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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南漢山城) !!
서울의 내 외곽 어느 성과는 다르게 이곳은 역사에 남은 비참한 치욕의 산성으로 각인(刻印)되어 있는 곳입니다. 이 피눈물의 남한산성의 역사적 사실을 필자가 알고 있는 자료 범위 내에서 소개코자 합니다. 지루하지만 읽어 보세요.
1.조선왕조 인조(仁祖)와 남한산성
제16대 인조(仁祖)는 광해군의 폭정으로 1623년 김류 이귀 등의 반정(反正)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중국에 대한 외교정책으로 광해군 때의 청(淸)나라 명(明)나라에 대한 중립정책을 반대하고 명나라와 친하고 청나라를 적으로 삼는 반청친명(反淸親明) 정책을 폈다. 당시 중국대륙에는 기울어져 가는 명나라와 날로 부강해지는 청나라(후금)가 한창 싸우고 있었다. 이런 판국에 청나라를 적으로 삼는 조선을 청(淸)은 가만 둘리 없었다.
1636년 청(淸) 태종은 이를 이유로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입 하였다. 이것이 조선역사상 유일무이한(唯一無二)하게 외국과의 전쟁에 항복한 치욕의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인조는 전쟁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종묘사직 신주와 태자와 왕족들을 피신시키고 인조 자신은 조정을 남한산성으로 옮겨서 청나라에 항전하였다. 그러나 봉림대군(인조의 둘째아들)이 피해있던 강화도마저 함락되자 남한산성내에는 식량 부족과 추위 속에서 47일 동안 청나라 맞서 항전하였지만 역부족 이였다. 성안에서는 [싸우다죽자]의 김상헌파와 [무조건 항복하고 화해하자] 최명길파의 팽팽한 갈등 속에서 인조는 결국 1637년 1월 30일 세자(소현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걸어 나와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2.치욕의 삼전도(三田渡)
삼전도는 송파구 삼전동에 있던 한강 상류의 나루터이다.
지금의 성동구 왕십리와 뚝섬 사이 살곶이다리(箭串橋-전관교)를 지나, 신천동과 잠실동이 있는 하중도(河中島)를 건너 송파에 이르도록 뱃길이 마련된 곳이다.
인조는 소현세자및 신하들과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을 하기위해 삼전도에 왔다. 청 태종은 조선왕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기 위해서 군막에 설치한 127개의 계단위에 수항단(受降壇)을 쌓고 높이 앉아 있었다. 인조는 청 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 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 번씩 이마를 땅에 대고 조아림)로 항복을 표시했다. 이때 인조 임금의 옷차림은 임금의 의복인 곤룡포(袞龍袍)가 아닌 평민 복장의 남색 옷이었다.
그리고 겁 없이 청(淸)에 대항한 죄인의 몸이라는 이유로 정문이 아닌 서문(샛문)으로 나오는 치욕을 감당해야 했다.
왕자와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초라한 인조임금은 127개의 계단을 오르며 다시는 청을 무시하지 않고 상국(上國)으로 모시겠다는 서약을 하게 된다. 127개의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절을 세 번하고 아홉 번 이마를 계단에 쥐어박으며 올랐다. 인조임금의 이마에서 피가 터져 가슴에 눈물과 피가 절절히 흘렀고 이를 보는 백성들은 통곡을 하였다. 조선의 자존심은 완전히 무너졌다. 인조임금이 이마를 찧으며 절을 하는 도중에 청(淸) 태종 홍타시는 인조의 절을 멈추고 소변이 마려워 밖으로 나가 오줌을 갈기는 장면도 있었다. 이때 조선의 굴욕은 서릿발처럼 꼿꼿해졌다.
그럼에도 인조는 그 추운 땅, 겨울 밭에서 청 태종 홍타시가 물러가라고 할 때까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다음 그리고 치욕스런 항복조인식이 치러진다.
역사서에는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행한 항례(항복 의식)를 “삼전도의 치욕”이라고 부른다.
