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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영광] 09
#.1 씬. 강석의 사무실. (낮)
8회 연결 상황으로.
만기, 들어오는.
강석 : (문 앞으로 다가서서 정중하게 인사하는)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까?
만기 : 항복은 적진에 와서 하는 거 아니겠소?
강석 : ......
시간 경과.
만기, 강석, 마주 앉아 찻잔을 앞에 놓고 있다.
만기 :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시고) 차 맛이 깊구만.
강석 : 어머님께서 가져다주신 것입니다만 아직 차 맛을 제대로 알지는 못합니다.
드시고 자리를 옮기시죠, 회장님?
만기 : (보고)
강석 : 적진으로 항복을 하러 오셨다는 말씀이 마음에 걸려서 말입니다.
만기 : (물끄러미 보는)
#.2 씬. 희원.(낮)-에버랜드 내 희원 미술관 내 정원.
만기, 강석 걷고 있다.
만기 : 바쁜 사람을 내가 너무 멀리 나오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소?
강석 : 좋은 곳이군요.
만기 : 가끔 내가 손녀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오는 곳이오.
강석 : ......
만기 :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고들 하는데, 참 정갈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소?
우리 손녀 아이가 이곳을 참 좋아하지.
강석 : 네.
만기 : 난 말이요, 이사장. 배움도 길지 않고 수완도 뛰어난 사람은 못되오.
그런 내가 집장사를 해서 돈을 좀 모았소.
강석 : ......
만기 : 세상에 많고 많은 장사 중에 내가 왜 유독 집을 지어 팔 생각을 했는지 아시오?
강석 : ......
만기 : 집이란 곳이 말이요. 사람들이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키우고,
그 아이들을 또 다른 집으로 내보내고, 그리고 그 아이들을 기다리다 눈을 감는 곳 아니겠소.
그래서 나는 집을 짓고 싶었던 사람이오. 다행히 천운이 따랐는지
수완도 별다르지 않은 내가 돈을 좀 벌어 지금에 이르렀소.
강석 : 회장님께서 입지전적인 인물이시란 말씀은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만기 : 우리나라에서 리조트 사업을 하는 건 무모한 짓이라고 흔히들 말하지.
맞는 말이오. 수익을 내기엔 너무도 힘든 구조가 바로 리조트 사업 이란 거 아니오.
이사장이 더 잘 아실테지만.
강석 : 회장님의 도전 정신은 존경하고 있습니다.
만기 : 우리 같은 중소기업 수준의 회사에서 벌이기엔 너무 벅찬 사업이었다는 거 잘 알고 있소.
그래서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겠지만서도.
내 고향 지자체와 명성의 공동 투자가 없었다면 아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거요.
강석 : 명성의 몰락이 없었다면 저에게 항복이라는 듣기 민망한 말씀을 하는 일도 없으셨을텐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기 : 이 사장?
강석 : 네, 회장님?
만기 : 우리 회사 하나만 문을 닫는 상황이라면 오늘 이사장을 찾아오는 일은 없었을 거요.
강석 : .....
만기 : 사업하다 망하는 일도 흔하디 흔한 일이니, 내 운이 여기까진가보다 하고 겸허히 받아들였을 거요.
허나, 내 고향 사람들의 혈세가 투자 되어 있는 사업이오.
그 분들께 누를 끼치는 일만은 하고 싶지 않구만. 이 사장이 좀 도와주실 수 있겠소?
강석 : ......
만기 : ......
강석 : 회장님?
만기 : .....
강석 : 저는 천성이 야박한 장사치입니다.
이문이 남지 않는 장사엔 아예 발을 들여놓지 않는 뼈 속까지 장사치인 인간입니다.
만기 : .....
강석 : 저는 회장님의 고향 분들은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는 놈입니다.
만기 : ......
강석 : 그런 저와 손을 잡게 되시면 많은 위험을 감수하셔야 할 겁니다.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만기 : (바라보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이사장을 찾아온 것 아니겠소.
강석 : ......
#.3 씬. 길.(낮) -희원 앞 길.
만기, 이기사가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에 앉아 밖을 바라본다.
나무와 호수가 보이는 길을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만기.
그 뒤로, 강석이 운전하는 차.
강석 : 회장님? 저는 경고를 했습니다. 제가 어떤 놈인지도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니 저는 무슨 짓을 해도 자유로운 겁니다.
#.4 씬. 강석의 사무실.(낮)
강석, 들어오면, 천갑 신문을 보고 앉아있다.
강석 : 나오셨어요?
천갑 : 하만기 회장이 직접 찾아왔었다며?
강석 : (앉으며)
천갑 : 그 꼿꼿한 양반이 똥줄이 타도 디게 탔나보다.
강석 : 항복을 하려면 적진에 와야 하지 않겠냐고 하던데요.
천갑 : 하. 그 노친네 말발도 무지 폼난다 야. 그래서? 항복 문서는 받았냐?
강석 :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정원에 데려가던데요.
천갑 : 뭐?
강석 : 인간의 손으로 만들고 가꾼 정성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봐라. 뭐 그런 뜻이었겠죠.
천갑 : 그런거냐? 야, 그거 머리 안돌아가는 놈은 그 노친네랑 상대가 되기나 하겠냐.
강석 : 내가 하려는 사업도 이런 것이니 섣불리 주판 튕기지 말고 마음 곱게 쓰고 들어와라,
뭐 그런 것 같더군요.
천갑 : 그래서 뭐랬냐?
강석 : 전 천성이 야박한 장사치다 그랬습니다.
천갑 : 야, 너 진검 승부 했구나. 자식, 누구 아들인지 진짜 너도 폼은 난다 야.
그랬더니 그 노친네 뭐라디?
강석 :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찾아온 거 아니겠냐구요.
천갑 : (호탕하게 웃어 재끼는, 그러다 웃음 딱 멈추고 차가운 시선으로 강석을 바라보는)
내가 네 엄마랑 넝마로 돈을 좀 모아서 시장통에서 일수놀이를 시작했거든.
그 일수라는 게 아편하고 다를 게 없는 거야. 우선은 달지, 아주 달아. 정신이 몽롱하니 아주 달달해.
근데 그게 바로 사람 죽이는 거거든. 근데, 웃기는 건 뭔지 아냐?
강석 :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뿌리치진 못한다는 거겠죠.
천갑 : (테이블 탁 두드리며) 그거야. 우선은 급한 불 끄자고 끌어다 쓴 일수가
결국엔 그 집은 물론이고 그 일가까지 몽창 태워버린다는 걸 인간들은 몰라.
그 불에 결국은 지가 타 죽는다는 걸 몰라. 아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어.
그게 인간이야. 그런 인간들 때문에 오늘에 네 에비가 있는 거다.
강석 : (차갑게 미소 지으며) 저는 그런 아버지의 아들이구요.
천갑 : 불 속으로 날아들었으니 태워버리는 게 도리겠지. 각자 타고난 운명이라는 게 있는 거거든.
강석 : (자신감 있는 미소로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5 씬. 종가집 마당 정자.(낮)
만기, 앉아있는. 삼월, 빨래 바구니 들고 빨래 널러 나왔다가 만기를 보는.
삼월 : (화들짝 놀라 다가오는) 아니, 언제 들어오셨어요?
만기 : 조금 전에.
삼월 : 옷도 안 갈아입으시고 왜 여기 앉아계세요?
만기 : 좀 쉬었다 들어가려구.
삼월 : 많이 지쳐보이시는데 들어가서 좀 누우시죠. 회장님.
만기 : 앉아요.
삼월 : (앉고)
만기 : 오늘 내가 어떤 젊은 친구를 하나 만났는데 말이요.
삼월 : ......
만기 : 난 천성이 야박한 인간입니다, 하는 거요.
삼월 : 그런 말을 제 입으로 하는 사람도 있나요?
