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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4월21일(수)맑음
가야 할 곳에 이미 도착했고
있어야 할 곳에 이미 와있다,
지금 이대로 본래 바로 그 사람이여
세계가 뜰앞에 펼쳐진다
황금빛 햇살을 받은 참새가 노래하며 푸른 대나무 사이를 날아다닌다
여기가 어디인가? 여기도 저기도 아닌 어디에나 이곳!
지금도 아니고 다른 때도 아닌 언제나 이때!
나도 아니고 남도 아닌 늘 그 본인
마음도 아니고 몸도 아닌 것이 보고 듣는 오늘 밤
눈으로는 나르는 금시조를 삼키고 귀로는 달 굴러가는 소리를 뱉는다
2021년4월22일(목)맑음
어제저녁부터 인터넷이 끊겨서 KT지점에 고장신고를 했다. 오늘 오후에 기사가 와서 수리해서 인터넷이 복원되었다.
<생각의 파도를 타는 서핑의 달인>
생각의 세계에 뛰어들자. 그러면 정보가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시공간으로 들어온 것이다. 여기는 有爲의 세계이다. 업-형성의 영역이다. 여기서는 개인의 뇌가 인류의 집단지성과 연결되어 동시에 공유된다. 사적인 것이 집단적으로 공유될 수 있고, 공적인 것을 사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정보의 거래에 관한 공정한 규칙이 필요할 것이다. 개인의 기억정보가 해킹될 수도 있고 조작될 수도 있다. 즉 개인에게 저장된 정보와 개인이 생산한 정보는 외부의 힘으로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기에 무엇이 진실인지 판가름하기 어려운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생각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상황-가변적이며, 임의적이고 한시적이며, 불확정적이며, 불확실하며, 확정-불가능하다. 다만 통계적 확률적으로만 예측가능할 뿐이다. 생각의 세계에 갇혀 사는 인간의 심리는 기본적으로 불안하며, 불만족하며, 의심하며, 흔들린다. 그래서 뭔가 확실한 것, 예측가능한 것, 믿을 수 있는 외부대상 혹은 정신적 경지를 찾아서 영혼의 안식을 구하려 한다. 그러나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생각의 영역 안에서는 휴식을 찾을 수 없다. 비록 위안과 도취, 휴양이나 명상을 통해서 한시적인 안식을 찾을 수 있겠지만 흔들리지 않는 불퇴전의 안심은 얻을 수는 없다. 인위적인 수단으로 얻어진 안심은 有爲法이기에 결국 부서지고 만다. 無爲自然은 생각의 영역을 벗어나야만 누릴 수 있다. 禪은 생각의 밖으로 탈출하는 길을 제시한다. 생각의 세계를 벗어나라. 그러면 본래부터 이미 여기에 와있는 大安心을 누리리라. 생각으로 이뤄진 세계자체가 바로 생각에 붙들리지 않고 생각에 머물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諸行(有爲의 영역, 생각의 세계)가 無常하다고 했다. 무상하다는 것은 늘 자기를 갱신하여 찰나도 머물지 아니하고(無住) 어떤 개념이나 언어문자에도 포획되어 관리될 수 없다는 말이다. 생각을 묶어둘 수 없다. 생각은 엔트로피이다. 생각은 바로 생각이 아니면서 생각일 뿐이다. 그래서 생각은 끝없이 출렁이는 파도이다. 파도에 빠지지 말고 파도타기를 즐기는 서핑의 달인이 되어라.
무아란 개아를 넘어 우주와 한 팀을 이루라는 가르침이다.
모든 존재는 양자 상태이다. 확률론적으로 미결정상태이다. 의자에 누군가가 앉기 전까지는 의자인지 아닌지 결정되지 않은 불확정상태에 있다. 누군가 앉을 때 의자로 결정된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은 ‘거시기’이다. '거시기'는 양자론적으로 불확정상태를 지칭한다.
주관과 객관 사이에 걸려있는 힘(권력, 명령 관계)과 연결(작용과 반작용)을 보라.
①나귀(관측주체)가 하늘(관측대상)을 본다.
②하늘이 나귀를 본다.
③나귀와 하늘 사이의 힘과 관계를 본다.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명사를 동사화해서 세상을 보라. 명사는 비결정 상태를 결정화crystalize한다. 동사는 사건의 관계를 드러낸다.