3.삼전도비(三田渡碑)
지금 삼전도비는 롯데월드에서 석촌호수 건너편 마을 속에 조그마하게 마련된 장소에 세워져 있다. 삼전도비의 원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公德碑)”이다. 풀이하면 “큰 나라 청 황제의 공과 덕을 기리는 비”라는 뜻이다. 이 비는 병자호란이 일어난 지 3년 뒤 인조 17년(1639년) 12월에 청나라의 강요에 따라 병자호란 당시 청 태종의 공적과 덕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전승비다. 치욕의 비다.
삼전도비의 문화재적 의미는 비석 중에 3개국 문자가 새겨진 유일한 것으로, 전면 오른쪽에는 만주(여진) 글자로 20행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몽고문자 20행이 새겨져 있었다. 뒷면에는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이 비문은 인조의 특명으로 도승지 겸 예문관 제학이던 이경석이 지었고, 글씨는 당시 명필인 오준이 쓰고, “대청황제공덕비”란 전서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와,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거짓 내용이다.
삼전도비는 비록 조선이 청에 항복하게 된 경위와 청 태종의 침략을 “공덕”이라 찬미한 굴욕적 내용이지만,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후세에 일깨워주는 소중한 역사적 교훈이 된다. 또 비문이 새겨진 만주․ 몽골문자는 조선시대 외국어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항복문서 조항에는 청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받들 것과 청나라 군대가 물러가고 난 후 어떠한 경우라도 남한산성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아서는 안 된다는 “절대 산성을 수축·개축하지 마라”조항이 있다.
몇년 전에 신문에 누가 이 비석에 붉은색 스프레이를 칠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매우 좁은 소견의 비석 훼손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국가를 침략한 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도 역사인 것처럼 감추고 싶은 치욕의 역사도 엄연한 역사다.
이 비석은 청일전쟁까지 세워져 있다가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치욕스럽다하여 고종 32년(1895)에 이 비를 강물 속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일제 강점후(1913년)에 일제가 우리 민족이 원래 힘이 없어 다른 민족에게 지배되어 왔다는 논리를 증명하기 위해 다시 건져 올려 세워놓았다. 그 후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마자 지역주민들은 비석을 땅속에 묻어버렸는데 1963년 대홍수 때 그 모습이 드러나자 정부는 치욕적인 역사를 되새기자며 다시 세웠다. 서울시는 1983년 5월 지금의 자리인 석촌동 일대에 500평 규모의 소공원을 조성하였다.
4.비운의 소현세자
소현세자는 1612년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인조반정과 함께 세자로 책봉되고,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부왕 인조와 같이 항전하다가 패하여 청군(淸軍)에 항복, 청(淸)과 군신(君臣)의 의를 맺고 동생인 봉림대군(鳳林大君)과 볼모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하였다. 볼모가 된 소현세자는 함께 잡혀 온 동생 봉림대군과는 달리 대륙의 정세를 살피면서 이미 강대국으로 자리 잡은 청나라와의 관계를 원활히 유지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독일의 선교사와의 교류하면서 사상 면에서 개방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반면 봉림대군(효종)은 부왕과 조정의 뜻에 좇아 청나라를 철천지원수처럼 여기며 분노와 증오의 세월을 가슴에 쌓으며 보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수행원 3백여 명과 함께 심양에 “심양관”을 짓고 거주하였다. 이곳이 사실상 중국에 설치된 우리나라의 첫 영사관인 셈이다. 그곳에서 청나라는 소현세자를 통해·조선에 대한 대부분의 업무를 처리했다. 실제로 조선의 대화 창구 역할을 했는데 그의 인품과 업무처리가 뛰어나서 청나라 측에서의 칭송도 자자했는데 그러한 명성이 오히려 인조를 자극하여, 당시 보호국이나 다름없는 조선의 상황에서는 친청(親淸) 성향의 국왕을 세우는 것이 청나라 입장에서는 해될 것이 없으므로 심심찮게 국왕 교체설도 청나라에서 흘러 나왔고, 이에 인조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정탐 형식의 사자도 자주 보냈다고 한다.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의 위상이 올라가면 갈수록 부왕인 인조의 정치적 입지는 점점 좁아지는 상황에서 인조는 점차 소현세자를 불신하게 되었고 미운털이 잔뜩 박히게 된 것이다.
