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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수를 하고 물을 빼낼 때면 세면대는 언제나 괴성을 지른다. 마치 둠메탈을 듣는 것 같은 그로울링. 자신이 괴물인양 온 힘을 다해 으르렁거리는 세면대는 하루하루 그 소리를 더해갔다.
세면대 꼭지를 눌러놓고 물을 가득 담았다. 내 얼굴이 보였다. 일렁이는 물속에 비친 나는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이 더 일그러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엔 내 얼굴이 온전히 비춰졌다. 어떤 게 나의 진짜 모습일까. 울부짖는 세면대에 가득 담긴 물에 비쳐 여기저기 일그러진 모습일까? 아니면 차갑고 차가운, 투명하고 깨끗한 거울속의 모습일까. 어느새 물은 잔잔해져 내 얼굴은 거울속의 나만큼 깨끗하고 온전히 비춰졌다. 하지만 물 한 방울에서 이내 큰 일렁임을 가져버릴 것이다. 그러면 내 얼굴은 또다시 일그러질 테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잔잔해질 것이다. 세면대의 물을 뺄 때, 나는 세면대에 귀를 기울였다. 언제나처럼 세면대는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눈물이 흐를 것 같은 슬픈 울음. 세면대는 무슨 사연이 있기에 언제나 울고 울고 우는 걸까.
“사람 앞에서 울부짖지 않으면 안될 만큼 슬픈 걸까…….”
중얼거리는 소리는 온 집안에 퍼졌다. 모두들 들었겠지. 모두들 궁금해 할 것이다. 궁금한 건 참을 수 없다.
“세면대 말이야. 물을 뺄 때면 언제나 괴성을 지르잖아. 울부짖기도 하고. 왜 그런 걸까? 슬픈 걸까? 나는 잘 모르겠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속닥이는 소리가 들린다. 저들끼리만 속삭이고 있다. 항상 그랬기에 신경 쓰지 않는다. 무언가 알게 된다면 내게도 말해주리란 것을 안다. 언제나처럼.
똑같은 하루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나는 언제나 같은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끊임없이 흐른다. 흐르고 흘러서 항상 변한다. 우직하게 머물러 있지 못하는 게 시간. 조급하고 다급하게, 자신의 사전에 부동의 자세라는 건 없다는 듯이 바삐 흐른다. 가끔은 시간도 쉬어야 할 텐데. 혹시 모두가 잠든 그 때에 잠시 쉬는 건 아닐까?
한동안 잠잠했다. 녀석들이 뭔가 알아내긴 한 것 같은데 도통 말해주질 않는다. 언젠가는 말해주겠거니 하며 세면대에 물을 받으려던 그때, 무언가 꿈틀거렸다.
“흐에엑!”
“뭘 그렇게 놀라?”
그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세면대가 말을 걸어왔다. 세면대는 둥그런 눈—사실 뭐가 눈인지도 모르겠지만—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랑 말하는 거 처음이지?”
“응.”
신기한 목소리를 한 세면대는 그렇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일상의 단편에 불과하다는 것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넌 내가 왜 괴성을 지르는지 궁금해 했지?”
수도꼭지를 꿈틀대며 세면대는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물과는 견원지간이야. 그야말로 물과 기름의 관계랄까. 물은 우리더러 자기들을 가둬놓는다고 불평이야. 게다가 나갈 때 더러워지는 걸 우리 탓으로 돌려. 우린 뭐 자기네들이 좋은 줄 아나? 간신히 보송보송하게 말랐다 하면 여지없이 내 코를 타고 우르르 쏟아지잖아. 그럴 땐 내 입도 코도 무지하게 아프다고. 뜨거운 물이 나올 땐 어떻고? 아마 내 코의 안쪽은 수없이 데여서 완전히 헐어버렸을지도 몰라. 입이 닫혀 있을 때나 열려 있을 때나 뜨거운 물은 싫어. 게다가 성질도 더럽기는 얼마나 더러운지! 걔네들에 비하면 찬물은 신사라니까? 간혹 가다 아주 잠깐 미지근한 물이 나올 때가 있는데, 걔네들은 아주 친절해. 코랑 입을 부드럽게 지나가 주거든. 또, 물은 때라던가 하는 것들을 다 나한테 떠넘긴다니까? 엄연히 더러운 것은 물이 가져가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어째서 나한테 붙여두고 가냐고. 게다가 자기네들이 내 입으로 내려가면서 같이 밀려온 덩치 큰 쓰레기는 가져가지도 않아. 설사 가져간다 하더라도 중간에 내 목에 걸치고 그냥 가버려서 너무 고생 한다고. 이런 내 고생 아무도 몰라.”