나도 남에게는 남이다. 모두가 타자이다. 타자를 자기로 공감하라. 타자를 확장된 자아로 포용하라. 그러면 자기와 타자가 에너지 교류가 일어나 동일한 수준으로 통합된다. 자타불이의 각성은 공감의 희열을 동반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데까지 말해야 한다>
답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 질문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질문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경우에만 답이 가능하다. 질문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뭘까?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일상 언어가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상 언어가 참된 논리적 구조를 지니지 못한 탓에 세계에 관한 충실한 그림이 되지 못하고, 따라서 온갖 혼돈과 착각이 빚어진다. 이런 난국을 피하려면 진위를 완벽하게 판정할 수 있는 이상적인 언어가 필요하다. 현실에서 그것에 가장 가까운 언어는 자연과학의 언어지만 철학의 과제는 일상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고 단점을 보완한 이상理想 언어를 만드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그러나 이상언어를 만들려고 했던 실증주의자의 시도는 실패했다. 그들은 언어를 과대평가한 것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관해서 알려거든 의미를 묻지 말고 용도를 물어라는 관점으로 바뀌었다. 일상 언어에서 발언이나 진술은 텍스트보다 그 텍스트를 둘러싼 맥락, 즉 콘텍스트가 중요한 경우가 많다. 일상 언어는 말놀이, 언어게임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 -비트겐슈타인
따라서 최상의 가르침은 이심전심, 默然而通묵연이통(묵묵한 가운데 저절로 통하다)이다. 그다음 단계는 언어로 통하는 선문답이다. 선사들은 말할 수 없는 실상을 언어문자를 동원하여 제자의 눈앞에 드러낸다. 말을 떠난 진리를 말로써 드러내려고 제자의 면전에 세간의 언어를 집어던진다. 제자는 선사가 던지는 말에 깨어나든지 희롱당하든지 양단간에 처하게 된다. 선사의 언어는 칼날이며 가시덤불이면서 미끼이며 사다리가 된다. 한마디로 선사의 말은 독이면서 약이다. 선사들이 선문답에서 사용하는 언어문자는 방편적 도구이다. 선사의 언어는 살활자재, 묘변막측하며 신출귀몰하다. 선사는 언어 유희의 달인이다.
海低泥牛含月走, 해저니우함월주
巖前石虎抱兒眠; 암전석호포아면
鐵蛇鑽入金剛眼 철사찬입금강안
崑崙騎象鷺鷥牽. 곤륜기상노사견
바다 밑 진흙 소가 달을 물고 달리니
바위 앞 돌 호랑이는 새끼를 안고 존다
쇠 뱀은 금강의 눈을 뚫고 들어가는데
곤륜산을 태운 코끼리를 해오라비가 끌고 간다
2021년4월27일(화)맑음
부산 반송 길상사 일진선사의 선 강의
오후 4:20~6:10. 참석자: 원담, 민재거사, 홍보살
1. 깨달음은 사회적 현상이다. 깨달음은 인류의 집단지성의 최정점에서 일어난 사회적 현상이다. 선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遮詮, 雙遮)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한다’(言詮, 雙照)는 두 가지 방편을 구사한다. 이것을 遮照同時(차조동시, 막고 여는 것을 동시에 함)라 하며, 조사선이 발휘하는 활발발한 수단이다.
[참고]
詮전: 사리에 맞게 말로 설명함.
遮詮차전: 말을 막음으로써 도리를 드러냄. 言詮언전: 말로서 도리를 드러냄.
