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彬皇后 傳
북위(北魏)에서 이런일이 있었다. 7대 신제(愼帝)가 붕어(崩御)한뒤 이복아우 철(哲)이 즉위 8대 명제(明帝)가 되었다. 37세에 즉위하여 72세가 될 때까지 황위에 있었다. 이때 빈철현(彬喆顯)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증조부 두식(豆識)은 이전에 제갈(諸葛)가와 의순(意純)가가 반란을 일으켜 천하쟁패를 다툴 때 지혜를 발휘하여 콩 한석과 쌀 석되로 외적을 무찌른 공으로 의무공신(義武功臣) 1등에 충위장군(忠衛將軍)에 봉해졌다. 철현에 대에 이를때까진 아직 음서의 혜택을 볼수 있었으나 스스로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대사령(大師領) 벼슬에 올랐는데 이때 소(疏)를 올려 임금으로서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는 일 여덟가지, 간신과 충신을 구분하는 도리 여덟가지, 백성의 삶을 평화롭고 안정되게 하는일 여덟가지, 외적의 침입을 지혜롭게 막을 방도 여덟가지등 서른두가지의 길을 제시하였다. 허나 이는 이때의 권신들이 기득권을 빼앗기는 일이라 반발하여 오히려 철현이 조정에 반역하려 한다 모함하여 벼슬을 빼앗고 사약을 내릴 것을 권하였다. 명제가 본래 우암(愚暗)한 군주가 아닌지라 간신들의 의도를 알아챘으나 다만 조정의 공론을 마냥 외면할수만은 없어 은밀히 쳘현을 불러 대안을 논의하였다. 이에 철현이 말하기를 ‘신의 벼슬을 깎고 귀양을 보내신다면 군주의 징계이기전에 하늘의 징벌로 여기고 달게 받겠사오나 다만 한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못난 노신이 다만 일찍이 두명의 부인으로부터 아들 열명을 얻었고 나이 50을 넘어 본 후실과의 사이에 어린딸 하나가 더 있으니 청컨대 이 아이를 바치는 조건으로 다만 모진 목숨을 구겋라나이다.’ 하여 명제가 고민 끝에 노신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로써 철현의 막내가 후비(後妃)로 입궁하였으며 철현은 천리 떨어진 두성(豆成)땅으로 귀양을 갔다.
빈씨가 황명으로 입궁하니 나이 열네살이었다. 이때 명제는 본래 정비(正妃)와의 사이에 딸 다섯을 보았고 후비에게서 아들 하나를 보았는데 이때 명제가 이미 나이 마흔을 넘겼다. 태자의 이름은 정명(貞明)이라 지었는데 나이 서른이 되도록 정신이 온전치 못하였다. 지금껏 용변을 스스로 처리하는일이 없었고 밥을 먹을때도 늘상 내관과 시녀가 시중을 들어주어야할 판이었다. 말을 태우려 하면 무서워서 사흘을 울어 어찌할 도리가 없었고 지금껏 문자를 깨우치지 못하였다. 또한 후비 윤씨(尹氏)가 정명을 낳고 석달만에 세상을 떠나니 밤마다 모후를 그리워하며 울지 않는날이 없었다. 궁녀들이 겨우 달래면 잠을 이룰수가 있었다.
황제가 빈씨를 다시 후비로 들인뒤 함께 술을 나누며 근심을 말하기를 ‘내 부족한 몸으로 돌아가신 선대 형님의 뒤를 이어 후계(後繼)를 맡았으나 앞으로의 일이 근심이도다. 내 나이 칠십이 되도록 마땅한 후사가 없었고 다만 나이 마흔이 넘어 본 유일한 원자(元子)가 나이 서른이 되도록 정신이 온전치 못하니 후계는 거론할것조차 없고 내가 죽은뒤 그 한몸이나 온전히 보존할수 있을지 그조차 걱정되도다. 항차 이 일일 어찌하면 좋은가 ?’ 빈씨가 합환주를 받아마신뒤 말하기를 ‘폐하께서 천하대권을 쥐신 일국의 군왕으로 어찌 그와같은 근심을 하시나이까. 제 나이 열넷에 나이많은 낭군을 얻었으니 마땅히 그 아들에게도 어미된 도리를 다함이 사람된 도리이니 모쪼록 제게 모든 것을 맡겨 주시옵소서.’ 하였다. 명제가 오히려 어이없다는 듯 ‘그대에게 무슨 현묘한 계책이라도 있는가 ?’ 하니 ‘마땅히 모든 것을 신첩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하고 다만 빙긋이 웃기만 하였다
황후가 먼저 태자의 하루 사는 모습을 살펴보니 과연 듣던대로 밥먹는 것 조차도 없에서 내관과 궁녀의 시중이 있어야만 제대로 들 지경이었으며, 스스로 씻지도 못하였고 말하는 것 또한 제대로 하지 못하여 나이 이미 서른이나 그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마치 다섯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를 보는 듯 했다. 먼저 아침 수라를 들 때 황후가 먼저 태자의 처소에 들러 주위를 먼저 물리게 한뒤 이와같이 말했다.
