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느헤미야 8;1-12, 은혜의 수문 앞 광장 2026. 2. 8.
먼저 본문의 내용입니다. 느혜미야는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과 성벽의 재건을 위한 모든 일정을 마칩니다. 이제 성곽의 문을 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배 공동체의 예배를 위한 경계를 위하여 경비를 정하고 굳건한 예배의 삶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번제를 위한 물이 드나드는 수문 앞 광장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공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자발적으로 모인 이유는 은혜가운데 중건이 되었지만 삶의 현실은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신앙공동체의 소망과는 다르게 신앙의 진보와 풍성함이 없었습니다. 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에 영적으로 갈급했습니다. 그래서 성과 성곽의 중건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예배 공동체의 유지와 하나님의 은혜가 지속되기 위하여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8: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水門)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 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온전히 성과 성벽이 세워진지 일곱 달이 지났는데 스스로 모였습니다. 학사 에스라를 모셔오고 여호와의 말씀을 듣습니다. 왜요? 말씀에 대한 기갈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수문(水門) 앞 광장, 얼마나 멋있습니까? 이름대로 풀이하면 물이 쏟아지는 문 앞 광장입니다. 무슨 물인가요? 제물을 위한 윗물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찾았던 수가성의 우물, 물입니다. 해갈을 위한 생명의 물입니다. 번제에 필요한 물이 들어가고 나가는 수문 앞 광장입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나요? 우리가 마시는 물은 잠시 해갈이 되지만 또 다시 갈증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수로 오신 분이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입니다. 수문을 드나드는 물은 에스겔을 통하여 보여주신 성전 문에서 흘러나오는 물입니다. 발목을 적시고 무릎과 허리를 적시고 나중에는 온 몸이 잠기는 그 물입니다. 겔37;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영혼의 기갈을 해소시키는 물이고 더러움을 씻어내는 물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주시는 영적인 물입니다. 그래서 수문(水門) 앞 광장이 중요합니다, 오늘 이 예배의 자리가 수문 앞 광장입니다.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장소이며 생명을 공급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수문 앞 광장에서의 은혜가 중요합니다. 이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은혜입니다. 수문 앞 광장과 마가의 다락방은 말씀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가 동시에 나타난 은혜의 자리입니다. 오순절은 기도를 통한 성령의 역사이었는데, 수문 앞 광장에서의 은혜도 말씀과 회개를 통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이런 저런 은혜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 앞에 경외하는 자세가 되며, 깨닫고 그 뜻대로 행하게 됩니다. 오늘 성전과 성곽의 중건이 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배의 공동체가 다시 회복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사모하게 되는데 남자와 여자, 남종과 여종과 선포되는 말씀을 알아들을 만한 사람은 다 모였습니다. 이 때 학사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펼 때에 다 감격하여 일어났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말씀을 낭독할 때에 그 율법의 말씀을 백성들이 감격하여 들었습니다. 새벽부터 12시까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더하여 레위 사람들의 가르침과 제사장들을 통하여 말씀의 내용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중에 통회의 역사가 나타났고, 회개의 기도를 합니다. 9절에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 지라. 다 울었습니다. 구원의 즐거움을 서로 나누면서 기쁨과 함께 울었습니다. 10절에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힘이고 능력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은 힘과 능력이 되었습니다. 그 능력과 힘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경험하는 초막절을 지킵니다. 이 초막절의 행사는 여호수아 이래 이때까지 없었고 초막절의 은혜를 몰랐으나 수문 앞 광장에서 새로운 광야생활을 경험합니다. 개인을 뛰어 넘어 9;1-4에 민족적 회개운동으로 번집니다. 수문 앞 광장에서의 은혜가 민족을 바꾸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2026년의 현실 앞에 갈급함과 사모함이 있습니까? 계속되어져야만 하는 은혜 때문에 고민하십니까? 수문 앞 광장에 있어야 하고 수문 앞 광장에 모여야 합니다. 은혜를 받고 결단하고, 놓인 문제를 풀기 위해서 말씀을 듣고 묵상해야 합니다. 왜요? 이루어진 성전과 성벽의 울타리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하여 은혜를 받는 5가지 단계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것과(1, 3절) 말씀을 경외하는 자세와 태도(5-6절) 말씀을 깨닫게 되고(8-9절)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고(12절) 그 말씀대로 행동하게 됩니다.(16절)
2. 그러면 수문 앞 광장의 은혜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수문 앞 광장에서의 은혜의 상황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무너진 성벽이 52일 만에 중건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들로 채워졌지만 온갖 협박과 음모와 모략과 비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이루어 낸 하나님의 역사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느혜미야를 택정하시고 느혜미야는 성전과 성곽의 중건과 경비를 위한 적임자를 세우고 살만한 도시로 예루살렘의 미래를 굳게 세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 완성되어진 것으로 매듭을 짓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배 공동체입니다. 다 채워지고 만들어 졌지만 그 어떤 갈급함과 사모함 때문에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속에 말씀이 들어가고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고 이스라엘을 바꾸려고 고민하는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결국 칠월 일일 나팔절과 칠월 십오일부터 한 주간 동안 광야와 여호수아가 지켰던 초막절을 지킵니다. 번제와 화목제와 속죄를 드리고, 칠월 첫날은 그 제물 위에 나팔을 불었습니다. 