만기 : 있더군. 마치 먹이감을 앞에 놓고 슬슬 주위를 도는 맹수 같은 친구였소.
삼월 : 뭐하러 그런 사람은 상대하세요? 사람이라는 게 다 기가 있는 거 아닙니까?
괜히 그런 친구 잘못 상대하시면, 기만 뺏기실텐데.
만기 : 근데 그게 참 묘합디다. 난 당신을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있는 놈입니다,
하는 눈빛으로 내 먹이가 되시겠습니까? 하는데.....
삼월 : 어째 그런 독한 사람을.....
만기 : 근데 묘한 게 이 놈은 비열하게 뒷덜미를 물 놈은 아니구나 그래지는 거요. 그게 싫지 않읍디다.
삼월 :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통.....
만기 : 서로 자기가 가진 수를 다 내보이고 하는 승부도 참 재미있겠다 싶구려.
삼월 : (무슨 뜻일까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보는)
만기 : (깊은 미소로 마당의 꽃들을 바라보는)
#.6 씬. 석호의 사무실.(낮)
석호, 수영, 태영, 얘기하고 있는.
수영 : 강남에서 건물 임대업을 하시는 부친을 둔 동창이 있어서 어제 만나봤는데,
부친께 공동 출자를 권유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석호 : (끄덕이고) 네 성격에 쉽게 말 꺼내기 힘들었을 텐데 수고 했구나.
태영 : 그런 친구가 있으면 진작 좀 나서보지 그랬어? 형은 그 느려터진 게 진짜 문제야.
석호 : (태영을 보고)
수영 : (태영을 보면)
태영 : (무안을 감추려고 애써 오버하며) 아, 그래요, 저는 그런 잘나가는 아버지 둔 친구 놈 하나 없어요.
3류 대학도 겨우 들어가서 빌빌 거렸는데, 잘나가는 친구 놈이 있을 턱이 없잖아요.
인터폰 울리고.
석호 : (일어나서 책상 앞으로 가서 인터폰 누르는) 뭔가?
여비서E : 사장님, 이천갑 회장님 전화십니다.
석호 : (긴장해서) 연결해. (수화기 들고) 하석홉니다. (듣는) 네, 네, 알겠습니다.
그 사이, 수영과 태영, 긴장한 표정으로 석호를 바라보는.
석호 :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수화기 내려놓는)
태영 : 왜요? 만나재요?
석호 : 이 상태로 손을 놓는 건 상도가 아닌 거 같으니 다시 한번 검토를 해보겠다고 하는구나.
태영 : 네? 검토요? 뭐야. 진짜 이것들 우리를 가지고 놀겠다는 거야 뭐야.
수영 : 만나기로 하셨습니까?
석호 : 리조트 현장을 보고 싶으니 일정을 잡아 달라는구나.
태영 : 간을 제대로 보겠다 그거네요, 뭐.
석호 : 어쨌든 급한 건 우리 쪽이니 일정부터 서둘러 잡아봐라.
#.7 씬. 수영의 사무실.(낮)
수영, 태영 들어오는.
태영 : 이젠 약점 확실히 잡힌 꼴이니 무조건 저자세로 나가야 하는 거 아냐? 내 참 더럽고 치사해서.
수영 :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그렇게라도 다시 연락이 온 걸.
태영 : 밀고 당기면서 잇속 챙기려는 수작인데, 알면서도 끌려가는 게 속이 터지니까 그렇지.
수영 : 넌 좀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태영 : 태생이 욱욱 지랄인 걸 어떡해?
수영 : (못마땅하게 보고)
태영 : 그래도 회사 뒤숭숭한 바람에 딴 얘긴 쏙 들어갔으니 그거 하난 다행이네.
수영 : 딴 얘기라니?
태영 : 아버지 이영인 실장하고 결혼 얘기 말이야.
수영 : 넌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정말 하고 싶냐?
태영 : 난 단순난폭한 놈이잖아. 회사가 망하면 망했지,
돌아가신 우리 엄마 원통해하시는 건 정말 못 참겠는 걸 어떡해. (나가버리는)
#.8 씬. 노교수 사무실.(낮)
노교수, 단아, 마주 앉아있는.
노교수 : 자네 볼 낯이 없구만. 계획적으로 자넬 심부름 보낸 것처럼 됐으니 말일세.
현금 서비스 한도가 그 정도 밖에 남지 않았을 줄이야.....
단아 : 교수님,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불우이웃 돕기도 하는데,
아픈 아이 살리는 일에 가진 돈 좀 내놓은 게 뭐 그리 큰일이라구요.
마음 불편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노교수 : (일어나서 캐비넷 열어 보자기로 싼 책 뭉치를 가지고 다가와 앉는)
단아 : (보는)
노교수 : 그 사람 집안 족볼세.
단아 : 네.
노교수 : (단아 앞 쪽으로 밀어놓는)
단아 : (의아하게 보는)
노교수 : 자네가 맡아가지고 있게나.
단아 : (당황해서) 교수님?
노교수 : 그 사람 부탁일세.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흔들릴지 모르겠으니
자네한테 맡겨놔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하더구만.
단아 : 제가 어떻게. 교수님이 맡아가지고 계세요.
노교수 : (쓸쓸하게 미소 짓고) 나도 내 자신을 못 믿겠네.
단아 : 교수님.
노교수 : 못난 아들놈이 아버지 저 좀 살려주세요, 하고 매달릴 때마다
나도 못난 에비라 자꾸 마음이 흔들리는구만.
그 이강석이라는 젊은 친구가 와서 팔라고 성화를 부릴 때마다 모질게 해서 돌려보내긴 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나도 자신이 없어. 그러니 자네가 맡아가지고 있어주게.
단아 : 제가 어떻게 이 귀한 걸.....
노교수 : 자넨 얼마를 주겠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을 거란 거 하난 확실한 사람 아닌가?
그럼 자격 충분히 있는 걸세.
단아 : ......
#.9 씬. 남교수 사무실.(낮)
단아, 보자기에 싼 책 꾸러미 들고 들어와서 자리에 앉는. 복잡한 심정으로 꾸러미를 바라보는데,
남교수 들어오는.
남교수 : 자기, 어제 멋졌다며?
단아 : 네?
남교수 : 오다가 정현규한테 어제 얘기 다 들었어. 자기도 참 어지간하다.
대학 때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알뜰하게 모은 돈을 한순간에 톡 털어 넣고.
물욕이 없는 거냐? 모지란 거냐?
단아 : 둘 다겠죠 뭐.
남교수 : (책 꾸러미 보면서) 근데 그건 뭐야?
#.10 씬. 카페. (낮)
현규, 서빙하고 있는. 친구1,2 앉아있는.
친구1 : 이봐요, 총각, 여기 얼음냉수 한잔 더.
현규 : (흘겨보고 다가오는) 영업 방해 할래?
친구1 : 높은 자리 있을 때 좀 봐주게나, 친구.
친구2 : 그래도 커피는 한잔 시켰잖은가, 친구.
현규 : 둘이 와서 달랑 한잔?
친구1 : 도서관에 자리 못 잡은 걸 어쩌나.
현규 : 니들 때문에 나 사장님한테 잘리면 알아서들 해라.
친구2 : 사장님도 없고, 손님도 저기 한 명 뿐인데 뭐 어떤가.
친구1 : (저쪽 구석 자리에 혼자 앉아있는 혜주를 보며) 쟤도 어지간하네. 우리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지?
친구2 : 바람 맞았나보지 뭐. 아님, 우리처럼 도서관 자리 못 잡았거나.
친구1 : 쟤 우리 들어와서부터 지금까지 저 책 한 장도 안 넘겼다.
친구2 : 그러냐? 진짜 바람 맞았나보네.
현규, 그제야 혜주가 좀 신경 쓰이고, 혜주 쪽으로 다가가는.
현규 : 뭐 필요한 거 없어요?
혜주 : (놀라서 고개 들고)
현규 : 물이라도?