“ 이제 제가 부황의 아내가 되어 국모(國母)가 된 이상 어미로서의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
하고는 손수 수저와 젓가락을 들어 태자에게 밥을 먹여주려 하였다. 처음 태자가 놀라고 두려워하여 거부하였는데 황후가 친절히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주며 손수 수저를 쥐어주니 그제서야 태자가 밥을 먹게 되었다. 보아하니 태자가 음식을 가리는 것이 있는듯해 나중에 궁녀들을 불러 은밀히 물으니 말하기를 ‘태자께서 행동하시는 것 자체가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사와 저희가 차마 말을 다 하지는 못하겠는데, 다만 이전부터 지나치게 맵거나 짠 음식은 드시지 못하며 나물류는 제대로 듣지 못하고 고기반찬만을 드시나이다.’ 하였다. 이에 황후가 다시 태자의 처소에 들러 타이르며 말하기를 ‘음식을 가리는 것은 예부터 좋아하는 습관은 아니니 고치는게 좋을것이며 다만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스스로 말하는 것은 과히 나쁜 것이 아니니 스스로 원하는 것이 있을때는 말씀을 하소서. 어미가 몸소 궁녀에게 명하여 챙겨드리리다.’ 하였다. 태자가 가까스로 입을 놀려 맵고 짠 음식종류 몇가지를 들며 그것을 싫어한다는 듯이 말하니 다시 황후가 말하기를 ‘맵고 짠 음식은 예부터 위와 간에 좋지 않으니 삼가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허나 너무 고기반찬만을 탐하는것도 몸에는 좋지 않사오니 다만 콩나물과 시금치와 단무지만은 반드시 들도록 하시옵소서. 이 어미가 몸소 그것을 지켜본뒤에 물러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니 비로소 태자가 시키는대로 하였다.
또한 태자가 제대로 씻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처소에 들러 손수 손과 발을 씻겨주었다. 손수 수간으로 젖은 손발을 닦아주기까지 하니 그 지극정성이 갓난아키를 키우는 젊은 어미를 보는 듯 하였다. 또한 손수 태자를 목욕시켜주었는데 태자가 물으니 황후가 답하기를 ‘옛부터 범인(凡人)은 사흘에 한번은 몸을 정갈케 하고 천한 백성들도 일주일에 한번은 몸을 정갈케하니 이 어미의 말을 따르도록 하소서.’ 하고는 스스로 궁녀들에게 명하여 목욕물을 덥혀오게 한뒤 스스로 머리를 감겨주고 몸을 씻겨주었다. 몸을 씻길대는 손과 발, 팔 다리는 물론 등과 배,가슴,겨드랑이 등등 그 어느곳 하나 정성스럽게 문지르지 않는곳이 없으니 지켜보는 궁녀와 내관이 다들 놀라며 또 한편으론 놀라워할 지경이었다. 한번은 다소 장난삼아 태자의 겨드랑이 사이를 살짝 간지럽히니 태자가 당황하여 어쩔줄을 모르고 황후는 해맑게 웃었다.
태자가 옷 갈아입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니 황후가 손수 궁녀들을 시켜 빨래를 해오게 한뒤 정갈해잔 옷을 손수 입혀주었다. 웃옷을 입힐때는 먼저 앵 팔을 벌리게 하여 양쪽 소매를 직접 넣어주었으며 바지를 입힐 때 또한 스스로 벗겨준뒤 새 바지의 양 다리속으로 다리를 넣게하여 손수 힙이고 대님으로 묶는 것 또한 직접 해주니 역시 내관과 궁녀들이 놀라워하였다. 태자가 처음 나이어린 황후를 두렵고 경계하였는데 매일같이 황후가 직접 태자의 세끼 식사 먹는 것을 챙겨주고 몸을 씻겨주고 옷을 갈아입혀주니 그제서야 태자의 마음이 녹는듯했다.
태자는 밤마다 악몽을 꾸며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와같은 말을 듣고 황후가 몸소 침전에 들었다. 그리고 태자에게 직접 ‘무슨 꿈을 꾸냐 ?’고 그 내용을 직접 듣고자 했다. 태자가 본래 말을 제대로 못했지만 스스로 구사할수 있는 단어를 이어가며 황후가 귀담아 들어주고 또한 일부 필담과 그림을 섞어가며 대화를 나누니 대충 이야기의 절반 정도는 알아들을수 있었다.
