|
세계 평화의 길
신천 함석헌
죽지 않는 씨알
이번에 우리는 첨으로 우리의 모임을 갖게 됐다. 가슴이 벅찬 느낌이다.
수는 비록 많지 않지만 그래도 이 어려운조건 속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맨 씨알들이 모든 방해를 싸워 물리치고 멀리 여러 곳에서 모여 와서 돈을 위한 것도 아니요 권력을 위한 것도 아니요, 예술 학문을 위한 것조차도 아니요 오로지 씨알의 이름으로 씨알을 위해 모였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이 초라한 모임을 응원하기 위해 나이 많은 두 동지가 구름과 물결만 아니라 때로는 그보다 더 험한 인종 국경의 울타리를 끊고 날아온 것을 생각할 때 눈물을 금할 수 없다. 정말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다.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마치 허허 바다 가운데 조그만 얼음산 꼭대기를 타고 서기나 한듯 보이는 것은 손바닥만 밖에 안 되지만 보이지 않는 한 엄청난 대륙이 우리 말 밑에 있어 우리를 지지해 주며 천천히, 그러면서도 무섭게 큰 운동량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껴, 어떤 까불대는 철갑선이라도 한번 들이받아 보고 싶은 용기에 가슴을 내민다. 그렇다 씨알은 움직이는 대륙이다.
나 개인으로 하면 이것은 30년 이래의 꿈이 이루어진 셈이다.
나는 나기를 사회의 밑바닥에서 했고 자라기를 풀 속에서 했고 사귀기를 씨알 속에서 했기 때문에 아는 것이 씨알 밖에 없다.
악독한 일본 제국주의 밑에서 생각 할 줄을 알기 시작한 때부터 언제나 마음속에 두고 그려온 그림은 정치도 아니요 사업도 아니요 폭동은 물론, 지하운동조차도 아니요 다만 살림의 푸름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마는 씨알의 운동뿐이었다. 잘나서 보다는 못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해방이 되어 평화의 들고일어남(峰起)을 누가 시킨 것 없이 직감에 의한 자동폭발로 하는 이름 없는 씨알의 대중이 삼천리 방방곡곡을 마치 꿀 흐르는 철에 과일 나무를 습격 하는 꿀벌 떼같이 기쁨의 음악으로 뒤흔들며 새 시대의 아들을 위한 사정작용을 하고 있었을 때 나는 나를 잊고 뛰어 들었었다.
그러나 역사의 나가는 길 여리고에서 예루살렘 가는 길보다 더 험해 도중에서 불한당을 만났다. 민주주의의 정당한 “양의 우리의 문”으로는 아니 들어오고 울타리를 넘어 들어오며, 씨알의 이름 알지도 못하고 씨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할 줄도 모르면서 “선한 목자” 인척 속여 씨알을 잡아먹기를 목적하는 “절도요 강도”인 소위 정치가란 것들이 판을 치게 됐다. 씨알은 움츠려 버렸다. 또 속았다.
그래도 믿을 것은 씨알 밖에 없어 나는 “생각하는 백성”이라 불러 보고 “행동하는 씨알”이라 외쳐 보았지만 내 모양이 너무 험해 뵈는 장발장 같아 그랬는지 잡아먹을 듯이 골목에 앙절거리는 강아지 새끼들 소리만 요란했지 “삼천만 앞에 울음으로 외친다”는 소리조차도 씨알의 귀에는 가 닿는 것 같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빈정대는 돼지들 생글거리는 여우들조차 있는데 어쩌나?
처녀를 죽여 놓고 못된 짓을 하듯 민중을 묶어 놓고는 헌법을 고치는 꼴을 보고 참아 입을 헤벌리고 “남의 나라 고적만 쳐다보고 다닐 수 없고 세계 사람이 짐승이다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아 하던 여행을 중간에 그만두고 돌아왔는데, 그래도 시민회관과 대광학교의 두 차례의 강연에서 내 마음을 쏟아본 다음에는 “씨알은 죽지 않는다”는 확신을 굳혔고, 어서 씨알을 길러내자는 것이 그때부터 오늘까지 변함없는 생각이다.
종교 지도자들을 한번 동원 못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던 일이 있었으나 그것이 망상임을 알았다. 생각 있는 대학 교수들은 못할까 해도 봤으나 그것도 어림없는 생각임을 알았다. 그럼 그것이 못된다면 밸이 있는 신문인이라도, 하고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나라에 신문은 없다. 있는 것은 광고지지, 씨알의 피와 땀과 혼을 살살 뽑아내는 갈대 통이지. 그들의 눈이 되고 귀가 되고 콧구멍이 되는 신문이 아니다. 우리 씨알의 소리 지난달 호가 정식으로 법의 명령을 받음 없이 정체 모를 어떤 힘으로 발매 방해를 당했기에 그 사실을 천하에 밝혀 달라고 일제시대 이래 자유와 정의의 투쟁의 전통을 가졌노라 자랑하는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우리 입으로 직접 호소했는데도 그들은 못하겠다고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러니 그것이 어찌 신문인가? 내 마음으로 한다면 벌써 “謹吊東亞日報” “哀悼朝鮮日報”의 만장을 그 문 앞에 가져다 세운지 오래다.