혜주 : 쥬스 한잔 더 주세요.
현규 : 지금 벌써 다섯 잔 째거든요. 자학취미 있어요? 스스로 물고문 하는?
혜주 : 그, 그럼 케잌 주세요.
현규 : (진짜 묘한 애다 싶고) 무슨 케잌?
혜주 : 네?
현규 : 무슨 케잌 주냐구요?
혜주 : 치즈 케잌.
현규 : 저기 혹시 누구 기다려요?
혜주 : 네?
현규 : 너무 오래 있는 거 같아서?
혜주 : 아, 안되나요?
현규 : 우리야 매상 올려서 좋지만, 보기가 좀 그래서요. 바람 맞았어요?
혜주 : .....
현규 : 세 시간 넘게 기다려도 안 오면 바람 맞은 거예요. 그러니까.
혜주 : 바람 안 맞았어요.
현규 : 그럼 도서관에 자리 못 잡아서 공부하러 온 거예요?
혜주 : 네.
현규 : 그럼 책장이라도 좀 넘기면서 공부하던지..... (걸어가면)
혜주 : (얼른 책장을 넘기며 공부하는 시늉하는)
현규 : (돌아보면서, 갸웃하며, 진짜 이상한 애다 싶고)
#.11 씬. 병원 일각. (낮)
이씨, 강석 마주 서있는.
강석 : 어제는 엉뚱한 사람이 끼어들어서 제가 그냥 돌아갔지만,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씨 : 저.....저희 집 족보, 이젠 저한테 없는데요.
강석 : 알고 있습니다. 노현석 교수님께 맡겨두신 거. 노교수님과도 얘기가 끝났습니다.
이선생님께서 제게 넘기겠다고만 하시면 이의를 달지 않으시겠다고.
이씨 : 이젠 노교수님한테도 없을 겁니다.
강석 : (보고)
이씨 : 제가 어제 온 그 하단아라는 분께 맡겨달라고 부탁을 드렸거든요.
강석 : (어이가 없고)
이씨 : 저도 제 자신을 못 믿겠어서, 그 분께 맡겨놔 달라고.
제가 마음이 흔들려서 팔겠다고 미친 소리를 해도 그 분이 말려주실 거 같아서요.
그 분이 말려주시면 제 정신으로 돌아올 거 같아서.....
강석 : ......
#.12 씬. 현옥의 아파트 입구. (낮)
경비실 앞. 경비원과 얘기하고 있는 동동.
동동 : (눈물이 그렁해서 올려다보는)
경비원 : 느네 집 팔렸어. 느네 엄마는 이사 가셨는데.
동동 : 거짓말이죠?
경비원 : 아니야, 진짜야.
동동 : 우리 엄마가 나 오면,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죠? 그렇죠?
경비원 : 아니라니까. 니 집 텅 비었어. 다음주에 새 집 주인이 이사 오기로 돼있어.
#.13 씬. 아파트 내 경비실.(낮)
동동, 경비원이 지켜보는데, 전화를 걸고 있다.
동동 : (버튼을 누르면)
없는 번호이오니, 하는 안내 멘트가 나온다.
동동 : (울먹해지는) 우리, 엄마 번호 맞는데.....(다시 눌러보고, 역시 같은 멘트가 흘러나오고)
#.14 씬. 종가집 마루.(낮)
동동, 힘없이 걸어오면, 마루 걸레질 하고 있던 조만.
조만 : 지금 와?
동동 : (힘없이 방으로 들어가는)
조만 : 선생님한테 혼났나?
삼월, 부엌에서 나오며.
삼월 : 동동이 왔냐?
조만 : 네, 애가 힘이 하나도 없이 들어오는데요.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혼났나 봐요.
삼월 : 동동이가 너냐?
조만 : 어머, 할머니, 아니예요. 전 선생님한테 혼난 적 없어요.
삼월 : 그래서 맨날 공부하다 말고 집으로 도망 왔냐?
조만 : 그건요, 혼나서 그런 게 아니구요. 빨래솥 올려놓은 게 갑자기 생각나고,
장독대 열어놓고 갔는데 갑자기 비가 오고 그러니까 집으로 냅다 달려온 거죠.
삼월 : 나 원. 살림 귀신이 씌인 것도 아니고.
내가 살면서 희한한 인간 여럿 봤지만, 그중에 으뜸은 바로 너다.
#.15 씬. 만기의 방.(낮)
만기, 책을 보고 앉아있으면, 동동 우두커니 앉아있는.
만기 : 학교 다녀왔으면 세수부터 하고 숙제를 해야지.
동동 : 할아버지?
만기 : 왜?
동동 : 저 좀 자도 돼요?
만기 : 왜? 몸이 안 좋냐?
동동 : 네.
만기 : 이리 와봐라.
동동 : (만기 앞으로 기어가는)
만기 : (동동의 머리 만져보는) 머리가 따끈한 거 같긴 하구나.
동동 : 그러니까 자도 되죠?
만기 : 그래, 좀 자거라.
#.16 씬. 부엌.(낮)
삼월, 조만, 채소 다듬고 있으면.
만기E : 이봐요?
삼월 : 네, 회장님. (얼른 일어나서 마루로 급하게 움직이는)
#.17 씬. 마루.(낮)
만기, 서 있으면, 삼월 다가오는.
만기 : 동동이가 몸이 좀 안 좋은 거 같으니, 쌍화탕 조금 데워서 먹여 봐요.
삼월 : 힘이 하나도 없이 들어오는 거 같다더니 진짜 아픈가보네요?
만기 : (끄덕이는)
#.18 씬. 방송국 복도.(낮)
자판기 앞에서 음료수 꺼내고 있는 주정, 홱 돌아보는.
주정 : 뭘 입어?
병도 : 원피스나, 투피스 그러니까 치마 종류로 입어 달라 그거죠.
주정 : 니가 지금 나한테 의상까지 주문할 입장이냐?
병도 : 도와주기로 했으면 확실히 해줘야 고맙다는 인사도 확실히 받을 거 아냐?
주정 : 니가 우리 오빠를 구워삶았다고 아주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병도 : 선배, 우리 할머니, 어머니 앞에서 진짜 그런 험악한 발언은 삼가줘야 한다.
우리 할머니, 어머니 잔칫날 뒤로 넘어가시게 하고 싶지 않으면.
주정 : 내 입은 나도 어쩌지 못하거든. 그니까 병도야? 사랑하는 후배 김병도야?
병도 : 왜 그래? 야사시하게? 그거 진짜 선배하고 안 어울리거든?
주정 : 나 같은 시한폭탄 들고 좋은 날 집에 내려가는 위험천만한 짓을 꼭 해야겠냐?
병도 : (핸드폰 꺼내는)
주정 : 그래, 잘 생각했어. 집에 전화 걸어. 전화 걸어서 튼실이하고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그래버려.
병도 : 여보세요? 하회장님 댁이죠? 저, 김병도라고 어제 찾아 뵀던.....
주정 : (핸드폰 확 뺏고, 병도의 목을 팔로 감아버리는) 이게 죽으려고 빽을 써요, 써.
#.19 씬. 홍보실.(낮)
태영, 서류 들고 걸어오는.
태영 : (직원에게) 홍보 실장님 안에 계시죠?
직원 : 병원에 가셨는데요.
태영 : 병원이요?
직원 : 네. 요즘 계속 몸이 안 좋으신 거 같아요. 저번 날 결근 하신 것도 병원에 입원하셨던 거였다는데.
태영 : (이상한 느낌이 들고)
#.20 씬. 수영의 사무실.(낮)
수영, 일하고 있으면, 들어오는 태영.
태영 : 이유를 알았어.
수영 : (보고)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태영 : 아버지가 왜 이영인 실장과 그렇게 결혼을 서두르시는지 이유를 알았다구.
수영 : .....