*소현세자의 볼모 생활
조선 국왕 인조(인조 15년정월(1637)가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행한 후, 소현세자는 그대로 청 진영에 들어갔다가 2월 5일 돌아왔다. 돌아온 지 3일 후인 2월 8일 예친왕 도르곤에게 인도되어 회군하는 청군을 따라 북행하게 되었다. 일행은 세자와 세자빈 강씨(姜氏), 나중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 이하 관원 180명이었다.
소현세자 일행이 심양에 도착한 이후 영구 귀국하기까지 거의 8년을 심양에 머물렀다. 그는 약 1개월씩 2번 서울에 머물렀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생애의 중요한 시기를 인질로서 생활했다.
소현세자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출입의 제한은 받았으나 그 이외 큰 불편은 없었다. 세자는 청과 조선간의 현안을 중재해 갔으나 양측으로부터 다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하였다.
청과 조선 사이의 현안은 주로 명(明)나라 공격을 위한 조선의 원병, 식량지원, 등이었다
소현세자의 독자적 결정이 어려웠던 이유는 부왕과의 관계였다. 인조는 청(淸) 조정과 친숙한 소현세자에게 왕위를 넘기라고 청이 요구할까 두려워했다. 부자관계는 결국 파국을 맞게 된다.
세자가 주로 접촉하였던 인물은 청(淸) 태종의 뒤를 이을 가능성이 높은 도르곤과의 친교였다. 그래서 소현세자의 심양 활동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소현세자의 청나라에서의 입지가 늘고 또 청에 우호적으로 되어가자 인조의 경계는 심해졌다. 소현세자는 청이 중국을 차지할만한 자격이 있고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세자는 청나라가 명(明)을 정벌하는 원정에 2번 참여하였다.
청나라 태종의 아들 도르곤은 북경에서 소현세자와 서양인 독일 선교사 아담 샬과의 만남을 주선하였다. 서양의 과학 기술을 높이 평가하던 도르곤이 조선의 발전을 위해 배려한 조치였다.
중국은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 초에 걸쳐 기독교가 전파되고 있었다.
그리고 1650년 북경에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인 천주당(天主堂, 南堂)을 세웠다.
뛰어난 과학자이며 선교사인 독일의 아담 샬은 친절을 다하여 서양역법을 도입하려는 소현세자를 도왔으며, 자신이 고심하여 한문으로 번역한『천문역산서(天文曆算書)』와 여지구(輿地久-지구본)를 주었고 천주상(天主像)까지 선사하였다.
*소현세자의 귀국과 의문의 죽음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때 끌려간 조선인 포로 가운데 1만 3천명을 인솔하여 영구 귀국길에 올라 실로 8년만인 인조 23년(1645) 2월 18일 서울에 도착했다. 수많은 서양문물도 가지고 왔다. 1643년 청 태종 사망 후 순치제(6세)의 섭정이 되어 사실상 황제 역할을 하고 있는 도르곤과 친숙한 소현세자의 귀국으로 인조는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도르곤이 조선왕 인조에게 소현세자에게 왕위를 양위하라는 지시를 내릴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인조는 귀국한 소현세자에게 신하들이 귀국을 축하하는 인사마저 못하게 하였다.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두 달 만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오한과 발열 증세를 보이던 세자는 발병한지 3일 만에 창경궁에서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았다. 4월 26일이었다. 그렇게 중하지도 않던 병세가 하루아침에 급변한 것은 처방이 잘못된 탓이며, 매일 침을 놓던 의관(醫官) 이형익(李馨益)에게 책임이 있다는 여론이 일었다. 이형익은 3개월 전에 인조가 아끼는 후궁인 소용(昭容) 조(趙)씨의 추천으로 특채된 자였다. 조씨는 소현세자빈 강씨와 사이가 나빴다.
