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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훈련 (15) 곤고 영성
- 롬 7;14-25.
내가 세어 보지 않았지만 성경에는 믿음의 사람이 3만명 가량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중애서 최고 영성의 사람을 뽑으라고 하면 바울입니다.
바울의 영성은 곤고 영성이었습니다.
곤고함을 느끼는 것이 진정한 영성입니다.
곤고함을 느껴야 할 때 곤고함을 느끼지 못 하는 것은 영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최고의 영성을 지닌 선지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좋은 왕 웃시야가 죽던 해였습니다.
좋은 왕은 죽고 앗수르는 호시탐탐 엿보고 있는 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죄악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려고 준비중에 계셨습니다.
위기중에 위기였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이사야가 선지자가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환상을 보았습니다.
천사들이 하나님을 모시고 서 있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천사들은 날개가 6개였습니다.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었습니다.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었습니다.
그리고 두 날개로는 날라 다녔습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이 온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모습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천사들도 감히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하나님 앞에서는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었습니다.
그리고 두 날개로는 감히 하나님 앞에 발을 보여 드릴 수가 없어서 발을 가리었습니다.
그리고 여섯 날개중 겨우 두 날개로만 날라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혼자 있을 때에는 몰랐는 데 하나님 앞에 서니까 입술이 부정한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이사야는 자기의 곤고함을 하나님 앞에서 보았습니다.
영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지금 잘못 하고 있으면서 곤고함을 느끼지 못 한다면 영성의 사람이 아닙니다.
곤고함이 있다는 것은 좋은 영성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화인맞은 양심입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 합니다. 그렇기에 곤고함이 없습니다.
23명을 살인하고 잡히고 나서 말합니다.
“잡히지 않았으면 더 죽일 텐데..”
곤고함이 없습니다.
도둑질하다 잡히고 말합니다.
“나만 더럽게 재수없어서 잡혔다.”
곤고함이 없습니다. 영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고도,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도, 기도하지 않으며 살면서도 곤고함이 없습니다.
이것은 좋은 영성이 아닙니다. 바울은 성자중에 성자입니다.
전도자중에 전도자입니다. 선교사중에 선교사입니다.
위인중에 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곤고함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영성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자기가 곤고함을 느끼지 못 하게 되는
둔한 시대가 될 것이라고 요한 계시록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곤고함을 모르는 시대가 마지막 때입니다.
현대인들이 영적으로 곤고함을 느끼지 못 하고 살고 있습니다.
무엇이 곤고한 것인지조차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 하도다”(계3;17)
영국에서 유명한 목회자 중에 사무엘 루더포드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나의 죄됨을 바라볼 때 내게 주신 구원은 나의 구세주의 가장 큰 기적이다.”
곤고함을 느끼는 것이 영성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아 근근히 살아가는 어부였습니다.
어느 날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 한 마리 잡지 못 하는 밤이 있었습니다.
새벽에 피곤한 몸으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이 때 베드로에게 영성이 생겼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동안 자기는 죄인인 것을 몰랐습니다.
자기는 죄인이요 곤고한 사람인 것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곤고함을 느끼는 것이 영성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절규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사람들은 왜 곤고한가요? 바울은 왜 곤고하다고 하였는 가요?
1. 선과 악 사이의 곤고함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바울은 선과 악사이에서 곤고하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 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 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19-21)
아담과 하와 이후 모든 사람속에는 선과 악이 들어 있습니다.
악만 있으면 곤고하지 않습니다. 선만 있어도 곤고하지 않았습니다.
선과 악이 같이 있기에 사람들은 곤고하여 집니다.
이중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북극에 알라스카가 있습니다. 얼음덩어리 지역입니다.
그 곳에서도 북쪽에 놈(Nome)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동토 지역이라고 말합니다.
일년에 9개월 동안은 흰 눈에 덮여 있기에 설경이 장관입니다.
이 장관을 보러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 들고 있는 지역입니다.
그러나 여름 3개월에는 눈이 다 녹아 버립니다.
겨울 설경에 반한 관광객들이 여름 풍경이 궁금하여 또 방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름에 다시 방문한 방문객들은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을 가지게 됩니다.
더럽고 지저분한 쓰레기장같은 곳입니다. 짐승 시체가 즐비합니다.
심지어 사람 시체도 여기 저기에 보입니다. 폐차된 자동차들이 널려 있습니다.