태영 : 상중인데 갑자기 결혼 말 꺼내신 것부터가 우리 아버지답지 않으신 거 아냐?
그럼,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 아니겠냐구?
수영 : 이유가 뭔데?
태영 : 이영인 실장. 시한부 선고 받은 거야.
수영 : 뭐?
태영 : 러브스토리 못 봤어? 그런 거야. 이영인 실장이 불치병에 걸린 거라구.
그래서 아버지가 단 하루도 아깝다 그렇게 나오시는 거라구.
수영 :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냐?
태영 : 이영인 실장 병원에 갔다잖아.
수영 : (어이가 없고) 병원에 가면 다 시한부 중병인 거냐?
태영 : 앞뒤가 딱 들어맞잖아?
수영 : 뭐가 앞뒤가 들어맞는데?
태영 : 그렇지 않고선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나오실 이유가 뭐냐구?
수영 : .....
태영 : 그렇다면, 이건 더 더욱 안 되는 일이야. 돌아가실 이영인 실장한텐 좀 모진 말이겠지만,
오늘 내일 하는 분 새 어머니로 모셔다가 아버지 병수발 하시는 거 어떻게 봐?
만약 아버지가 그걸로 우리 동정표 모으려고 하면 형은 무조건 나랑 반대편에 서는 거야? 알았지?
수영 : .....
태영 : 에이, 아버진. 사람 모질어지게 왜 하필이면 그렇게 중병을 앓는 사람을......
수영 : 아무것도 확실한 거 없으니까 괜히 넘겨짚고 수선 떨지 마라.
태영 : 가뜩이나 이래저래 머리 아픈데, 아버진 하필.....
이영인 실장님 돌아가시면, 회사장으로 해드려야 할까?
#.21 씬 병원 내 휴게실 정도.(낮)
영인, 은주 차 마시며 앉아있는.
영인 : 몸 상태가 얼마나 엉망인지 모르지만 해줘.
은주 : 너 친구 의료 사고로 매장 시킬 일 있니?
영인 : 네가 직접 하는 것도 아니잖아?
은주 : 산부인과 담당의 내 후배야. 후배 보호 차원에서도 그렇게 위험한 수술 부탁할 수 없어.
영인 : 나 정말 하루하루가 지옥 같단 말이야.
배 속에 아이가 하루하루 커가고 있다는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된다구.
은주 : 몇 주만 기다려보라니까. 몸 상태가 좋아지고 나서 생각해 보자구.
영인 : 그럼 애가 더 커질 거 아냐? 그럼 고통도 더 많이 느낄 거 아니냐구?
은주 : (보는)
영인 : 왜?
은주 : 애 걱정하고 있잖아, 너.
영인 : ......
은주 : 애기가 고통을 느낄까봐, 시간 가는 게 무서운 거구.
영인 : (톤 높여서) 난 사람도 아니니? 이 지지배야.
은주 : (주위 둘러보며) 나 우리 병원에서 꽤 카리스마 있는 닥터거든. 말 좀 가려줘라.
영인 : 몰라, 몰라. 나 머리가 뺑 돌거 같으니까 무조건 수술 스케줄 잡아줘.
그렇게 위험하다면서 내가 아무 병원에 가서 수술해도 좋아?
은주 : 하석호 선배. 괜찮은 남편감 아니니?
영인 : (기가 막혀 보고)
은주 : 세상에 태어나서 네 새끼 하나 낳아보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요즘 출산율 저하가 사회 문제다. 사회에 아무 공헌 한 거 없으면, 이참에 그거라도 해보면 어떻겠냐구?
영인 : 내가 출산율 높여주자고 이 나이에 애 낳아야 네 속이 시원하겠냐?
은주 : 너 여고 때 우리 반 꼴등 했다고 담임이 풀 죽어 있으니까
다음 시험에서 작정하고 컨닝 페이퍼 돌려서 반성적 끌어올렸던 정의파잖아?
그 정의감 사회를 위해서 한번 발휘해봐라.
영인 : 이 지지배가 무슨 궤변이야. 컨닝 페이퍼 돌리는 거랑 애 낳는 거랑 같니? 같아?
그땐 열여덟 살이었고, 지금은 50이야, 50.
50에 사회 정의 실현하자구 애 낳는 또라이가 세상에 어딨냐?
#.22 씬. 길.(밤)
말순, 장기 음주 단속하고 있는. 태영, 차에서 보고.
태영 : 무슨 음주 단속을 매일처럼 하냐? 벌금 걷어내자고 작정을 했구나, 했어.
(그러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핸드폰을 들어 귀에 대는)
말순 : (핸드폰 들고 유유히 앞으로 다가오는 태영의 차를 보는) 아주, 작정을 하셨군.
장기 : 보통 강심장은 아닌데요.
아니면 국가를 위해서 내 한 몸 희생하자는 애국심에 불타는 이상 성격의 소유자거나.
말순 : (다가서면)
태영 : (핸드폰 귀에 대고 차창 내리며 올려다보는) 불까요?
말순 : 면허증 제시해주십쇼.
태영 : 왜요?
말순 : 운전 중에 핸드폰 사용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태영 : 아, 이거요. 저 핸드폰 사용 안했는데요.
말순 : 지금 들고 계시지 않습니까?
태영 : 그냥 들고 있는 건데요.
말순 : 지금 장난 하십니까?
태영 : 장난 안하는데요. (핸드폰 말순에게 내밀며) 확인해보세요, 통화 내역 있나?
말순 : (기가 막혀서 핸드폰 받아들고 눌러보면, 통화 중이 아니었다는 거 확인하고 태영을 노려보는)
통화도 안하시면서 핸드폰은 왜 귀에 대고 계셨습니까?
태영 : 내 맘인데요. 통화 안하고 핸드폰 귀에 대고 있는 것도 불법입니까?
(목 내밀고 장기에게) 불법인 겁니까?
장기 : 불법 아닙니다.
태영 : (말순에게) 어쩌신대요? 오늘도 한 껀 했다 싶으셨을 텐데.
(말순이 들고 있는 음주 단속기 끌어다 확 부는) 됐죠?
말순 : (왠지 당했다 싶어 약이 오르고)
태영 : (휘파람 불면서 지나가려고 하면)
말순 : (노려보다가, 눈이 확 커지는. 호루라기 불면서 따라와 태영의 차 두드리고)
태영 : 아, 왜 또?
말순 :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뒷 미등이 고장이시네요. 도로교통법 제48조 안전운전의무위반이십니다.
태영 : (욱 하는 느낌으로 눈 감고. 차에서 내리는) 어디? 어디?
(정말 뒷 미등이 켜져 있지 않다. 미친다 정말 하는 느낌으로) 이게 언제부터 이런 거야.
말순 : 저번에 접촉 사고 나셨을 때 고장 나셨나보네요. 면허증 제시해주십쇼.
태영 : 아니, 앞으로 들이받았는데 왜 뒷미등이 나가냐구.
말순 : 왜?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경우가 있죠.
핸드폰 사용하고 계신 것만 안 봤어도 음주 단속만 하고 보내드렸을 텐데, 참 애석한 일입니다.
시간 경과.
태영 : (벌금 딱지 확 구겨서 옆 자리에 던져버리며) 내가 끊은 딱지로 경찰서 하나 짓겠다 니들.
룸밀러로 보면, 말순 벌금 스티커 들고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다.
태영 : 아주, 좋아 죽네, 좋아 죽어. 내가 저거하고 살풀이를 하든가 해야지.
말순 : (태영의 멀어지는 차 보면서) 그러게 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
장기 : 저는요. 조금 무서워지려고 하는 거 있죠 선배.
말순 : 뭐가.
장기 : 이 악연의 끝은 어디일까 하고. 살인 사건으로 끝나는 건 아닐까하고.
말순 : 내가 설마 저런 인간을 죽이기야 하겠냐? 손 더럽힐 일도 없는데.