태자가 꿈의 내용을 말하기를 ‘한번은 이전의 전란이나 역모의 누명을 쓴 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달라며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쫒아오는 꿈을 꾸기도 하고 또 한번은 자신의 죽은 조상이라며 내가 죽을때가 다 되었다며 저 세상으로 데려가겠대고 하는 꿈을 꾸며 또 어떨때는 죽은 어미가 피눈물을 흘리며 나타나 자신에게 먹을 것을 달라 요구하는 꿈’이라 하니 황후가 곡절을 듣고는 이와같이 말하였다. ‘중원이 오래전부터 수많은 전란에 휩싸였고 심지어 북적 오랑캐들에 의해 넓은 강토를 빼앗기기도 했으니 그로인한 원귀들이 곳곳에 숨어있음은 당연한 이치이니 너무 심려 마소서. 또 죽은 조상이 종종 꿈에 나타나 불길한 일이 닥칠 것을 예고해준다던가 앞으로 닥칠 행운을 말해주는 경우는 있지만 죽은 조상이 아직 멀쩡히 젊은 시절을 살고있는 자손을 데려간다는 꿈은 잘 없으니 죽은 조상이 아니라 마귀나 귀신의 장난일 가능성이 높으니 태자는 심려모사소’ 위로하였다. 그리고 죽은 원귀들이 나타나는 문제와 관련 태자의 침소 동북쪽을 조금 높게 짓고 남서쪽에는 붉은깃발과 노란깃발을 꽂고 그 사이에 기이한 형사으이 조각을 만들어 놓을 것을 명하니 이후 태자가 더는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다. 다만 태자의 죽은 모후가 꿈에 피눈물을 흘리며 나타나는 꿈은 황후 스스로도 해결할 방법이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황후가 백날을 고민하다 하루는 몸소 태자의 침소에 들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그린 초상화를 안겨다주며 ‘이것을 품에 안고 주무시면 무서운 꿈을 안꿀수도 있다’며 태자를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스스로 태자를 품에 안고 재워주며 자장가를 불러주었는데 내용은 대개 이와같았다. 그 하나는 전란중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어린아이가 자신을 낳아준 친어미를 찾아 천만리 먼길을 떠난다는 내용의 ‘모정다애가(母情多哀家)’, 예부터 전해내려오는 진귀하고 신비한 보물이 가득한 섬을 찾아 떠나는 소년의 모험기를 담은 ‘장도천리가(長島千里家)’, 낮에는 작아지고 밤에는 커지는 이상한 마법에 걸린 여인을 노래하는 ‘묘법애상가(妙法愛想家)’ 등이었다.
황후가 태자를 품에안고 잠을 재워주며 종종 입맞춤을 해주었는데 그러면서 이와같이 말하곤 했다. ‘더럽고 불결한 생각을 하지않고 맑고 순수한 생각만 하시면 됩니다. 더럽고 불결한 생각을 하며 입맞춤을 하면 문제가 되지만, 맑고 순수한 생각만 하면서 하면 그저 어미가 아들에게 해주는 맑고 깨끗한 입맞춤일뿐입니다’ 라고 타이르고 가르쳤다.
신제가 본래 정비와의 사이에 딸 다섯을 두었는데 이중 첫쨰가 의진(意眞) 공주로 이때 나이 마흔다섯이요, 둘쨰는 의옥(意鈺) 공주로 이때 나이 마흔둘이며, 셋쨰는 의경(意景) 공주로 이때 나이 마흔이며, 넷쨰가 의명(意銘) 공주로 이때 나이 서른일곱이고 다섯째가 의혜(意慧) 공주로 나이 서른 다섯이었다. 이들은 모두 나이 스물을 조금 넘겨 출가(出嫁) 하였는데 부황(父皇)이 나이 칠십에 새 후비를 들이니 모두 탐탁찮게 여겼다. 이때 황후가 오히려 공주들이 출가후 낳은 딸들보다 어렸으니 더러는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말하기도 했다.
이때 공주 다섯이 맏이 의진(意眞)의 집에 모여 의논하기를 ‘부황께서 나이 칠십을 넘어 새로운 황후를 모셨는데 여염집이라면 대를이을 아들이 필요하고 황실은 마땅히 차기를 이을 대통이 필요한데 막내아우인 태자가 지금 나이 서른이 되도록 정신이 온전치 못하니 부횡의 심려야 이해못할바는 아니다. 허나 나이 칠십에 손녀딸같은 후비를 들였으니 이 민망함을 어찌하란말인가. 비록 의붓어미라 할지라도 우리보다 나이터울이 십여살정도 진다면 그런대로 받아들일만 한데 오히려 우리가 낳은 딸들보다도 어린 후비를 들였으니 이 민망함을 어찌할것이며 후세에는 이를 뭐라고 평할것인가 ? 더 늦기전에 대책을 세워보도록 하세’ 하였다. 이에 둘째 의옥이 화답하여 말하기를 ‘지금 어린 후비가 나름 모후의 도를 다하곘다며 정신도 성치못한 태자의 침소에 매일같이 드나드는 모양입니다. 이를 기화로 충분히 이간시킬수 있습니다.; 하였다. 의진이 귀가 솔깃하여 묻기를 ’아우에겐 무슨 좋은 계책이 있는가 ?‘ 하니 의옥이 다시 답하기를 ’어린 후비가 장성한 태자를 연모하여 정분이 난것같다 소문을 퍼트리면 충분히 부황의 의심을 사게하여 폐비시킬수 있습니다.‘ 하였다. 하지만 되려 의진이 당치않다는 듯 어이없어 손을 내저으며 ’태자가 새 황후와 나이가 엇비슷하고 거기다 정신이 온전하다면 납득이 가곘지만 이미 태자 나이 서른이 되도록 말과 행동이 여전히 다섯 살도 채 안된 어린 아가와 다름이없고 실제 나이로도 후비보다 열여섯살이나 많은데 이를 누가 납득하곘는가. 이쯤되면 오히려 태자가 황후에게 큰오라비 정도도 아니고 숙부뻘은 될판인데 그 둘이 정분이 났다면 대체 누가 납득을 하겠는가 ? 내가 그런 입장이라도 넘어갈 계책이 아니니 다른 뜻을 말해보라.‘ 하였다. 허나 여기에 셋째 의경이 반박하여 말하기를 ’옛부터 남녀사이는 모르는것이라 했으니 이 정도의 계책이면 충분히 부황을 이간시킬수 있습니다. 또한 황후가 나이어리고 또 비록 충의있는 지사가 부당하게 모함에 빠져 이를 면키위한 방책으로 바친 여식이라 하나 지금껏 다른 남자를 접한일이 없고, 궁에서 접할수 있는 사내라야 남자구실 못하는 내관과 장성하였으되 그 언행이 코흘리개 어린아이같은 태자뿐이니 나이어린 후비가 충분히 마음이 움직일수 있는 상황입니다. 상황을 충분히 만들면 충분히 부황의 의심을 사게할수 있습니다.‘ 하였다.