이 나라의 지성은 죽었다. 아니지, 죽은 것은 아니지. 앎은 삶에 직결되는데 어떻게 죽을 수 있겠나? 삼백여년 전에 갈릴레오가 뭐랬나? 올가미와 칼로 위협하는 종교재판이 지동설을 버리라 억지 명령을 했을 때 할 수없이 그 명령하는 대로 듣기는 하면서도 꿇었던 무릎을 일으키면서 하는 말이 “그래도 돌아가는 걸 어떻게 할 수 없지”했다. 지식의 힘은 그렇다. 그러니 이것은 죽은 것이 아니다 잔다. 겨울이 하도 사납기 때문에 동면을 하는 것이다. 그들이 약한 것은 그 붙이고 있는 살점 때문이다.
지성인은 철새다. 봄이 오면 노래도 하고 새끼도 치지만 겨울에는 못한다. 엄동설한에도 배겨나는 것은 씨알이다. 누르면 한없이 눌리우면서도 그들은 종당 “그래도……” 하고 꿇었던 무릎을 일으키고야 만다. 그것은 살이 없이 파리하기에, 고운 것이 없이 알속뿐이기에, 말이 없이 뜻이기에, 그럴 수가 있다. 씨알의 알은 하늘의 알이요 삶의 알이다. 씨알이 아구를 트는 날이 오면 그때는 천하의 모든 철새가 다 일어나 합창을 울리게 된다.
씨알의 소리는 그래서 내기 시작했고 오늘의 이 자리는 그래서 있게 됐다.
닦고 이기고
첨에 이 모임을 계획하려고 할 때 그 이름을 무엇이라 할까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다가 그중에서 수련(修練)이란 두 글자를 골라 붙이기로 했다. 그것은 우리 목적이 단순히 침목이나 사 무적인 토론이나 또는 어떤 커다란 운동에 있기 보다는 차라리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키우고 알들임에 있기 때문에 그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한 것이었다.
수련의 뜻을 더 밝히려면 수리연단(修理練鍛)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닦고 다스리고 이기고 다듬고.
첨 둘은 외적이고 나중 둘은 내적이다.
우리의 바탈(性)은 바로 하늘 그대로요 한삶(대생명, 절대생명) 그대로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될 수 있고 되어야 하는 가능성이지 다 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말씀이요 命이다. 바탈이란 말은 받은 알이라 해석할 것인지도 모른다. 받은 상태 그대로는 하나님 의 형상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中이요 未發이다. 中庸에서는 中은 天下之定理라 했지만 理가 理대로만 있다면 죽은 理다. 中은 필연적으로 發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은 말씀을 하고야 만다. 그러면 벌써 만물이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곧 사람에게 있어서 빛이지만, 빛이라 할 때 벌써 거기 어두움이 있었다. 싸움은 거기서부터 벌어진다. 힘씀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 목적은 和에 있다. 죽은 中, 죽은 理대로 있는 것 아니라 發해서 和에 이르는 것이 목적이다. 씨알이 씨알대로만 있으면 죽은 것이요 피어나서 잎이 되고 꽃이 되고 열매들 맺어서만 비로소 산 씨알이다.
닦자 다스리자 이기자 다듬자 하는 말은 이것을 위해서 하는 말이다. 공자는 明明德이라, 밝은 덕을 밝힌다 했지만 밝은 덕이란 기성품이 있는 것 아니요, 밝힘이 곧 밝음이다. 진리는 실현해서만 진리다. 예수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하는 자는 영과 참으로 해야 한다고 했을 때의 참도 실현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中은 사람의 자리가 아니 다. 그러나 中을 목표로 삼지 않고 和에 이를 수는 없다. 완전한 和에 이르렀다 누가 감이 마음을 노을 수 있으리요마는 和를 실현하려 힘을 쓰는 가운데 和가 있다. 誠은 하늘 道요 誠하려는 것이 사람의 道다.
옛 사람은 자아의 실현 과정을 흔히 옥을 다스리는데 비해서 설명했다. 어떤 옥도 첨부터 아름다운 옥으로 돼 있는 것은 없고 흙과 돌 속에 묻히고 섞여있으며 곱게 생기지도 않았다. 그러한 겉에 붙은 모든 것을 제해 버리는 것이 닦음이다. 인격의 실현도 우선 밖에 것의 가리움을 제함으로 시작된다.
