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은 1912년 평양의 만경대에서 부친 김형직과 모친 강반석의 3형제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성주이며, 두 동생의 이름은 김철주, 김영주이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기독교 계통의 숭실학교를 다녔으며, 어머니 강반석은 기독교 가문의 딸이었다. 자연스럽게 김일성은 기독교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했으며, 또한 후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여위고 어려운 시절을 보낼때에 그를 돌보아 준것도 기독교 목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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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직의 친구였던 손정도 목사는 만주에서 양친을 잃은 10대의 김일성을 거두어 친자식처럼 돌봐주었는데, 이 때 함께 자라나 한
형제처럼 지낸 인물들이 건국후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지낸 손원일 제독이었고, 그의 여동생은 80년대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를 지내다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92년경쯤인가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60여년만에 해후하면서 찍은 사진이 알려져 화제가
된적이 있었다.
김일성은 10대후반부터 중국인학교를 다니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
양세봉은 아마도 만주에서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인 최후의 우파계 항일세력이었을 것이다. 1920년대부터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양세붕은 1932년 무렵이면 몇개의 무장세력을 규합하여 한때 조직원 수가 2만명에 이르렀던 '조선혁명당군'을 창설했다.
김일성이 양세봉을 찾은 것은 18살 때인 1930년경으로 아직 조선혁명당군이 태동하기 전이었다. 당시 중국인 중학교에서 공산주의 청년활동을 하다가 장학량의 중만주군벌정권의 단속에 쫓기던 중 양세봉을 찾아왔다고 한다. 통일부 발간 자료가 인용한 일본 육군정보기록에 따르면, 당시 우파계였던 양세봉세력은 조직가입을 희망하는 김일성등 8명의 청년들에 대한 사상 점검을 했는데,
김일성은 자신은 공산주의자지만, 항일 투쟁을 하는데 있어서 사상은 어디까지나 도구에 불과할뿐 민족주의던 공산주의던 조국보다
우선일 수 없다고 주장하여 감동시켰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반박도 있다. 즉, 양세봉은 원래부터 민족주의 저항운동을 했던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의형제간이었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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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당군에서 김일성이 나오게 된 것은 1932년 '춘추대투쟁'을 계기로 만주 전역에서 이주 조선 농민들이 일제에 맞서 항일무장투쟁, 즉 '빨치산 투쟁'을 벌이면서 였다.
아버지 장작림(張作霖)의 뒤를 이어 1928년부터 만주군벌을 이끌게된 장학량(張學良)은
만주지역의 농업 및 산업개발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1931년에 들어서자 군벌정권은 농업생산 확대등 농업의 발전을 위하여
현장의 실태를 조사하여 정책에 반영키위해 농민들, 특히 농업노동력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이주 조선농민들의 의견을
청취하였는데, 조사결과에 장학량정권은 크게 실망을 하였다. ..
당시 만주정부(군벌)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소작농들은 생산량의 1/2을 지주에게 바쳐야했다. 뿐만 아니라, 일년내내 지주들이 요구하는 일(주로 신농지 개간이나 지주개인의 일)에 무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해야했다...
이에 농업법을 제정하여 과도한 소작료와 노역을 금지하는 법안을 입법예고하고 이를 농민들에게 약속하였는데
이 입법내용이 알려지자 소작농들은 아쉬움속에 환영했으나, 군벌정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지주계층들이 크게 반발하여 법안이 실행되지 못하였다...
1932년 봄, 조선농민들은 군벌정권에게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고, 만주전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당시 조사에 따르면 시위 참가자는 만주 전역에서 10만명 이상이었다고 한다.(춘계투쟁春季 鬪爭) 이를 합하여 춘추대투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만주는 곧 일본의 침략을 받아 그들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일본군과 지주들의 공세에 희생이 눈덩이 처럼 커져가던 농민들은 자위수단을 찾기 시작했다. 즉, 지주들의 무기고를 털거나, 경비가 허술한 지서를 습격하여 무장을 하고 맞서게 되었다.
이 때에 바로 훗날 북한정권수립에 핵심세력이었던 이른바 '빨치산' 세력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