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호, 두레문화기행 연구간사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삼청동쪽이 아닌 효자동쪽으로 가다 보면 사직 터널 조금 못 미친 곳에 사적 제121호로 지정된 사직단이 보인다.
사직(社稷)의 연원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이후부터 시작된다. 국토의 신을 모신 사단(社壇)과 오곡의 신을 모신 직단(稷壇)의 두 신위를 단을 쌓고 함께 제사를 올리기 때문에 사직단 이라고 한다. 조상을 섬기어 모시고 효를 숭상하며 농업을 주생산으로 하던 나라에서 사당인 종묘(宗廟)와 제단인 사직(社稷)을 세워 국토의 보존과 나라의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드리던 제도였다. 그러므로 사직은 종묘와 함께 중시되었으며 국가를 말할 때는 흔히 종묘사직 즉, 종사라 하고 왕이나 대신은 종사와 생사를 같이할 의무를 느꼈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는 고구려 제18대 고국양왕(391)때 가장 먼저 사직신에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단을 쌓아 제사를 지내는 방법은 신라 선덕왕(783)때의 제도이다. 이 것이 고려로, 다시 조선으로 전승되었으니 아주 오래되고 귀중한 우리의 문화임을 알 수있다.
1392년 개성의 수창궁에서 즉위한 태조는 1394년 한양 천도 두 달 전인 9월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새 서울 건설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경복궁의 자리가 북악을 주산으로 하여 결정되자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옛 법식에 따라 종묘는 왼쪽(동), 사직단은 오른쪽(서)으로 지금의 자리에 정하였다.
그리하여 10월 28일 한양 천도 후 곧 바로 종묘 터와 사직단 터를 손수 살펴 정하고, 11월 3일 정도전에게 명하여 천지신명께 새 서울 건설에 착수함을 고사 드리게 하였다. 사직단은 다음해 1월에 축조를 시작하였는데 큰 공사가 아니었으므로 그 해 2월에 완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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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이란 현판을 달고 우리 나라 단층집 문의 일반적 형식인 정면 3칸에 맞배지붕으로 세워진 정문은 보물 제177호이다. 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있고 그 앞쪽에 두 개의 단과 단의 외곽을 둘러싼 담장을 볼 수 있다. 이 담장의 동,서,남쪽에는 단칸의 홍살문을 두었고 북쪽에는 세 칸의 홍살문을 두었다. 이 북문을 들어서면 네모난 2기의 단이 다시 한번 낮은 담장(유)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유의 사방에는 작은 문을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바닥에는 거친 화강암을 깔아 어도와 신도를 만들었다.
왼쪽에 있는 단이 국토신을 모시는 사단이고, 오른쪽에 있는 단이 오곡신을 모시는 직단이다. 우리 나라 각 지방의 주.현에도 사직단을 설치하였으므로 이와 구분하기 위해 국사단(國社壇), 국직단(國稷壇) 또는 대사단(大社壇), 대직단(大稷壇)이라고도 한다.
단의 형태는 천원지방(天圓地方)에 의해 네모난 방형으로 만들었으며 지대석, 면석, 갑석을 높이가 1미터 가량되게 쌓았다. 단의 둘레에는 3층의 돌계단을 사방으로 둘렀으며 단 위에는 각 방위에 따라 황,청,백,적,흑 등 다섯 가지 빛깔의 흙을 덮었다.
사단에는 국사신과 후토신을, 직단에는 국직신과 후직신을 모신다. 그런데 국사신주만은 돌로 만들어 사단의 북쪽을 향하여 묻었고, 나머지 세 신주는 위패로 되어 있어서 신실에 따로 모시고 있다가 큰제사가 있을 때마다 단 위에 내다 놓고 제를 올린다.
정기적인 큰 제례는 일년에 세 차례로 중춘절(2월),중추절(8월)의 상술(戌)일과 동지 후 셋째 술일인 납(臘)일에 거행되었는데 숙종 이후부터는 정월 첫 신(辛)일에 기곡제를 올리게 되어 있어 모두 네 차례가 되었다. 또한 때에 따라 홍수와 가뭄, 전쟁이나 질병이 없기를 천우신조께 기원하는 기제 및 궁궐의 관례나 가례시 행하는 고유제가 거행되기도 하였다.
제사를 집행하는 제관은 중추원에서 선정하여 엄숙하게 진행되도록 하였다. 태종때는 재실을 설치하여 제사를 관장하게 하였으나 세종때는 단 안팎의 청결과 보호, 제사진행과정을 담당하는 사직서를 두어 담당관리는 매달 사직단과 담장을 살피고 신실을 보수할 곳이 있으면 예조에 보고 하도록 하였다. 또한 매년 정월과 7월에는 호조, 예조, 공조에서 관리가 나와 주변을 살피게 하는 등 종묘와 함께 관리를 철저히 하였다. 사직단의 시설상황과 각종의식의 예와 의절 등을 기록한 「사직의궤서」가 정조때 작성되었다.