국왕이나 세자가 사망할 경우 치료를 담당한 시의(侍醫)들은 일단 책임을 지고 처벌받는 것이 상례인데 인조는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현세자의 시체를 3일 만에 입관시켰다. 또한 입관할 때 입회하는 인원도 관례를 어기고 제한하였다. 즉 대소렴(大小殮) 때에는 빈궁․당상관 등이 입회해야 하는데도 이를 불허하고 인척 4~5인에게 소렴을 맡겼다.
소현세자는 과연 학질로 급서했는가.『인조실록』에는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세자의 시신은 진흑(盡黑-매우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으며 7혈(입 코 눈 항문등)에서 출혈하고 있어 마치 독약에 중독된 사람 같았다.
이 증언은 소렴에 참여하였던 종실인 진원군 이세완(李世完)의 처가 한 것이다. 그녀는 바로 소현세자의 모후인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서제(庶弟)로 세자에게는 이모가 된다.』
시신이 검게 변하고 출혈은 독약을 먹고 죽은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며 침을 잘못 놓아서 생기지는 않는다.
소현세자는 아버지 인조와 소용 조씨에게도 용납대상이 못되는 정치적 정적이었다. 청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쌓인 인조와 청을 인정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소현세자의 태도는 상극이었으며, 인조는 왕위를 아들 소현세자에게 양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감에 시달렸다(인조에 대한 인물평은 권모를 잘 쓰고 의심이 많다는 것이다). 세자빈과 사이가 나쁜 소용 조씨는 세자가 즉위할 경우 그 운명은 불을 보는 것처럼 뻔한 것이었다.
*소현세자 유족의 비극
소현세자의 사망 후에도 인조의 세자에 대한 잔학 행위는 그치지 않았다. 소현세자의 장지와 장례일 문제도 소현세자빈 강씨의 희망은 일축되었고 소현세자의 아들인 세손을 왕위계승자로 정위하자는 상소도 일축하었다. 그러던 중 5월에는 둘째왕자 봉림대군(후일 효종)이 귀국하였다.
인조는 세자가 죽으면 세손에게 왕위를 전한다는 왕위계승의 원칙을 어기고 둘째 왕자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기로 결심하고 중신회의를 열었다. 여러 중신들이 인조의 봉림대군에 대한 양위의 부당함을 상소하였지만 인조의 억지와 강변을 꺾지는 못했다. 세손이 왕위계승 자격을 잃음으로써 소현세자 유족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소현세자는 이석철, 이석린, 이석견 등 3남과 3녀를 남겨두었다.
인조는 소현제자의 유족을 제거 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결국 인조는 소현세자에 관계되는 소현세자빈, 소현세자의 세 아들, 소현세자빈의 친정어머니, 소현세자의 장남인 이석철의 두 보모상궁, 소현세자빈의 형제 두 사람, 등을 제주도등 여러 곳으로 귀양 보내어 죽였다.
이모든 기록은 조선왕조의『인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소현세자빈의 누명이 풀리고 복권이 되기에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숙종 44년(1718)에 이르러서야 소현세자빈은 복권되었다 약 80년 만이었다
역사라는 것이 승리자에게 유리하게 기록되게 마련이어서 예를 들어 세조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는데 노산군으로 있던 단종이 복권되기에는 300년이 걸렸다. 이 역사의 기록의 편향적인 문제는 지금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계속 집권을 하려는 것이다.
소현세자가 즉위하지 못함으로써 한국사는 아까운 기회를 잃었다. 그의 세계관은 주자학의 명분론을 넘어섰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개혁하려는 뜻을 가졌으나 냉혹한 권력의 속성에 희생되었다. 모든 외침에 국가는 어려움을 당하지만 일본의 침략도 청나라의 침공도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낙후된 조선의 실상을 깨닫고 더 넓은 세계에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조선의 지배층은 더 어리석은 길을 택했다. 이점은 제한적이나마 서양과의 꾸준한 교류로 서구 문물을 소화할 능력을 길렀던 일본과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는 매우 아쉬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일본은 명치유신 아라는 새제도의 변신이 성공적으로 이룩된 반면 조선은 모든 개혁세력(갑오경장 갑신정변)등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도올 김용옥 같은 학자는 소현세자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인조와 아들 소현세자간의 부자간의 권력 갈등으로 일어난 비극은 21대 왕인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으로 재현되었다. 좋은 역사보다는 좋지 않은 역사가 더 잘 되풀이되는 법이다.
