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로반(주판) 사무라이'를 아십니까?
강화도조약으로 개항하여 근대 일본과 본격적인 접촉이 이루저지면서 조선에도 새삼 주판이 알려졌다. 그러나 여전히 주판은 널리 보급되지도 사용되지도 않았다.
사무라이는 말하자면 ‘칼잡이’다. 적어도 한국인이 아는 한은 그렇다. 하지만 사무라이가 칼만 휘둘렀던 건 아니다. 주판(珠板)도 튕겼다. ‘주판을 튕긴다’는 말은 타산적이거나 약삭빠르다는 부정적인 비유로 요즘도 흔히 쓰인다. 계산도구인 주판의 용도에서 유래된 관용구다.
일본의 사무라이가 주판알도 잘 튕겼다고 하면 그들이 그만큼 계산적이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분들이 많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비유가 아니다. 말 그대로 일본에는 주판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무라이들이 있었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지만 다스릴 수는 없다”는 말이 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육가열전(陸賈列傳)에서 유래된 말이다. 육가(陸賈)는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휘하에서 그가 천하를 통일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 중 한 명이다.
육가는 유방에게 종종 <시경>이나 <서경> 등을 들먹이곤 했는데, 유방은 이를 귀찮게 여겨 “어느 겨를에 <시경> <서경> 따위를 보겠는가?”라고 대꾸했다. 그러자 육가는 '居馬上得之 寧可以馬上治之(거마상득지 녕가이마상치지)'라고 반문했다. '말을 타고 천하를 얻을 수는 있지만 어찌 말 위에서 그것을 다스리겠습니까?'라는 뜻이다.
육가의 이 말은 동양 문화권에서 힘에 의한 패도정치가 아니라 왕도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으로 오랫동안 인용돼왔다. 일본의 사무라이에 대해서라면 ‘칼로 천하를 얻을 수 있지만 칼로 다스릴 수는 없다’고 응용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무력만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지적은 적절할 수도 있겠지만 ‘왕도’ 운운은 천진한 얘기다. 평천하(平天下)를 위해서 수신(修身)하고 제가(齊家)하는 게 불필요한 것은 아니겠다. 그러나 수양을 하여 덕을 쌓고 집안을 잘 다스린다고 해서 곧바로 천하를 안녕케 할 수 있다 여기는 건 천하를 우습게 아는 것이다.
천하 만민의 삶의 안녕의 핵심에는 언제나 먹고 사는 문제가 있다. 관중(管仲)은 일찍이 “倉庫實而知禮節, 衣食足而知榮辱(창고실이지예절, 의식족이지영욕)”이라고 했다. “창고가 가득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해야 영욕을 안다”는 뜻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경제가 중요하다.’ 통치 집단이 제 아무리 도학(道學)을 열심히 익혀도 창고를 채우고 민의 의식을 족하게 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평천하는 없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경전 구절을 읊조리거나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과는 다르다. 하물며 참선도량에도 먹거리의 살림이 있다.
나라에는 나라살림이 있다. 나라가 제 꼴을 갖추고 돌아가려면 경제가 작동해야 하며 국가 경영에는 재정이 필요하다. 요체는 돈이다. 돈이 들어와야 하고 그 돈을 또 제대로 써야 한다. 그래서 그 운용을 위해서는 비유컨대 주판을 제대로 튕겨야 한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선 말 위에서 칼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러나 ‘도학’만으로도 안 된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선 주판이 필요하다.
도학정치에 심취했던 조선의 선비들은 비분강개의 개탄만 했지 실제로 나라를 융성케 하기 위한 방책이 없었다. 율곡은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상소를 통해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고 격정적으로 나라 걱정을 토로했다. 그러나 거기에도 정작 제대로 된 대안은 없었다.
학문을 장려하고, 어진 선비를 가까이하며, 개방적으로 의견을 수렴하고, 임금은 경연을 열심히 하고 사치풍조를 개혁하라는 등 예의 도학의 논리를 재탕 삼탕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후 임진왜란에 정묘, 병자 양대 호란을 거쳐 나중에 멸망할 때까지 200여 년간 늘 똑 같은 ‘말’만 되풀이하며 안방 차지 싸움에나 몰두했다. 조선에는 관중(管仲)이 없었다.
일본에선 거지도 돈을 원한다는 데 놀란 조선 통신사
일본은 달랐다. 일본의 사무라이는 ‘무사(武士)의 시대’가 열리던 초창기부터 매우 ‘경제인’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무사의 시대를 개막시킨 인물로 평가받는 다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 1118~1181)는 송(宋)나라와의 무역을 장악하여 힘을 발휘했다.
그는 송전(宋錢, 송나라 동전)을 대량으로 수입하여 일본 전역에 유통시켰는데, 일본에서 화폐경제가 전면화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다이라家의 권세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1147~1199)에 의해 키요모리 사후 바로 무너지고 일본 최초의 본격적 무사정권인 가마쿠라(鎌倉) 막부가 수립된다. 그러나 키요모리 때부터 시작된 화폐경제의 발전은 멈추지 않았다.
가마쿠라 막부를 이은 아시카가 막부(足利幕府)의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인 1429년, 세종이 파견한 조선 최초의 통신사 박서생(朴瑞生)이 일본을 방문했다. 그가 가장 놀란 것은 일본에선 돈만 있으면 빈손으로도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에 앞서 1420년 일본에 답례 사절로 방문했던 송희경((宋希璟)도 일본에선 거지가 쌀이 아니고 돈을 원한다는 것에 놀랐다.
