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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2월 16일 월요일
[(녹)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야고보는 시련에 굴하지 말고 인내로 이겨 내며,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지혜를 청하라고 한다(제1독서). 바리사이들의 불신앙에 실망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세대가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복음).
제1독서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리하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이다.>
▥ 야고보서의 시작입니다. 1,1-11
1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합니다.
2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3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4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5 여러분 가운데에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6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7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8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9 비천한 형제는 자기가 고귀해졌음을 자랑하고,
10 부자는 자기가 비천해졌음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꽃처럼 스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1 해가 떠서 뜨겁게 내리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져서 그 아름다운 모습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일에만 골몰하다가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13
그때에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이렇게 묻습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계시다면, 저희한테 직접 보여 주실 수는 없나요?” 그러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시고 탄식하시며 자리를 떠나십니다. 그들의 태도는 ‘하느님이시기에 믿겠다.’가 아니라, ‘내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믿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곧 ‘기적이 먼저, 믿음은 나중’이라는 잘못된 순서였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표징을 본 뒤에 믿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기 때문에 삶 안에서 표징을 발견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러한 믿음의 길에 지혜를 더합니다.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야고 1,3).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십니다]”(1,5).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그저 고난을 피하는 요령이나 세상의 지식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련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께 믿음을 두며 희망을 잃지 않는 마음의 눈을 가리킵니다.
온갖 균과 바이러스가 가득한 세상에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균을 없앤 무균실에 머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면역력을 키워서 이겨 내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기 전까지 우리가 신앙으로 받는 은총은 후자와 같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악과 시련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신앙의 힘으로 그것들을 이겨 내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으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 자비 저에게 이르게 하소서. 제가 살리이다.”(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고통 속에서도 기꺼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기적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도 바리사이들은 무례하게도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해도 해도 너무한 무례한 요구에 깊이 탄식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황당한 요구를 들어주는 것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순식간에 불벼락을 내리는 것, 다양한 하늘의 이상징후를 보이는 것, 예수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의 불신앙을 신랄하게 꾸짖으십니다. 그들의 불신과 완고함에 큰 슬픔을 느끼시며, 그들을 뒤로 하고 떠나가십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도 예수님께 특별한 징표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요? 얼토당토 않은 엉뚱한 기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털끝만큼의 노력도 하지 않은채 손을 놓고 있으면서, 하느님 편의 기적만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진정한 기적은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성체성사 안에 다 있습니다. 참된 기적은 우리가 정기적으로 들어가는 고백소 안에서 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참된 기적은 우리가 얼마나 먼저 변화하고 쇄신되고자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 시대, 기적이 무엇이겠습니다.
하느님의 한량없으신 자비에 힘입어 이 아침, 우리가 다시금 눈떴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 아침, 우리가 그 누군가의 부축 없이 우리 자신의 두 발로 서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또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매일 우리가 봉헌하는 성체성사야말로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그 크신 하느님께서 이 비천한 우리 인간과 합일한다는 것,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어깨에 메어진 멍에의 무게로 휘청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 살며시 그 멍에를 벗겨주시는 하느님, 그분 안에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무인도처럼 고독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매일 다정한 친구로 다가오시는 예수님, 그분 사랑 안에 하루를 기꺼이 견뎌내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가 당신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느 부부가 결혼 20주년을 맞았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죠. "여보, 당신 나 사랑해?" 남편은 쑥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럼, 사랑하지." 하지만 아내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한다면 증거를 대봐. 요즘 내 친구들은 남편한테 다이아몬드 반지도 받고, 유럽 여행권도 받는다던데 당신은 뭐야?"
남편은 고민 끝에 다음 날 아주 커다란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아내는 설레는 마음으로 봉투를 열었죠. 그런데 그 안에는 명품 가방 영수증이나 비행기 티켓 대신, 두툼한 서류 한 뭉치가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남편의 생명보험 증서였습니다. 남편이 비장하게 말했습니다. "여보, 내가 죽으면 당신한테 10억이 나와. 내 목숨을 건 이 증거보다 더 큰 사랑의 표징이 어디 있겠어?" 그러자 아내가 서류를 바닥에 내던지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양반아! 당장 죽지도 않을 거면서 이런 게 무슨 소용이야?"
우리는 웃지만, 사실 이 아내의 모습이 오늘 복음 속 바리사이들의 모습이자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또다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진정으로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상대방에게 거창한 표징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발견하는 것이지 증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상대의 젖은 눈동자, 무심코 건네는 따뜻한 물 한 잔, 나를 바라보는 그 미세한 입꼬리의 떨림만으로도 온 세상을 다 얻은 듯한 사랑을 느낍니다.
만약 누군가 여러분에게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전 재산을 내 명의로 돌려라" 혹은 "모든 사람 앞에서 나를 위해 무릎을 꿇어라"라고 요구한다면, 여러분은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 사람 안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악한 사람일 뿐입니다.