닦은 담에는 빛깔이 나도록해야 한다. 홍옥은 홍옥의 갈, 비취는 비취의 갈이 있다. 그것이 나타나도록 잘 가는 것이 理 곧 다스림이다. 좋은 렌즈를 갈아낼 때 첨에는 굵은 금강사로 그담은 가는 금강사로 또 그 담엔 앙금으로 갈다가 정말 나중에는 맨 손으로 문지른다고 한다. 찢긴 자취가 하나도 없이 매끈한데 이르러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속의 빛의 실현도 그렇다. 가린 것을 제할 뿐 아니라 받았던 허물까지를 씻어 버리지 않으면 아니된다. 玉은 생명 없는 물건이기 때문에 갈아서 그 근본 갈을 드러내게 하지만 생명인 인격의 경우는 간다기보다 기른다 해야 적당할 것이다. 양성이란 말은 그래서 있다. 나무가 어릴 때는 약함으로 받는 상처가 많지만 차차 자라 연륜이 더하면 더할수록 점점 더 튼튼해져서 모든 상처 가 다 아물고 미끈하게 제 본성을 드러내어 하늘에 닿는 몸집을 가지고 버티어 서게 된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닦고 다스린 다음에는 이기고 다듬어야 한다. 밖을 깨끗이 할 뿐 아니라 속을 또 깨끗이 해야 한다. 생명의 정말 대적은 겉에 보다 제 속에 있다. 왕양명이 산중의 도둑은 깨칠 수 있어도 심중의 도둑은 깨칠 수 없다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연(練)이란 실을 이기는 것을 가리킨 말이다. 삼이나 칡으로 실을 만들려 할 때 우선 그 겉껍질을 베낀 담에 그것을 뜨거운 잿물에 삶고 방망이로 두들겨 속에 들어있는 찌끼를 말끔 뽑아내어 부들부들하게 만들어야한다. 이것을 이긴다고 한다.
쇠의 경우에는 煉 혹은 鍊 혹은 鍛자를 쓴다. 실과 같이 이긴다고도 하지만 흔히 다듬는다는 말을 쓴다.
먼저 용광로에 넣어서 철분만을 뽑아 낸 후 다시 그것을 여러 번 풀무에 넣어 달궈가지고는 끄집어내어 모루 위에 큰메로 두들기고 다시 달궈가지고는 또 두들기고 해서 그것을 거듭 할수록 속에 든 찌끼가 빠져 나와 굳고도 질긴 눴다 일어나는 강철이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순수해진다는 것과 부드러워진다는 점이다. 섬유가 아무리 길고 질겨도 빳빳하면 실이 되지 못하고,쇠가 아무리 굳고 질겨도 부드러워 굽었다가 다시 제 자리로 일어서는 힘이 있지 않아서는 강철노릇을 하지 못한다.
사람의 정신도 그렇다. 깨끗하고 굳세고 날쌔기도 하지만 또 부드럽지 않으면 아니된다. 노자가 虚와 靜과 柔와 謙을 권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모임을 수련회라 했다. 그러나 한가지 더 중요한 것은 여기는 선생이 없다는 일이다. 씨알은 개인숭배를 하지 않는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은 가이공옥(可以攻玉) 이란 말이 있지만 옥중에서도 옥인 금강석은 다른 돌로는 못 갈고 같은 금강석으로만 간다. 씨알도 씨알끼리만 갈 수 있다. 이것은 교만해서가 아니다. 씨알 밖에 씨알을 만들어 낼 스승이 없기 때문이다. 참 승리는 밖에 있지 않고 씨알 제 속에 있다. 잘난 개인 속이 아니라 전체 속에 있다. 전체가 곧 우리 스승이요 아버지요 임금이다. 우리는 우리의 참 나를 전체 속에서만 볼 수 있다. 많고 적음도 문제 아니요 잘 잘못도 문제 아니요, 죄인의 하나 둘이라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거기 하나님이 계신다. 생명은 전체의 것이오 전체 안에서만 얻을 수 있다. 너와 내가 씨알의 이름으로 전체 속에 한통칠 때, 개구장 물이 큰 바다 속에 흘러들듯 감옥의 네 문을 활짝 열어 하늘 바람을 받아들이듯 저녁 영광 속으로 날아드는 까마귀가 그대로 황금빛에 빛나듯 단번에 나의 참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을 우리는 우리끼리 부딪쳐 봄으로 해내잔 말이다. 나무와 나무가 비비고 돌과 돌이 부딪치면 불이 나오듯이 씨알과 씨알이 비비고 부딪칠 때 너도 아닌 나도 아닌 전체의 모습과 음성이 나온다.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살리는 것은 생명이요 생명은 전체에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이 우리 모임이 영웅 숭배하는 군대나 사상운동의 모임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러므로 수줍어할 필요 없다. 수줍음은 교만의 뒷면이다. 뽐낼 것 없다. 뽐냄은 도둑질의 첫걸음이다.
그저 열린 마음으로 서로 대하자 「그이」가 직접 나타나실 것이다. 너도 없고 나도 없고 그저 생명의 큰 바다의 물결침이 있을 뿐일 것이다.
거기 고래가 있어도 큰 줄을 모를 것이요. 새우가 있어도 작은 줄을 모를 것이다. 구정물이 들어오면 그 더러움을 잃을 것이요 맑은 물이 들어오면 그 맑음을 잊을 것이다.
