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초기 왕의 호칭변천을 통해 본 신라인의 형성과정
신라가 처음에 형성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왕의 호칭이 신라에 유입된 세력들에 의해 변천되는 양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신라는 토착민과 계속되는 이주민들에 의해 형성된 고대국가이다. 그 형성과정을 연대순으로 간략하게 살펴보자.
첫째, 고인돌을 남긴 선사시대이후 청동기시대를 거치는 토착농경의 진한(辰韓)인
둘째, B.C.3세기중 진(秦)나라의 만리장성부역을 피해 이민해 온 이주민
-『삼국지(三國誌)』「동이전(東夷傳)」한(韓)조, 辰韓은 馬韓의 동쪽에 있다. 그 나라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 진(秦) 나라의 괴로운 부역을 피하여 도망온 사람들이 한(韓)나라로 오자 마한은 동쪽국경 지역 땅을 베어서 그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성책이 있고 말하는 것이 마한과 다르다. 나라를 방(邦), 활(弓)을 호(弧), 도둑(賊)을 구(寇)라고 하며 술잔을 돌리는 것을 행상(行觴)이라고 한다. 서로 부르기 를 친구처럼 불러 진(秦)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았다. -
셋째, B.C.2세기중 고조선(古朝鮮)의 멸망으로 흘러들어온 유민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新羅本紀)」 시조 혁거세(赫居世)조, 이곳(徐羅伐)에는 오래전부터 朝鮮의 유민들이 산계곡에 나누어 살아서 여섯마을(斯盧六寸)을 형성하고 있었다... 시조 혁거세 38년(B.C.20)...이전부터 중국사람들이 秦나라의 난리를 피하 여 東來한 무리가 많았는데 이들은 마한의 동쪽에 자리잡아 辰韓사람들과 섞여 살더니 이때에 이르러 더 많아졌다. -
넷째, A.D.37 낙랑에서 투항해온 5천명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新羅本紀)」 유리왕 14년(A.D.37) 조, 고구려 무휼왕(대무신왕)이 낙랑을 쳐서 이를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들 5천명이 (신라에)투항해 와서 육부에 나누어 살게 했다. -
신라는 초기 토착 농경민의 辰韓 사람에서부터 중국의 秦나라 만리장성 부역을 피해 들어온 당시의 초원유목민을 중심으로 한 중국북방지역 세력들, 漢의 고조선 멸망 이후 유입된 고조선 유민들 등이 순차적으로 유입하여 형성된 고대국가라 할 것이다.
이것은 당시가 동북아시아의 역사에서 격변하는 시기였으므로, 고구려나 백제의 형성과정에도 유사한 대륙에서의 유입이 이루어졌었지만 신라만큼 다양하고도 다량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는 신라의 성립지역이 한반도에서는 대륙의 선진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지역으로 여겨진 당시의 관념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신라의 전신인 辰韓 사람들이 秦나라 유이민이후 馬韓 사람들과 말이 달랐다는 것은 그만큼 종족적 구성이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秦나라는 중국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감숙,섬서성의 西夷의 후예들인 유목기마민족으로서 중원사람들과 달리 상투를 틀고 있는 동이계통과 습속이 유사한 종족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진나라 사람들 일부가 신라로 유입되고 진나라에 의해 격파된 고조선의 서부변방지역 고조선사람들 일부도 신라로 유입되는 등의 역사적 사건들이 발생하게 된다.
경주 안압지 발굴시 8면체의 주사위가 출토되어 음주에 관한 놀이가 소개되어 있어 신라사람들의 음주습속을 엿볼수 있었는데, 오늘날 우리가 술잔을 돌리며 마시는 우리나라만의 풍속도 신라에서 비롯되었고 또한 이는 유목기마민족들의 공통적인 풍속이었다. 또한 칭기즈칸도 그랬듯이 유목기마민족의 전통은 모두가 각개전사들로서 상하계층 서로간에 평등한 호칭으로 이름을 과감하게 불렀다. 친구처럼 한다는 기사는 바로 이러한 유목기마민족적 습속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변화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신라왕의 호칭변천을 살펴보면 신라왕계에 성씨별 세력등장과 관련된 어떤 역사적인 사연이 스며들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 성씨별 세력변화 과정은 다음과 같다. 朴氏系(B.C.57~)→昔氏系(A.D.57~)→金氏系(A.D.65~):13대 味鄒이사금(262~284) 등극
* 신라왕의 호칭은 거서간에서 이사금, 마립간, 왕 등으로 이어진 것을 알고 있다. 居西干(B.C.57:1대赫居世거서간~)→尼師今(24:3대儒理이사금~417:18대實聖이사금)→麻立干(417:19대訥祗마립간~514:22대智證마립간)→王(514:23대법흥왕~935:56대경순왕)
박혁거세는 백마와 강림으로 대표되는 북방신화와 난생신화가 결합한 북방유입세력으로 거서간(居西干)의 호칭이 자연스럽다. ‘거서간>카한(Kha Khan)’의 호칭은 북방 알타이 몽골족 군장의 호칭이었다. 혹자는 ‘거서간’을 서방에 대비한다는 의미라고도 말하지만 한자식 의미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신라고유의 우리말식 혹은 이두식으로 해석해야 될 말이다. (한가위의 유래도 여기서 파생된 것이다...)
