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무학당 순교의 역사적 고찰과 순교 정신의 현재적 의미
기조강연 : 김희중 주교
2003년 7월 27일(일) 광주 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 "나주무학당 성지개발 학술회의" 자료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나주 무학당 순교의 역사적 고찰과 순교 정신의 현재적 의미
천주교광주대교구 보좌주교 김 희 중 히지노 교회사학박사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한번 끊어지면 회생할 수 없는 생명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소중한 생명까지도 그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가치를 위해 선선히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남편의 뒤를 따라 부인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뒤 따라 죽는 순절(殉節), 임금에게 죽기까지 충절을 다하는 순군(殉君) 등이다.
그리고 직장에서 맡은 바 소임에 충실한 나머지 죽음에 이르는 것을 순직(殉職)이라 하고, 우국지사나 열사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순국(殉國)이라고 부른다. 결국 자신들이 의롭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목숨을 스스로 바치는 행위이다. 그러나 자기가 믿는 종교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죽은 사람을 순교자(殉敎者)라고 부른다. 라틴어로 순교는 그리스어 '마르투리온'에서 유래된 '증언' 또는 '증거'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교회 역사에서 목숨을 바쳐 그리스도를 위하여 복음의 가치를 증거하고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하다가 피를 흘려 목숨을 바친 신앙인들을 뜻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 순교라 함은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까지 포함하는 전인적인 자기 봉헌을 통한 증거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순교는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까지 봉헌하는 가장 완전한 증거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봉헌에 보다 가깝게 동참하는 행위일 것이다.
사실 이 지역에서 순교자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도 이렇다 할 순교 성지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순교 성지가 아직 본격적으로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것은 우리들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까닭도 클 것이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순교 정신을 계승하고 순교 영성을 생활화하며 순교성지를 개발하기 위해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에서 나주 무학당 순교지를 학술적으로 고찰하여 입증하고자 학술회를 개최하는 것은 참으로 시의 적절하다고 본다.
한국교회사 연구의 터를 닦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교회사 연구에 일생을 헌신하신 한국교회사연구소 명예 소장 최석우 신부님이 오늘의 학술회에서 순교정신과 성지개발의 의미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순교 정신을 일상생활에서 구현하는데 큰 도움을 주시게 되었다. 제1주제 발표에서는 실제로 목숨을 바쳐 믿음을 증거 하는 순교 영성의 의미와 목숨을 바치지는 않지만, 순교 영성의 정신대로 신명을 바쳐 신앙을 증거 하는 영적 순교 영성으로 크게 나누어 순교 영성을 소개하게 되겠습니다.
첫 번째 주제 발표에서 초기 교회의 순교관에 입각한 순교 영성의 전통을 한국 초기 교회에서도 그대로 이어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순교 영성이 내세 지향적이라는 일부 비판도 있었지만, 오늘날에 와서 그 순교 정신의 진의를 외면한 나머지 순교 정신의 중요한 요소를 도외시하는 경향까지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신앙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서는 순교 영성을 부활시키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성지 개발이란 그저 기념비 하나 세우는 것쯤으로 생각거나 관광 여행보다 좀더 높은 수준으로 생각하고 슬쩍 둘러보는 행태를 비판하고 있다.
즉 성지 개발은, 순례자들로 하여금 성스러운 분위기에서 순교자들에게 경건하게 기도를 바치고, 필요한 은혜를 청하고, 순교자의 영성을 본받아 자신의 신앙을 쇄신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조용한 기도의 장소와 필요한 시설을 제공하려는 데에 그 의미와 목적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두 번째 주제 발표에서는 본 학술회의 구체적인 관심사의 하나인 나주 무학당 순교의 역사적 고찰에 관해 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인 서 종태 박사가 나주의 천주교 박해와 순교자, 나주의 순교 사적지와 무학당, 그리고 나주 순교자들의 신심에 대하여 학술적으로 밝혀줄 것이다.