이것이 평화의 길이다.
세계 평화
이러고 보면 첨으로 하는 이 닦고 이김의 운동에 제목을 왜 세계 평화도 내걸었느냐 하는 설명을 다시 할 필요도 없다. 씨알은 평화요 평화는 씨알에 있다.
칸트는 “돌이켜 생각해 보면 볼수록 더욱 더 놀라움과 두려움의 느낌을 자아내는 것이 있으니, 위에 있어서는 별이 반짝이는 푸른 하늘이요 안에 있어서는 도덕률”이라고 했다.
하나는 하늘나라요 하나는 마음의 나라다. 그러나 또 누구나 더 잘 아는 다른 한 나라가 그 중간에 있다. 눈에 되는 이 세상 나라다. 우리는 다 세 세계를 살고 있다. 극대의 나라, 극소의 나라, 중간 나라. 물질계를 보는데 눈, 망원경, 현미경의 세 눈이 있듯이, 정신계에도 세 눈이 있어야 한다. 영원무한을 내다보는 눈, 마음의 갈피를 찾는 눈, 그리고 사회와 역사를 두루 살피는 눈. 그런데 이 여섯 세계에 공통으로 다스리고 있는 원리가 평화다. 和는 곧 조화, 고름인데 고르게 되지 않고는 세계가 서 갈 수 없다. 안, 밖, 생, 무생을 말할 것 없이 복잡한 힘의 얽힘인데 그 얽혀 작용하는 것이 어느 고른 상태에 이르지 않고는 하나의 세계가 있을 수 없다. 코스모스라는 말은 그래서 있다. 하나의 질서 잡히고 법칙 있는 세계가 된 다음에야 우리가 능히 생각하고 알고 교섭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기 전은 설혹 상상한대도 혼돈, 어지러움, 허무, 두루뭉수리 밖에 없다. 우리가 있을 때, 알 때, 나일 때는 벌써 거기 세계 곧 질서, 코스모스, 대조화, 평화가 있었다.
“和는 天下之達道”다.
그러므로 和는 알파요 오메가다. 다른 말로 하면 평화는 구경의 원리인 동시에 또 내재의 원리다. 칸트가 위와 안을 보고 다 같이 놀라고 찬미 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중간의 세계도 알고 보면 놀랍다.
공자는 교육의 대강을 말하는데 “明明德, 親(新)民, 止於至善”이라고 했다.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을 말할 때 첫머리에 “平天下”를 내걸었다. "明明德於天下”라 했다.
예수가 날 때 하늘에서 찬송이 들려서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기쁨”이라 했다.
노자의 무위,석가의 니르바나도 요컨대 平의 자리다.
예와 이제를 말할 것 없이, 종교 정치를 가를 것 없이,사람인 다음에는 다 평화를 내세웠다. 전쟁을 직업으로 하여 불쌍한 씨알의 피로 제 살을 지우고 기름을 지우며 사람 죽임을 재미있는 작란으로까지 하는 소위 영웅이란 것들도 입으로는 평화를 위해 하노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내놓고 전쟁을 예찬하는 놈은 미쳤거나 그렇지 않으면 악마의 종자라고 할 밖에 없다.
씨알은 말하자면 내재의 평화, 극소세계의 평화다. 본질적인 평화다. 씨알의 바탈이 평화요 평화의 열매가 씨알이다. 그러므로 씨알의 목적은 평화의 세계 이외에 있을 수 없다. 극소는 극대에 통한다. 그러므로 산을 오르는 사람이 순간도 그 눈을 산봉우리에서 떼지 않아서만 모든 발걸음을 바로 할 수 있듯이 씨알이 스스로를 닦고 다듬으려 할 때도 세계 평화의 이상을 잊고서 될 수 없다.
당면의 큰 문제
그러나 우리가 여기 세계평화를 내거는 것은 그것이 구경의 문제요 내재의 문제이어서 뿐만 아니라 또 당면의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구경의 문제요 내재의 문제면 자연히 언제나 떳떳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떳떳한 문제이기 때문에 시급한 문제다. 떳떳이 했어야 할 것을 아니했기 때문에 그것이 당면의 큰 문제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도는 잠잔 동안도 떠날 수 없다. 떠날 수 있는 것이라면 도가 아니다”
“도는 가까운 데 있다”
“도가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
“내가 도둑같이 온다”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쫓지도 말라.”
언제나 지켜야할 평화의 길을 사람들이 지키지 않았다. 더구나 이 3,4백 년 동안의 역사에 있어서 그렇다. 그 결과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일부러 눈을 감는 사람은 말할 것 없고, 적어도 눈을 뜨는 사람이면 각별 노력함 없이 이 세계가 운명의 갈래 길에 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평화냐, 그렇지 않으면 멸망이냐?