5.삼학사 (三學士)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청(淸)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다가 참형을 당한 세 충신 학사들이다. 송파구 석촌동 삼학사길 은 이 세 충신을 기념하는 길이다.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를 말한다. 청태종(淸太宗)이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에 침입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했을 때, 조정 신하들 사이의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였다. 최명길(崔鳴吉) 등은 청나라와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삼학사는 결사항전(決死抗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세 사람은 청(淸)을 반대한 죄목으로 청나라 심양(瀋陽)에 잡혀가 참형(斬刑)되었다. 이야기의 처참한 기록이 많지만 지면 관계로 여기서 맺는다.
6.환향녀(還鄕女)
환향녀(還鄕女)는 보통 정조 없이 여러 남자들을 상대하는 여자들의 대명사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절개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 즉, “환향녀(還鄕女)”에서 유래한 말이다. 조선시대 환향녀들은 정절을 잃었다는 이유로 남편들로부터 공개적으로 이혼 청구를 받고 사회적으로 냉대 받은 여성들이었다.
환향녀는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 많이 발생했다. 주로 북쪽 지방에 사는 여인들의 피해가 컸다. 특히 의주에서 평양까지는 미인이 많아 벼슬아치나 양반의 처까지도 끌려갔다. 청나라에 끌려간 여자들 중 대부분 돌아올 수 없었으나, 많은 돈을 주고 돌아온 여자들도 “환향녀”로 불리면서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병자호란으로 삼전도에서 인조 임금이 청나라 태종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함으로써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고 더욱 치욕스런 일이 그 다음에 일어났다. 청나라 군사가 철수하면서 50여만 명의 조선 여자를 포로로 끌고 간 것이다. 청나라는 이들 여성 포로들을 나이와 신분에 따라 값을 매겨 이를 갚으면 돌려보내 주었다. 돈이 없어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거니와 값을 턱없이 높게 불러 생기는 비극도 있었다.
청나라 심양을 다녀온 좌의정 최명길은 한 처녀를 값을 정하고 되찾으려고 했는데 청나라 사람이 뒤에 약속을 깨고 값을 더 요구했다. 그러자 그 처녀가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고 말았다. 이에 끝내는 그녀의 시체를 사 가지고 돌아왔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값을 치르고 돌아오는 것을 속환이라 했고 돌아온 여자를 환향녀라 불렀는데 환향녀에 대한 가정과 사회의 냉대적 비극이 속편처럼 잇따랐다.
인조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정조를 잃고 돌아온 며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혼을 요청을 했다. 조정에서는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사족의 부녀자가 한둘이 아니니, 십분 참작하여 결정하라고 중재를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남자들이 이혼을 청구할 경우에는 먼저 왕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청나라 심양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만나자 부둥켜안고 통곡하기를 마치 저승에 있는 사람을 만난 듯이 하여, 길 가다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부모나 남편으로 돈이 부족해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장차 돈을 벌어서 값을 치르고 돌아올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조선에 돌아와도 정조를 잃은 명목으로 이혼을 당하게 되어 조선에 돌아오지 못하는 허다한 부녀자들은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는 것이다.
그때 돌아오지 못한 부녀자들의 원혼이 지금도 중국 허공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전쟁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비록 잡혀 가지는 않았지만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서도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지금 우리나라가 외국인 근로자들을 학대한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말도 안 되는 짓이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절대로 순수한 단일민족의 혈통이 아니고 일본 중국 인도 폴투갈 등의 피가 섞여있는 혼합 민족이다. 우리나라는 자의든 타의든 국제결혼의 역사가 깊은 나라다
비극은 전쟁으로 더렵혀진 몸을 정조를 잃었다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유교 문화의 관념이 더 큰 슬픔이 아니었을까?