세면대는 그렇게 쌓인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세면대를 쓰다듬었다.
“맘고생이 심했겠구나.”
그러자 세면대는 코를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물이 내 입을 타고 흐를 때면 정말이지 목구멍이 찢어질 것만 같아. 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해. 그래서 내가 비명을 지르는 거야. 슬프게 들리는 이유는 아마 그 때문 일거야. 그래도 난 좀 나은 편이야. 어떤 녀석은 니코틴 중독이 되 버렸대. 자기를 쓰는 사람이 헤비 뭐라던데.”
“헤비 스모커?”
“그래, 헤비 스모커. 그게 무슨 골초를 가리키는 말이라지? 무튼 난 네가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니코틴에 중독될 일도 없을 뿐더러 화장실 공기도 항상 깨끗하잖아. 그리고 너는 음악도 자주 듣잖아. 듣고 있으면 얼마나 흥겨운지 몰라.”
그때, 세면대는 웃는 것처럼 보였다. 마개를 달칵거리며 신나게 웃었다. 나도 덩달아 웃었다.
“네가 음악을 그렇게 많이 좋아하는 줄 몰랐어.”
“그야 뭐, 아무도 물어보지 않은걸. 게다가 너 말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주기는 커녕 관심조차 없잖아.”
“음악을 좀 더 크게 틀까?”
“크게 틀면 옆집에 폐가 될 텐데. 화장실 문을 열어 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 말을 끝으로 세면대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얘기하기 싫었던 걸까. 이 녀석들은 항상 이렇게 제멋 대로다. 하지만 제멋대로인 반면, 한번 말을 걸면 언젠가는 또 다시 말을 걸어온다. 언제나처럼, 항상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래서 난 이 녀석들이 좋은 건지도 모른다. 항상 함께 있고 모든 걸 알고, 날 떠나지 않을 뿐더러 날 좋아하기까지 하니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까. 그 후로도 종종 세면대와 얘기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눌수록 속이 깊고 좋은 녀석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 봄날, 모처럼 일찍 일어나 식사 후에 이를 닦는 중이었다.
“네 엉덩이는 정말 아름답더군.”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그런가? 고마워.”
그리고 곰곰이 생각한 후에 한마디 덧붙였다.
“네 능력도 꽤 좋던데? 뭐든지 못 넘기는 게 없잖아.”
변기는 크고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너 뭔가 좋은 녀석이구나. 마음에 드는 걸?”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나는 변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얘기를 들었다.
“살다 보면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만나게 마련이지. 그런데 나는 장난이 아니었어. 처음 여기 살던 사람은 내가 토사물 제거기 인줄 알았는지 똥은 안 싸고 하루가 멀다 하고 마냥 토악질만 해 대는 거야. 그래, 뭐 거기까진 괜찮아. 그런데 왜 게워낸 후에 물을 내리지 않는 거야? 그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데. 그리고는 다음날 나를 보면서 더럽다며 얼굴을 찡그리기만 하고. 날 더럽힌 게 본인이라는 생각을 잊었나 보더라? 게다가 변비는 얼마나 심한지. 30분 동안 냄새나는 궁둥이를 들이밀고 있더라니까? 너 라면 참을 수 있겠어? 그래서 한번은 일부러 똥을 안 넘기고 버티니까 아 이놈이 변기 뚫는 사람을 불렀지 뭐야. 어쩔 수 없었지 뭐. 목구멍을 시원하게 긁어주는데 별 수 있겠어? 그 다음은 누구더라, 예쁘장하고 젊은 아가씨였지 아마? 헌데 그 아가씨 습관성 장염이 있었는지 툭하면 게워내고 설사를 하는 거야. 냄새가 장난이 아니더라. 그렇게 고약한 냄새는 처음이었어. 비위 좋다고 소문난 나도 그때는 속에서 막 거꾸로 올라왔다니까.”
변기는 꺼억 하며 트림을 하고 말을 이었다.