의진이 아우들의 설득을 듣고 곧 좋은 계책이라 하여 일을 꾸미기에 이르렀다. 우선 황후가 태자를 연모하는듯한 거짓 연서를 만들어 몰래 황후의 처소에 가져다놓고 하루는 의옥과 의경이 직접 부황을 찾아 뵙고 이와같이 말했다. ’듣기로 지금 장성했으나 정신이 어린 태자가 밤마다 잠못이루는 병을 앓고 있는데 어린 후비가 이를 빌미로 밤마다 태자의 처소로 드나든다 들었습니다. 어린 황후가 제 딴에는 모후로서의 도리를 다하곘다고 나서는 것은 딱하기 그지없으나 혹시 잘못되는 일이 있을까 두려우니 부황께서 마땅히 경계하소서.‘ 하였다. 황제가 이를 듣고 오히려 의심하며 말하기를 ’공주들은 어찌 그와같은 망령된 말을 입에 담는가. 황후는 내가 직접 곁에서 지켜보니 그럴사람이 아니니 더는 거론치 말라‘ 꾸짖었다. 이에 다시 의옥이 부황을 부추기며 ’옛부터 남녀사이는 모르는것이라 했고 어린 황후가 열네살에 시집와 늙은 남편을 모시고 있고 매일 접할 수 있는 사내라야 비록 정신이 온전치 못한게 흠일뿐 이미 장성한 태자가 있으니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하곘습니까. 다시금 경계하소서.‘ 하였다. 결국 황제가 의심이나서 불시에 황후의 처소에 들렀는데 이때 황후는 태자의 잠자리를 살피다 밤늦게 처소로 돌아왔다. 황제가 의아하여 묻기를 ’황후가 이 밤늦은 시간에 어딜 그리 쏘다니는가 ?‘ 하니 황후가 답하기를 ’태자께서 비록 장성하셨으나 정신이 온전치 못하시고 또 밤마다 돌아가신 모후를 그리워하며 우는게 안타까와 그 곁을 지켜드린것뿐 다른뜻이 없으니 심려마소서.‘ 하였다. 황제가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방을 뒤지는데 기어이 연서가 나오고 말았다. 실은 의옥과 의경이 거짓으로 집어넣은 연서이지만 황제가 바로 의심하여 ’이것이 무엇인가 ?‘ 물으니 황후가 바로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울며 말하기를 ’이는 어느 간특한자의 흉계입니다. 신첩이 비록 나이어리다하나 어릴때부터 사가에서 옛 선현의 도리를 아비와 조부로부터 배우지 않은 것이 없는데 어찌 이제와서 그런 망령된짓을 하겠습니까. 마땅히 필적을 확인해보소서. 또한 저는 서한을 쓸 때 한번 완성하지 못한 서한은 혹시 정신이 산란해질까 두려워 따로 보관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만약 완성치 못한 서한이 제 서랍안에 있다면 그것은 분명 제것이 아니니 다시 확인하여주소서.‘ 하고는 바로 자신의 서간을 보여주며 필적을 확인하게하고 또한 자신의 완성하지 못한 서한을 별도로 보관하는곳을 보여주었다. 이에 황제가 노여움을 버리며 ’공주들이 나이어린 황후에게 용렬한 시기심을 보인것같으니 황후는 너무 노여워말라‘며 위로하고 돌아갔다.