이제 강대국이라는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무서운 핵무기 독가스 세균을 몇 분지 일을 쓰기만 해도 눈 깜짝 할 동안에 전 세계 인류만 아니라 생명의 씨를 온통 멸망시켜 버릴 수가 있다.
생각해 보라,생명이란 어떻게 귀한 것인가? 이담은 또 모르지만 지금 까지 과학이 연구한 결과로는 막막한 무한대의 우주 안에 생명 현상이 있는 곳은 오직 이 조그만 지구 위 뿐 이다. 그 지구의 나이를 30억년으로 계산하는데 생명이 첨으로 나타난 것은 10억 년 전이 라 하니 대 우주 전체로 말할 것 없고 이 지구 위에서만도 무대 준비에 20억년이 든 셈이다. 생명 그 자체가 하나의 복잡한 조화기 때문에 그 준비가 그만큼 힘들었다는 말이다. 그러고 그 10억년 중에서도 사람이 나오려면 참 힘들었다. 고고학자들이 크게 계산해도 인류의 선조 200만년을 넘지 못하고, 문명이란 것은 기껏해야 만년 정도다. 거기 비하면 소위 국가니 과학이니 하는 것은 겨우 엊그제의 일이다. 그런데 이제 우주 연령으로 하면 벌거숭이 정도 밖에 아니되는 철없는 어느 사람들이 정치니 국가니 하는 싸움 끝에 정신없이 누르는 단추 하나 때문에 그 귀한 생명의 종자가 없어질 염려가 있는 때를 당했으니 그 문제가 얼마나 큰가? 하나의 생각하는 인간으로 어찌 책임을 아니 느낄 수 있나?
그런 말을 하면 가장 현실에 충실 하노라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의 위험을 말하면서 평화론은 한가한 말이라 하고 전쟁의 피할 수 없음을 주장하려 한다. 그러나 거기 대한 대답은 닉슨 모택동 더러 하라면 충분하다. 그들의 한일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전쟁은 이 이상 더할 수 없다.” “평화 앞에 이데올로기는 문제 되지 않는다”는 말 아닌가?
이제 시급히 필요한 것은 세계적인 평화기구를 세우는 일이다. 지금 평화는 성인들의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 졸라대는 과학적인 사실이다. 어느 나라도 어느 민족도 마음에는 다 원 하고 있으면서 다만 저쪽을 의심해서 담대히 말을 끄집내지 못할 뿐이다. 서로 약속만 되면 세계적인 긴장 상태가 풀리고 새로 협조하는 가운데 새 문명을 열어나갈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번 미·중공의 회담이 그 좋은 증거다.
물론 아직 양쪽이 다 진심이 아니라 현실의 요청에 몰려 두 겹 마음을 가지고 말하는 정책임을 모를 사람 없다. 그러나 정치란 본래 악해짐으로 선에 협조하는 사탄의 일이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제도의 종이다. 위에서 말한대로 우리는 극대에도 살고 극소에도 살지만 또 중간에도 산다. 중간은 늘 불완전 불철저 부조리한 것이지만, 그것 없이는 마음의 세계도 영원의 세계도 있을 수 없다. 마치 나무의 생명이 뿌리와 억만 잎에서 하는데 동화작용에 있지만, 중간의 나무통 없이는 그것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느 나무도 이상적으로 똑바로 서고 흠 없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그런대로 버티고 서는 나무통이 있어서만 뿌리와 잎에서 생긴 생명의 진액이 서로 오르고 내려서 나무노릇을 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 사회도 마찬가지어서 종교나 과학에서 보면 완전하고 합리적은 못되어도 우선 대체로 옳은 제도를 세우면 그것을 통해 생활의 교통이 오고 가는 동안 차차 튼튼해져서 전날의 약하고 부족했던 것을 고쳐서 건전한 문화에 이를 수 있다. 구구한 이론 싸움이나 소소한 이해의 고집을 하다가 전체의 세계가 망하면 너도 없고 나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 의미에서 세계평화의 세계적 틀거리를 우선 잡도록 하는 것이 다급한 문제다. 이것을 할 사람이 종교가도 과학자도 아니요 일반 보통의 씨알들이다. 더구나 소위 후진국, 약소민족 하는 세계 바닥의 씨알들이다.
정부지상주의
세계평화 문제에서 볼 때 두 번째 세계대전 후 전에 없던 아주 고약한 현상이 있다. 그 하나는 냉전이란 것이요 또 하나는 지역전이라는 것이다.
첫 번 대전 때만 해도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다시 옛날의 평화 상태에 돌아갈 수가 있었다. 어제까지 서로 적국이던 나라들이 다시 정다운 이웃으로 서로 물건을 사고팔고 여행을 오고 가고 학문과 인정의 교류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전쟁이 참혹했던 만큼 거기 대한 반성도 커서 한때 평화사상 인도주의가 세계를 휩쓸었다.