실제로 이런 비극은 우리 현실에서 너무나 자주 일어납니다. 최근 유행하는 '로맨스 스캠'이나 가스라이팅 범죄를 보십시오. 사기꾼들은 말합니다. "내가 지금 급한 돈이 필요한데,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이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이게 우리 사랑의 증거야."
이런 악한 요구에 넘어가는 이들은 사랑이 너무 간절한 나머지, 사랑의 본질을 잊어버립니다. "내 사랑을 증명해야 해"라는 강박에 빠져 재산을 다 털리고 인생을 바치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비참함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랑을 증명하라고 압박하는 사람은 결코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당신의 사랑을 연료 삼아 자신의 욕망이라는 괴물을 키우고 있을 뿐입니다. 악한 자는 결코 사랑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는 오직 숫자로 된 증거, 육체적인 굴복, 눈에 보이는 커다란 표징만을 탐할 뿐입니다.
아름다움이란 그것을 보는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법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시인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은 그의 시 『오로라 리』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지구는 하늘나라로 가득 차 있고, 모든 가시덤불은 하느님의 불로 타오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사람만이 신을 벗는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그 주위에 둘러앉아 블랙베리나 따 먹는다.』
꽃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길가에 핀 작은 들꽃 한 송이 앞에서도 발을 멈추고 창조주의 신비를 읽어냅니다. 하지만 마음이 악하고 무딘 자는 꽃을 밟으며 지나갑니다. 그리고 말하죠. "이게 뭐가 아름답다는 거야? 금으로 만든 꽃이라도 가져와 봐. 그럼 믿어주지."
개는 장미꽃의 향기에 감동하지 않습니다. 오직 먹을 수 있는 고기 덩어리라는 표징에만 반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끊임없이 "내 병을 고쳐주시면 믿겠다", "내 자식을 합격시켜주시면 하느님 사랑을 인정하겠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세속과 육신에 갇힌 개와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자백과 같습니다.
아프리카 사막에서 평생을 바친 복자 샤를 드 푸코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사막의 뜨거운 모래바람 속에서 아무런 가시적인 성과도 내지 못했습니다. 개종시킨 사람도 거의 없었고, 화려한 성당을 짓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매일 아침 사막의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아침, 하느님께서는 나를 위해 태양을 띄워주셨고, 목마른 나를 위해 작은 오아시스의 물 한 모금을 허락하셨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하느님은 나를 미치도록 사랑하신다.』 샤를 드 푸코 신부님은 세상이 요구하는 표징, 즉 교회의 성장이나 기적의 숫자에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막의 고요함 속에서 하느님의 숨결을 듣고 말 한마디에서 그분의 뜻을 읽어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처럼 작은 것 하나하나에서 하느님을 볼 줄 압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처럼 주님을 시험하지 맙시다. 여러분이 오늘 성당에 올 수 있었던 건강, 오늘 점심에 먹을 따뜻한 밥 한 그릇,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앉아 있는 형제자매의 존재 자체가 바로 하느님이 보내주신 가장 확실한 표징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작은 것들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하늘이 갈라지고 죽은 이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우리는 잠시 놀랄 뿐, 결코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약속보다 더 큰 표징은 없습니다. 이 사랑을 알아보는 눈을 가질 때, 우리는 더 이상 이용당하거나 버려지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영원히 안전하고 행복한 자녀가 될 것입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원준 선생님의 ‘구약성경의 인물’이라는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대 근동의 신화는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영웅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의 신화는 구조가 단순하다고 합니다. 신과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신의 혈통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모두 똑같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하느님을 멀리했고, 죄를 지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용서하시고, 그런 인간과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이고, 카인의 제물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벨은 선하고, 카인은 악한 것처럼 보입니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의 핵심은 왜 하느님께서 아벨의 제물만 받아들였느냐가 아닙니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의 핵심은 카인은 악하고, 아벨은 선하다는 구별도 아닙니다.
에덴동산 밖의 세상은 노동의 수고가 있고, 에덴동산 밖의 세상은 출산의 고통이 있는 세상입니다. 에덴동산 밖으로 나온 인간은 이제 자신의 힘으로는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공정하거나 공평하지 않습니다. 선한 사람이 고통받기도 하고, 악한 사람이 성공하기도 합니다. 이 현실은 카인의 시대에도, 2026년의 시대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아벨과 카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내면에 아벨의 모습도 있고, 카인의 모습도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추수 때까지 밀과 가라지를 남겨 두라고 하셨습니다. 밀이 가라지가 될 수도 있고, 가라지였지만 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카인의 속성은 희생양 아벨을 찾으려고 합니다. 아벨은 공동체에서 힘이 없는 사람, 병든 사람, 소외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강대국은 힘으로 약소국을 괴롭혔습니다. 그것이 제국주의입니다. 군사력으로 주권 국가의 대통령도 잡아가는 현실입니다. 일본의 대지진에는 조선 사람이 우물에 독을 탔다며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독일은 유대인을 제물로 삼아 수용소에 가두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박해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박해하였습니다. 당시 로마에 커다란 화재가 있었습니다. 성난 민심을 돌리기 위해서 초대교회 신자들을 박해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그릇된 소문, 거짓된 소문이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초대교회는 박해와 시련을 받아들였고, 복음은 더 멀리 전해졌습니다. 로마라는 카인은 초대교회 공동체를 아벨로 만들었습니다.