장기 : 저는요, 저 양반이 어느 날 갑자기 뛰어내려서
음주단속기로 선배의 머리를 내리치는 장면이 머리 속을 확 스쳐가거든요.
말순 : 걱정마라. 나 머리 무지 딱딱하다.
저 인간 음주 단속기 하나 박살내고 공무 집행 방해로 들어가는 거는 거다, 그날.
장기 : 인생 낙천적으로 사셔서 정말 마음은 편하시겠어요.
#.23 씬. 영인의 아파트 현관 앞.(밤)
초인종 누르는 석호. (작은 봉투 들고 있는)
문 여는 영인.
영인 : 웬일이야?
석호 : 은주씨한테 전화 받았어.
영인 : 그 지지배는 왜 시키지 않는 짓은 하고 그래. (그러면서도 비켜서는)
석호 : (들어서는)
#.24 씬. 영인의 아파트 거실.(밤)
석호, 영인 들어오고.
영인 : 회사 일 때문에 정신없을 텐데 뭐 하러 와?
석호 : 네가 불안해 보인다고 좀 진정 시켜주라고 하드라.
영인 : 오지랖도 넓어 그 지지배는.
석호 : 녹차 사왔는데 따뜻하게 타줄게. 그럼 마음이 좀 가라앉을 거야. (봉투 들고 부엌 쪽으로 움직이는)
영인 : .....
#.25 씬. 만기의 방.(밤)
만기, 책을 보면서 바둑을 혼자 두고 있으면. 동동, 잠들어 있고.
태영, 문 여는.
태영 : 다녀왔습니다, 할아버지.
만기 : 오냐.
태영 : (들어와 앉으며, 잠든 동동을 보는) 이 녀석 아프다면서요?
만기 : 쌍화탕 데워 먹였으니 땀 푹 내고 자고 나면 개운해질게다.
태영 : 젊은 놈이 왜 아프고 그래. (동동의 이마를 짚어보고) 이거 식은 땀 아닐까요?
만기 : 좀 지켜보자꾸나. 지도 한 고비 넘기느라 그러는 걸거니.
태영 마음이 아프고. 단아 문 여는.
단아 : 작은 오빠, 상 차렸는데.
태영 : 응. 알았다.
#.26 씬. 태영의 방.(밤)
태영, 앞에 밥상 놓아주고 나가려고 하는 단아.
태영 : 나 동동이 놈 아파서 속상하다.
단아 : (보고)
태영 : 밥이 안 넘어갈 거 같다구.
단아 : 그냥 가져 나가라구?
태영 : 앞에 좀 앉아 있어 달라구.
단아 : (앞에 앉는)
태영 : (수저에 밥 퍼서 단아 앞에 내미는)
단아 : 뭐?
태영 : (눈으로 생선 구운 거 가리키는)
단아 : (기가 막힌)
태영 : 동동 놈 엄마가 생선 살 발라서 올려주곤 했었단 말야.
단아 : 동동이 아파서 속상하단 사람이 지금 이런 어리광 부리고 싶어?
태영 : 그럼 내가 누구한테 치대냐?
단아 : (기가 막히지만, 하는 수 없이 생선 살 손으로 발라서 태영의 수저 위에 올려주는)
태영 : 네가 내 누나로 태어났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렇지?
단아 : 지금도 누나 같거든.
태영 : 하긴, 그렇다, 그지?
단아 : 대체 작은 오빠는 언제 철이 들 거야?
태영 : 참, 단아야.
단아 : 왜?
태영 : 우리 아버지 가여워서 어쩌냐?
단아 : (보고) 무슨 소리야?
태영 : 이영인 실장님하고 결혼하시겠다고 했을 땐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나서 얄미워 죽을 거 같았는데.
단아 : 같았는데?
태영 : 속사정을 알고 나니까 마음이 짠하다. 내가.
단아 : 무슨 속사정? (혹시 알고 있나 싶은 느낌으로)
태영 : 이영인 실장님.....아무래도 오래 못사실 거 같다.
단아 : 뭐?
태영 : 불치병이신 거 같아.
단아 :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태영 : 요즘 병원에 자주 다니신대잖냐? 얼마 전엔 병원에 입원도 하셨었다고 하구.
단아 : .....
태영 : 어쩌냐, 우리 아버지. 가뜩이나 인생에 낙이 없으신 분인데.
이영인 실장님 돌아가시면 마음 아파서 어떻게 보냐구. 우리 새어머니가 되는 건 좀 그랬지만,
그냥 두 분이 아무도 모르게 연애나 하고 지내셨으면 싶었던 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거든.
아, 진짜 그 양반은 깡은 혼자 다 있는 것처럼 그러면서 왜 아프고 그러신대.
#.27 씬. 영인의 아파트 거실.(밤)
석호, 영인 녹차를 마시고 있는.
석호 : (놀라서 보는) 단아가 찾아왔었단 말이야?
영인 : (녹차잔 내려놓으면서) 알고 있드라. 나 애 가진 거.
석호 : (당황하고) 어떻게?
영인 : 상 치룰 때, 우리 둘이 얘기하는 거 들었대.
석호 : .....
영인 : 창피하지?
석호 : 영인이 너 민망할까봐 결혼 전까진 비밀로 하려고 했었는데.....
영인 : 참 곱더라, 선배 딸. 요즘 젊은 아가씨 같지 않은 게. 잘 키웠어.
석호 : .....
영인 : 하과장이 낫살 먹은 어른들이 그러시면 되겠냐고 깐죽일 땐,
확 꼭지 돌아서 진짜 네 새 엄마 되서 물 한번 먹여줄까 그런 마음이 살짝 들었었는데.
석호 : (보고)
영인 : 꼭지 돌아서. 근데, 선배 딸 보고나선 절대 결혼 같은 건 하지 말아야겠구나 싶드라.
석호 : 무슨 말이야?
영인 : 선배 집안사람이라는 게 어떤 건지 그 아가씨 보니까 그냥 느껴지드라구.
저런 아가씨가 살고 있는 집안에 들어가서 물 흐리면 안 되겠구나.
그럼 정말 천벌 받겠구나, 그래지더란 말이야.
석호 : 별 이상한 생각도 다 한다. 단아가 영인이한테 와서 결혼하지 말라고 하진 않았을 텐데.
영인 : 그러니까. 하과장하곤 날 대하는 태도부터가 다르더라구.
내가 재수 없게 구는데도, 놀라긴 하면서도 아버지가 선택하신 분이니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야.
석호 : 그 녀석은 어떻게 했을지는 안 봐도 짐작이 돼.
영인 : 회장님 뵈면서도 그런 느낌 들었지만, 선배 딸 보니까 그 느낌이 더 확실해지더라.
난 선배랑 같은 울타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아니란 거.
석호 : (아득한 눈길로 보는)
#.28 씬. 주유소.(밤)
수영의 차 다가오는.
다른 차 앞에서 영수증 건네고, 물 한통 건네주고 돌아서는 유니폼 차림의 여자, 진아다.
진아 : (수영을 보고, 놀라서 뛰어오는)
수영 : (차창을 내리다 진아를 보고 약간 놀라는) 여기서 일해요?
진아 : 네, 아르바이트 바꿨어요.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자꾸 만나지는 거 보면, 우리 인연이 약간 있긴 있나 봐요.
수영 : 가득 넣어줘요.
진아 : 저, 바쁘세요?
#.29 씬. 주유소 내. (밤)
수영의 차, 한쪽에 서있고.
수영, 한 켠에 서있으면. 진아, 캔 음료수 들고 뛰어와 건넨다.
진아 : 서비스예요.
수영 : (미소 지으며 받는, 둘러보고) 근데, 혼자 일해요?
진아 : 사장님은 집에 일이 있으셔서 일찍 들어가셨고, 같이 일하는 알바생은 친구가 와서 잠깐 나갔어요.
수영 : 밤에 혼자 일하려면 힘들겠네요.