“어휴. 뭐 나만 이러겠어. 세상의 모든 변기들이 구역질을 참으면서 사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해도 해도 너무 하잖아. 그 아가씨 다음에 온 사람은 할아버지였는데 조준을 잘 못하셔서 옆으로 자꾸만 새 나가는 거야. 덕분에 그 할아버지가 사실 동안은 욕실에 지린내가 가시질 않더라고. 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다른 이들에겐 미안하더라. 그네들이 무슨 죄여, 내가 죄지.”
‘변기는 마음씨가 참 곱구나.’ 하고 생각했다. 입이 좀 거칠긴 하지만 그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변기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도 생각해 보면 난 운이 좋은 것 같아. 어쩌다 널 만나서 이렇게 신세 한탄도 하고. 다른 인간들은 우릴 거들떠도 안보잖아. 우리가 없으면 정작 불편한 건 인간들이면서 어쩜 그렇게 이기적이고 무관심할 수가 있을까. 적어도 깨끗이 닦아는 줘야 한다고 생각해. 너 처음 들어왔을 때 내 모습 기억나지? 그런 변기에 앉고 싶어지겠냐고. 나라도 당장 깻박쳐 버렸을 걸. 나도 그렇게 되리라 맘먹고 각오는 하고 있었어. 그런데 네가 날 이렇게 깨끗하게 닦아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넌 나의 은인이야.”
“뭘. 그냥 내가 깨끗한 걸 좋아하기 때문이야.”
그렇게 변기와의 대화는 막을 내린 듯 했다. 그래서 난 바지를 내리고 변기에 일을 보았다. 경쾌하게 들리는 물소리는 변기의 마음을 말해주는 듯 했다. 일을 본 후에 물을 내리고 화장실을 나가려다, 뒤돌아서 변기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입이 쩍 벌어져 있는지라 표정을 도통 알 수 없지만, 그때 변기는 분명히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나처럼 언젠가는 또 그렇게 말을 걸어 주리라 기대하며, 또 하루가 지난다.
슬금슬금 봄은 지나가 버리고, 내가 싫어하는 여름이 왔다. 밖에 나가보지 않아 얼마나 더운지 잘 모르겠지만, TV의 일기예보를 보면 대충 짐작은 갔다. 집안에 있어도 덥다. 옷을 벗고 다닐 수 도 없어서 나는 수시로 샤워하는 방법을 택했다. 땀에 젖은 옷을 벗고 샤워기를 집어 들었다. 물을 틀려는데 샤워기를 쥔 손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안녕?”
너무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나는 많이 놀랐다. 샤워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대답 안 해?”
“아, 안녕?”
“놀랐나보네. 변기랑 세면대는 말하는데 나는 못 할 줄 알았어? 섭섭한걸.”
“그런 것이 아냐. 단지 시기가 좀 좋지 않았어.”
“후후후. 그런데 너 몸이 참 좋구나. 운동하나?”
“아니, 전혀.”
큰 수건을 가져다 허리에 둘렀다. 욕조에 걸터앉아 샤워기가 하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까지 여기 있으면서 본 몸 중에는 네가 가장 좋은 것 같아. 하지만 좋아하진 마. 변기에게 들어서 대충 알겠지만 맨 처음 살던 사람은 뚱뚱한 40대 아저씨였지. 다음은 늘씬한 아가씨였지만 허리가 통이라서 김이 팍 새버렸어. 그 다음은 나이든 어르신이었고.”
샤워기는 긴 줄을 덜그럭 거리며 말을 이었다.
“난 다리가 있지만 이 다리로 설수 없을뿐더러 끝이 수도꼭지에 붙어있어서 자유롭지 못해. 누구나가 그렇듯이 나도 꿈이 있었는데, 현실은 만만치 않더라. 참, 할 얘긴 이게 아니었는데 왜 삼천포로 빠진 걸까. 사람들은 내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나봐. 툭하면 떨어트린다니까. 이것 봐. 예전에 생긴 멍이 아직도 그대로 있어.”
들이밀어 보여주던 샤워기의 머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뭔가 있는 척 했다.
“많이 아팠겠네. 지금도 아파?”
“가끔.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그래. 하지만 자주 그러진 않으니까 괜찮아.”
그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소리에 몸도 마음도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샤워기가 몸을 흔들거리며 말했다.
