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전 유대의 한 산림에서 여러 그루의 나무가 잘려나갔다.
그 중 하나는 사람을 죽이는 사형 도구로, 다른 것들은 사람들이 앉는 의자나 가구로 재탄생 됐다.
그 도구는 어떤 분의 몸을 못 박아 죽일 십자가가 되어 갈보리라는 산에 서서 그 분의 피로 흥건히 적셔졌다.
그 십자가는 그분과 일체가 되어 인류를 구원하는 도구의 길을 간 것이다.
다른 나무들은 사람들의 도구나 가구가 되었다가 세월이 흐른 후 썩어 없어졌다.
십자가의 길을 간 나무는 적지만 사람의 도구가 되는 나무들은 셀 수가 없다.
십자가의 길을 간 나무는 피가 흘러내려야 하지만 사람의 도구가 되는 나무들은 광택이 난다.
십자가의 길을 간 나무의 용도는 오로지 그분 한 분을 위한 것이지만
사람의 도구가 되는 나무들은 정해진 상대가 없다.
마태복음16장에 빌립보 가이사랴에서의 장엄한 질문과 심오한 대답이 등장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그 질문은 하늘에서 인간에게 주신 중심 질문이요, 그 대답은 인간이 하늘을 향해 하는 중심 대답이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신앙이 하나님의 계시였다고 말씀하신 후 어떤 일이 벌어졌다.
하나님의 아들의 길이 치욕과 죽음의 길임을 언급하시자 당황한 베드로가 항변한 것이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태어나자마자 우리는 삶의 현장에 선다.
자라가면서 사람은 이 삶의 현장에 배어있는 엄중한 사실과 부딪치게 된다.
인생이라는 게 유쾌하거나 즐거워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어떤 여정이라는 것,
이 여정은 수많은 생각, 수많은 의도, 수많은 선택, 수많은 방법이 요구되는 의무라는 것,
어떤 여정이든 그 사람의 자유이며 이 자유를 억압하는 자는 없다는 것,
그러나 모든 사람에겐 그의 여정에 대해서 어떤 책임 추궁과 결산이 따른다는 것,
영광에 이르는 길은 단 하나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태어났으니 먹고 마시고 누리고 즐기자고 할 일이 아니다.
나아가 이것은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내가 배우고 내가 믿고 내가 아는 것은, 인생의 길은 본질 상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사람의 길,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길.
외면적으로 똑 같은 생활 모습이라도 그것이 인간의 길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길이 될 수 있다.
행위들 자체만을 두고 판단할 수는 없기에, 행위의 본질이 무엇이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춘향이가 이 몽룡을 위한 열녀가 될 수도 있지만 돈과 쾌락만을 쫒는 간부가 될 수도 있다.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을 산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와 무관한 것이었나,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영위된 여정이었나 자기 영광을 위한 여정이었나인가를 두고 판단해야 한다.
주님과 연합된 자로서 그 은혜를 감사하며 그분의 피가 흐르는 십자가로서 산 것인가,
자신과 인간의 엉덩이를 받치기 위한 의자와 소파로서 산 것인가를 헤아려야 한다.
베드로가 자기 안일만을 염려하여 주님의 십자가 행을 저지한 것은 아니었다.
주님의 십자가 행은 이제껏 주님을 믿고 따라온 베드로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행으로 말미암아 베드로를 비롯한 이 세계와 전 우주적 구속이 가능했던 것이다.
인간은 이런 주님을 모신 도구여야 하며, 인간의 일생은 그분 구속의 사랑 안에서 믿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여정이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길이다.
그런데 이 세상은 사람의 길, 자기의 길, 인본주의 길이 홍수처럼 넘치고 있다.
2024. 7. 31
이 호 혁
첫댓글 하나님을 경배하는 길을 가게 하소서!
아멘! 나의 삶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여정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길을 가게 하소서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로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