그런데 둘째번 대전 때는 그와 다르다 전쟁은 끝났다는데 긴장과 적의는 풀리지 않고 눈에는 뵈지 않는 전쟁, 외교와 선전과 스파이로 하는 전쟁을 계속하게 됐다. 그래 냉전이라 는 말이 나왔다. 또 큰 나라들끼리는 냉전 끝에 공존이라는 생각이 나서 주의 제도는 달라도 같이 살아가도록 해보자는 노력이 차차 나오게 됐는데 이상하게도 전쟁 결과 해방이 돼서 자유를 얻었다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여러 조그만씩한 나라에서는 이웃끼리 혹은 저희끼리 전쟁이 그칠 날이 없다. 이것은 사실 큰 나라들이 시키는 전쟁이다. 그들이 무기와 돈을 대주지 않으면 그 싸움은 몇 날이 못가서 끝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큰 나라들은 자기네끼리 붙으면 또 세계적인 전쟁이 될 수밖에 없고 그러면 너도 나도 다 망해 전쟁한 의미가 없어지는 줄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멸망의 전면전쟁을 아니하는 대신 조그만 나라에 무기와 돈을 빌려주어 돈을 버는 한편 그 세력권을 지켜가려는 방법을 취해 이것을 지역전쟁이라고 부르면서 계속시키고 있다. 전보다 아주 더 악질적인 제국주의다.
그러면 그 원인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해서 국가주의에 있다. 좀더 분명히 말해서 국가지상주의, 그보다도 차라리 정부지상주의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나라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사회적인 의미에서 하는 것으로서 그때는 보통「나라」혹은 「우리나라」라고 부른다.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로서 주로 국가라고 부른다. 문명의 정도가 낮았을 때 사람의 교통 범위는 매 국한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원시 사회는 매우 좁은 지역 안에서 있는 것이었다. 그 안에서는 개인 개인이 서로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사회에 어느 정도의 통일이 잡혔을 때 그것은 인간성과 종교신앙에 근거를 두는 불문법에 의해 유지되어 가는 단단한 전통의 사회였고 그 지도자는 인망으로 되는 족장, 성군 타입의 것 이었다. 나라는 그렇게서 된 것이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면 교통 범위도 넓어지고 그러면 그 사회관계도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고, 그러면 사회의 질서는 소박한 옛날의 인정 의리 신앙으로만은 될 수 없고 보다 더 법적인 방법이 필요하게 된다. 한편으로 개인의 깨어감에 따라 야심적인 영웅도 일어났다. 그래서 사람의 정치생활의 과정을 보면 후세에 올수록 점점 더 성문법적으로 강제적인 폭력주의로 되어왔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소위 근대국가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점점 더 정치적이 돼 왔다.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란 말이 있지만 그때에 정치에 죄 될 것 없다. 사람은 질서를 원한단 말이다. 그것은 씨알들의 가지는 전체의식에서 자연적으로 나온 것이다. 그것이 나라다. 그 나라는 망할 리도 없고 누가 싫어 할 리도 없다. 그러나 국가니 국민이니 정치적이니 할 때는 거기 벌써 강제하는, 인위적으로, 계획적으로 하는 어떤 죄악의 씨가 들어 있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렇게 되나? 그것은 사회 발전에 따라 일어난 잘못에서 나온 것이다. 첨에 일어난 나라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자각을 일으켰다. 그것은 좋은 발전이다. 그러나 거기 따라 지능이 앞선 어떤 분자가 지배욕을 발동시켜 나라를 도둑질하기 시작했다. 소위 영웅이란 것들이다. 그래서 첨에는 정치와 종교 도덕이 완전히 하나이었던 데서 법과 힘을 주장해서 종교 도덕에서 갈라져 나오기를 주장했고, 그 다음은 서로 싸웠고, 나중은 종교 도덕을 아주 완전히 무시하는데 이르렀다.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큰 나라 작은 나라, 사상의 좌우를 가릴 것 없이 리얼리즘 곧 극단의 현실주의다. 현실이란 글자는 별로 나쁠 것 없이 뵈지만 그 내용을 말하면 정치에서 종교 도덕을 완전히 무시해 버린 노골적인 권력 정치다. 종교 도덕 없단 말은 바꾸어 말하면 씨알 없단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완전히 하나의 집단지배다. 소수의 몇몇이 짜고 들어서 전체를 지배해 가는 것이다. 정부지상주의란 이런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19세기만 해도 국민이니 민중이니 하는 말이 적어도 겉에 내세우는 정치의 표어 일수가 있었다. 그것은 아직도 민심이니 여론이니 하는 것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어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민 민중은 사실상 없다. 있는 것은 독재하는 지배 단체가 있을 뿐이다. 옛날은 씨알을 속이려 할 때 국부니 성군이니 영웅이니 하는 말을 썼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필요 없다. 지도자라고 한다. 지배자들은 이상주의 낭만주의가 벌써 다 죽어 버린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있는 것은 냉혹한 권력주의 뿐이다.
