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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방세계 >
현대세계불교 연재를 시작하며 ①
불교의 생명은 전법포교에
편년체와 기전체 혼용, 고금과 남북의 현대불교를 통해 불교의 전모를 파악한다
글 | 이치란 박사
(원 응 보검)
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아시아불교평화회의(ABCP 본부 몽골) 한국회장
국제불교연맹 이사(IBC 본부 인도)
동방불교대학 전 총장
한국불교신문 전 주필
현: 해동불교대학장
강원불교대학장
WFB 세계불교대학 집행이사
일붕신문 상임논설위원
매일종교신문 기고가
땅끝어룡도해수관세음보살도량
당제산 여의암 회주
다나TV 영어경전 강의
세계불교 TV에서 ‘세계불교를 가다’ 소개
(www.haedongacademy.org)
불교는 너무나 방대해서 어디서부터 시작하고 어디로 들어가야, 불교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을까? 참으로 난감한 과제요 어떻게 풀어가야 쉽게 접근할 수 있을지 막연하다. 그렇다고 무질서하게 만연체(蔓衍體) 형식으로 글을 엮는 다는 것은 독자를 오히려 피곤하게만 할 뿐이다. 불교를 소개하는 데는 당연히 불교역사부터 알아야 한다. 그럴라치면 편년체에 입각해서 연대순으로 서술해야하는데, 이 또한 진부한 사건의 나열일 뿐일 수도 있어서 불교에 대한 상식이 없는 분들에게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그렇다고 사마천의 필법으로 인물중심의 기전체를 방법론으로 택한다면, 흥미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불교란 종교의 전모를 파악하는데 있어서는 다소 미흡할 뿐이다. 그래서 편년체와 기전체를 혼용하면서, 고금과 남북을 오락가락 하면서 일단 출발을 현대불교에서 시작하기로 작정했다.
연재 제목을 ‘현대 세계불교’로 정한 것은, 한 지역의 현대불교를 시작으로 통(通)불교적 관점에서 지역불교를 소개하면서 인도불교와 내지는 전 세계 불교 전체와 관련하면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방향으로 전개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불교라는 종교는 교리발달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초기불교와 중세불교 그리고 현대불교의 교리(철학)가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부처님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몇 세기가 지나면 인식방법과 표현양식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마치 금이라는 원료는 같지만, 모양은 때로는 반지로 귀걸이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의 초기원시불교와 중국의 선불교는 그 모습과 내용이 아주 다르게 거리가 있는 듯하지만, 관통해보면 너무나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고득락(離苦得樂)’이다. 간단히 풀이하면 ‘고를 떠나서 낙을 찾는다.’는 정도이지만, 이 말속에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조사(祖師)의 가르침이 동시에 들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세속명은 ‘고오타마 싯다르타’이다. 이것은 산스크리트어의 발음이고, 당대 현장에서 구어체로 사용되던 빨리어 발음으로는 ‘고타마 싯다타’이다. 고타마 싯다타는 왕자였음은 분명하다. 왕자였기에 부처가 된 것은 아니고, 철저한 자기 노력과 고행에 의해서 대각(大覺)을 하였기에 ‘붓다(깨달은 자)’가 되었고, 우리는 한국어로 ‘부처님’이라고 부른다. 붓다를 중국에서는 ‘불타(佛陀)’라고 음차(音借)했다. 뜻으로 풀이하면 각자(覺者)가 된다. 한글로 뜻풀이를 한다면 ‘깨달은 님’이라 해야 하지만, 중국의 한자식 음차에 님‘자(字)’만 붙여서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인가? 불교에서 가장 키워드는 바로 이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이란 키워드는 불교의 궁극적 목적과 관련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을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고’와 ‘낙’만을 주목해 보자. 고타마 싯다타는 ‘고(苦)’ 때문에 진리를 찾아 나섰고, 6년 고행 끝에 결국 ‘고’가 무엇인가를 알았고, 고를 떠나서 자유로운 해탈(자유)의 경지인 열반인 ‘낙(樂)’을 얻어서 붓다(깨달은 자)가 되어서, 제자들에게 이 ‘낙’을 가르치고 ‘고’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45년을 보내게 된다. 이렇다 보니 제자가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수행단체가 되고 규모가 커지고 내용이 풍부해져서 종교라는 형태로 발전하게 되어서 오늘날 불교라는 하나의 종교로 성장해서, 거대한 몸집이 되었다.
