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그림은 미국 정치만평가·출판인 유도 케플러(Udo Keppler; 조지프 케플러 주니어; Joseph Keppler Jr., 1872~1956)의 1902년작 〈피리부는 자를 맹종하는 것들(따라쟁이들): 그의 연주에 홀린 세계(Following the piper: his music enchants the world)〉이다(☞ 참조).
그림에 묘사된 피리부는(나팔부는) 자는 미국 자본주의의 급발전기간에, 미국의 이른바 도금시대(鍍金時代; Gilded Age, 1877~1893년)에, 뉴욕시(New York City) 월 스트리트(Wall Street)를 지배한 은행업자·금융재벌·돈쟁이 존 피어펀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 1837~1913)이고, 그의 주둥이에 물린 피리에(나팔에) 적힌 글자들은 인수합병(merger)이다.
뭐, 어쨌거나, 자본주의에 찌든 세계를 계몽하여 뒤엎기는커녕, 그리고 적어도 한반도를 뒤엎기는커녕, 자신조차 뒤엎지 못할 만치 노오오력하지 않아서 미능(未能)하기는커녕 불능하고 어쩌면 아예 무능할 죡변이 적어도 한반도 같은 서식지에서 지질하게라도 연명하려면 채택할 만한 유일한 묘수는, 최선묘수는, “당분간!” 세계를 겨냥한, 한국을 겨냥한, 자신을 겨냥한! 냉소뿐이다.
그러니까 꽤나 저명하답시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이른바 “상앗빛 냉소”마저 당연하게도 일찌감치 간과·묵과·묵살당해버린 한반도에서, 남루하게나 누추하게나 지질하게 용케도 숨쉬며 연명하려는 죡변처럼 얄망궂은 반골의 최선묘수는 세계를 겨냥한 냉소이기는커녕 자본주의의 똥꼬조차 간질이지 못할 만치 무모한 헛지랄 같은 냉소뿐일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따위 말이나 글이 “당분간!” 어쩌면 “몇 시간만!” 술취한 죡변의 티끌만한 근거를 달랑거릴말랑하는 잠언(箴言)이 아닌 잠언(暫言)이나 잠언(睡言)이나 취언(醉言) 중 어느 것이든 무슨 상관이랴.
하물며 비릿하고 얄망궂은 아랫글들이 꼴랑 56억7천만 년 뒤에도 설마, 미륵보살(彌勒菩薩, 마이드레야; Maitreya)이라는 치에게도, 읽힐랑말랑한들 무슨 상관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