왜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 후에 7월을 신년의 첫 달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팔 절은 장차 오셔서 새로운 역사를 펼쳐 나가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표하고 좁게는 성도의 현재의 삶을 거룩한 생활이 되게 하는 새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 속에서 복음의 나팔이 울려 퍼질 때 죽은 심령들이 살아나고, 병든 육체가 회복되는 새로운 역사입니다. 겔45:17과 46:1-6, 왕이 성전에 나타나 성전 안뜰의 동문을 열고 제사하던 날로서 특별한 날인데, 안식일과 같이 성일로 지켰습니다. 기쁨의 날이기 때문에 금식하지 않고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뿐 아니라 백성들이 먹고 마시며 만찬을 하고, 의식주가 쉽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나누어 주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신양시대의 초대교회의 부흥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오순 절 때의 베드로를 통해서 일어난 부흥의 사건과 같습니다. 사도들은 오늘 레위 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쳤고 먹고 마시며 즐거움을 회복하는 말씀의 공동체와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어떻게요
2-1. 삶의 안정의 은혜 받으면 말씀을 사모하게 됩니다. 1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 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그런데 3절에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사모했으면 이렇게 됩니까? 일제히 모이는 자세와 율법 책을 읽기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울었다는 것은 그만큼 여호와를 사모했다는 증거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7:73절에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사람들과 온 이스라엘과 주어진 말씀에 대한 각자의 소임을 잘 받들어 행할 때 이와 같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모든 직분 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주어진 소명을 잘 감당할 때 역사가 나타난 것은 그 기저에 말씀에 대한 사모함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은 내일에 대한 소망을 줍니다. 일본 삿포로 농과대학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 동상이 유명해진 것은 그 동상의 주인공이 미국 사람이기 때문도 아니고, 세계적인 석학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동상에 적혀 있는 그가 남긴 말 때문입니다. Boys be ambitious! 청년들이여 꿈을 가지라는 이 말 때문에 그 동상이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미국의 식물학자인 윌리엄 클라크(William S. Clack) 박사가 1876년 일본의 초청으로 삿포로 농림학교의 교장으로 초청되었습니다. 그 해 7월 초 클라크 박사와 그 일행(조수 2명, 학생 11명)은 일본 요꼬하마 항구에 도착을 했습니다. 일본 정부에서는 장학관을 내보냈는데 그 장학관은 클라크 박사의 큰 짐을 보고 그 안에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예!! 성경책입니다. 그 장학관은 정색을 하며 정중하게 교수님! 일본에서는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가져가실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을 들은 클라크 박사는 단호하게 그러면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겠소. 순간 장학관은 당황해 하면서 아! 아닙니다. 가지고 가셔도 되지만 강의 시간만큼은 피하시고 강의가 끝난 후에 가르치는 것은 가능합니다. 문책을 당할까봐 엉겁결에 허락을 했습니다. 며칠이 지나 학교는 개교를 했습니다. 개교를 한 후 한 관리가 학교 교칙을 들고 와서 박사님!! 이 교칙대로 운영해 주십시오. 클라크 박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 규칙대로 한다면 신사를 만들 수는 있지만 인간은 만들지 못합니다. 그 후 클라크 박사는 방과 후에 학생들을 모아 놓고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계약기간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고별 연설을 하는데. 그 때 남긴 말이 바로 청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그것만이 살길이다. 당시의 일본의 정치와 경제는 혼란에 빠져 있었고 청소년들은 가치관의 혼란으로 방황할 때이었는데, 클라크 박사에게 배웠던 청년들이 일본의 정신적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그 중에는 일본의 간디로 불리는 우찌무라 간조도 있고 다나까 수상도 나왔습니다.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그 학교 교정에 클라크 박사의 동상이 세워졌고 그 동상에 Boys be ambitious!, 청년들이여 야망을 가지라는 이 말이 기록 되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말이 많은 사람의 인생과 나라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귀에 들려질 때 우리를 먼저 변화시킬 것이고, 공동체가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총독, 느헤미야를 선두로 해서 예루살렘 성이 다시 수축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안정된 삶을 살게 되었는데 그들은 더하여 수문 앞 광장에 스스로 모였습니다. 학사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마음과 심령 속에 무엇인가 있었던 허전함은 은혜와 사모함과 깨달음으로 채워졌습니다. 살리고 회복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다시 세워진 안정과 은혜의 연속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그 공허함을 채우고 회복시킬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대하는 태도인 갈급함입니다. 물이 없어 갈급함도 아니고 양식이 없어서 갈급함이 아닙니다. 영혼을 채울 수 있는 말씀에 대한 갈급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자신과 공동체와 히메지와 나라를 살리는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말씀에 대한 태도와 자세입니다. 5-6절에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일어나 두 손을 들고 아멘으로 응답을 합니다.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여러분, 성경책을 펼 때 모든 백성들이 기립하는 이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찬양할 때 모든 백성들이 손을 들고 아멘으로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경배를 했습니다. 경외하는 찬양의 마음이 어디서 시작되었나요? 말씀 앞에서의 경외하는 자세가 분명했습니다. 말씀을 존중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에스라가 말씀을 펼 때에 백성들은 일제히 일어섰습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6시간을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쉽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 자리에 서서 여섯 시간 동안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암8;11.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주체가 누구입니까?