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장애가 되는 선입견 버리기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첫 제자들을 데리고 가장 먼저 가신 곳은 카나 혼인잔치다. 첫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세례자 요한을 따라다녔던 이들이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들꿀로 요기하며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며 살았기에(마태 3,4) 그들도 스승처럼 자주 단식했을 것이다.
첫 제자들은 옛 스승을 통해 알게 모르게 구도생활은 모름지기 엄격하고 금욕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몸에 배었을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제자로 삼으시고 어디로 데려가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면 여러 가지 추측을 했을 것이다. 성전에 가는 것일까?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회당으로 가시는 것일까? 세례자 요한처럼 광야로 나가 단식하며 기도하려는 것일까? 그들은 어디로 가든 당연히 경건한 곳으로 가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옛 스승과는 달리 혼인 잔칫집으로 가자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제자가 된 다음 처음으로 데리고 간 데가 잔칫집이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그들은 굳어진 종교관념 때문에 새 스승을 버리고 은근히 비판하고 눈살을 찌푸렸을지도 모른다. 특히 나타나엘처럼 무화과나무 아래 명상에 잠기기를 좋아한 제자라면 더욱 혼란스러워하며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관념과 태도를 고집했다면 생을 경이로 보면서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신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굳어진 가치관과 신앙관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신앙생활은 무조건 엄숙하고 엄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엄격과 엄숙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삶에서 순수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조차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성당에 오면 ‘웃음 사절, 재미 사절, 흥겨움 사절’이란 표지판을 얼굴에 달고 다닌다. 또 본당 모임에 참석할 때는 꼭 정장 차림으로 와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은근히 비난하며 눈살을 찌푸린다. (정장 차림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는 태도다.) 또 신자들끼리 여흥을 즐기는 자리에 어쩌다 참석했을 때 신앙 얘기가 아닌 우스갯소리가 오가면 경망스럽다는 눈길을 보낸다.
강의 중 이해를 쉽게 하거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어금니를 꽉 깨물고 웃지 않는 이들이 있다. 경건한 성당에서 깔깔 대고 웃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선입견 때문인지 마치 돌부처처럼 굳은 얼굴을 하기도 한다. 신앙생활에서 ‘어떻게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과 경직된 가치관에 굳어 있는 이들은 예수님처럼 생을 경이로 대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또 영혼들을 지극히 사랑하신 예수님과 달리 이웃형제들을 자기 잣대로 판단하고 비난하게 된다.
그리스도교의 최대 장점은 그리스도인들의 기쁨과 확신, 완전함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최대 단점도 그리스도인들이다. 우울하고 독선적이며 남을 억압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그리스도는 몇 천 번 죽임을 당한다. 할 수만 있다면 천국의 기쁨이 담긴 웃음으로 삶의 여정에 지친 영혼들에게 위로를 주는 사람이 되도록 마음을 열어야 한다. “파리들은 식초보다 꿀에 더 많이 몰려든다. 얼굴에 지옥의 음울함을 담고 있는 사람들보다 천국의 기쁨을 담고 있는 사람이 더 많은 영혼을 천국으로 이끈다.”는 말도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여러 번에 걸쳐 그들의 옛 가치관과 선입견을 버리기를 요구받는다.
첫 번째로 요구받은 사람은 나타나엘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가 나자렛 촌 동네에서 나올 수 없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던 사람인데, 예수님을 만난 후 그 선입견을 버린다.
두 번째는 카나 혼인잔치에서 이루어진다. 첫 제자들은 옛 스승 세례자 요한을 보며 신앙생활은 모름지기 엄숙하고 경건해야 하며 자주 단식하고 금욕적이어야 한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이 선입견을 버리도록 초대받는다.
세 번째는 사마리아 마을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유다 땅에서 갈릴래아로 내려갈 때 통상 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 갈릴래아로 내려간다.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자들이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선입견을 깨기를 요구하신다.
네 번째로 예수님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가 이야기를 나누심으로써 제자들을 놀라게 만든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단 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속으로 판단한다. 그들이 보았을 때 예수님의 행위는 남녀유별의 관습을 어기는 것일 뿐 아니라 스승으로서 품위에 맞지 않는 행위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러한 선입견을 버리도록 직접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러 번에 걸쳐 선입견을 버리도록 요구받는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한 번도 자기들이 갖고 있던 선입견에 대해 의문을 가진 적이 없었다. 당시엔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가진 선입견들은 영적인 것뿐 아니라 세상살이에서도 많이 존재한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세계 시계시장을 지배한 것은 스위스 시계업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톱니바퀴와 작은 베어링을 넣어 제작된 전통적 시계는 자주 태엽을 감아주어야 했다. 그런데 시계 생산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태엽을 감지 않아도 자동으로 작동하는 시계가 탄생한 것이다. 이런 시계를 고안해 낸 사람은 다른 나라 사람이 아니라 바로 스위스 사람이었다. 그런데 스위스 업체에서는 누가 그런 시계를 사겠느냐고 이 새로운 발명품을 무시했다. 그리고 새로운 기술이 외면당할 것이라 보아 발명특허조차 신청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이 이 발명에 관심을 갖고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스위스 시계업계의 시장 점유율은 65%에서 10%로 떨어지게 되었다. 지금 스위스는 더 이상 세계굴지의 시계 생산국가가 아니다. 그들은 고정된 패러다임에 묶여 다른 방법을 보지 못한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파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가격파괴, 인사파괴, 조직파괴. 그러나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고정된 틀을 파괴하는 것이다. 고정된 시선, 고정된 패러다임의 파괴다. 가운데가 뻥 뚫린 동그라미 안에서 마치 마술처럼 바람이 나오는 선풍기를 본 적이 있는가? 영국 발명가 다이슨은 선풍기에 날개가 있어야 한다는 고정된 틀을 파괴한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왜 선풍기는 꼭 날개가 있어야 하지? 돌아가는 날개 때문에 바람이 중간중간 끊기고 날개를 청소하기도 어렵지 않은가? 더구나 아이들이 손가락을 넣으면 크게 다치기도 하는데.”
이렇게 고장관념을 깨는 질문 덕분에 날개 없는 선풍기가 나오게 되었다. 최초의 선풍기가 나온 이래 127년만이었다. 이 선풍기는 2009년 <타임>지가 ‘올해의 발명품’ 가운데 하나로 뽑았다. 2009년 10월 영국에서 판매를 시작하자 인기가 대단해 상당 기간을 기다려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2010년 겨울쯤에나 들어왔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다이슨이 직원을 채용할 때 해당 분야에 전혀 경험이 없는 사람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선입견이 없고, 맡은 일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됩니다. 스스로 마치 탐험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는 평소 ‘전문가들의 말을 듣지 마라’는 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