생각의 전환, 인식의 전환,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땅에 있지만 우리는 우주적인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유한한 공간에 살고 있지만 영원한 시간을 향해 나가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집채만 한 고래도 아주 작은 꼴뚜기도 저마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원하는 바리사이파들을 만났습니다. 바리사이파들은 예수님을 비교하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세보다, 엘리야 보다, 다윗보다 더 뛰어난 분인지 알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비교하는 마음으로는, 상대평가를 하는 눈으로는 사랑으로 오시는 분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월요일입니다. 비교하고 평가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보다는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의 성인
성녀 율리아나 (Juliana)
활동년도 : +305년
신분 : 동정, 순교자
지역 : 니코메디아(Nicomedia)
같은 이름 : 율리안나, 줄리아나, 쥴리아나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 출신인 성녀 율리아나는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Campania)의 쿠마에(Cumae)에서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순교하였다. 처음에는 그녀의 부친으로부터 모진 매를 맞았고, 그 다음에는 그녀와 결혼을 간절히 바라던 집정관 에빌라시우스(Evilasius)로부터 또 다른 고문을 받았다.
그 후 감옥에서 넘실거리는 불꽃으로 고문을 받다가 순교하였다.
그녀의 수난기는 중세 시대에 널리 알려졌다.
성 오네시모 (Onesimus)
활동년도 : +1세기경
신분 : 바오로의 제자, 주교, 순교자
지역 : 에페수스(Ephesus)
같은 이름 : 오네시무스
필레몬에게 보낸 사도 바오로의 편지에 의하면(10절~18절), 오네시모는 프리지아의 골로사이에서 살던 필레몬의 노예였다.
그는 사도 바오로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당시에 바오로를 만났고, 세례를 받았으며, 사도 바오로의 영적 아들이 되었다.
또한 바오로는 그를 필레몬에게 되돌려 보내면서,오네시모는 이제 노예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주도록 요청한다.
바오로는 필레몬에게 말한 그대로 자신도 행동했고, 또 "성실하고 사랑받는 형제로서" 인정하였다(골로사이 4:7~9).
성 예로니모에 의하면, 그후 오네시모는 말씀의 설교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교까지 되었으며, 로마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여 로마 순교록에도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복자 그레고리오 10세(Gregory X)
활동년도 : 1210-1276년
신분 : 교황
지역
같은 이름 :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테오발두스 비스콘티(Theobaldus Visconti)는 피아첸차(Piacenza)의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나 파리(Paris)와 리에주(Liege)에서 교회법을 공부한 후 리에주에서 부제가 되었다. 그는 오토보니(Ottoboni) 추기경을 수행하여 영국 선교 길에 오른 적도 있고 성지를 순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아직 사제품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6명의 추기경 위원회에 의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어 약간의 물의가 일었다. 그래서 그는 로마(Roma)로 와서 1272년 3월 19일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3월 27일에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 또는 그레고리오) 교황으로 착좌하였다.
그는 1274년에 리옹(Lyon) 공의회를 소집하여 동방 교회와 로마간의 화합을 꾀했으나 십자군으로 말미암아 성공하지 못하였다. 공의회가 끝난 후 그는 스위스의 로잔(Lausanne), 이탈리아의 밀라노(Milano), 피렌체(Firenze), 아레초(Arezzo)까지 여행했으나 1276년 1월 10일 아레초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1713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로마 순교록에 등재되었다.
복녀 필립바 마레리아(Phillippa Mareria)
활동년도 : +1236년
신분 : 동정녀
지역
같은 이름 : 마레리, 필리바, 필리빠, 필리파, 필립빠, 필립파
성녀 필립바는 리에띠의 지꼴리 태생인데, 그녀의 집안은 아브루찌의 주요 지주 가문이다.
그의 부모는 신심이 깊은 부부인지라, 인근 지방에 설교하러 오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자기 집으로 모신 적이 있다.
이때부터 필립바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완전히 본받으려는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부모들이 그녀의 결혼을 서두르자, 필립바는 삭발을 한 후 보기 흉한 옷을 입고는 몸을 숨겨버렸다.
이윽고 그녀는 집을 나와서 마레리오산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거룩한 어느 프란치스칸의 지도를 받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저 유명한 또디의 로제르 수사이다. 그녀는 성녀 클라라의 규칙을 채택하였고, 필립비가 원장이 되어 많은 동료들을 지도하였다.
철저한 가난생활이 그들의 특징이었다.
1236년, 그녀는 중병에 걸린 후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운명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