일본의 화폐경제는 거지에게까지 퍼져 있었다. 돈만 있으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돈만 지불하면 이용할 수 있는 상업적인 숙소와 말 배 등의 상업적 운송수단이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선은 송희경, 박서생 등이 일본에 대해 놀랐던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화폐 통용이 전혀 정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이 화폐 유통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화폐제도가 정착하려면 상업의 발전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은 화폐제도를 정착시키려 하면서도 정작 상업은 극도로 억제하는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지 않았다.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기에도 대내외적 모든 차원에서 상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00여년의 전국시대를 마무리 짓고 통일 일본의 시대를 연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은 모두 理財에 밝았다.
포르투갈 스페인 등 멀리 서양 국가 등과도 무역을 했으며, 내적으로도 상업적 힘의 축적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오사카를 근거지로 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힘의 원천 중의 하나는 오사카 상인 집단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당시 힘을 기른 오사카 상인들은 나중에 도쿠가와 시대에도 그 힘을 잃지 않았다.
조선에는 주판이 없었다
조선과 일본의 그러한 차이, 특히 화폐 경제와 관련한 조선과 일본의 차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상징 중 하나가 주판이다. 간단히 말해 조선에는 주판이 없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기원을 둔 주판은 기원전 500년경에는 중국에서도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국사는 중국의 주판이 15세기경에는 한반도에도 전래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계기로 일본에 주판이 전래된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선 주판은 <조선왕조실록>의 그 방대한 기록에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한편 일본어로 주판은 소로반이라고 부른다. 산반(算盤)의 일본식 발음이다. 주판이 동남아 화교권에도 전래되면서 그 영역에서 불리던 ‘스완반’이라는 발음이 소로반의 유래다. 즉 일본에 주판이 전래된 것은 한반도가 아니라 다른 경로였다는 게 그 지칭과 발음에서부터 드러난다.
어떻든 이렇게 일본에도 전래된 주판은 도쿠가와 막부 시대부터 일본 전역으로 퍼져 매우 활발히 사용되기 시작하여 상인들의 필수품이 되었다. 상인 수업의 핵심은 ‘소로반’의 사용법을 배우고 그에 능숙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상인만이 아니었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 일본 전역의 260여개 번정부 모두에서 주판은 필수품이었다. 번의 회계를 처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전문 회계사는 산용자(算用者)라고 불렸는데, 그들은 산용장(算用場)이라는 작업장에서 매일 장부와 씨름했다. 당시 각 번들의 경제 규모는 미곡의 ‘석’을 기준으로 가늠되었는데, 100만 석 정도면 150인 정도의 전문 회계사가 상시로 일했다.
도쿠가와 막부 직속령이 700만석 정도였으니 단순 계산으로는 막부 직속에는 1천여 명의 전문 회계사가 있었다는 게 된다. 산용자는 박봉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분상으로는 모두 사무라이 계급이었다. 그래서 이들 산용자들을 ‘소로반 사무라이’라고 불렀다.
조선에도 그와 비슷한 일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많지도 않았을 뿐더러 신분상으로는 양반이 아니라 중인(中人)이었다. 주판은 당연히 사용하지 않았다. 회계를 담당하는 조선의 중인 실무자들은 ‘산가지’라는 매우 원시적인 계산 용구를 사용했다. 조선 후기 청(淸)에서 온 사신은 조선에서 산가지 같은 초보적인 용구로 나름 복잡한 계산을 하는 것 자체에 놀라워하곤 했다. 이렇게 원시적인 산가지가 조선에선 19세기까지도 사용되었다.
강화도조약으로 개항하여 근대 일본과 본격적인 접촉이 이루저지면서 조선에도 새삼 주판이 알려졌다. 그러나 여전히 주판은 널리 보급되지도 사용되지도 않았다.
한반도에서 주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다. 한일합방 이후인 1920년, 조선 총독부는 <조선주산보급회(朝鮮珠算普及會)>를 만들고 주판 교육을 전면적으로 실시했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의 주판의 역사는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주판은 지금은 전자계산기와 컴퓨터의 오피스 프로그램인 엑셀 등에 밀려 역사 속의 유물이 되었지만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필수적인 사무용품이었다. 은행이나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선 반드시 주산을 익혀야 했다. 지금은 ‘토익’이 중요하지만 당시까지 최고의 스펙은 주산 실력이었다. 상고(商高)에서 주판을 열심히 익히면 고졸만의 학력으로도 곧바로 사무직으로 취직이 가능했다.
‘경제적 동물’이란 인간만이 누리는 명예다
일본인들을 ‘경제적 동물’이라고 일컬었던 때가 있었다. 1970~1980년대 일본 경제가 세계를 놀라게 할 때였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 대한 이 같은 지칭을 비하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일본인 자신들도 때로는 그렇게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적 동물이라는 칭호는 결코 불명예가 아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 그처럼 경제적 행동을 하는 것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근대인은 달리 말하자면 경제적 합리인이다. 그래서 경제적 동물답지 못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전근대적 한계일 수밖에 없다.
조선에는 주판이 없었고, 한국인들은 ‘경제적 동물’을 우습게 아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사회주의가 바로 그랬다. 사회주의는 주판을 튕길 줄 모르고 경제적 동물답지 못해야 오히려 이상적인 인간형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게 바로 ‘사회주의적 인간형’이다. 역사는 그런 인간형의 구현에 몰두했던 체제가 어떻게 퇴락하고 몰락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주판을 튕길 줄 아는 경제적 동물을 몰아낸 자리에 등장한 것은 이상적 세계가 아니라 지옥이었다. 북한이 바로 그렇다. 조선도 비슷했다. 조선은 ‘계산’을 우습게 알고 천시하다 망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에도 여전히 그런 한계를 보이는 심지어 자랑스러워하는 인간 유형이 많다. 이래선 일본을 결코 이기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