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일본문화 가운데 세속화라고 일컬어지는 우키요에(浮世絵)는 유럽의 인상파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 가운데 하나였다. 우키요에의 탄생은 에도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흥 쵸닌층의 호색적인 욕구와 어우러진 화류계 여성들의 감성, 이들의 생활풍속 등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우키요에의 본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새로운 문화주역 쵸닌의 등장
에도시대는 정치적인 안정과 상공업의 발달을 배경으로 쵸닌(町人 : 근세 일본의 사회계층의 하나, 상인)이라는 새로운 사회계급이 급부상하였다. 쵸닌은 사회신분제도의 제한과 경제적 지위 향상이라고 하는 불균형 속에서 나타난 갈등과 인간본연의 호색적인 욕구를 마음껏 해소하면서, 지배계급인 무사와는 달리 서민적이고 쾌락적인 색체가 짙은 독특한 문화를 추구하였다. 새롭게 탄생한 문화의 주역은 말할 것도 없이 금전적 소유자인 쵸닌과 그들에 순응하는 화류계 여성들이었다. 이와 같은 쵸닌들의 생활 풍속과 인정을 그린 것이 우키요에(浮世絵)이다.
우키요에는 에도시대에 만연한 호색적인 경향과 세속적인 광경을 화려한 색채로 표현한 풍속화로 주제는 주로 민중생활로 당시 서민 사이에서 최고의 관심사였던 유곽(遊郭)의 세계와 유행 패션의 주역이었던 화류계 여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 많다. 서민의 통속적인 사고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는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의 일본적 색채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우키요에는 일본적인 것으로 대표되는 문화 중 하나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일본의 대표적인 서민 미술 장르의 하나인 우키요에가 에도시대의 서민문화 속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인상파화가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우키요(浮世)'는 불교적인 생활감정으로부터 나온 '우키요(憂き世)'와 한어(韓語) '후이세(浮世)'를 혼용한 단어이다. 우키요(憂き世)는 내세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덧없는 세상, 무상하게 살아가기 힘든 세상인 현세(現世)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불교적인 염세관(厭世觀)이 반영되어 있고, 이 세상, 세간, 인생, 또는 애락(哀樂)의 세계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처럼 부정적인 의미가 무로마치(室町, 1340 -1574) 말기부터는 긍정적인 의미로 변화되기 시작한다. 특히 다른 단어의 앞머리에 붙여 '현대적'이거나 '그 시대에 맞는' 혹은 '호색적'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우키요오토코(浮世男)'라 하면 유행을 쫓으며 여색을 밝히는 남자라는 뜻이고, '우키요조메(浮世染)'는 당대에 유행하는 염색 문양을 의미한다. 어찌 보면 '우키요'라는 단어는 중세적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꿈에 불과한 무상한 세상'으로서의 세계관과, 그 속에서나마 찰나적인 향락을 즐기고자 하는 근대적이고 긍정적인 현세관이 동시에 반영되면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우키요의 그림이라는 본질을 갖고 형상화된 우키요에는 신흥 에도 서민의 그림으로서 현실 생활과 풍속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우키요에의 보급에는 우키요에 판화가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초기의 육필화에서 시작하여 동시에 다량 제작이 가능한 니시키에(錦絵)라는 다색 목판화 형식으로 변천되었다. 이 다색 판화 기법의 발달로 더욱 정교하고 아름다운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우키요에가 주로 판화로 제작되었다고 하는 사실이야말로 그것이 귀족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서민층에게 널리 향유될 수 있는 양식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판화는 미술의 대중화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기법인 것이다.