“비가 오네? 비는 좋은 녀석이지. 나도 비처럼 자유롭고 싶어. 가고 싶은 곳도 가고, 여기저기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어. 항상 비를 부러워하다 보니 내가 내뱉는 물소리는 어느새 빗소리를 닮아있더라. 그래서 난 눈을 감고 그 소리를 즐겨. 그럼 내가 마치 비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상상은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그럴 때면 나는 비가 되어서 여기저기를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것 같아. 아름다운 것들을 보며 내 마음대로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그런 상상. 그 동안은 잠깐이나마 행복하더라. 하지만 이내 내 처지를 깨닫지.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하나뿐인 내 다리가 걸그럭 거리니까. 가끔 답답할 때 창문으로 빗소리가 들리면 얼마나 좋던지. 너는 그 기분 모를 거야.”
말을 마친 샤워기는 침묵했다. 시계의 초침소리가 시끄러웠다. 한낱 샤워기도 이상과 꿈이 있는데 나는 뭘까? 샤워기는 꿈을 바라봄으로써 힘들고 답답한 현실을 이겨나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사람이 무서워 세상이 무서워 현실 도피한 녀석일 뿐이다.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의 꿈이나 이상을 찾으려 했지만 허사였다. 내 속은 무(無)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혼란스러운 생각들만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고 있을 뿐 이었다.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나에 대해 회의가 들었다. 이대로도 괜찮은 건지 불안해졌다. 하지만 이렇게 고민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머릿속을 비우고 모로 돌아누웠다. 시계 초침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밖엔 비가 오고 있었다.
어제부터 내리던 비는 오늘도 내린다. 나는 샤워기가 빗소리를 잘 들을 수 있게 화장실 창문을 열어두었다. 화장실로 축축한 공기가 들어왔다. 문을 닫고 나와 우산을 가지고 옥상으로 갔다. 잘 열리지 않는 문을 힘들게 열고 난간으로 걸어갔다. 난간 밑으로 동네가 한눈에 보였다. 흐린 하늘 밑으로 차의 전조등 불빛이 반짝였다. 걸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우산을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위에서 보니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뿌옇게 보였다. 마치 하나가 된 것 같았다.
비오는 여름날은 참 좋다. 가슴 한가득 맑고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다. 말라버린 흙이 촉촉이 젖는다. 덥지 않다.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비에 젖어버린 발을 닦았다. 수건으로 발의 물기를 닦고 걸어 놓으려는데 수건이 꿈틀거렸다.
“푸에취!”
재채기한 수건은 코를 훌쩍 거리더니 나를 쳐다보고는 말했다.
“밖에서 놀다 들어왔구나? 축축하게 젖은 걸 보니.”
“뭐, 그런 셈이지.”
오물오물 움직이는 수건이 신기했다. 눈과 코는 보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잘 어울렸다. 나는 수건을 바닥에 내려놓고 나도 그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들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낡은 몸이지. 네가 혼자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같이 생활했으니까, 그렇지? 그만큼 난 널 오랫동안 봐 왔고, 조금은 널 알고 있다고 생각해. 그런 의미에서 하는 이야기니까 아니꼽게만 들어주지 않았으면 해.”
수건은 망설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넌 왜 인간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걸까? 네가 딱히 이상한 성격도 아니고 오히려 사근사근하고 부드러운 성격인데 말이야. 너도 다른 인간들과 똑같은 인간인데.”
“그들과 똑같은 취급하지 마! 난 그렇고 그런 인간들 따위가 아냐!”
소리쳤다. 수건은 놀랐는지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뭘 안다고 저렇게 지껄이는 거지? 겨우 수건 주제에 인간을 뛰어 넘으려고 하다니. 저 녀석은 미친 게 분명하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화를 가득 품은 눈으로 말없는 수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수건이 입을 열었다.
“세상에서 버림받는 것이 무서웠던 거구나. 그게 겁이 나서 네가 먼저 세상을 버린 거지? 인정할 건 인정 해.”