세상 쓰레기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겨울과 여름을 다 본 사람들은 말합니다.
“여름은 천국, 겨울은 지옥같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모습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서 먹은 후에는
인간은 선악을 소유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
람들 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게 되었습니다.
천사와 같을 수 있고, 악마와 같을 수 있습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이야기입니다.
낮에는 그 마을에서 둘도 없는 선한 의사입니다.
그러나 밤에는 몰래 나쁜 짓을 하는 하이드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라어 원하지 아니 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 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19-21)
얼마 전에 구 쏘련 사할린에 가서 성막 쎄미나를 하였습니다. 가가린 호텔이 있었습니다. 우주에 제일 먼저 올라갔던 우주인이 가가린입니다. 가가린은 우주에 올라갔다 내려와서 말했습니다.
“우주에 올라가 보니 하나님이 안 계십니다.”
가가린은 이런 건방진 이야기를 하더니 미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영성은 갈등을 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도 그렇게 이야기하여 놓고 곤고합니다. 찜찜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의 말로 비참하였습니다.
내가 수도사가 되려고 하면서 토마스 머튼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1968년 53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가 수도사가 되어 봉쇄 수도원에서 죽기까지 나가지 않고 기도만 하다가 부름을 받은 것은 히틀러의 오른 팔이었던 아히이만 재판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히이만은 히틀러와 함께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한 장본인입니다. 그를 체포한 사람은 이스라엘 정보원 피터 말킨(Peter Malkin)입니다. 1960년 3월 11일 그가 아히이만을 체포하였습니다. 너무나 더러운 사람이라고 자기 손으로 그를 잡을 수 없다고 가죽 장갑을 끼고 그를 잡았습니다. 아히이만이 재판받을 때 판사에게 이렇게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조금도 느끼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악이 가득한 그에게 선으로 포장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토마스 머틴은 너무나 선과 악 사이에서 곤고를 느끼는 모습이란 전혀 없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봉쇄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기도하며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선과 악사에서 곤고를 느끼는 것이 영성입니다. 조그만 악과 접하여도 곤고하게 느낄 수 있는 영성이 예민한 영성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영성이었습니다.
2.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서의 곤고함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속에 다른 한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로 나를 사로 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사람들은 이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속사람과 겉사람이 있습니다. 겉사람은 날로 부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바울은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속사람과 겉사람이 다릅니다.
그렇기에 곤고함을 느낍니다. 속사람이 진심입니다. 겉사람은 얼마든지 위장할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만 살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손자가 생전 처음으로 서울 구경을 왔습니다. 손자가 할아버지 할머니 서울 구경을 시켜 주는 여행이었습니다. 이 곳 저 곳 모두가 신기한 것뿐이었습니다.
호텔로 들어갔습니다. 할머니가 화장실에 갔습니다. 그 동안 할아버지와 손자가 호텔 로비에 앉아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상한 것을 보았습니다. 엘리베이터에 늙은 할머니가 탔습니다. 문이 닫혔습니다. 조금 후 그 곳에서 예쁜 여자가 나왔습니다. 할아버지가 놀라서 손자에게 말했습니다.
“손자야! 빨리 할망구 데리고 와라. 저 상자에 넣었다 빼면 저렇게 달라지는구나!”
아무리 늙은 할아버지라도 젊고 예쁜 여자와 살고 싶은 것이 남자의 본성입니다. 속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속사람과 겉사람이 달라서 곤고합니다.
나는 모 교회 장로님 댁에 아내와 함께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대단히 큰 대형교회 장로님입니다. 은행 지점장입니다. 교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존경합니다. 은행에서 모든 행원들이 그의 말에 복종합니다. 아주 좋은 분으로 평이 나있습니다. 명함에 보니 회장 직함만 5개도 넘습니다. 그의 아내는 목사입니다. 집도 고급 아파트입니다. 그 앞트에서도 넓은 평수의 집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집입니다.
4명이 식사를 맛있게 먹던 중이었습니다. 이야기 도중 장로님이 갑자기 자기 아내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뭐! 이런 게 있어?”
아내는 무한하여 벌벌 떨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그 자리에서 더 버티고 밥을 계속 먹어야 할 지, 그만 뛰쳐 나와야 한 지 판단하여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꾹 참고 밥을 먹었습니다. 그 후 식탁 분위기는 얼음장같았습니다. 싸늘하였습니다. 아내 목사님은 무한하여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속사람과 겉사람이 달랐습니다.