황후를 모해할 계책이 수포로 돌아가자 의진이 다시 아우들을 불러 말했다. ’본시 우리가 나이어린 황후를 몰아내고 우매한 태자를 지키기위하고자 계책을 꾸몄는데 용렬한 아우들의 허술한 계책으로 그만 부황의 노여움을 사고 말았다. 이제 어찌하면 좋겠는가 ?‘ 하니 이번엔 넷째 의명이 말했다. ’제게 다른 좋은 계책이 있나이다‘ 하여 의진이 ’어서 계책을 말해보라‘ 하니 의명이 이와같이 답했다. ’본래 빈철현이 지조있는 선비로 나라의 법도를 바로잡으려다 모함을 받아 귀양을 간 것으로 이전에는 승상부 관리였던 권광석(權廣錫), 지일웅(池逸雄)등과 교류가 있었나이다. 이들은 모두 학같고 솔같은 이라는 평가를 받던 선비들로 이전 빈철현과의 교류를 생각하면 두 집안 사이에 혼담이 오간다 해도 이상할것이 없던 사이옵니다. 허나 이제 철현은 귀양을 가고 그 딸은 황제께 바쳐졌으니 다만 광석과 일웅 모두 황후와 비슷한 연배의 아들이 있어 이 모든게 수포로 돌아간 것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있을것입니다. 먼저 광석과 일웅에겐 은밀히 사람을 보내 황후께서 은밀히 만날 것을 청한다 하시고 반대로 황후에겐 광석과 일웅 자제가 만나기를 청한다는 거짓 서한을 띄우소서. 그리고 이들이 만나는곳에 폐하를 납시게하면 반드시 부황의 의심을 사게될것입니다.‘ 하였다. 의진이 한편으론 의심가서 말하기를 ’이런식으로라면 앞서 황후를 모해하려던 계책과 별반 다를것이 없는데 이것이 효과가 있겠는가 ?‘ 하니 이번엔 막내 의혜가 말하기를 ’원래 젊은 계모와 장성한 의붓아들 사이를 모해하여 정적을 제거하는일은 동서고금에 흔하게 있었던일이라 황제께서 의심했던 것은 어쪄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일은 쉽지 않을것으로 이미 철현이 귀양을 간 몸으로 아부리 이전에 교분이 있다한들 권광석,지일웅의 자제가 그리 쉽게 움직이겠으며 황후 또한 그들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없지는 않을터 능히 뜻을 이룰것입니다.‘ 하였다. 의진이 의혜릐 말을듣고 옳다여겨 ’계책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이어 내놓은 계책대로 권광석의 아들 태경(泰景)과 지일웅의 아들 관용(館容)에게 사람을 보내 황후가 은밀히 만날 것을 청한다 하였다. 이때 태경과 관용의 나이는 모두 십칠세였다. 또한 황후에겐 은밀한 서한을 보내니 황후가 다만 서한을 받아보고 ’이만 물러가라‘ 하였다. 이후 직접 황제를 만나 서한을 보여주고는 ’아무래도 신첩을 모해하고자 이와같은 흉계를 꾸미는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태경과 관용 두 도령은 본래 어릴적부터 집안끼리 왕래가 있었던 사이로 두 도령 모두 서예(書藝)가 부족하여 정서체(正書體)외엔 거의 쓰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나 이 필적은 이미 서예가 능숙한이가 쓴 것으로 두 도령의; 서체가 아니옵니다. 또한 하필 두 도령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내용의 서한을 보냈으니 어찌 이것을 도령들이 보낸것이라 하곘습니까. 흉계가 분명하옵니다.‘ 하니 황제가 거듭 노하여 ’대체 누가 우리 귀하고 존엄한 어린 황후룰 계속 모해한다더냐 ? 항차 이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 하니 황후가 답하기를 ’이미 제가 적의 간계를 알았으니 약속장소에 나갈일이 없거니와 다만 폐하께서 오히려 변장을 하고 직접나가 흉계를 꾸민이들을 정죄하소서‘ 하였다. 황제가 의아하여 ’내가 몸집이 그대의 두배는 되고 또한 나이도 늙었으니 변장을 한들 알아보곘는가 ?‘ 하니 황후가 답하기를 ’궁녀나 내관중 저와 외모와 체구가 흡사한이를 시켜 도령과의 밀화장소로 내보내고 황제께선 호위하는 병사들과 은밀히 숨어 지켜보시면 마땅히 역당의 무리들을 일망타진할수 있을것입니다‘ 하여 황제가 황후의 말을 옳다 여기고 그대로 시행토록 하였다.
마침내 약속한날 약속장소에 황제가 일홍(一紅)이란 궁녀를 변장시켜 내보냈다. 권태경과 지관용이 본래 황후의 용모를 알고 있었으나 어느덧 만나지 못한지 수년이 지났고 어두운 밤이라 바로 알아보지 못하였다. 먼저 태경이 황후에게 묻기를 ’낭자를 사모한지 오래였건만 이제 부득이한 사정으로 늙은 황제에게 바쳐진 몸이라 밤마다 가슴아파 견딜날이 없었소이다. 이제 이렇게 만났으니 앞으로의 일을 논해보도록 합시다.‘ 하였고 지관용은 한술 더 떠서 ’그 늙은 도적을 내 스스로 간과 창자를 베어도 시원치가 않을 것 같소이다. 어차피 이리된 것 나와함께 어디 멀리 달아나서 다른 삶을 간구해보도록 합시다‘ 하였다. 이에 일홍이 변장한채로 답하기를 ’도령들의 마음은 충분히 알았으나 이제 황후된 몸으로 황실에 묶여있으니 다만 섣불리 움직이다가 도령들또한 다칠까 염려되오이다‘ 하였다. 이에 태경이 분루를 삼키며 말하기를 ’황실이 이 지경이 된 것을 보니 북위도 멸망할날이 머지 않았소이다. 예부터 중원의 왕조가 삼백년 이상 간일이 많지 않거늘 어찌 멸망의 날이 머지 않았다 하겠소이까. 우리 함께 일을 도모합시다.‘ 하였다. 이때 황제가 노하여 마침내 호위하는 병사들과 나타나 ’저 역적들을 체포하라‘ 하였다.