진아 : 여긴 그래도 안전한 편이예요. 주유소 습격 사건 같은 건 영화에서나 있는 일이잖아요.
예전에 편의점에서 알바할 때 저 강도 두 번이나 만났어요.
수영 : (보고)
진아 : 한번은 정말 목에 칼까지 들이댄 적 있었다니까요.
수영 : 많이 놀랐겠네.
진아 : 그때 순찰차가 편의점 앞에 와서 섰으니 망정이지 진짜 저승 구경 할 뻔 했다니까요.
수영 : 어린 아가씬데 험한 일 많이 겪었네요.
진아 : 고시원에 살 땐, 불 난 적도 있어요. 3층에서 사다리로 내려오다가 팔목 금 간 적도 있는데.
수영 : (희한하다는 느낌으로 보는)
진아 : 진짜 파란만장하죠?
수영 : 무슨 무협지 보는 거 같네요.
그러는데, 동시에 차가 세 대나 들어오는.
진아 : 어머, 왜 갑자기 손님이 밀려들지. (진아 뛰어가는데)
수영 :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어서 차 옆으로 다가가는)
진아 : 괜찮아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수영 : (다른 차로 다가가서) 잠깐만 기다려주십쇼. 금방 넣어드리겠습니다.
(진아에게) 음료수 어디서 가져오면 되는 거예요?
진아 : 네?
수영 : 기다리시는 동안 드시고 계시라구....
진아 : (참 착한 아저씨다 하는 느낌으로) 저 사무실 앞에 냉장고에서 꺼내면 되는데.
정말 저 혼자 할 수 있는데.....
인서트 느낌으로. 진아 옆에서 진아가 주유 하는 거 보고 있는 수영.
다른 차에 주유하는 수영. 어느새 양복 윗저고리 벗어두고 와이셔츠 팔 걷어 올린채.
진아 : (주유하면서 다른 차에 주유하고 있는 수영을 보면서) 오늘따라 밤에 왜 이렇게 손님이 오는지 모르겠네요.
알바하는 애가 밤엔 손님 없다고 했는데. 금방 친구 보내고 온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안 오지.
수영 : (다른 차에서 카드 받아들고 진아 옆으로 오는) 이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예요?
#.30 씬. 석호의 방.(밤)
석호, 앉아서 생각에 잠겨있는데.
태영E : 아버지?
석호 : 그래.
태영 : (문 여는) 아직 잠자리에 안 드셨죠?
석호 : 왜 그러냐?
태영 : 저랑 술 한 잔 하실래요?
석호 : .....
#.31 씬. 마당 정자.(밤)
석호, 태영, 술을 마시고 있다.
태영 : (술잔을 내려놓고 갑자기 석호의 손을 와락 잡으며) 아버지.
석호 : (당황해서) 왜, 왜 그러냐?
태영 : 왜 하필.....왜 하필....
석호 : 무슨 일 있는 게냐?
태영 : (어느새 눈물까지 흘린다) 사랑을 하시려거든 좀 건강한 분하고 하시지....
석호 : (얘가 무슨 소린가 하는)
태영 : 저 정말 속상해서 미치겠어요. 울 엄마 생각하면, 아버지 이영인 실장님하고 연애하는 거 정말 싫거든요.
울 엄마가 아버지한테 어떻게 하셨는지, 아버지, 아시죠? 울 엄마한테 아버지 하늘이셨잖아요?
아버지 그림자로 한 세상 살다 가신 가여운 분이잖아요. 울엄마.
솔직히요, 아버지. 울엄마하고 이영인 실장님하고 비교나 되요?
이영인 실장님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거 그거 다 화장발이예요.
근사해 보이는 거요? 그거 다 옷발이에요, 옷발.
석호 :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
태영 : 우리 엄만 별당 아씨 그 자체셨잖아요. 우아한 자태에, 고고한 성품하며,
우리 단아가 엄마 그대로잖아요.
단아, 과일 안주를 가지고 오다가 놀라는.
단아 : 작은 오빠? 뭐해?
태영 : 단아야. 그지? 울엄마가 이영인 실장님보다 훨씬 이뻤지? 그지?
단아 : 진짜, 왜 그래? 작은 오빠? 어떻게 술 한 잔만 들어가면 바로 주정이야.
태영 : 야, 야, 주정은 고모 할머니 이름이지.
단아 : 안되겠다, 작은 오빠, 일어나. (태영을 억지로 잡아 일으키는)
태영 : 난 아버지가 가여워서 정말 미치겠다.
단아 : 됐어, 됐다구.
태영 : 아버지, (단아에게 끌려가면서) 아버지. 절대 절망하시면 안돼요?
아버지한텐 우리가 있잖아요. 힘내세요, 아버지. 네, 힘내시는 거예요, 아버지.
석호 : (무슨 말인지 정말 모르겠다)
#.32 씬. 태영의 방.(밤)
태영, 끌어다 눕히는 단아.
단아 : 진짜 작은 오빠 주책 여러 가지로 떤다.
태영 : (단아 무릎 끌어안고 펑펑 우는 느낌으로) 나 이제 이영인 실장님 미워하지 않을 거다.
그분도 생각해보면 진짜 가엾지 않냐?
단아 : 난 진짜 작은 오빠가 가엾다.
#.33 씬. 석호의 방.(밤)
석호, 잠옷으로 갈아입고 앉으면,
단아, 물과 컵 쟁반에 받쳐 들고 들어오는.
석호 : 태영이가 왜 저러는 거냐?
단아 : 이영인 실장님이 중병으로 돌아가실 거로 알아요.
석호 : (어이가 없어서 보고)
단아 : 회사에서 이영인 실장님이 병원에 다니신다는 말을 듣고 혼자 지레 짐작을 했나봐요.
석호 : 저 놈도 참....
단아 : 욕 보셨어요. 주무세요.
석호 : 너.....알고 있다면서?
단아 : .....
석호 : 그 사람 만났다고?
단아 : 주제넘다는 거 알면서도, 아버지께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 죄송해요.
석호 : 너한테 에비로 낯이 없구나.
단아 : 설득...해보세요, 아버지. 겉은 강해보이시지만 속은 여린 분 같았어요.
석호 : 아마 힘들 거 같구나.
단아 : (보면)
석호 : 살아온 방식이 있어서, 아무래도 겁이 나는 거 같다. 우리 집안사람이 된다는 게.
단아 : 아버지?
석호 : (보면)
단아 : 나중에 후회하시면 안 되시잖아요? 할 수 있는 데까지 안 해 봤다구.
그러니까 할 수 있는 거 다 해보세요. 무릎이라도 꿇고 사정 하셔야 하면.....그것도 해보세요.
그래야 하는 거잖아요. 사랑하시면.....
석호 : 그래보마.
단아 : 주무세요. (인사하고 나가는)
석호 : .....
#.34 씬. 주유소.(밤)
한숨 돌리고 한 켠에 와서 서는 진아와 수영.
진아 : 제 알바비 다 드려야겠어요.
수영 : (미소 짓고) 저 고급 인력이예요.
진아 : 지금 재시는 거예요?
수영 : 네.
진아 : (킥 웃고)
수영 : (보면)
진아 : 농담 같은 거 절대 못하실 분 같아서요.
수영 : 농담 아니예요. 나 월급 아주 센 사람이예요.
진아 : 진지하게 웃기시니까 더 재밌다. 고생하셨어요. 그만 가보세요.
수영 : 또 손님 밀려들면 혼자 어떡하려구요?
진아 : 이젠 밤이 늦어서 그렇게 밀려들지 않을 거예요. 오늘은 진짜 이상한 밤이에요.
예전에도 주유소에서 알바한 적 있었는데, 오늘 같은 날은 없었거든요.
아저씨한테 신세질 일 만들려고 하느님이 아주 작정 하셨나 봐요.
퇴근하고 피곤하실텐데 괜히 저 때문에 고생하셨어요. 어서 가세요.