이 뒤로 사대부집 자제는 거의 다시 장가를 들고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고 [인조실록]은 기록되고 있다.
환향녀라는 말은 세월을 거치면서 오늘날 “화냥년”이라는 말로 남았는데 국어사전에는 화냥년을 일컬어 “남편 아닌 사내와 관계를 하는 계집”이라 쓰고 있다. 환향녀들이 억울한 삶을 마치고 죽은지 몇 백 년이 지났으되, 이 여인들에 대한 비겁한 사대부들의 생각은 화냥년이라는 말 속에 오늘날 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
당파 싸움만 일삼으며 오랑캐 청나라가 쳐들어오게 만든 사대부들이 가소롭게도 여인들이 정절을 지켜 자결하지 않았다고 핍박하는 한심스러운 일이 우리나라 땅에 지식층 사회에서 벌어진 것이다. 조선시대 여인들의 일생은 참으로 “한”그 자체였던 것이다.
참으로 서글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그 이후 청나라는 본색을 드러내었다. 조선에서 좋은 것, 귀한 것은 모조리 쓸어 갔고 이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이란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다.
어린 여자아이까지 종으로, 성노리개로 끌고 갔다. 끌려간 수는 무려 17만 명이나 되었고 그곳에서 다시 서역(西域)으로 팔려간 사람도 많았다고 기록되고 있다.
세월이 흐른 후 쓸모가 없어진 사람들은 채홍사(採紅使-처녀와 여자를 모집하는 관리)를 동원하여 강제로 모집하여 또 교체하였다. 나이 들고 병든 사람이라도 혈육이라 돌려받고자 했고 10년이 지난 후 5만 명이 돌아왔는데 그 비용, 즉 속환으로 양반들은 100냥, 선비들은 50냥, 일반백성들은 5냥으로 정했다. 환향녀 중 2만 명은 1년이 채 못 되어 자살했다.
조선군대는 약하고, 조정은 무능하고 백성들은 하나 되지 못하여 10년 이상 심신을 능욕당하고도 고향이라고 돌아왔건만 따뜻한 위로는커녕 손가락질을 하며 옷에는 까만 칠, 빨간 칠을 하게 하여 환향녀라 놀려댔던 것이다. 한국판 주홍글씨 인 것이다.
나라가 약해지면, 국민이 하나 되지 못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처절하게 알려주는 역사의 체험이다.
이스라엘 국민들은 식사 때마다 우리는 이집트 파라오의 종이었다고 말한다. 출애급의 뼈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는 다짐인 것이다.
이상의 모든 피를 토하는 역사적 사실들이 이곳 남한산성에서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떠하며. 무엇을 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남한산성의 진달래와 철쭉은 붉게 물들고 있다. 진달래와 철쭉의 붉은빛은 원한에 사무쳐 우는 두견새의 목에서 나온 피라고 한다. 남한산성에서 짓밟힌 조선여인들의 원혼이 두견새의 울음을 통하여 진달래에 물들고 있다.
그 남한산성에서 4월 향락을 모임을 즐기고 있다.
杜宇竟何冤(두우경하원)-두우(두견)는 도대체 무슨 원망이 그리 많길래
年年叫蜀門(년년규촉문)-해마다 사천 지방에서 울어 쌌는가
至今銜積恨(지금함적한)-지금도 쌓인 한을 가득 물고서
終古吊殘魂(종고적잔혼)-쓰러진 혼백을 언제까지나 애통해하네
芳草迷腸結(방초미장결)-향기로운 꽃에는 애간장이 닳았고
紅花染血痕(홍화염혈흔)-붉은 꽃에는 핏자국이 물들었구나!
山川盡春色(산천진춘색)-산과 강은 온통 봄빛으로 가득한데
嗚咽復誰論(오열복수논)-저리도 흐느낌을 그 누가 알아줄 텐가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