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참다운 공부길
강진에서 귀양 살면서 쓰다
오직 독서만이 살아나갈 길이다.
이 세상에 있는 사물 중에는 그대로 두어서 좋은 것이 있는데 이런 것을 두고 이리저리하다고 떠들썩하게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파손되거나 찢어진 것을 가지고 어루만지고 다듬어 완전하게 만들어야만 바야흐로 그 공덕을 찬탄할 수 있듯이,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해서 살려야 훌륭한 의원이라고 부르고 위태로운 성을 구해내야 이름난 장수라 일컫는다. 누대에 걸친 명문가 고관들의 자제처럼 좋은 옷과 멋진 관을 쓰고 다니며 집안 이름을 떨치는 것은 못난 자제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제 너희들은 망한 집안의 자손이다. 그러므로 더욱 잘 처신하여 본래보다 훌륭하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기특하고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폐족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것 한가지밖에 없다. 독서라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깨끗한 일일 뿐만 아니라, 호사스런 집안 자제들에게만 그 맛을 알도록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촌구석 수재들이 그 심오함을 넘겨다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드시 벼슬하는 집안의 자제로서 어려서부터 듣고 본 바도 있는데다 중간에 재난을 만난 너희들 같은 젊은이들만이 진정한 독서를 하기에 가장 좋은 것이다. 그들이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뜻도 의미도 모르면서 그냥 책만 읽는다고 해서 독서를 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원이 삼대를 계속해오지 않았으면 그가 주는 약을 먹지 않는 것같이 반드시 몇대를 내려가면서 글을 하는 집안이라야 문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내 재주가 너희들보다 조금은 더 나을지 모르지만, 어려서는 방향을 알지 못하였고 나이 열다섯에야 비로소 서울 유학을 해보았으나 이곳저곳 집적거리기만 했지 얻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후 스무살 무렵에 처음으로 과거공부에 전력을 기울였더니 소과에 합격하여 태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서 또다시 대과 응시과목인 사자구 육자구 등의 변려문에 골몰하다가 규장각으로 옮겨가서는 그 과제에 응하려고 한갓 글귀만을 다듬는 공부에 거의 10년이나 몰두하였다. 그 뒤로 똑 책을 교열하고 펴내는 일에 분주하다가 곡산부사가 되어서는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오로지 정신을 쏟았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는 신헌조, 민명혁 두사람의 탄핵을 받았고, 이듬해 정조대왕이 승하하신 비통함을 당해 서울과 시골을 바삐 오르내리다가 지난봄에 유배형을 받기에 이르렀으나, 오로지 독서에만 마음 쓸 겨를이 거의 하루도 없었다.
그러므로 내가 지은 시나 문장은 아무리 맑은 물로 많이 씻어낸다 해도 끝내 과거시험 답안 같은 틀을 벗어날 수 없고 조금 괜찮은 것일지라도 관각체의 기운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머리털과 수염이 이미 희끗희끗하고 정기도 시들고 말았다. 이것이 다 운명이구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