그러나 태강칙절(泰剛則折)이라 힘치고 망하지 않는 것 없다. 자체모순이다. 이 권력숭배의 정부지상주의가 그 멸망을 예감하는 것이 오늘의 세계다. 인간은, 가인의 자손들이 아무리 업신여겨도 역시 인간이다. 하늘의 씨알이다. 아벨의 터지는 대가리에서 흐르는 피의 알알이 망 속에 들어가 새 억만의 알로 일어날 것이요. 그 부르짖음에 못견디어 가인은 마침내 따끝 으로 물러날 것이다.
평화의 세계적 틀거리를 세우는데 가장 강한 대적은 소위 대국이라는 나라들의 정차가들 이다. 그들은 군대라는 조직적인 폭력과 선전과 과학적인 정보기술로 세계를 지배하려 하고 있다.
그담은 그 뒤에서 그들을 조종하고 있는 독점적인 기업가들이다. 기업의 경쟁이 있는 한 국경선은 없을 수 없고 국경선이 있는 한 전쟁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셋째는 소위 약소국이라는 나라의 지배자들이다. 그들은 민족적 해방의 물결을 타고 일어나서 씨알을 속여 강대국들의 새로운 제국주의에 팔아먹으며 그 심부름꾼이 되어 스스로의 멸망을 이끄는 줄을 알면서도 한때의 지배욕과 향락의 만족을 위해 전쟁을 청부 맡아 하고 있다.
넷째는 씨알의 가슴 속에 아직도 뿌리 깊이 들어 있는 배타적인 민족 감정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선천적인 것 자연함인 것같이 알고 심지어는 이것을 신성한 것으로 알고 정의로 알아 장려하려는 경향까지 있지만 이것은 지난날 무지하던 시절에 생긴 습관으로 된 것이다. 이것이 남아 있는 한 전쟁은 없앨 수 없다. 지배자들은 언제나 이것을 악용한다. 국가주의 민족주의는 인간이 아직 어린 시절 한때 우리를 이끄는 선생이었다. 그러나 이제 인류는 그 정도를 지나쳐 자랐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것이 죄악이다. 청산해 버려야 한다. 객관화해 볼 때 환하지 않은가? 생각해 보라 8억을 자랑하는 중국 민족이 민족 감정으로 교만하게 미칠 때 세계의 장래가 어떠하겠나? 인류의 장래를 위협하는 그 어리석은 습관을 어서 깨쳐 주어야 할 것이요 그것을 하기위해 우리 자신이 먼저 앞장서야 할 것이다.
힘으로 약한 자는 언제나 정신으로 앞장을 서는 수밖에 없다. 밖에서 잃고 안에서 찾는다는 것은 그것 아닌가?
내가 길
어렵지만 이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 씨알이 맨 주먹을 가지고, 아니다 맨 주먹이 아니라, 맨 알 마음을 가지고 국가주의와 싸우는 것은 아메바가 사자에 대드는 것 같고 바위를 계란으로 때리는 것 같지만, 모든 사자는 죽었고 아메바는 영원히 살았으며, 바위는 마침내 부서지고야 말고 물은 길이 하나로 흐르는 것을 우리는 안다. 씨알도 이기고야 말 것이다. 로마에 가보라 금관을 쓰고 보석에 묻혀 있던 모든 법황은 간 곳이 없고 그 금관과 보석을 날마다 즐기는 것은 이름 없는 세계의 씨알이더라.
우리는 그 국가주의의 암벽을 무너뜨리고 그 폭력주의의 사나운 짐승을 잡기 위해 몇가지 할일이 있다.
첫째 세계의 모든 씨알이 될수록 빨리 손을 잡는 일이다. 오늘의 악조건에 있어서도 이것은 할 수 있다. 국경의 검색을 아무리 엄히 해도 관세의 규정을 아무리 까다롭게 해도 씨알의 알을 빼는 재주는 없다. 칼로 죽이고 불로 태워도 이 알만은 날아서 국경선, 감옥을 넘는다. 혹독히 죽이면 죽일수록 우리 알은 더 큰 날개를 얻는다. 세계의 씨알이 하나로 되면 역사는 우리 것이다.
둘째는 씨알의 과학화다. 어떻게 생각해 봐도 이치에 어그러지는 권력주의 집단주의 비밀 정보주의가 판을 치는 것은 과학 때문이다. 과학을 어떤 것들이 독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반 씨알이 어서 과학을 잘 체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이 우리를 속이는 것은 아직도 우리게 미신이 있기 때문인데 그 미신을 완전히 이기려면 새 종교 있어야 하고 새 종교가 나오려면 과학을 반대할 것 아니라 깊이 알아야 한다.
