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동역자
(마 9:35-10:4)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살다 보면 결정을 하고 선택을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한적한 시골길을 자동차를 타고 가고 있습니다.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노인인데 무척 아파 보입니다. 한 사람은 의사인데 옛날 자신이 아플 때 고쳐준 생명의 은인입니다. 또 한 사람은 평생 반려자가 될 좋은 사람입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구를 태워 주겠습니까? 자동차에는 짐이 많아서 한 사람만 태워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버스는 언제 올지 잘 모릅니다. 어느 기업에서 면접 할 때 질문한 것이라고 합니다. 가장 좋은 점수를 받은 대답은 의사에게 자동차 열쇠를 주고 노인을 태워 병원에 데려가게 하고 자신은 내려서 평생 반려자가 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있으며 버스를 기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것’을 포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는 자기 것입니다. ‘내가’ 운전을 해야 한다, 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포기할 때 모두를 만족하게 할 수 있는 좋은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갈등이 많고 다툼이 많은 세상입니다. 좋은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지만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정부도, 의사단체도 자기가 옳다고만 합니다. 갈등을 겪는 사이에 환자들이 고통 받고 국민이 불안해합니다. 국제 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것을 지키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 전쟁과 갈등을 불러올 뿐입니다. 한 사람을 태워 준다면 두 사람은 고통을 받습니다. 한 사람은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더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우리가 선택을 할 때도 내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약간의 이익을 얻는 결정을 할 수 있지만, 최선의 결정은 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도 ‘세상’을 살리시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을 찾으려고 고민했을 수도 있습니다. 좋은 율법을 주어서 가르치려고도 했습니다. 좋은 교사와 지도자를 택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생명을 살리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선택을 하십니다.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내 것’을 포기하는 것이 모든 생명을 살리는 가장 좋은 선택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 것’을 잘 포기하지 못합니다. 눈앞에서 손해를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기하는 것 없이 더 많은 것을 얻는 방법을 찾으려고 합니다. 노력하지 않고 이익을 얻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려는 욕심입니다. 신앙이 변질되어서 노력하지 않고 축복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물론 노력한다고 합니다. 주일을 지키고, 헌금하고, 금식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고 합니다. 이만큼 노력했으니 하나님은 백 배, 천 배로 축복해 주셔야 한다고 떼를 씁니다. 마치 복권 사서 일등에 당첨되고 싶어 하는 마음과 같습니다. 이런 신앙을 한탕주의 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자본주의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윤을 얻는 것을 미덕이라고 가르칩니다. 적게 투자하고 많이 받으려는 욕심이지요. 누군가 자본주의 논리로 적게 노력해서 많은 이익을 얻었다면, 누군가는 많이 노력했는데 적은 이익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뺏어 자기 이익으로 만든 것입니다. 복권 일등 당첨 된 사람은 좋지만, 낙첨해서 손해를 입은 수많은 사람의 것을 가져간 것입니다. 자본주의 논리는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가장 귀한 소유를 포기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뜻대로 살며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내 것’을 포기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내 것을 포기하는 것은 손해가 아니라, 모두에게 더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을 얻는 유일한 선택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우리가 내 것을 포기하고 가장 귀한 것을 얻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세상에 오신 사명을 감당하십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35절 말씀입니다.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왜 주님은 이 일을 하실까요? 세상의 상황이 주님의 일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상황, 곧 사람들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3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무리를 보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목자 없는 양은 위험합니다. 들짐승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 푸른 풀과 맑은 물을 얻지 못해 굶주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에는 목자와 같이 백성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 율법학자, 바리새인 같은 지도자들이 목자입니다. 그런데 왜 백성들은 고생하고 위험에 빠져 있을까요?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지만, 삯군 목자는 양을 버리고 도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요 10:11-12) 곧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자기 이익을 지키려고 백성을 위험한 곳으로 내몰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백성들은 고생하고 지쳐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한 목자가 되시어 양들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고, 약한 것을 고쳐주십니다. 진리를 가르쳐서 바른길을 가게 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희망을 갖게 하고, 병들고 약한 것을 고쳐 회복시키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런 일을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연민이라고도 하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 아니면 공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유를 찾고, 분석을 하려고 합니다. 병든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결론은 ‘당신 책임’이라고 떠넘깁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유를 찾거나 분석하지 않습니다. 측은히 여기시고, 함께 아파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실 일을 할 뿐입니다.
누가 힘들어하면 ‘왜’라고 묻지 마십시오. 그 짐을 함께 지는 마음으로 위로하고, 곁에 있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일을 하도록 일꾼을 부르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추수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최후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추수 때 알곡은 거두어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모아 태운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거두어들임’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 세우시는 것입니다. ‘거두어들임’이 교인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전파하고, 회복하게 하는 일을 통해서 사람들이 해방되고 자유와 기쁨을 누리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시는데, 10장 1절 말씀입니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이 권능이 병을 고치는 의사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해방과 자유와 기쁨을 얻게 하는 권능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정신건강을 치료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무지, 교만, 탐욕과 같은 어리석음에서 해방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죄와 욕심에서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약하고 병들 때 좌절하고, 낙심하여 근심하는 이들에게 소망을 갖게 하고, 기쁨을 얻게 하는 일입니다. 구원받은 삶이 자유와 기쁨과 해방입니다. 평화를 누리는 삶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일을 맡아 할 수 있도록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권능을 주십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은 열두 제자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신분이나 나이, 직업이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동역자가 되는 자격은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결단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이 누가복음에 잘 나와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눅 5:11, 28)고 하였습니다. 자기 것을 버릴 때 가장 좋은 선택을 하고, 가장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주님에게서 새 생명을 얻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주님의 동역자들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권능을 주십니다. 이웃에게 기쁨의 소식, 생명의 소식을 전하고,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모든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굳이 내가 모든 것을 갖추고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내 것’을 포기하는 것뿐입니다. 내 고집, 자존심, 내 계획, 내 목표를 버리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어디로 이끄실지는 모릅니다.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기쁘게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전쟁 중에 오래된 성당이 파괴되었습니다. 교인들이 안타까워하며 복구를 위한 헌금을 하였습니다. 예산을 다 쓰고 난 뒤에 보니까 예수님 상이 완성되지 못하고, 손과 발이 부서진 채로 남게 되었습니다. 한 부자가 동상을 복구할 기금을 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교인 중에 한 사람이 말합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을 복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일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교인들이 모두 동의하여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동역자로서 주님의 일을 맡은 자들입니다. 입술로 믿는다고 고백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목자 없는 양 같이 위험 속에 방황하며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평화와 기쁨을 증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