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상주 항몽대첩(抗蒙大捷塔) 기념탑
2025.2.2(일) 충북 영동 노근리 평화공원 탐방후 오늘의 마지막 일정으로
경북 상주 수동면 수봉리 산84에 위치한 항몽대첩 기념탑을 찾는다(17:00~17:20)
상주항몽대첩기념탑이 있는 백화산은 신라 무열왕이 삼국통일 대업을 도모한 곳이며
고려시대인 1254년 몽골의 차라 대군이 상주성을 침공하였을 때 그 당시 황령사 승려 홍지가 지휘하는 관민이
몽고군 과반을 사살하여 몽고군을 물리친 업적이 있는 호국성지이다.
<고려 말 삼원수를 낳은 김만궁의 설화 >
김만궁은 고려 때 보문각 제학(정3품)인 호장 김조의 딸로 본관은 상산 김씨입니다.
나이 일곱살 때 거란군이 침입해 오자 아버지를 따라 백화산으로 피난을 가다가 길섶에서 그만 길을 잃어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3일 후 거란군이 물러간 후 산속을 헤매다 힘들 게 다시 아버지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어떻게 지냈느냐?' 고 물으니, '밤에 어떤 짐승이 품에 안아 젖을 먹여주고 낮에는 어디론가 사라졌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아버지가 주변을 살펴보니 호랑이 발자국이 선명하여 호랑이가 사람을 헤치지 않고
보살펴 준 것이 분명하다 여겼고 모두가 기이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만궁이 과년하여 고을의 관리 김일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 록을 낳았고
록은 득배, 득재, 선치 삼형제를 두었으며 모두 나라에 큰 공을 세운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득배는 홍건적 난에 큰 공을 세우고도 간신 김용의 모함으로 효수를 당하여
그의 문인 포은 정몽주(1337~1392)가 공민왕에게 진실을 청하여 허락을 받아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포은이 장례를 치르면서 지은 제문은 동문선에 오른 명문장으로 인구에 회자되었고
그의 공적은 조선이 개국한 후에 문충이라는 시호를 내려 천양하였고
아우인 득제는 상산군에, 선치는 낙성군으로 봉하여 이를 두고삼원수라고 전해집니다.
후세 사람들은 만궁부인을 살려준 백화산 호랑이는 훌륭한 인재를 낳을 사람을 미리 알아보고 목숨을 구해준 산신령일 것이라고 하였다.
상주 항몽대첩탑(抗蒙大捷塔) 기념비 안내도
<임진왜란과 천하촌>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불과 13일째인 4월 25일 상주 북천전투에서 1000여명의 농민군과
한양에서 내려 온 60여 명의 군관이 첫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처참하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5월 13일 상주의 향민 1000여명이 백화산 고모탑에서 상의군 의병을 창의하여 활동하던 중
1593년 2월 21일 의병들로 하여금 명나라의 지원에 주력하라는 순찰사의 전령에 따라
백화산의 상의군 본진이 비워진 상태에서 왜병의 급습으로 발생한 처참한 당시의 이아기들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상주 선비정신의 사표 - 송이회>
송이회라는 인물은 우곡 송량의 맏아들로 본관은 여산이며 공성면 효곡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상주성이 왜적에게 함락되자 부친이 이회를 불러,
'왜적들은 예의도 모르는 야만이니 향교에 봉안된 성현들의 위패가 저들에게 봉변을 당하지 않게 하라' 고 명하니
그 길로 상주향교로 달려가 성현들의 위패를 정결한 곳에 묻고 집에 돌아오니
가족은 이미 약속되었던 백화산으로 피난을 떠난 뒤였습니다.
급히 백화산으로 달려가 부모님들이 왜병들에게 붙잡혀 큰 화를 당하는 지경을 보고
아버지를 몸으로 막아서 생명을 다했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항몽대첩비
백옥정 맞은편 보현사 입구에 몽골제국의 제6차 침입 당시
황령사 승려 홍지의 지휘 아래 몽골군을 크게 물리친 역사를 기리기 위해 지난 2013년 건립됐다.
항몽대첩 기념탑의 크기는 폭 7.5m, 높이 11.5m로 형상은 전투에 참여한 승려와 민중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구성했다.
특히 외부의 하늘로 상승하는 3개 스틸 곡선은 전투 당시 백화산에 울려 퍼진 함성과 기개를 표현했다.
이는 역사적인 전쟁의 풍파마다 지역민이 스스로 일어나 민관군 합동으로 전쟁의 흐름을 바꾸고 승리를 이끈 전투를 펼쳤다는 특징을 잘 표현해 준다.
기념탑 하부에는 전투에 참여하였던 승려와 민중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구성하여 사실감 있게 표현하였고
상부에는 수려한 백화산의 자연환경을 물방울 형상으로 구성하여 그 당시 희생된 피와 호국정신으로 상주를 지켜온 숭고한 충을 의미하고 있다.
회부의 곡선은 3개가 있는데 이것은 전투 당시 백화산에 울려 퍼졌던 함성과 기개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장원 황원선(1798~1873) 백화산(白華山)>
끝없이 땅에서 높게 솟아 곧게 하늘과 짝을 이뤄 걸출하다네. 무슨 일로 조물주가 이처럼 크게 뭉치게 하였는가?
작은 구렁은 길바닥 빗물과 같이 가고 자질구레한 봉우리는 언덕과 비등하다네.
신라왕이 옛날에 이곳으로 왔었는데 남겨진 성책이 구름 속에 보인다네.
당나라 소정방 장군도 지나면서 이별한 곳이라네.
훌륭한 사람을 태어나게 한 것은 천지의 기운이 나왔기 때문이라네.
이름난 가람 90개 정도가 곳곳에 있었다고 전해온다네.
신령스러운 옹추는 비구름을 생기게 하니 공경하는 마음으로 희생물 바친다네.
위급한 상황에서 형제간 우애 있었으니 높은 명성은 하늘처럼 높았다네.
황선은 별 탈 없는지 세월은 무릇 얼마를 지냈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