너무 화가 났다. 수건을 집어 벽으로 힘껏 던졌다. 수건은 벽에 날아가 부딪히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떨어진 수건을 발로 짓밟았다. 한낱 수건에게까지 이런 얘기를 들을 정도로 나는 썩지 않았다.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너무 화가 나서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한참을 밟은 후에야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고 내가 바보짓을 하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비가 그쳤는지 거세게 내리던 빗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푸르게 차가운 물에 세수를 했다.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수건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 늦은 시각이 아니었지만 하늘이 흐린 탓인지 굉장히 어두웠다. 손에 든 수건을 폐기물 수거함에 쳐 넣었다. 내 손을 떠난 수건은 이제 악취 나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뒤돌아서 집으로 향했다. 그때 하늘에서 달이 보였다. 달을 가렸던 구름이 흘러 간 것일까. 어두운 하늘에 달은 첨예하게 빛났다. 그 빛 아래선 나도 빛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안은 조용했다. 아무도 수군대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피곤하진 않았지만 잠자리에 들었다. 투둑투둑 빗소리가 들렸다. 또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 후로 한동안 나에게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왜일까? 수건을 내다 버린 게 못마땅했던 걸까? 머릿속이 복잡하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보니 모두가 흐느끼고 있었다. 아무도 말해 주지 않는다. 뭔가 굉장히 슬픈 일이 있는 것 같다. 다정히 말을 건네주던 커튼도 지금은 아무 말 없이 흐느끼고만 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지? 궁금하다. 물어보고 싶지만 그건 예의에 어긋난다. 궁금하더라도 참아야 해.
얼음장 같은 물을 받아 세수를 했다. 몽롱했던 정신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고 있던 그 때, 밑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칫솔통의 칫솔 하나가 몸을 꽈배기처럼 비틀고 있었다.
“나도 이젠 가야지.”
“왜 가려고 하세요?”
내가 대꾸하자 칫솔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내 솔이 벌어지지 않고 가지런했던 때가 기억나는구나. 그때 나는 싱싱하고 파릇파릇한 젊은이였지.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은 꿈으로 가득 찬 그런 때였는데. 살다보니 꿈 이란 건 허구에 지나지 않더라. 하고 싶은 게 있지만 다른 걸 해야만 하고, 꿈이 있지만 손조차 뻗을 수 가 없었어. 어쩔 수 없이 나는 대부분의 칫솔들처럼 하기 싫고 꿈이 아닌 일에 매달려 살아야 했지.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 왔는데, 이건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죽을 때 까지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일들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죽을 순 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 이 상태에선 어떤 방법으로도 내 꿈을 실천하지 못해. 그래서 난 다시 태어나기로 마음먹었어.”
칫솔은 어린아이같이 반짝이는 눈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엔 푸르른 하늘이 보였다. 흰 구름과 함께 불타는 태양도 보였다. 그의 눈은 세상을 담고 있었다.
“제가 뭘 해 드리면 되죠?”
“날 죽여줘.”
칫솔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괜찮은 것 같지 않았다. 흐느낌을 넘어서 모두가 울고 있었다.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방법은 죽는 일 뿐이야. 나 스스로는 죽을 수 없으니 네가 날 죽여줬으면 해.”
“어떻게요?”
“부러트려 줘.”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칫솔을 두 손으로 쥐고 힘을 주어 부러트렸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칫솔의 허리가 두 동강이 났다. 그가 해달라기에 한 것일 뿐이다. 나는 아무런 죄책감도 느낄 수 없었다. 역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일까. 내가 갖지 못한 꿈에 대한 질투는 아닐까.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원망하거나 질책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단지 자신들의 곁에서 사라진 그 칫솔이 다음엔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눈물일 것이다.
방으로 들어와 오디오를 켰다. 슬픈 음색이 방 안을 휘감았다. 평소에 자주 듣던 음악이지만 그날따라 좀 더 슬프고 우울하게 들렸다. 오디오조차 울고 있었다. 울지 않는 자는 나 뿐 인걸까? 갑자기 슬퍼졌다. 타인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나는 저들과 어울리는 것으로 세상과의 대화를 대신하곤 했다. 나는 어느 정도 그들과 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저들에게 조차도 유리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어째서 저들에게도 녹아들지 못하는 것일까. 슬픔에 눈물이 흘렀다.
첫댓글 이거 예전에 쓰셨던 거에 무언가 살이 더 붙었네요. 항상 그렇듯이 보기에 좋아요.
언제나 댓글 감사해요
여러가지 애들이 차례대로 등장하는게, 참 흥미로운 단편이네요. 나름대로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게 재밌게 읽었답니다. 부러뜨려달라던 칫솔이나 버려진 수건이나 모두, 어쩌면 외로운 주인공의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느낌도 들어요.
음...어디서 읽은 듯한...^^;;;
접때 한번 맨 처음 이야기를 올렸던 적이 있는데 혹시 그게 생각나신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