3대 유리이사금부터 이사금을 사용하는데, 유리이사금은 우리가 알고 있는 중추절 한가위를 명절로 삼은 분이다. 한가위의 유래는 베짜기시합에서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농사를 마치고 추수를 기념하면서 왕성앞 넓은 터에서 여자들의 베짜기시합을 벌인데서부터 한가위가 유래한 것이라는 설이다. 하지만, 유리이사금이 한가위의 베짜기시합을 시작한데는 농업진흥과 의복발전 등의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역사외에, 사실은 이산가족 상봉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가 더 컸다.
유리이사금 당시에 가장과 아들이 없는 가정이 많았다. 이는 대륙의 격변하는 정세로 인한 유이민의 수가 늘어나 이들중 남편과 헤어진 가족들이 추수가 끝나고 설움에 밤마다 곡소리가 끊이지 않고 또 이들 가족을 찾는 부랑자들이 늘어나자 이를 해결할 방도를 찾던중 골머리를 싸매던 유리이사금이 이들이 한날 한장소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고안해 낸 축제형식의 이산가족상봉의 자리인 것이다. 현대의 여의도판 이산가족상봉의 현장과 같다. 우리의 역사는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게 이산가족의 슬픔을 겪어야 하는 슬픈 민족사가 내포되어 있는 것인가. 유리이사금의 시대는 고조선의 유민들이 많았다. 즉 고조선의 멸망이후 분열된 열국시대를 피해 소문을 듣고 신라로 들어온 세력들이 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사금>임금(任檢)’은 고조선의 최고군장 호칭인 ‘임금(任檢)’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사금’을 여러 가지로 해석하려고 애쓴 결과 ‘이(齒)’와도 연결시키는 예도 있는데 우리가 아직도 사용하는 ‘임금(任檢)’의 해석이 옳다.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세웠다고 하여 ‘왕검(王檢)’이라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임검(任檢)’의 중국측 오기였다. 이에 대한 내용은 서희건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에 상세히 밝혔으므로 참고하기 바라며, 단군임검이 바른 호칭인 것이다. 임금은 우리말의 군왕호칭으로 아직도 전해내려오고 있다. 현대 호칭의 ‘~님’도 순수하게 우리 한국인에게만 전해지고 사용되어지는 유별난 접미사이다.
유리이사금이후 임금의 표기인 이사금 호칭은 그후 김씨세력이 왕계에 진출하고 나서 다시 ‘마립간(麻立干)’으로 바뀐다. 물론 김알지이후 7세손 미추마립간이 신라왕계에 최초진출할 당시는 이사금을 그대로 사용하였지만, 김씨세력이 왕계와 정치세력을 확고히 한 417년 눌지마립간 다음부터 불교를 국교로 하고 중국식으로 호칭을 바꾼 법흥왕에 이르기까지 100여년간 마립간이 사용되었다. ‘마립간(麻立干)’의 해석 또한 신라고유의 우리말식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 칸(干)’의 의미는 알타이식 군장의 호칭이라고 했다.
김씨세력은 대륙에서 유입된 유목기마민족의 후예들이다. 특히 匈奴가 망하고 난 이후 漢의 박해를 피해 한반도로 들어온 흉노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금관과 각배, 유리제품 등의 독특한 기마유목민족적 특징인 유물을 많이 남겼다. ‘마립간’은 이러한 김씨세력의 등장배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마립간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는 아직 확언하기 어렵지만 ‘이사금’을 대체하는 새로운 세력의 등장과 맛물려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마립간>말한(Mo-khan)’등으로 해석하는 사례도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상에서와 같이 신라의 군장의 호칭의 변화는 당시 시대적인 상황을 이해하고 이에 맞추어 해석하여야 한다. 특히 김씨세력의 영구집권과 삼국통일로 우리는 현재 북방유목 기마민족적 기질에 대해 매우 가깝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초기의 형성과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