초심자에겐 분별망상을 쉬기 위해 언어문자를 떠나라고 가르친다. 언어문자에서 벗어난 안목이 열려야만 실상무상을 직접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문자를 멀리하라는 지침은 초심자에게 주어지는 한시적 방편이다. 그러나 깨달은 분들은 세상 가운데서 사람을 만나 그들의 안목을 열어주기 위해서는 頭頭物物毘盧身, 百草頭上明明佛(두두물물비로신:낱낱의 물건이 모두 비로자나 법신불이요, 백초두상명명불:온갖 풀들이 밝고 밝은 부처님이구나)이라고 언어문자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방편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遮詮차전(언어문자를 떠나라)을 너무 강조하면 수행이 고식화, 정형화되어 사회적 지성과 단절을 가져와 세상과 소통할 수 없게 된다. 인류는 언어와 문자로 소통하면서 문명을 건설하였기에, 언어와 문자는 세상이 통하여 흐를 수 있게 해주는 최고로 중요한 수단이다. 생각을 끊는다고 사유하는 법까지 잊어버리면 언어문자를 활용할 수 없게 된다. 차전수행을 오래하게 되면 사유하는 기능이 퇴화하여 언어문자에 대한 감각을 잊어버리게 된다. 한마디로 시대에 뒤처져 산속에 고립된다. 이런 현상이 현재 조계종 선원의 구참 수행자들에게 나타나고 있다. 문자도 보지 않고 말문을 닫고 주구장창 앉아있기만 하는 선방수행이 무슨 결과를 낳았는가? 언어문자를 막음과 언어문자를 씀은 서로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도와주는 상보적 관계이다. 그러므로 입을 닫음(開口卽錯개구즉착, 입 열면 그르친다)과 입을 엶(口脣皮放光, 구순피방광, 입술에서 광명이 비쳐나온다)을 쌍쌍으로 굴리며 언어문자에 자재해야 한다.
2. 일진선사: 중도 정견을 사회적 맥락으로 적용한다면 佛智慧불지혜가 역사에 개입하여 인간해방 萬物和諧만물화해의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 방향에서 보수와 진보 양단을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超歷史的초역사적인 역사참여로 해석한다.
<원담의 첨언> 超歷史的이란 말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서옹스님이 일본의 임제대학에 다닐 때 개인적으로 친분을 맺은 세계적인 선학자 히사마쓰 신이치(久松眞一: 1889~1980, 호 抱石, 일본의 재가선사, 불교철학자)가 쓰신 용어입니다. 그분은 재가불자들과 함께 선문화를 창도하기 위해 FAS운동을 일으켰어요. FAS란 Formless Self(無相의 自己), taking the standpoint of All Mankind(전 인류적 관점을 가지고), creating Supra-historical history(초역사적 역사를 창조하자)의 앞말 F, A, S를 따서 조어한 것입니다. 무상의 자기가 전 인류적 관점에서 초역사적 역사를 창조하자고 했습니다. 일진스님께서 보수, 진보의 양단을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관점을 말씀해주시니 저도 한마디 보태고자 합니다. 저는 둘로 갈라진 현실정치 집단을 내려다보는 神의 관점을 택합니다. 현재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전면에 진보를 앞세우고 후방에는 보수를 위치시킴으로써 국면을 장악한 후 양쪽의 위상과 정책을 적소적시에 실용적으로 활용합니다. 중도는 정해진 규칙이나 제도가 있는 게 아니라 그때 그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하면서 공생-화해-번영의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동적인 균형(dynamic equilibrium)이지요.
3. 자기를 덮고 있는 알 수 없는 막이 있다. 자기 생각, 고정관념의 틀에 갇혀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다. 자기가 가둔 틀 안에서 뺑뺑 돌아다니며 헤매고 있다. 마치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좁은 울타리에서 무료하고 무력하게 세월만 보내고 있다. 이것이 현대인의 병폐인 매너리즘이고 권태이다. 고독과 권태는 사람을 천천히 죽이는 무기이다.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그 사람이 처해 있는 환경을 확 바꿔주거나 그 사람에게 충격을 주어야 깨어난다. 여기에 가르침이 있다.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인대 何處하처에 惹塵埃야진애리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티끌(번뇌, 괴로움)이 붙을까 보냐? 천지가 개벽하는 소식이다! 자기를 덮고 있는 뭔가 답답하고 갑갑한 느낌이란 자기가 지어낸 기분이다. 애초부터 본래 마음은 한 물건, 한 티끌도 붙을 수 없는 허공과 같았다. 그런데 거기에다 자기가 어슴프레한 막을 뒤집어씌우고 스스로 들어가 갇힌 것이다. 너는 본래무일물! 본래 자유이다.
제가 모셨던 구산선사는 학인들에게 자주 諸佛出身處제불출신처, 모든 부처님이 나오신 곳은 어디인고? 라고 물으셨지요. 하루는 제가 스님의 뒤를 따라가는데 제불출신처를 묻길래 부지불식간에 답하기를 ‘해탈도 부처도 구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더니 뒤를 돌아다보면서 빙그레 웃으셨지요.