밖에서와 안에서 달랐습니다. 바울도 자기 속에 이런 것이 있음을 알고 곤고하다고 외쳤습니다.
3.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의 곤고함
바울은 왜 곤고하다고 하였나요?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 곤고함을 느끼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속에 다른 한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로 나를 사로 잡는 것을 보는도다.”
하나님의 법을 따라가야 함을 알면서도 육신이 약하여 죄의 법을 따라가고 있는 자신을 모습을 보면서 바울은 곤고하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욱신이 약하다고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인 십일조를 드려야 함을 알면서도 아까와서 십일조를 드리지 못 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영성이 없기에 곤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두 법 사이에서 곤고하여 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아도 곤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곤고함을 느낍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일날 놀러 다니고 세상을 즐기면서도 마음에 갈등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주일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마땅히 하여야 할 것을 하지 못 한 것을 하지 못 하였기에 께름직합니다. 하나님이 벌을 줄 것만 같은 괴로움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곤고함입니다.
동갑 부부가 있었습니다. 둘 다 같이 환갑을 맞았습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환갑 기념으로 선물을 주고 싶다. 한 가지만 말해라.”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나와 30년 차이나는 아내와 살고 싶습니다.”
천사가 말했습니다.
“당장 들어 주마!”
천사 말이 끝나자 말자 할아버지가 90살이 되었습니다.
곤고함을 이기는 비결
누구에게나 곤고함이 찾아 올 때가 종종 있습니다. 곤고함을 처리할 줄 모르면 더 죄에 빠지게 됩니다.
가수나 연예인들이 마약과 대마초에 빠져서 나오지 못 하는 때가 있습니다. 곤고함 때문입니다. 무대에 섭니다. 휘황찬란한 조명이 그를 비춰줍니다. 옷은 화려합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열광하며 박수를 쳐줍니다. 이 세상이 다 자기 것같습니다.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날 혼자 방으로 돌아 옵니다. 허탈합니다. 곤고합니다. 술을 퍼마십니다. 마약을 합니다. 그 황홀함을 찾고 싶어서입니다. 곤고함을 이기는 법을 알지 못 하면 더 타락합니다.
곤고함속에서 더 당당하여 질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할머니가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말기입니다. 이제 약도 소용없습니다. 의술로는 끝입니다. 하나님도 못 고칠 것입니다.”
할머니는 절망적인 곤고함속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 때 강도가 들어와 칼을 대고 말합니다.
“돈 내놔. 안 내놓으면 죽일 것이다. 만일 돈을 내놓으면 살려 줄 것이다.”
할머니는 일어나서 칼을 대고 있는 강도 뺨을 치면서 말했습니다.
“네 이놈! 의사고 못 살리고 하나님도 못 살린다는 데 네 놈이 나를 살려줘!”
강도는 할머니에게 뺨만 맞고 도망쳤습니다. 곤고함을 담대함을 주기도 합니다.
솔로몬은 우리에게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미리 예방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곤고가 오지 못 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병나서 고치는 것도 좋지만 병 나지 않게 예방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처럼, 곤고가 왔을 때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예 곤고하여 지기 전에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솔로몬은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전 12;1)
하나님은 곤고한 사람은 반드시 곤고함에서 벗어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욥 36:15)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시 18:27)
바울은 곤고함을 어떻게 이겼나요? 바울은 곤고함을 어떻게 해결하였나요?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3-24)
누가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 줄 것인지 바울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누가 곤고함에서 이끌어 줄지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대답은 예수님입니다.
12해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습니다. 의사로 안 됩니다. 약으로 안 됩니다. 재산을 다 써도 안 됩니다.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옷 자락을 잡았습니다. 고침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해답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어느 집의 벽이 갈라졌습니다. 그냥 두면 안 될 정도로 심하게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건축 기술자를 불러서 틈을 메꾸고 흰 페인트칠을 하였습니다.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다시 갈라졌습니다. 다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갈라졌습니다. 몇 번 이렇게 반복하였습니다. 아무리 틈을 메꾸고 수리하여도 자꾸만 갈라졌습니다. 건축 분야에 최고 전문가에게 원인을 진단하여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가 와서 정밀 조사하고 말했습니다.
“기초가 잘못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기도가 에덴 동산부터 잘못 되었습니다. 선과 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원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초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님뿐입니다.
- 갈보리교회 강문호 목사의 보혈의 강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