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권주열
아뿔싸 외
참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반갑구나! 반가워 악수를 넘어 서로의 팔을 붙들고 흔들며 네 이름을 부르려다 갑자기 머리가 하얘 온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머리 한편으로는 떠오르지 않는 네 이름을 짜내면서 또 한 편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마려운 오줌을 참듯 친구의 붙잡은 팔을 더 세게 흔들어도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이 친구가 자신의 이름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민망할까 싶어 잡은 손을 더 꽉 잡아 쥐며 머릿속은 전속력을 다해 뱅글뱅글 돌아가지만 끝내 이 친구에게 붙여 주어서는 안 될 이름만 나열되고 시간은 진땀처럼 흘러, 나는 지금 친구의 얼굴을 보고 있지만 어쩌면 이 친구의 뒤통수를 보고 있다 너의 뒤통수에서 희미하게 사라진 이름의 얼굴을 찾을 수 있을까 찾아서 우리가 흔드는 양 팔의 앞쪽으로 가져올 수 있을까, 갑자기 네가 낯설어지고 네가 아득해져온다 너를 처음 만난 게 언제였더라 우리가 만난 적은 있었던가 나의 팔을 쉽게 못 놓는 이 친구도 나처럼 마려운 오줌이라도 참는 걸까, 뒤통수 그 너머로 우리는 여전히 빙빙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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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조금씩 코가 자랐다 내 코는 갓 30센티를 넘겼다 아버지는 60센티고 어머니는 무려 90센티가 넘는다 30센티가 넘을 때마다 콧잔등의 빛깔이 달라지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짐작한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두서너 개의 학원을 전전하며 거짓말을 배우지만 천부적인 소질을 가진 몇몇만 빼고는 모두 고만고만한 길이다 젊은 여성들은 보란 듯이 긴 콧등에 명품 백을 걸고 지나간다 참말은 차츰 고어처럼 사장되고 있다 그 말이 고지식하게 들려서가 아니라 코의 길이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통상 코가 짧을수록 은행 대출이 어렵고 이자율이 높다 참말은 할수록 가난하다 그것은 코의 흔적처럼 붙어 있다 거짓의 기원 같은 참말,
방금 코 대회에서 289센티 코가 올해 미스 긴 코에 당선되었다고 뉴스 화면에 비친다 아름답다, 순수 거짓은 순수 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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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주열|2004년 《정신과표현》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처음은 처음을 반복한다』, 『바다를 팝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