수영 : (마음이 놓이지 않고)
진아 : 정말 괜찮아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 뛰어오고.
남자 : 어, 누나 진짜 미안해요. 친구 자식이 얼마나 붙잡는지.
진아 : (수영에게) 왔네요. 어서 가세요.
수영, 차에 올라타고 있는. 진아 그 옆에서.
진아 : 차타고 돌아다시는 일 많으세요?
수영 : 사무실에서 일할 때가 많아서 별로....
진아 : 네. 기름 빨리 떨어지면 자주 들리실 텐데.
수영 : (미소 짓고)
진아 : 그럼 제가 서비스 음료 잔뜩 챙겨드릴 수 있는데.
수영 : 수고해요. (차 떠나는)
진아 : (그런 수영의 차를 바라보고 손 흔드는)
#.35 씬. 말순의 집.(새벽)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진아.
말순 : (자다가 눈 뜨고) 몇 시니?
진아 : 새벽예요.
말순 : (자명종 시계 들어보면) 다섯 시 넘었네.
진아 : 더 자요, 언니.
말순 : 다른 아르바이트 알아봐라. 밤새 일하는 거 그거 골 빠지는 짓이다.
그러다 나이 들면 약 값이 더 들어가.
진아 : 여기 저기 이력서는 넣고 있어요.
말순 : 나도 알아보고는 있는데, 워낙 경기가 안 좋아서 그런가 새로 채용하는 데가 많지 않드라.
진아 : (냉장고에서 물 꺼내 마시면서) 웬만한 자리엔 저 명함도 못 내미는 걸요 뭐.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말순 : 왜 상고 갈 생각은 안 해봤니?
진아 : 꼴에 제가 꿈이 컸거든요. 어떻게든 대학에 가보려고 했는데, 그게 쉽지 않드라구요.
말순 : 언 놈하고 사랑에 빠져서 뒷바라지 하느라 못간 건 아니구?
진아 : (슬프게 미소 짓는)
말순 : 네 다이어리 뒤지려고 뒤진 건 아니구. 잘못하다 떨어뜨렸는데
거기서 너 대학 합격 통지서 떨어지더라.
누가 그러는데 사람 착한 뒤끝은 있다드라. 그러니까 너 말년 운은 좋을 거야.
진아 : 그것도 몰라요. 나보다 무지하게 더 착해 보이는 사람인데.
나보다 더 비참하게 당하는 거 봤거든요.
말순 : 원래 인생이 끼리끼리 얽혀 살아가는 거거든. (하품하면서 돌아눕는)
진아 : (혼잣말로) 간통한 아내 앞에서 무릎까지 꿇더라구요.
#.36 씬. 만기의 방.(밤)
만기, 잠들어 있는데, 동동의 울음소리. 아주 작은 소리로 흐느끼는.
만기 : (몸을 일으키는) 많이 아프냐?
동동 : (울음소리 억지로 참는) 아니요. 아까보단 안 아파요.
만기 : (다가앉으며, 머리 만져보는) 그래, 열은 많이 내렸구나.
동동 : 할아버지?
만기 : 오냐?
동동 : 울엄마....이사 갔대요, 이젠 거기 안산대요.
만기 : .....
동동 : 그래서....여기가....여기가.....
(가슴을 가르키며) 머리는 안 아픈데 여기가.....너무....너무.....아파요.
만기 : (동동의 가슴을 쓸어주면서) 그래. 안다. 그렇게 많이 아프고 나면 여기가 단단해질게다.
그럼, 힘든 일이 생겨도 조금씩 덜 아프게 되는 거란다.
#.37 씬. 강석의 집 전경.(아침)
#.38 씬. 강석의 집 식당.(아침)
천갑, 영자, 강석 식사하고 있는. 아줌마 들어오는.
아줌마 : 혜주는 나중에 먹겠다네요.
천갑 : 그렇게 식구들하고 한 상에서 먹기 싫으면 아예 나가 살라고 해.
영자 : 어제 오늘 일도 아닌데 왜 또 발끈 하고 그래요?
천갑 : 식구라는 게 한 상에서 먹고 그래야 정도 붙는 거지.
그 놈의 자식은 아주 식구들한테 정 떼려고 작정한 놈처럼 굴잖아.
영자 : 저도 시집가서 남의 집 사람 되면 친정 식구 귀한 거 알게 될 테니까 모른 척하고 기다려요.
(강석에게) 아침 너무 많이 먹지 마. 나가서 점심 먹으려면.
천갑 : 사람이 밥심으로 사는 건데, 왜 먹는 걸 말려.
영자 : 얘, 모르는 사람하곤 밥 잘 못 먹잖아요.
천갑 : 오늘이 그날인가?
영자 : 어젯밤에 말 할 땐 뭐 들었어요?
천갑 : 연속극 보고 있었잖아.
영자 : 미술관에서 잠깐 그림 보고 점심 먹으러 가는 거야. 알았지?
강석 : 네.
천갑 : 미술관은 또 뭐야?
영자 : 어젯밤에 다 얘기 했잖아요?
천갑 : 연속극 보고 있었잖아?
영자 : 아줌씨도 아니고 연속극만 하면 정신이 없으니.
요즘은 촌스럽게 호텔 커피숍 같은데서 안 만난대요.
키가 얼만지, 스타일은 어떤지, 문화적인 취향은 고급인지 그런 거 탐...탐....사...새...
강석 : (미소 지으며) 탐색이요.
영자 : 그래, 그거, 탐색. 그거 하려면 그런데서 만나는 게 최고라잖아요.
천갑 : 최선생이 그래?
영자 : 그럼 내가 누구한테서 듣겠어요.
아가씨가 쿠레이션인가 뭔가 미술관에서 그거 하는 아가씨라니까....
강석 : 큐레이터요.
영자 : 그래, 그거. 그림은 잘 알거야. 모른다고 너무 기죽지 말고.
천갑 : 자기 아들을 저렇게 몰라. 저 놈이 그림 좀 모른다고 기죽을 놈이야.
영자 : 워낙 고고한 학자 집안 아가씨잖아요.
천갑 : 고고는 얼어 죽을. 배운 놈들이 룸싸롱 애들한테는 더 지저분한 짓 많이 하드라.
영자 : 당신은 왜 툭하면 룸싸롱 애들 얘긴 해요?
그리고 당신 오늘 나하고 인사동 최선생한테 가기로 한 거 알죠?
물건 좋은 거 나왔다니까 가서 봅시다.
천갑 : 오늘 나 골프 나가기로 했는데.
영자 : 어젯밤엔 고개 끄덕였잖아요?
천갑 : 연속극 보고 있었잖아.
#.39 씬. 미술관.(낮)
강석, 그림 앞에 서있는. 다가오는 도영.
도영 : 이강석씨?
강석 : (돌아보는)
도영 : (고개 까딱하면서) 신도영입니다.
강석 : 이강석입니다.
그림을 보고 있는 강석과 도영.
도영 : 그림 좋아하세요?
강석 : 잘 모릅니다.
도영 : .....
그림 앞을 걸어가고 있는 강석과 도영.
도영 : 원래 말씀이 없으신가 봐요?
강석 : 네.
#.40 씬. 레스토랑.(낮)
강석, 도영 식사하고 있는.
강석 : 전 결혼하면 부모님을 모시고 한 집에 살아야 합니다.
도영 : (어색한 미소 지으며) 처음 만났는데, 그런 말은 좀 빠르지 않나요?
강석 : 난 섬세한 인간은 못됩니다. 우리 같은 만남, 어차피 결혼을 전제로 한 탐색전 아닌가요?
그럼 솔직히 자기가 가지고 있는 패를 먼저 까는 게 시간 낭비 안하는 일인 거 같은데요.
도영 : 직설적이시네요?
강석 : 그리고 여자가 직업을 가지고 있는 거, 저는 원치 않습니다.