날이 밝아 일이 그르쳐진 것을 알고 공주들이 모두 놀라 다시 모였다. 추국장에서 권태경과 지관용은 모두 ’간교한자에 꾀임에 빠진것뿐이니 용서하여 주소서‘ 눈물로 빌었고 마침내 배후에 공주들이 있음이 밝혀졌다. 황제가 몸소 다섯딸을 불러 꾸짖으며 말하기를 ’공주들이 어찌 나이어린 황후를 시기하여 망령된일을 꾸미기를 이와같이 하는가. 앞으로 행동거지를 삼가고 근신토록하라‘ 엄중히 명하였다.
의진이 더욱 답답하고 화가나 다시금 아우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아우들의 걔첵대로 행했다고 이미 두 번이나 실패하고 오히려 부황의 노여움만 샀으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 하니 다시 둘째 의옥이 말하기를 ’저희에게 다시 좋은꾀가 있으니 형님께선 너무 심려마소서‘ 하였다. 허나 여전히 의진이 믿을수 없다는 듯 나오자 다시 셋쨰 의경이 설득하기를 ’앞서의 계책은 너무 상투적인것이라 황후나 황제가 쉬이 계략을 알기 좋은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다른 방도를 꾀해볼테니 믿어보소서.‘ 하여 의진이 ’말해보라‘하여 의옥이 다시 계책을 내놓았다. ’비록 황후가 지금은 태자를 극진히 돌본다 하나 자신이 아이를 가지면 달라질것입니다. 먼저 소문을 퍼트려 ‘황후가 결국 늙은 황제와의 사이에 자손을 보아 그 아이를 태자로 올리려 할것이며 그리되면 이후 태자의 안위는 장담할길 없도다. 또한 황제가 이미 늙었으니 황후가 다른 마음을 품으면 그 자손이 황실의 씨가 맞을지 어찌 장담하는가 ?’ 소문을 먼저 퍼트려 황제로 하여금 스스로 의심을 하게 한뒤 이후 황호의 처소에서 태자를 저주하는 물건이 발견되게 하면 마땅히 일을 도모할수 있을것입니다. 하여 의진이 옳다 여기고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마침내 저자에 ‘황후가 결국 늙은 황제와의 사이에 자손을 보면 태자를 해할것이오 또 이미 황제가 늙었으니 그 자손이 황제의 씨앗일것이란 보장이 없도다’ 하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황제가 결국 의심하여 황후를 불러 술을 마시며 말하기를 ‘내 비록 늙은나이에 충신의 배려가 있어 어린 황후를 맞았으나 다만 내게 딸만 다섯이 있고 나이 40이 다 되어 본 아들 하나가 지금껏 정신이 온전치 못해 이후의 근심은 달라지는 것이 없도다. 지금 태자가 능히 한 나라를 경영할만한 능력이 못된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데 항차 이를 어찌하면 좋단말인가 ?’ 하니 황후가 답하기를 ‘신첩에게 다른뜻이 없으니 너무 심려마소서. 또 이미 스스로 삼가는바가 있으니 근심하실일이 아니옵니다.’ 하였다. 황제가 거듭 의아하여 ‘그대가 회임이 되고 안되는 것을 어찌안단말인가 ?’ 하니 황후가 ‘여인은 스스로 피하는 법도가 있으니 너무 심려 안하셔도 됩니다.’ 하여 황제가 일단 의심하진 않았다. 다만 이후의 후계문제는 여전히 마땅한 대안이 없어 황제는 물론 황후도 기어이 근심하기 시작했다.
이때 황후의 처소에서 흉측한 물건이 발견되니 태자의 형상을 닮은듯한 목각인형과 저주의 글귀였다. 황제가 결국 놀라 황후를 불러 진상을 캐물으니 다만 황후는 눈물을 흘리며 ‘모든 것이 신첩을 모해하는 흉계입니다. 하늘에 이 목숨과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니 제가 그런적이 없사옵니다.’ 하였다. 허나 여전히 황제가 의심을 품지않고 ‘허나 그대가 한짓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증명하는거 ?’ 하니 황후도 스스로 불안하고 억울한가운데 곰곰 생각해보니 ‘일전에 묘진(妙眞)와 주희(株嬉)라는 궁녀가 저희 처소 궁녀를 은밀히 만나는 것을 본적이 있사옵니다. 이들은 모두 본래 공주들과 친분이 있는 궁녀로 이들을 문초하여 캐물으면 진상을 알수 있을것입니다’ 하였다. 마침내 의심가는 궁녀들을 모두 불러 문초하니 결국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황제가 마침내 의진,의옥,의경,의명,의혜 다섯 공주를 모두 불러모아 말했다. ‘내 비록 늙은 나이에 어린 황후를 맞아 자손들 앞에서 민망한 면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황실과 가문의 법도는 바로잡고자 노력하지 않은바가 없었다. 황후가 비록 어리다하나 지금 황실에서 태자를 돌보는 중책을 맡고있고, 또한 공주들이 비록 나이가 많다하나 아비가 황후로 들인이상 마땅히 어머니로 존중해야 하거늘 이 무슨 나변이란말인가. 앞으로 두 번다시 황후를 모해하는 일이 없을것이며 정중히 아비 보는앞에서 모녀간의 예를 갖추도록하라.’ 하였다. 이에 다섯 공주가 마지못해 황후에게 절을 올리는데 황후는 진정성있게 맞절로서 화답하였으나 공주들의 얼굴에는 어둡고 그늘진 표정이 여전히 가시지가 않았다.