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낸다. 하나님께서 보낸 다는 것이죠? 그 기근은 양식에 대한 기근입니까? 물에 대한 기근입니까? 말씀에 대한 기근입니다. 여러분, 알고 깨달아야 합니다. 갈급함과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과정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어야 합니다. 여러분, 진정한 기쁨은 무너진 성을 다시 수축하는 것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평안하게 사는 것만이 아닙니다.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채울 때에 찾아옵니다. 말씀으로 인한 평안과 부요가 되어야 합니다. 부흥이 무엇입니까? 6절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 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갈급한 심령에 채워지면 입술에서는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에스라가 얼마나 힘이 났을까요? 은혜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영광을 돌렸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듣고 반응이 되어 새롭게 변화되고 회복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3. 말씀을 깨닫는 은혜입니다. 오늘 백성들은 해석이 달라지고 그 해석에 따라 행동을 합니다. 8-9절에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여러분, 해석이 중요해요. 당시의 표현으로 기록이 되었지만 문자적 해석과 함께 영적의미를 지녔습니다. 오늘 에스라가 성경을 낭독하고 레위 사람들은 백성들 곁에서 열심히 성경을 가르쳐서 깨닫게 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지식적으로 잘 아는 것도 좋지만 그 말씀 속에서 감동되어지고 깨달아지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은 성령께서 하십니다. 골1:6에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 바울은 골1:9에서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했다고 말합니다. 왜요? 성령의 감동하심이 없이는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말씀을 절대적으로 인식할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눈물을 흘리고 회개를 했습니다. 감정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기준과 인생의 기준과 삶의 기준이 바뀌었습니다. 왜요? 해석이 되니까요. 여러분, 나름대로의 은혜를 받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 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혜인지, 나름대로 느끼는 은혜인지 알 수가 없을 때가 많아요. 여러분, 예수님이 오병 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다음에 계속 책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요? 왜 주님은 그 상황에서 제자들을 꾸짖기만 했을까요? 풀리지 않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 속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중심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름 자기 자신들은 은혜를 받았다고 하나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은혜이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깨닫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근본 의도를 바로 깨닫는 은혜가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근본 의도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서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고, 어떤 결과도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해석을 했더니 감정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눈물을 쏟아지며 회개가 터져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와 기도와 은혜의 자리에 있을 때마다 원하시고 뜻하신 변화가 일어나고 깨닫는 그래서 주의 뜻을 이루는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4. 말씀 때문에 받은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12절에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 그들의 기준이 바뀌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자기중심에서 이웃 중심으로 그 가치관이 옮겨 갑니다. 나의 것을 나누어줍니다. 여러분,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이스라엘, 그 것도 예루살렘, 고국으로 돌아오자, 성을 수축하고 자신들의 집을 짓고 인생의 낙을 즐겼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12절,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제는 나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누는 기쁨으로 인하여 즐거움이 돌아 왔습니다. 무엇을 나누고 무엇을 전하십니까? 생명의 말씀을 이웃들에게 나누고 원망과 비방과 낙심이 아닌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며 소망과 비전을 공유합니다. 여러분,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행동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나누어야 신앙이 회복이 되고 위대한 주님의 사람이 됩니다. 성령의 역사는 나누는 역사가 있습니다. 부림 절과 오순절도 그렇습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백성들처럼 그런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5. 말씀이 은혜가 되었으면 그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입니다. 말씀이 말씀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말씀 때문에 행함과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16절,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무 가지를 취하여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백성들은 나팔 절만이 아니라 칠월 15일 초막절도 율법의 말씀대로 성대하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17절,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함이 없었습니다. 신앙생활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신앙생활이 되었습니다. 억지가 아니라 간절한 소원에서 이루어집니다. 느8;1절도 간절한 소원이고 13절도 소원입니다. 나팔 절 성회는 강제가 아닌 자발적 부흥운동이었고, 초막절 역시 백성들 스스로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체험과 경험과 은혜입니다. 수문 앞 광장의 은혜는 자원함으로 이루어진 체험과 경험과 역사입니다. 여기까지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은혜 받았지만 더 깊은 은혜를 사모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모하는 레마의 말씀으로 받으면 하나님을 경외함과 동시에 깨달음과 나눔과 행함이 있습니다. 이런 5가지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