4. <깨달음의 노래> 김태완 역주에서
p7, 지공화상 대승찬
大乘이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마음자리이다. 거기서 모든 말과 행동이 나온다.
임제스님이 한 노파 집에 탁발하러 갔더니 노파가 꾸짖기를 ‘변변치 못한 화상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아직도 얻어먹고 다니다니’. 이럴 때 임제선사는 어떻게 대꾸를 해야 했을까? 한 큰 스님은 ‘삼십년래농마기러니 금일각피여자박’(삼십 년 동안 말 타고 잘 놀았는데 오늘 문득 나귀에게 들이받혔구나!)라고 했다. 나 같으면 ‘쯧쯧쯧, 노보살님 아직도 거기에 계십니까?’라고 했겠다. 고인의 어록에 나온 말로 답한다는 건 솔직하지 않고 불성실한 태도이다. 뭔가 그럴듯하고 있어 보이는 말귀를 툭 던져본 것이다. 알아먹든지 말든지 네가 알아서 해라는 식이다. 이것은 권위주의적이고 무책임한 짓이다.
[참고]삼십년래농마기(三十年來弄馬騎)러니 금일각피여자박(今日却被驢子撲)이로다.
삼십 년 동안 말 타고 놀았더니 오늘 당나귀에게 한 번 들이받혔구나.
자, 또 한 큰 스님에게 도를 물었는데 묵묵부답으로 침묵(良久양구 라 한다)하고 계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큰 스님, 아직도 살림살이가 그것밖에 없습니까?’라며 소리 지를 것이다. 그 스님이 입을 열어 뭔가 말하려고 하면 ‘말씀하실 줄 아시니 얼마나 다행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칭송한다. 사실 이것은 칭송이 아니라 두 번째로 공박하는 말이다. 첫 번째는 선사라면 학자를 다루는 수단이 살활자재해야 하는데 겨우 침묵이란 수단밖에 없습니까? 라고 꾸짖은 것이요, 두 번째는 말을 못 하시는 줄 알았는데, 이제야 말문이 터지니 대단하십니다. 라고 비꼰 것이다.
어떤 큰스님이 주관과 객관을 다 빼앗은 경계(인경양구탈)를 물었습니다. 내가 대답하기를 ‘흐르는 물에 잉어가 놀고 있습니다.’ 흐르는 물은 머물지 않으니 경계가 없음이요, 헤엄치는 잉어 또한 머물지 않으니 주관도 없음이다.
[참고]인경양구탈(人境兩俱奪): 사람과 경계를 다 같이 빼앗는 것으로 상근기(上根機)를 다루는 방편이다. 주체와 객체 모두를 부정하는 단계이다.
또 물으시기를 ‘어떤 것이 主中主주중주(주인 가운데 주인)인가?’ 내가 부지불식간에 답하기를 ‘허공을 나는 우주선의 그 사람입니다.’ 이런 답이 내 입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나중에 생각해도 신기해요. 그래서 본래로 갖추어진 지혜라는 말이 있는가 봐요. 한국선종의 장점은 생생한 현장성, 즉흥성입니다. 내가 1987년 봉암사에서 깨닫고 나서 반야심경의 한 구절 ‘照見五蘊皆空조견오온개공 度도 一切苦厄일체고액’이 떠올라 가만히 생각해보다가 그 뜻이 확연해졌어요. 뭔가 있다고 여기고 있던 가상의 我가 텅 비어지니 모든 시름과 번민인 깨끗이 사라졌어요. 허공의 밑바닥이 확 꺼져나간 듯 시원하고 통쾌했었죠. 그래서 度一切苦厄입니다.
<대승찬 본문 강설>
지공화상(金陵 寶誌公, 418~514)
1.
大道常在目前(대도상재목전) 큰 도는 늘 눈앞에 있는데
雖在目前難覩(수재목전난도) 눈앞에 있지만 보긴 어렵다.
강설: 깨달은 사람은 흔히 ‘알 수 없는데 분명하다.’라고 말합니다. 문외인은 이런 말을 들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요. 알 수 없는데 왜 분명하다고 하는가? 라고 말하겠죠. 그러나 깨달은 자리를 그렇게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어요. 이런 까닭으로 양무제가 달마대사에게 ‘짐의 면전에 서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물었을 때 ‘모릅니다. 不識’이라고 했어요.