황후가 매일같이 밤낮으로 우매한 태자를 돌보는데 그 지극함과 정성이 마치 갓난아기를 돌보는 젊은 어미와 같았다. 허나 누가봐도 태자가 다음 황위를 물려받는 것은 적절해보이지 않아 황제가 다시 술을 나누며 황후에게 물었다. ‘내 나이 어느덧 칠십을 넘었고 몸의 기력도 이전같지 않아 살날을 오래 기약하기 힘든것같다. 다만 마땅한 후사가 없고 유일한 아들을 다른 대안이 없어 태자로 봉하긴 했으니 여전히 정신이 성치 못하니 항차의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 하니 다시 황후가 답하기를 ‘옛 선현의 글귀에도 보위는 마땅히 적장자가 계승하되 적장자가 온전치 않으면 다른 대안을 찾는다’ 하였으니 태자는 다만 나중에 제가 정성스레 잘 돌보아 누구도 그를 해치는일이 없도록 할테니 폐하께선 지금이라도 다른 대안을 찾아보소서.‘ 하였다. 이에 황제가 다시 묻기를 ’그대는 새로운 대안을 낳기를 원하는가 ?‘ 하니 황후가 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신첩이 비록 어리석은 계집이라 하나 어찌 천지도리와 은혜갚음의 이치를 모르오이까. 이미 폐하의 후실이 된 몸으로 마땅히 태자도 제 아들이나 다름없으니 앞으로도 정성껏 돌볼것이며 신첩에겐 맹세코 다른뜻이 없나이다. 또한 이미 역적으로 몰려 다 죽게된 신첩의 아비를 폐하께서 자비로 사면해주신것이나 다름없으니 다만 견마의 노고를 다하여 신의 아비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갚기를 바랄뿐입니다. 진실로 다른뜻이 없나이다.‘ 하였다. 이에 다시 황제가 ’허먼 다음 황위는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니 황후는 거듭 ’다른 대안을 찾으시라‘ 권하고 황제가 근심의 빛을 거두지 못한채 다만 술만 마실 뿐이었다.
남서쪽 진응(眞應),유석(由錫)이란 곳에버 반란이 일어났다. 난을 일으킨자는 임준(任俊)과 소섭(蘇燮)이란 자였는데 이들은 본래 한 고장에서 나고자란 사이로 하루는 임준이 꿈을 꾸는데 한 도사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중원이 이미 쇠락하여 오랑캐에게 그 너른 강토를 잃고 다만 작은 터전을 기반으로 삼아 버티고 있는지 오래되었다. 이제 다만 북위가 옛 선현의 도리를 잇곘다는 명분으로 삼백년을 버텨왔으나 이미 그 운이 다하였고 새 황제는 어리석은 계집에게만 놀아나고 있으니 그대가 마땅히 천운을 받아 새 강토를 개척하라‘고 했다고 한다. 임준이 꿈에서 깨어 놀라 주위를 살피니 방구석에 이전에 없던 진귀한 구슬 세 개가 보여 ’이는 필시 하늘의 계시가 분명하다‘며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때 명제가 어느덧 늙고 병들어 더 이상 국사를 돌볼 처지가 되지못해 황후가 대산 국정을 관리하고 있었다. 반란의 보고를 듣고 장군 민형서(閔衡書)와 서재국(徐宰菊)에게 명하여 난을 진압토록 했다. 오천의 군대를 이끌고 출병하니 어느덧 반란의 무리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먼저 형서가 말하기를 ’어느덧 반란군이 열 개의 고을을 손에 얻었으나 척후병을 보내 살피니 이중 절반은 진심으로 반란군을 따르는듯하고 나머지는 마지못해 복종하는듯하다. 우리는 마땅히 진심으로 따르는이들을 움직일 것이다‘ 하여 재국이 의아하여 가로되 ’만약 반란군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면 마지못해 따르는쪽의 마음을 흔들어 투항케 하여야 할 일인데 어찌 진심으로 따르는쪽을 움직인다 하십니까 ?‘ 하니 민형서가 ’일단 두고보라‘ 말하였다.