많은 분들은 전라남도 지역에도 유배된 천주교인들이 많아 이곳에서도 순교된 분들이 있을 것인데, 왜 이곳에는 순교지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까 궁금해 할 것이다. 사실 조선 시대 전라도 지방의 행정 중심지는 감영이 있던 전주였고, 이로 인하여 전라남도 지방에서 체포된 신자들은 대부분 전주 감영으로 끌려가 신문을 받은 뒤 그곳에서 처형당했다.
이 때문에 광주교구의 관할 구역인 전남 지방에는 이미 신유박해(1801년) 이전부터 천주교가 전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광과 나주 등이 알려져 있을 뿐 박해기 신자들의 순교 터는 많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예를 들면 영광에서는 李화백이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고, 나주에서는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때 李춘화(베드로)․강영원(바오로)․柳치성(안드레아)․柳문보(바오로) 등 4명이 순교하였다.
사실 신유박해(1801) 이전에 이미 나주에서 가까운 무안․영광․함평․강진 등지에까지 천주교가 전파되어 있었고, 나주 진영의 관할 구역인 나주․정읍․무장․장성 지역에 박해 시기 동안에 신자들이 적지 않게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주에서도 상당한 수의 신자들이 순교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오! 늘날 남아 있는 기록으로는 나주에서 순교한 신자들이 총 4명만 확인되고 있다.
이와 같이 순교 터가 많지 않는 광주교구 관할 구역 가운데에서 나주는 가장 많은 순교자가 나온 지역이기 때문에 나주의 순교 터와 순교자들은 일찍부터 교회사 연구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아왔음을 밝히고 있다.
나주의 순교 터와 순교자들에 대해서는 일찍이 김구정 선생, 한종오 선생에 의해 순교 터인 武學堂의 한자 표기와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한 고증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광주대교구 50년사}와 김진소 신부의 연구에 의해 나주 순교자들에 대한 구명이 더욱더 상세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무학당을 중심으로 성지를 조성하고자 하는 노력을 교회에서 경주해 오고 있다.
이 두 번째 발표에서는 병인 박해 때 순교한 사례 이외에 기해 박해 때의 순교자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우선 기해박해(1839) 때 순교한 李춘화(베드로)가 찾아지고 있다. 이춘화에 관한 자료는 달레의 책에 수록되어 있는 짤막한 기사가 전부인데, 그것에 의하면, 이춘화는 공주 고을 태생으로 나주에 가서 산 지 얼마 안 되어 기해박해가 일어나 나주 고을에서 체포되어 고문을 받은 뒤 읍내 감옥에서 3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다음으로는 병인박해(1866~1878) 때 순교한 강영원(바오로)․柳치성(안드레아)․柳문보(바오로)가 찾아지고 있다. 이들에 관한 기록은 {치명일기},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병인치명사적} 등에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그런데 이들 자료를 살펴보면,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나주 읍내 감옥에 갇혔던 신자들은 이들 순교자 세 명 외에도 林군명(니고나오)․崔聖和(안드레아)․徐潤敬(안드레아) 등 세 명이 더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발표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이들 순교자의 집안 내력과 순교 과정 및 그들의 신심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고 그들의 순교 정신의 높은 뜻을 소개하고 있다.