처음에는 종묘와 사직단에서 사용하는 제수에 차이를 두어 종묘에는 소,양,돼지를 사직단에는 소,돼지를 사용하였으나 태종때 부터는 세 가지 제수를 모두다 사용하게 하였다. 또한 사직제향때에는 <국조오례의>에 의하여 사직제향악이 행해졌다.
사직서에는 옛 부터 구리로 만든 시루가 있었는데 기곡제의 제삿밥을 지을 때 뇌성소리처럼 큰 소리가 울리면 그 해에는 반드시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사직단은 국가의 번영과 민생의 안정을 위해 신께 기원하는 나라의 신성한 제단이므로 점차 규모 및 제도를 개정해 나갔다. 태종때는 단 둘레를 둘러싼 토담(유)밖으로 담장을 둘러 남쪽,서쪽,북쪽의 3면은 인왕산 언덕을 경계로 하고 동쪽으로는 140보를 한계로하여 경역을 넓혔으며 그 안에 제관과 금위병 등이 배열할수 있게 하였다. 세종때는 단의 규모 및 계단의 설치, 단과 단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점등을 들어 일부 수정을 하였고 사직서를 두게 하였다. 임진왜란시에 조정과 왕실이 피난을 떠날 때에도 선조는 종묘신주를 모시고 평안도로, 세자인 광해군은 사직신주를 모시고 강원도로 피하였으며 서울 환도후 전쟁에 의해 파괴된 건물 등을 중건하는 동안 임시로 다른 곳에 봉안하기도 하였다. 또한 숙종, 영조때에도 신실과 신문이 노후되거나 풍우에 쓰러진 것을 보수한 기록도 있다.
그러나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에 오르면서 국직단.국사단은 태사단.태직단으로명칭이 일시 높여졌으나 일제의 국토강점으로 1907년7월 이후부터 매년 4번이던 제사가 두번으로 감소되었다. 경술년 국치이후 나라의 형편이 땅에 기울어지므로 이 나라의 종사는 비운을 겪게 된다. 그 후 1922년에는 사직공원으로 변모시켰고 1932년에는 매동 초등학교가 들어서 태종때는 울안의 넓이가 약 15200여평 이던 곳이 현재 사직단 18.4평만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현재의 규모로 축소 되었다. 1940년에는 정식으로 도시공원이 되어 시립종로도서관과 어린이도서관이 들어섰으며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동상이 세워졌다. 운동장으로 올라가는 길 위에는 어머니헌장이 건립되어 있어 지역주민은 물론 이 곳을 찾는 시민들 모두에게 참된 어머니상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고 또한 훌륭한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자리잡고 있다. 운동장에는 거의 언제나 동네 어린이들이 모여 축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인근 주민 어른들 역시 남녀노소 한데 어울려 게이트볼을 즐기는 모습을 보게된다.
공원 뒷편의 돌계단을 올라가면 현정회에서 관리하는 단군성전이 있는데 이 성전에서는 홍익인간사상의 실천과 민족정신의 통일을 목적으로 각종행사를 벌이고 있다. 성전 안에는 정부에서 표준으로 선정한 단군영정과 소상이 있다. 현정회는 매년 3월 15일 단군이 사망해서 산신이 되었다는 어천절과 10월 3일 개천절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한편에 오래된 목조건물이 한 채 있는데 이 건물은 옛 관아이던 사직서의 중심 건물이었으며 제례를 준비하거나 왕이 직접 제사를 지낼 때에는 왕의 대기장소로 이용되던 안양청으로 지금은 내부 구조 등이 많이 변모된 채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공원의 관리사무소를 지나면 오른쪽으로는 어린이 도서관이 자리잡고 있고 앞쪽으로 계속 나있는 계단을 따라가면 종로 도서관으로 갈 수 있다.
주변의 여러 시설과 건물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시설이기는 하지만 정문 입구에서부터 어수선한 분위기에 둘러싸인 사직단은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여 우선적으로 공사를 착수할 정도로 중요시 되어왔고, 국가와 백성의 번영을 위하여 왕이 직접 제사를 지내던 경건하고 신성한 곳임을 일깨워 주기에 다소 부족한 것 같다.
종묘의 정문 앞은 넓은 광장이 있어 시민들이 만남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사직단의 정문은 도로변에 바로 인접해 있어 달리는 자동차에 쫓기듯이 안쪽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문 바로 뒤에는 간이 농구대가 설치되어 있어 넓지도 않은 단과 정문사이가 청소년들의 운동장소로 변한 모습을 보게 된다. 일제에 의해 공원화된 사직단의 현재모습은 이렇게 크게 손상되어있다. 청소년에게 건전한 운동시설을 마련 해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바람직한 일이지만 농구대의 위치를 현재의 위치에서 위 쪽의 운동장으로 옮겨 주는 일도 서둘러야 할 것이다.
도로 정비로 인하여 뒤로 물러서 있던 정문의 위치를 복원하고 사직단의 주변담장 및 돌계단 등을 옛 모습대로 복원한 일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약 1200여년 이어 내려온 우리 조상들의 유서 깊은 제단과 주변환경을 재정비하여 우리의 국토와 백성을 사랑하던 조상들의 정신을 현재의 위정자들도 본받을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