이후 소문을 퍼트려 ’임준과 소섭공은 일찍이 천명을 받은 몸으로 이제 쇠락하고 부도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세계를 열고자 나신분이니 이제 만약 황도를 평정하고 황제의 목을 베어 내놓게 하는자는 마땅히 열후에 봉하고 공신을 배출한 마을엔 삼년동안 세금을 면케할 것‘이라 하였다. 이에 고을에 일부 힘좀 세고 따르는이가 있는 청년 몇몇이 흥분되어 ’지금 우리가 먼저 군사를 몰아 황도로 진격하여 황제와 나이어린 황후의 목을베 폐하께 바치면 우리 고을은 만년의 복락을 누릴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먼저 군사를 몰아 황도로 진격하려하니 민형서는 미리 길목에 군사를 매복시켜 섣불리 군사를 움직인 반란군을 섬멸시켰다. 임준과 소섭이 소식을 듣고 놀라 ’적의 간계에 빠졌다‘면서 ’앞으로 허락없이 군사를 움직이는이는 극형에 처할것이며 본진에서 특별히 명이 떨어지는일이 없는한 경거망동하지말라‘ 하였다. 허나 한번 흔들리기 시작한 민심이 이미 걷잡을수 없어 저마다 먼저 군사를 움직이고자 아귀다툼이 벌어졌다. 이때 형서와 재국이 한때의 군사를 몰아치니 반란군의 핵심이 된 고을들이 모두 수하에 떨어졌다. 임준과 소섭의 난은 이와같이 진압되었다.
황제가 칠십삼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니 새 황후를 들인지 일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마땅한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황후가 선황(先皇)의 비(妃)의 자격으로 권신들과 후계 문제를 의논하였다. 먼저 사도(司徒) 백진(百進)이 말하기를 ’승하하신 선황폐하나 앞선 신제(愼帝) 폐하에겐 마땅한 후사가 없었으니 이제 다른 황실 종친중에 후사를 정할 수밖에 없는바 선대(先代) 상제(尙帝) 폐하의 장손 진정군(眞定君)의 차남 금룡군(金龍君)과 삼남 금목군(金穆君)이 모두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에 밝아 마땅히 황위에 오를만한 재목이라 사료되옵니다.‘ 하였다. 이에 태위(太尉) 한석훈(韓錫薰)이 반박하듯 말하기를 ’금룡군과 금목군이 모두 총명하고 지혜롭다 하나 지금 여러 가지로 나라 내외 사정이 어려운바 앞선 의제(義帝)의 자손으로 승천군(承泉君)이 오랫동안 외국을 돌아다니며 국제정세에 밝고 또한 민심을 살피는대도 나름 재주가 있으니 마땅히 승천군을 올림이 가한줄로 아뢰옵니댜.‘ 하였다. 이어 내무승(內務丞) 황원갑(黃原甲)과 재경총람(財經總覽) 이익재(李益宰) 또한 경쟁하듯 아뢰기를 그보다는 상제 폐하의 또다른 자손 태인군(太仁君)의 차남(次男) 어성군(於成君)과 사남(四男) 어홍군(於弘君)이 일전에 신등이 사사로이 만나보니 대국(大局)을 바라보는 혜안과 정세를 분석하는 판단력이 뛰어나니 이분중에 적임자를 찾는줄로 아뢰오’ 하여 대신들사이에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황후가 한동안 고민하다 한가지 지혜를 짜내니 이와같이 하였다. 먼저 임시로 ‘원상(院相)’ 회의를 황후 직권으로 소집하되 여기에는 선황시절 삼공(三公) 또는 태부(太傅) 이상의 벼슬을 한바 있거나 공신의 반열에 오른이중 나이 육십세가 넘은이들로 원상회의를 소집하였다. 이에 나이가 너무 많아 병환이 깊거나 거동이 불편한이, 또는 거리가 너무 멀어 황도까지 올수 없는이들을 제외하고 모두 칠십오인이 모여들었다. 이에 황후가 다들 불러모은뒤에 말하기를 ‘돌아가신 선황폐하에게 마땅한 적임 후계가 없어 다른 대안을 찾다보니 여러 대신들이 많은 종친들을 추천하였으나 이중 끝내 적임자를 찾지 못하였소. 따라서 여러 대인(大人)들이 모인 가운데 그 뜻을 알아보고자 하오. 각자 작은 종이와 붓을 나누어줄테니 거기에 자신이 바라는 차기 황제감을 적으시고 적은 내용은 누구에게도 보여줘선 아니되며 혹 내용을 타인이 알게되더라도 불이익이 없도록 하겠소. 그렇게 모인 종이쪽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써내려간자를 차기 황제로 결정하겠소’ 라고 하였다. 종이쪽을 모아 이름별로 분리하는일은 내시부의 의례내관(儀禮內官)들이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후 종이쪽이 모두 모아지니 의례내관들이 종이를 열어보고 황후가 친람하는 가운데 결과가 발표되었다. 모두 칠십오인이 종이쪽에 이름을 써낸 가운데 분류하여 발표를 하니 금목군을 적어낸이가 서른하나로 가장 많았고, 어성군을 적어낸이가 스물셋으로 그 다음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금룡군이 열하나, 승천군은 일곱, 어홍군을 적어낸에도 네명이나 있었다. 이로써 황후가 말한바와 같이 가장 많은 원상들이 적어낸 금목군을 차기 황제로 지명하였다. 이로써 금목군이 즉위하여 9대 성제(成帝)가 되었다.
한편 선황의 태자였던 정명에겐 금위왕(金圍王)이란 지위가 내려져 제후의 반열로 대접하게 하였으며 황후가 명하여 안온전(安溫殿)을 짓게하여 그곳에서 왕을 살게 하였다. 황후는 그곳에서 평생동안 왕을 돌보다 생을 마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