우키요에의 형성 과정에서 쇠퇴기까지 많은 화가들이 활약하였는데,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는 손발이 가늘고 애련한 분위기로 몽유적인 화면을 나타내는 한편 배경의 사물을 세세하게 그려내 현실미가 느껴지는 미인화를 완성시켰다. 도리이 기요나가(鳥居淸長)는 여성 자태의 아름다움과 복장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건강미 넘치는 미인에 밝고 따뜻한 인상을 주는 색채를 구사하면서 새로운 미인화 양식을 확립했다. 우키요에는 주제를 현세에서 취하면서 인물의 복장, 머리 모양, 정경까지도 전부 섬세하게 표현되어 이것을 통해 에도 문화의 중요한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화류계 여성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우키요에에 나타난 화류계 여성
쾌락을 추구하던 다양한 계층의 남성을 상대하는 화류계, 커다란 범위로 유녀(遊女)라 부르는 여성 가운데에는 여성적인 몸가짐, 예절, 고전 무용, 음악 등 다양한 교양과 예능을 익힌 게이샤(芸者)가 있다. 즉 게이샤는 남성과 함께 세상 이야기라든가 예술,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상대이다. 그들은 교양과 풍부한 재치로 남성들에게 즐거움뿐만 아니라 정신적 공감을 교환할 수 있는 친구였으니 이것이 게이샤가 담당한 일이며 존재의 이유였다.
이들은 단순히 몸을 파는 접대부의 차원을 넘어 일본 고유의 전통 고수 및 전승에 기여했다. 이러한 면에서 화류계는 공적인 사교 수단뿐만 아니라 교육의 장소로서 활용되었다. 예능 수업과 자기 개발을 통한 게이샤는 저명한 사람들과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현재의 매스미디어의 역할을 담당했다. 일본 여성 중에서 가장 많은 지식과 예술적인 재능을 지닌 게이샤의 스타일은<이키(いき, 취향)>로 대표된다.
당세의 취향이라고 하는 의미의 '이키'는 한마디로 에도시대의 미적 감각이다. 이것은 기질, 모습, 색채, 무늬 등이 세련되고 멋진 것을 의미한다. 우키요에 등에서 보여지듯이 가는 얼굴, 얇은 옷을 걸친 모습, 날씬한 허리, 엷은 화장, 곁눈, 미소, 맨발 등의 모습과 기하학적인 도형, 줄무늬, 그리고 회색, 갈색, 청색 계통에 속하는 색채가 '이키'를 대표한다.
우키요에와 유럽 인상파와의 만남
우키요에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지적해 둘 만한 일은 그것이 유럽의 인상파의 탄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우키요에와 인상파의 첫 만남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867년 파리의 만국박람회장에서 일본의 도자기 등의 특산품을 팔고 있던 매점의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뚱뚱한 몸집의 가게주인이 물건을 포장하는데 사용되었던 우키요에 판화들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넣으려고 하던 참이었다. 때마침 이곳을 방문했던 화가 모네(Monet)가 이를 발견하고 황급한 목소리로 그것들을 모두 사겠다고 했다. 이것이 모네가 처음으로 우키요에를 만난 사건이라고 전해진다. 초기의 인상파 화가들은 먼저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齊),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 등의 풍경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다음으로 그 대상은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磨), 토슈사이 샤라쿠(東州齊寫樂) 등으로 확대되어 갔다. 무엇보다 우키요에에서처럼 그림자를 그림으로써 대상을, 그리고 단편을 그림으로써 전체를 뚜렷이 부각시키는 기법과, 거의 평면적인 묘법, 그리고 색채의 신선함은 인상파의 화가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로 인해 우키요에에 대한 관심은 확대되어 갔고 대량의 우키요에가 프랑스의 화상(畵商)들에 의해 수집되었다고 한다.
어떤 예술 작품이든 그것은 그 시대의 사회상의 일면 또는 전부를 반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주로 유곽의 정경을 많이 그리고, 말초적인 묘사로 타락적인 분위기를 띄고 있기 때문에 우키요에라고 하면 바로 춘화(春畵)를 연상하는 사람도 있었다. 18세기에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신유한(申維翰)이 당시의 일본인에 대해 '금수와 같다고 할 정도로 남녀간의 풍기가 문란하고, 사람마다 춘화를 몸에 지니고 있다.'고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성리학적 교양이 몸에 밴 조선 선비의 눈에 우키요에의 존재를 통한 에도의 문화가 어떻게 비쳤을지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러나 우키요에에 나타난 일본적 미의식과 사상은 지금도 일본적인 특징으로서 일본인의 행동과 의식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