저한테 필요한 사람은 가정을 조용히 지켜줄 참한 아내이자, 공손한 며느리이구요.
도영 : 말씀이 없는 편이라고 하시더니.
강석 : 할 말은 합니다.
도영 : 좀 남다른 집안이라고 들었는데,
제가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과는 어딘가 모르게 좀 다르시네요.
강석 : (서늘해지는, 묘한 미소를 짓고) 졸부 집안이라고 들었는데, 역시 좀 천박하다 그건가요?
도영 : 오해하셨다면 사과하죠.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왠지 좀 절 거칠게 대하시는 게 아닌가 해서.
강석 :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습니다. 신도영씨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다 이렇게 대합니다.
도영 : 요즘 젊은 여자들 거친 남자한테 매력을 느낀다고 하던데.
전 학자이신 부모님 밑에서 자라 그런지 예의 없는 사람한테는 경계심부터 갖게 돼요.
강석 : 제가 무례하게 보이시나 보군요?
도영 : 저 이런 자리 쉽게 나오는 사람 아니에요. 중간에 서신 분이 워낙 저희 어머님께 보채셔서 어렵게 나왔어요.
그러니 좀 더 예의를 갖춰주시면 어떨까요?
강석 : 미안합니다. 이런 자리에 어렵게 나오신 분한테 제가 너무 무례하게 굴었다면 용서해주시죠.
도영 : 비꼬시는 거 같이 들리네요.
강석 : 우리 말 장난 그만하죠.
도영 : (당황해서 보고)
강석 : 고고한 학자 집안의 귀한 따님께서 세상이 다 아는 졸부 집안 아들놈을 어렵게 만나러 나오셨을 때는
상품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서셔서 일텐데, 결혼을 하고나면 아버님이 출마하시는데
얼마나 어떤 도움을 드리면 되는 건가요? 그것만 합의가 되면 큰 문제없을 거 같은데요.
도영 : 정말 무례하시군요. 저희 집에선 천하게 돈 얘기 입에 올리는 일 절대 없어요.
강석 : 그 천한 돈이 제 상품 가치의 전부일 텐데, 그럼 대체 이런 자리 왜 나오신 겁니까?
도영 : 이래서 여기 나오는 거 그렇게 꺼려했던 건데,
정말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끼리는 만나면 안 되는 거였네요.
강석 : 다른 환경이라. (싸늘하게 미소 지으며) 이봐요, 신도영씨.
내가 솔직하게 패를 깠으면 그쪽도 그래 주는 게 예의라는 겁니다.
다른 환경이라는 거 뻔히 알고 나왔을 때는 나한테 기대하는 게 있었을 거 아냐?
그럼 그렇다고 하면 얘기가 쉽게 진행 되는 거구.
도영 : 이강석씨? 왜 함부로 말을 놓는 거죠? 내가 댁한테 그렇게 쉬운 사람으로 보여요?
돈만 있는 집 졸부 집 아들 티가 그렇게 내고 싶은 건가요?
쓰레기로 돈 모은 아버지 밑에서 보고 배운 게 정말 너무 없나 봐요?
강석 : 머리 나쁜 아가씨군. 쉽게 가자고 하는데 굳이 어렵게 돌아가자고 하는 거 보니.
나 안 예쁜 여잔 참아줄 수 있는데, 머리 나쁘면서 좋은 척 하는 여잔 역겨워서 못 봐주거든.
그리고 당신 수술 한 것도 너무 티나. 천박해보이잖아. (일어나서 걸어가는)
계산대 앞.
강석, 카드로 계산하고 있는, 도영 화가 나서 노려보고 뒤로 걸어가려고 하면.
직원 : 저...손님?
도영 : 저요?
직원 : (강석을 보면서) 한분만 계산 하셨는데요.
도영 : (기가 막히고)
강석 : (빙긋이 웃으며) 쓰레기로 어렵게 악착같이 번 돈이라 쓰레기 버리듯 쓰는 건 싫거든.
(유유히 걸어 나가는)
#.41 씬. 병원 중환자실 앞.(낮)
단아, 찬합을 싼 보자기 들고 걸어오는데.
이씨, 현규와 마주 서있다.
단아 : (다가가고) 네가 웬일이야?
현규 : 볼 일 있어서요.
이씨 : (봉투를 보이면서) 이 학생이 환자 간호하려면 체력이 좋아야 한다고 이렇게 영양제를 사왔지 뭡니까?
단아 : (현규를 보면)
이씨 : 근데 교수님은 또 어쩐 일로?
단아 : 네, 병원밥이 부실할 거 같아서 도시락을 좀 싸왔어요.
이씨 : 아니, 다들 정말 왜 이러신대요. 그렇지 않아도 고마워서 얼굴도 못 들겠는 사람한테....
#.42 씬. 병원 앞 길.(낮)
단아, 현규 걸어오는.
단아 : 무슨 돈이 있다고 영양제까지 사와?
현규 : 우리 엄마 건강 염려증 환자시거든요. 우리 엄마가 모아들인 약으로 건강원 하난 거뜬히 차릴 걸요.
하나 들고 나왔죠 뭐. 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요.
단아 : (흘겨보는) 왜 자꾸 어머니 약은 훔쳐내?
현규 : 설마 신고야 하시겠어요?
단아 : (어쩔 수 없이 미소 짓는)
현규 :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구. 짝사랑 삼년에 눈치만 는 거 있죠.
어떻게 해야 이쁨 받겠다, 계산이 딱딱 서지 뭐예요.
#.43 씬. 희원 일각.(낮)
단아, 현규 걸어가는.
현규 : 야, 서울 근처에 이런 데가 다 있었네. 근사하다.
단아 : (걸음을 멈추는) 여기서 그 사람한테 청혼을 받았어.
현규 : (굳어지고)
단아 : 오래 전부터 그 사람하고 결혼 하게 될 거란 건 알았지만
막상 그 사람이 나와 결혼 해주겠니? 했을 때. 눈물이 나드라.
현규 : ......
단아 : 가끔 여기 와서 그날 생각을 해.
현규 : 잊어야 하는 거잖아요. 이젠 이 세상이 사람이 아닌데.
단아 : 다들 그렇게 말해. 이젠 그만 보내 주라구.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다구.
그런데 말이야. 그 사람이 떠나던 그날. 나도 이미 죽은 거야.
현규 : (보고)
단아 : 난 그냥.....시간이 흘러가 주길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현규 : .....
단아 :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없다는 게..... 볼 수 없는데도 잊혀지지 않고...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게....
가끔은 서글프고....아파.
현규 : .....
단아 : 네가 그 사람을 많이 닮았다는 거.....그래서 가끔은 그 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거 같은 착각에 빠진다는 거.
그래서 그날 널 그런 눈으로 봤다는 거. 인정할게. 하지만 그 뿐이야.
넌.....그 사람을 너무 많이 닮아서.....내게 가장 큰 고통을 주는 사람일 뿐이야.
현규 : 그렇게라도 의미 있는 거잖아요? 나?
단아 : (보면)
현규 :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고통을 느끼게 한다는 거, 그거 의미 있는 거잖아요?
그럼 살아있는 거잖아요? 그 사람이 죽던 날, 같이 죽은 게 아니라, 살아있는 거잖아요?
단아 : ......
현규 : 그거라도 하고 싶다구요, 난.
단아 : 그래서 더 안돼. 널 볼 때마다, 그 사람이 없다는 걸, 더 아프게 깨달아야 하니까. (돌아서서 걸어가는)
현규 : 그래도 할 수 없어요. 아무리 아프다고 비켜나라고 해도. 나 그건 못해요. 아니, 안 해요.
(고개 숙이며 혼자 중얼거리듯이) 하기도 싫고, 할 수도 없는 걸 어떡하냐구요.
걸어가는 단아와 고개 숙이고 있는 현규.
그 모습을 멀리 나무 밑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 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