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성경적 실천의 현장과 클레로스(259) – 사도들의 실천과 클레로스(238) – 히브리서 강해(14)
히브리서 강해(14) – 히11:8 ~12장, 13장 끝까지
피스티스는 신뢰함의 의미와 신실함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피스티스는 설득하다의 뜻인 페이도에서 파생된 동사인 피스튜오에서 나온 명사이다.
11장 1절에서의 믿음, 피스티스는 하나님에 의해 설득 당해서 신뢰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설득 당해서 신뢰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11장에서 언급된 구약의 인물들은 하나님에 의해 설득 당해서 신뢰하게 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이다.
이해와 동의와 소망의 단계에서는 신뢰함의 의미이지만 변화와 실천의 단계에서는 신실함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 피스티스이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 아닌 두 언약의 비교장이다
아브라함은 신뢰하도록 만들어짐으로써 부르심을 받고 순종하여 장차 상속물로 받을 그 땅을 향해 떠났는데 그는 목적지를 알지 못한 채 떠났다.(11:8)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가나한 땅으로 가라고 해서 가는 것이며 어디로 갈지는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하신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디서 나타날지를 모르는 것일 뿐 가나안 땅으로 갔던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같은 약속을 받았는데 죽을 때까지 장막에서만 살았고 하나님이 만드시고 세우실 든든한 터를 가진 성을 기대하며 살았다. 그들에게 약속의 본질은 이스라엘이 선민이라는 것이 아니라 천한만민이다.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는다는 약속을 주신 것이다.(창12:1-3, 26:1-4, 28:10-14)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두 하나님 체험을 했다. 그리고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홍해, 여리고, 기생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선지자들도 모두 하나님 체험을 한 사람들이다.
(요셉이 꿈 해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창41:25-26) 홍해 사건과 여리고 성 사건은 이스라엘의 집단적인 하나님 체험이며,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 소문을 듣고 살아남기 위해 밀정을 숨겨준 사건은 간접 체험에 의해 신뢰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계표를 옮기는 등 율법을 안 지켰다. 이 사람들은 모두 신뢰하게 만들어짐으로 말미암아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 약속을 받지는 못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신 것은 우리가 없이는 저들이 온전하 게 만들어지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히브리서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39-40)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전개에서 그렇게 구성을 짰다는 것이다.
그 약속이란 하나됨이다. 형제 자매들이 모두와 함께 평화와 성별됨을 추구하는 것이며,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은 것이다. 수신자들은 이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은 것이 기정사실인 자들이다. 그리고 진도가 계속 나갈 거라는 것이다. 수신자들은 형제 사랑을 이미 시작한 사람들이었으며, 이미 진행되고 있는 좋은 행실과 교류 즉 하나됨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잘 하고 있는데 더 잘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의 인물들은 개인적으로 하나님 체험을 한 자들이다. 그러나 자기 체험으로 끝난다. 하나님 체험은 했지만 자기밖에 모르는 자들이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사라를 아내가 아니고 누이 동생이라고 속였으며, 이삭도 그랬고, 야곱은 형인 에서에게서 장자권을 빼앗았다. 어머니와 공모해서 아버지를 속인 것이다. 라합은 자기 동족이 몰살 당해도 우리 가족은 살아야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옛 언약의 인물들이 받은 약속에는 하나됨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지적하거나 질책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나사렛 지파에게는 새 언약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신 것은 우리가 없이는 저들이 온전하게 만들어지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11:39-40) 우리가 먼저 온전해지고 우리로 인해 저들도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것이다.
새 언약은 전부 개인이 아닌 “우리” 이야기이다. “모두와 함께” 평화와 성별됨을 추구하는 것이며,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형제 사랑이 시작되었고, 좋은 행실과 교류 즉 하나됨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체험을 한 구약의 인물들만 눈에 들어오고 새 언약에 대해서는 서로 친하게 지내라는 정도로 성서가 보이는 것은 개인 구원 교리로서 옛 언약에 해당된다. 따라서 구약의 인물들은 모범이 아니며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 아닌 두 언약의 비교장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두 시대를 비교를 하고 있으며(렘16:14-15, 23:7-8) 히브리서 저자는 나사렛 지파가 새 언약(메시아와 성령의 강림으로 새롭게 창조되어 하나가 됨)이 성취된 새 시대의 사람들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11장을 믿음장이라고 하는 것은 구 시대의 믿음을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으로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조상의 전통으로 살면서 가증스럽고 서로 미워하며 살았다고 고백한 이유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저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움의 표현이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형제들이 다시 각자도생의 삶으로 돌아갈까 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과 히브리서 저자가 나사렛 지파가 다시 옛 시대로 돌아가면 안 된다고 설득하는 것과는 동일한 것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연동흠 형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