모든 씨알이 완전히 자유 해야 하는데 이 지배주의가 이겨 가는 것은 새 질서 때문이다. 과학의 발달로 고등 기술의 시대가 됐다. 그로 인해 점점 전문화 했고,전문화 때문에 인간관계가 더욱 더 복잡해졌고 그 때문에 종합이 어려워졌다. 한마디로 해서 현대의 고민은 복잡해진 환경에 대해 마음이 적응하지 못하는데서 나온 것이다. 그 때문에 종합이 깨졌고 종합이 깨지면 부분으로 발달했으니만큼 점점 더 혼란에 빠진다. 혼란에 빠지면 멸망이다. 오늘의 요청은 새 종합에 있다. 그런데 새로운 종합을 하려면 종교 철학을 통해 내적으로 이루어져야 할터인데 종교 철학이 그릇된 과학 사상에 빠져 그것을 못했다. 이 틈을 타서 나온 것이 강제적 전체주의다. 정신적으로 못하면 강제로라도 통일을 이루자는 것이다. 이것이 꿰뚫려 뵈는 야심을 가지고도 권력주의자들이 서가는 이유다. 그러므로 씨알이 과학화해서 한편으로는 그 고등기술의 독점을 막으며 한편으로는 새 종교철학에 의한 새 가치관의 확립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셋째는 비폭력 투쟁을 널리 일으키는 일이다. 어느 미친 것들이 단추만 하나 누르면 지구 전체와 생명의 씨를 온통 마사 버릴 아슬아슬한 이 대목인데 그 미친 것들을 어떻게 제지할 수 있을까? 폭력으로 아니 될 것만은 분명하다. 폭력의 최고 고지를 점령 하고 있는 그들과 경쟁할 수도 없거니와, 설혹 가능하다 해도 그것은 우리가 더 심한 악당이 됐다는 말이니 이긴 것이 도리어 진 것이다. 단 하나의 길은 그들이 그 무기를 쓰지 못하도록 자동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하는 것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토론이나 설득으로 아니 될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면 길은 실낱보다도 더 가는 오직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 글자 그대로 일조혈로(一條血路)다. 피로 뚫는 길이다. 아무리 악하고 미쳤어도 그들도 사람이라 그들의 인간성 양심을 불어 일으키는 것 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의 양심은 양심에 의해서만 움직여진다. 옳은 일을 위해 한 목숨을 희생 했을 때 우리의 혼은 그 힘을 최고로 발휘한다. 그러므로 지배자의 가슴속에 잠자고 있던 양심을 불어 일으킬 수가 있다. 이것은 역사상에서 많은 실증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비폭력에 대해 확신을 가자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자기희생으로 비폭력의 길을 걸어도 아니되는 때도 있다. 그러나 단번에 되지 않아도 그 투쟁을 거듭 하는 동안 혼의 힘은 가속도적으로 높아간다. 맹자가 이미 가르쳐 주었다. 한 잔 물로 한 수레의 섶에 붙은 불을 끄지는 못한다고. 그러기 때문에 비폭력 운동은 영웅주의가 아니다. 뒤에 뒤에 이어 서는 씨알이 있어서만 된다. 씨알은 자기의 부서짐으로 바위를 이기는 물의 알이다. 상선(上善)은 약수(若水)다.
예수는 말하기를 “내가 길이요 참이요 생명이다”했다. 그랬단다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예수는 길이요 예수는 참이요 예수는 생명이라고 떠들지만, 예수님 불쌍해라, 그 말씀을 어찌 그런 의미로 했겠나? 내가 길이요 내가 참이요 내가 생명이란 말이다.
예수가 그 말을 하면서 어떻게 했던가? 두 다리를 뒤로 뻗고 두 팔을 앞으로 뻗어 업디면서 “나를 밟고 건너가”하지 않았나? 그는 길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길이 됐고, 참 을 설명한 것 아니라 자기가 참을 했고, 생명의 신비를 보여준 것 아니라 자기가 바로 생명이 됐다. 그러기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 하지 않았나?
오해해서는 아니된다. 나는 살아야겠다는 우리 욕심이 우리로 오해하게 한다. 그는 두 세계에 다리를 놓아 둘을 하나로 살린 것이다. 죽음과 삶, 선과 악, 영과 육, 지배와 피지배, 전쟁과 평화, 나와 세계, 이 둘로 갈라져 영원히 건널 수 없는 끊어진 벽에 다리를 놓아 하나로 살려낸 것이다. 그 다리가 무엇이냐? “나”, 나란 말 아닌가? 예수가 아니라, 이 나란 말아야. 산 하나를 죽여 갈라놓은 것이 이 살겠다는 나기 때문에 그 죽은 세계를 살려내는 것은 그 나의 죽음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제 구원이라 하늘나라라는 이름 아래 더 잘 살기 위해 그 가엾은 나사렛 사람을 이것들이 2천년 두고 타고 밟고 건너가기만 한다. 그 마음인 담에는 건너가도 거기가 하늘나라가 아니요 지옥일 것이다. 이 20세기가 지옥 아니고 무엇인가?
길은 평화의 길이다. 내 한 몸을 인류의 길로 내놓고 번듯이 눕는 것이 평화다. 그 밖에 무슨 길이 또 있겠나?
씨알의소리 1972. 2,3 9호
저작집; 12- 37
전집; 12- 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