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6.25가 터진 지 73돌이 되는 날이다.
73년전 오늘도 일요일이었다. 새벽 4시에 당시 휴전선 38도선에서 일제히 북괴의 남침이 시작된다.
그로부터 서울은 불과 사흘만에 함락되고 정부는 수원,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에 임시정부를 꾸리고,
북한 김일성은 점심은 8.15해방날에 부산에서 하겠다고 적화통일을 꿈꿨던 것이 어언 73년이 되었다.
낙동강전선에서 교착상태에 빠졌던 한국군, 유엔군은 결국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9.28 서울 수복이 이뤄지고, 다시 북진,북진 압록강까지 다달았지만 뜻밖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반전된다. (1951년) 1.4후퇴가 시작되고, 밀리고 밀리는 전투는 무너진 38도선을 경계로 이뤄지기가 정전협상이 이뤄지는 1953년 7월 27일까지 계속된다.
내 어린 시절과 겹쳐지는 상황들을 다시 되짚어 본다.
초등(당시 국민)학교 1학년에 다니던 때는 1952년 4월.
내가 다니던 1학년 교실은 초가 지붕에 교실 바닥은 울퉁불튱 흙바닥에 창호지 바른 창문, 송판을 댄 문턱 높은 출입문, 어두컴컴한 교실 속의 풍경이 잊혀지지 않는다. 공책이 없어서 서울에서 피난 온 피난민이 살던 집에 가서 백노지(전지)를 사다가 가위로 잘라서 노트를 만들어 쓰던 시절, 그 때 그 고리짝에서 나던 시골에서 못 맡던 서울 냄새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러구려 지낸 지 73년.,
우리나라가 발전한다면 그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이라면서 한국을 영원히 구제불능의 쓰레기통으로 비유했던 외신기자의 말을 전해주시던 학교선생님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한테,
이제는 세계의 10대가 아닌 8대 아니 7대 선진국에 어엿하게 이르렀으니..
주마등같이 떠오르는 옛날이다.
-대전 지하철 현충원역 구내에서 본 호국보훈의 달 포스터 -
-국립대전현충원 묘역을 바라보면서 -
(붉은 점은 조선 태조/태종의 가마가 머물렀었다는 전설을 가진 보루가 있는 왕가봉 일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전몰장병 유해발굴 사업-
(충남 금산 백령성 답사시 본 유해발굴지에 둘러친 출입금지 띠를 잊지 못한다.
주요 전장터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 걸까?)
- 통계로 보는 6.25 전쟁 국군 희생자 -
(안장된 유해가 겨우 3만 명도 안 되고,
아직도 12만 여 분의 유해는 못 찾고 있다니..)
- 6.25 전쟁 기록 책 소개 - (2010년 6월 19일 (토)자 조선일보 신문 스크랩에서
- 휴전선, 군사분계선, 처음에는 북위 38도선에 그려졌다해서 생긴 38도선, 전방에서는' 비무장지대'를 뜻하는 DMZ를 가운데에 두고 남북으로 한계선이라 해서 남방한계선, 북방한계선이라고도 하고..
(- 남북분단의 먼 역사는 임진왜란까지도 거슬러 올라가고... )
-현재의 국토 분단선 : 흔히 '155마일'로도 불린다.-
(동해에서, 서해로는 말썽 많고 탈도 많은 백령도, 연평도 해전도 발생했던 곳까지 )
- 최전선 의 모습 : 흔히 '철책선'으로 불린다.-
( 1968년 1.21 김신조 청와대 습격조가 내려오면서 남북관계는 전쟁발발 직전까지 상황이 악화되고,
엉성했던 휴전선이 이런 식의 철잭선으로 구축되고, 현재는 전자장비까지 첨가되는 등 경계가 강화되고 있다.
필자가 1969년 겨울 - 1972년까지 근무했던 철책선 모습과 비슷,
운 좋게 2008년 여름에 다시 근무처 바로 지근거리까지 찾아가 볼 수 있었지만.
백마고지 근처. 역곡천이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 폭파된 공주 금강철교와 뒤의 연미산 북동쪽 줄기의 민둥산 모습 -
(한강방어선이 무너지자 금강방어선을 구축하고 방어하지만 결국은 무너지고...)
-1950년 당시의 피난민 행렬 사진 -
-작전명령서 보기 -
-다부동 전투 기념관 자료 사진에서 -
(2014.09.30 : 산성사랑 연번 220회에서 자세히 볼 수 있음 )
-낙동강 방어전투 개요 -
-6.25 전쟁 인명 피해 통계표-
(다부동전쟁기념관 자료)
- 9년여 전의 모습 -
(가산산성, 다부동전적지 답사시 기념 사진 : 2014. 09 .30 )
- 한국전쟁 관련 책들 보기 -
- 2009년 중국 시안(西安)에 여행 갔을 때 시안공항 구내서점에서 구입한 < 조선전쟁 내막 전공개> 표지 -
- 속 내용 보기 -
(공산 진영 측 시각에서 기록한 책으로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함 . 번역본은 있는 지 모르겠음.
1950년 봄, 김일성은 전용열차를 타고 (비밀리에) 시베리아를 거쳐 소련으로 가서 조선의 통일 문제를 놓고 대화를 나눴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스탈린과 비밀회담을 갖고 통일문제 (적화통일이었겠지만) 남진통일에 대해서 설명하고, 소련의 지원을 요청했겠지,.소련 방문을 마치고 비밀리에 북경에 들린다. 중공은 건국한지 불과 몇 개월(1949년 10.1일 건국)도 지나지 않은 정신없는 때에 모택동은 북한 김일성의 남침 지원 요청을 받는다. ( 참모들의 당연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은 지원쪽으로 가닥을 잡는다는 내용은 뒤에 자세하게 나온다. 정규군을 지원군의 이름으로 바꾸고 자신의 아들 모안영도 참전하게 하고..
1.4후퇴의 시작이 된다
이런데도 북한은" 6.25는 남침이 아니라고 남한의 북침에 대한 반격"이었다고 지금도 주장하고 있는 현실.
여기에 동조하는 일부 세력도 있다니...)
-눈 먼 아내를 지개에 짊어지고 피난길에 나선 남편 부부-
(문창재의 글 자료사진에서)
(6.25 한국전쟁을 보면서,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과 겹쳐지는 것은 왜일까?
당시 의주가 부산으로, 3도 할양 논의가 휴전선으로, 밀고 밀리고.. 외세의 개입과 . 혼란상... 의병까지..)
하필 6월 25을 전쟁 개시일로 선택한 속내는 어디에 있을까? 왜군의 부산 동래성 침입은 음력 4월 이고..
군량으로 하지감자랑, 보리랑 밀이 익고, 야영에도 문제가 없어 전쟁하기 좋은 조건이라 생각했을까?
참전했던 동네 아저씨의 사랑방 이야기 속에서 들었던 인육 먹던 이야기며, 빨간 고추 따 먹고, 발목에 쇠사슬 매고 총 쏘던 어린 인민군을 보았다던 설악산 전투담을 숙직시에 들려주던 청부 아저씨..... 등..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픈 이야기들 전쟁담이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아직도 전쟁 중이고...)
전쟁이 없는 국태민안(國泰閔安)의 평화가 계속되길 빌 뿐 이다.
(2023.06.25.카페지기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