2.
若欲悟道眞體(약욕오도진체) 도의 참된 모습을 깨닫고자 하면,
莫除聲色言語(막제성색언어) 소리, 색, 언어를 물리치지 말라.
강설: 소리, 색, 말 이대로 진여의 활발발한 작용이다.
3.
言語卽是大道(언어즉시대도) 언어가 바로 큰 도이니
不假斷除煩惱(불가단제번뇌) 번뇌를 끊어 없앨 필요가 없다.
4.
煩惱本來空寂(번뇌본래공적) 번뇌는 본래 텅 비고 고요하지만,
妄情遞相纏繞(망정체상전요) 망령된 생각이 번갈아 서로 얽어맨다.
강설: 자기가 지어낸 생각에 얽매여서 고통받는다.
<우두법융선사 심명>
우두법융牛頭法融(594~658)선사
心性不生(심성불생) 마음은 생겨나지 않는데
何須知見(하수지견) 어찌 알아볼 수 있겠는가?
本無一法(본무일법) 본래 한 법도 없는데
誰論熏鍊(수론훈련) 누가 훈습과 단련을 말하는가?
往返無端(왕반무단) 가고 옴에 실마리가 없으니
追尋不見(추심불견) 쫓아가 찾아도 보지 못한다
一切莫作(일체막작) 아무런 조작도 행하지 않으면
明寂自現(명적자현) 밝고 고요하게 저절로 드러난다
강설: 心性不生심성불생에서 심성은 망심이 아니고 진심을 말한다.
知幻卽覺이요, 離幻卽覺이다. 환인 줄 알면 깨달음이요, 환을 벗어난 자체가 깨달음이다. 원각경에 나오는 말이다. 明寂自現명적자현이니, 여기가 諸佛出身處이다.
[참고]영명연수 선사는 <종경록>에서 “홀연히 잠을 깨니 꿈속의 모든 일이 사라졌다는 것은 곧 일체가 오직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종경(宗鏡)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佛을 곧 깨달음覺이라 하니, 이것은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과 같고, 연꽃이 피어난 것과 같다.”라고 밝혔다.
知法無知(지법무지) 법을 알면 아는 것이 없으니
無知知要(무지지요) 아는 것 없음이 요체를 아는 것이다.
生死忘懷(생사망회) 삶과 죽음을 잊어버리면
卽是本性(즉시본성) 이것이 곧장 본성이다
至理無詮(지리무전) 지극한 도리는 설명할 수 없으니
非解非纏(비해비전) 풀림도 아니고 묶임도 아니다
目前無物(목전무물) 눈앞에는 한 물건도 없으나
無物宛然(무물완연) 한 물건도 없이 뚜렷하다.
강설: 뚜렷하다는 생생하다는 말
念起念滅(념기염멸)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사라지지만
前後無別(전후무별) 앞과 뒤의 차별이 없다.
後念不生(후념불생) 뒷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前念自絶(전념자절) 앞생각이 저절로 끊어질 것이다.
강설: 생각 있어도 무심, 무주, 생각 없어도 무심, 무주
衆生無心(중생무심) 중생에게는 본래 마음이 없지만
依無心出(의무심출) 없음에 기대어 마음이 나타난다.
강설: 허공이 말을 한다.
計校乖常(계교괴상) 헤아리고 따지면 늘 한결같음에서 벗어나고
求眞背正(구진배정) 참됨을 찾으면 올바름과 어긋난다.
萬像常眞(만상상진) 온갖 것들이 늘 참되고
森羅一相(삼라일상) 하나하나가 한결같은 모습이다.
강설: 水水山山各自明
心無異心(심무이심) 마음에는 다른 마음이 없으니
不斷貪淫(부단탐음) 탐욕과 음욕을 끊을 일이 없다
本來不存(본래부존) 본래가 따로 없나니
本來卽今(본래즉금) 본래가 곧 지금이다
菩提本有(보리본유) 깨달음은 본래부터 있으니
不須用守(불수용수) 애써 지킬 필요가 없다.
煩惱本無(번뇌본무) 번뇌는 본래부터 없으니
不須用除(불수용제) 애써 없앨 필요가 없다.