강영원(바오로)은 본래 충청도 홍산 사람으로 그는 전라도 용담(현 전북 진안군 용담면)으로 가서 살다가 뒤에 다시 정읍 남면 이문동 임군명(니고나오) 집으로 가서 품을 팔며 살았다. 그는 홀아비가 된 뒤 20여 년이 되도록 貞守하기로 뜻을 세워 천한 일을 즐겨하며 많은 재를 지키며 항상 겸손하고 극기하여 염경할 때에는 남보다 배로 더 열심히 하고, 항상 사람들에게 박해를 당하면 예수의 표양을 따라 순교하는 것이 자신의 본래 소망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태장으로 앞가슴과 등가슴을 맞는 고문을 당했지만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 마리아를 소리내어 외웠다고 한다. 그는 형벌을 받을 때 십계명을 외우며 "이러한 도리를 사람된 자가 어찌 받들어 행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말했다. 결국 그는 1872년 3월 9일 무학당 앞에서 영장의 지휘 아래 태장 30대를 맞은 뒤 백지사형을 받아 5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다음으로 유치성(치경, 안드레아)은 원래 경상도 사람으로 부모 때부터 천주교를 믿었다. 그는 부모가 정해박해 때 붙잡혀 먼 곳에 정배되자 고향을 떠나 충청도로 가서 살았으며, 뒤에 다시 전라도 무장 암티점에 가서 살다가 1871년 11월 22일 나주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영장이 그를 여러 차례 불러 형벌을 가하며 문초하였지만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지켰으며, 교우들을 고발하지도 않았다.
영장이 그와 강영원과 유문보를 불러 "참으로 천주교를 믿느냐"고 묻자,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과연 그러하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화가 난 영장은 "그러면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말하고 그의 발등을 불로 지져 살이 타게 만들었으며, 강영원과 유문보를 태장으로 무수히 쳤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격려하며 추위와 굶주림과 혹독한 고문을 꿋꿋이 참아 견디며 옥중에서 통경으로 기도를 바쳤다. 결국 그는 강영원과 더불어 옥에서 임종을 맞은 유문보를 권면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다가 1872년 3월 9일 무학당 앞에서 영장의 지휘 아래 태장 30대를 맞은 뒤 백지사형을 받아 48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다음으로 유문보(바오로)는 장성 삭별리에서 살다가 1871년 11월에 나주 포교에게 붙잡혀 읍내 감옥에 갇혔다. 영장이 그를 여러 차례 불러 혹독한 형벌을 가하며 문초하였지만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지켰다. 이 때문에 그는 불로 발등을 지지는 형벌을 받아 살이 타고 헐어 그의 발등에서는 진물이 흘렀다.
영장이 그와 강영원과 유치성을 불러 "참으로 천주교를 믿느냐"고 묻자,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과연 그러하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화가 난 영장은 그와 강영원을 태장으로 무수히 쳤으며, 유치성의 발등을 불로 지져 살이 타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격려하며 추위와 굶주림과 혹독한 고문을 꿋꿋이 참아 견디며 옥중에서 통경으로 기도를 바쳤다.
1872년 2월 12일 최성화․임군명․서윤경 등이 배교하고 석방되어 나갔으나 그는 강영원․유치성과 더불어 신앙을 굳게 지키다가 가혹한 형벌을 받아 염병에 걸려 위중하게 되었으며, 강영원이 밤낮으로 돌보아 주는 가운데 주님과 성모님의 성명을 부르다가 2월 12일에서 3월 9일 사이게 근 60세의 나이로 죽었다. 신앙을 증거하다가 형벌을 받아 염병에 걸려 죽었으므로 그! 는 순교자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순교 영성은 "매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양심의 일상적인 순교라고 간주한 오리게네스의 주장과 인내심을 가지고 동정(童貞)을 간직한 처녀는 자신의 일생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한다는 점에서 순교자의 영예에 비견될 수 있다고 보는 올림푸스의 주교 메토디오(? - 311)의 견해, 그리고 전염병 환자를 기꺼이 돌보다 죽은 경우도 순교자로 간주한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194-264) 견해와도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준으로 보면, 중세시대에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 백만 명이 죽어갈 때 환자들을 간호하다가 같은 병에 걸려 병사한 수많은 수도자들과 신자들도 순교자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순교자들은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하였다 지금은 이렇게 목숨을 바쳐야 할 정도의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일상생활에서 믿음을 증거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데 각자가 감내해야 할 모든 불이익과 고통을 자기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도 순교 정신?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복음 정신과 교회의 가르침에 신명을 바쳐 생활하는 것이 현대의 순교 정신이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