<심명>강의는 오늘 여기까지.
다음은 참선지도자를 위한 특강입니다.
1. 如何是여하시 超佛越祖초불월조인고? 어떤 것이 부처를 뛰어넘고 조사를 초월하는 것입니까?
답하되 過量上大人과량상대인이다. 마음이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넓고 커서 그 어디에도 막히거나 걸리지 않는 위인이다. 그런데 이런 답은 상투적이다. 차라리 ‘어디에다 금을 긋고 어디로 넘어간다고 하십니까?’라고 엎어버려야 한다.
2. 如何是여하시 獨脫生死독탈생사인가? 어떤 것이 홀로 생사를 뛰어넘는 것입니까?
답하되 天然無相子천연무상자니라. 천연의 모양 없는 놈이니라. 이것은 교리적인 냄새가 난다. ‘생사 이대로 도인데 무엇에서 벗어난다는 말입니까?’라고 되받아쳐야 한다.
3. 如何是여하시 殺佛殺祖살불살조이닛고?
답하되 杓柄在我手표병재아수니라. 죽이고 살리는 자루는 내 손 안에 있다. 이거 시원찮다. ‘이 보세요, 불조는 생사가 없는데 어찌 죽이고 살린다 하십니까?’라고 되받아쳐야 한다.
4. 如何是여하시 本來鼻孔본래비공인고? 어떤 것이 본래비공(본래 자기)입니까? 鼻孔은 중요한 핵심을 말한다.
답하되 帝網不得捕제망부득포로다. 인드라망의 넓은 그물로도 포획하지 못한다. 교학적인 냄새가 난다. ‘그대는 어디서 콧구멍을 보는가?’라고 되물어야 한다.
5. 如何是여하시 本來面目본래면목인고? 어떤 것이 본래면목입니까?
답하되 頭白不老顔두백불노안이니라. 머리는 희어도 얼굴은 늙지 않느니라. 생사가 없는 그놈이다. 잘 말했다.
6. 如何是여하시 無上大涅槃이닛고? 어떤 것이 위 없는 열반의 경지인가?
답하되 還歸一分土환귀일분토로다. 한 주먹의 흙으로 돌아갔구나. 세속의 상식적인 답이다. ‘생사 이대로 열반인데 어디서 별다른 열반을 구하십니까?’라고 반문해야 한다.
7. 如何是여하시 諸佛出身處제불출신처이닛고?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이 출현하는 곳입니까?
답하되 鬧市酒盤臺뇨시주반대니라. 시끄러운 시장의 술 주점이니라. 지금 이 자리다.
8. 如何是여하시 祖師西來意조사서래의닛고? 어떤 것이 달마대사가 서쪽 나라 인도에서 오신 까닭입니까?
답하되 只今有審麽意지금유심마의인가? 지금에 무슨 뜻이 있겠는가?
9. 如何是佛여하시불인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답하되 處處佛처처불이다. 처처가 부처이거늘 대체 무슨 부처를 찾는단 말이요?
<식당에서 원담 말하다>
서양 지성은 모든 분야에서 불교로 수렴하고 있다. 21세기 포스트모던의 트렌드를 읽어야 한다. 한 예로 자끄 라깡(Jacques Lacan, 1901~1981,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정신분석학자)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곳에 나는 존재하지 않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는 자아(상상계 the imaginary)의 공백을 지적했다. 자아가 공백한 자리에 언어라는 상징(상징계 the symbolic)이 명령하는 대로 움직이는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란 있는가? 라고 묻는다. 그는 실재하는 것(실재계 the real)은 공백, 허무(텅 빈 죽음)라고 보았다. 약간 허무주의적으로 보이지만 자기의 철학이 불교와 맞닿아있다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러기에 말년에 일본을 방문하여 선도량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또 미국의 인지신경심리학자 크리스 나이바우어(Chris Niebauer)는 좌뇌는 분별지, 우뇌는 무분별지를 담당하면서 인간의 인지행태를 해명하면서 이 둘은 서로 상보적이라 밝혔다. 그의 저술의 번역서로는 <하마터면 깨달을 뻔>과 <자네, 좌뇌한테 속았네!>가 있는데, 서양의 인지과학과 뇌과학이 불교의 마음이론에 얼마나 빠르고 쉽게 실용적으로 접근하고 있는지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