그런데 불교란 종교에 대해서 담론을 전개하려면 고타마 싯다타의 출가 동기부터 알아야 한다. 즉 왜? 고행의 길을 택했는지가 관건이다. 그것은 고타마 싯다타가 대방기(大放棄=크게 버린다는 의미인데, 출가를 말함)의 결단을 내리게 한 의문이었던 ‘고’였는데, 이 ‘고’에 대해서 좀 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고타마 싯다타의 의문과 진리추구는 고에서 출발했다. 사문유관(四門遊觀)이란 말로 상징하고 있는데, 왕궁의 동서남북의 문을 나서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은 고통의 존재라는 것을 파악하고 고민에 빠지자, 한 출가수행자가 출가해서 고명한 스승 밑에서 수행에 의해서 고의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알려준 것이다. 이 충고에 따라서 그는 대방기의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 출가동기가 고의 해결이었다.
고타마 싯다타가 왕자라고는 했지만, 왕국의 인구나 영토와 군사가 어느 정도였고, 당시 인도 亞대륙에서의 어느 정도 위상이었는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공국(公國) 정도였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 연구가들의 견해이다. 중국식으로 비교한다면 제후국 정도의 수준으로 보면 될 것 같다. 기원전 6세기이므로 지금의 관점으로 본다면 아마도 우리나라 읍 정도의 타운이 아닐까 상상해 보는데, 이런 비교도 맞지 않는 것이 고대 왕국의 모습은 확연히 다른 양상이었을 것이고 그 어떤 역사가도 꼭 그대로 재현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고타마 싯다타가 태자로서 왕의 후계 수업은 분명하게 받았고, 29세 정도면 사고의 깊이가 단순하지는 안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고타마 싯다타가 성장할 무렵, 북인도의 탁실라는 인도 아 대륙 특히 북동부의 전 지역의 왕후장상들의 자제들이 유학 와서 공부하는 고등교육기관이 있었고, 여기에서 함께 교육받은 바라문 출신자제들이 교수가 되어 직접 왕궁에 초빙되어서 왕자나 신하들의 자녀들을 가르쳤다. 이때 이미 카스트 제도가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승려 계급인 바라문과 정치 행정 군사지도자 계급인 크샤트리아 출신의 왕후장상급 자제가 아니면 이런 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음은 인도사(印度史)를 통해서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인도고대 교육제도를 구루쿨라(Gurukula गुरुकुल)라고 부른다.
길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이 ‘구루쿨라’란 인도 고대 교육제도를 이해해야 고타마 싯다타를 이해하는데, 고타마 싯다타의 자질의 배경이 될 수 있다. 고타마 싯다타가 직접 탁실라까지 유학을 가지는 않았지만, 탁실라 대학 출신의 교수(구루)를 초빙해서 아버지 정반왕의 조신(朝臣)들의 일부 자제와 함께 탁실라대학에서의 교과과정과 똑 같은 텍스트 교육을 받은 것이다. 이런 풍경은 인도 아대륙의 여러 나라의 왕궁에서 흔히 있었던 교육시스템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고타마 싯다타는 4《베다》와 기타 군사과목 등을 배워서 제왕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했다고 한다. 당대 최고 학식을 다 연마했기에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을 정도였고, 다만 출가하여 수행하는 사문들의 철학사유에는 다소 미흡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세속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지만, ‘고(苦)’의 문제를 세속적 학문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초현실세계의 수행자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처음엔 당시 유명한 두 스승문하에서 번갈아 가면서 도를 닦았으나 성과가 없자 그는 홀로서기에 나서서 스스로 6년 고행 끝에 정각(正覺)을 이루어서 대도(大道)를 성취하여 고 뿐 아니라, 우주 인생 전체를 전지(全知)하는 대각자(大覺者)가 되어서, 비로소 붓다(깨달은 자)가 되었다.
불교는 고타마 싯다타가 깨달은 순간부터 시작되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깨닫고 나서 한동안 점검과 보임(깨달음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다지는 작업)을 하면서 심신을 추스르고 있었다. 붓다가 된 그는 고민에 빠졌다. 깨달은 경지를 혼자 즐기는 자수용법락(自受用法樂=혼자만이 깨달음의 경지를 즐기면서 노니는 것)이냐 아니면 남에게도 베푸느냐 하는 갈림길의 고민이었다. 붓다는 후자를 택해서 남에게도 베푸는 중생교화(하화중생)의 길을 선택하고, 옛 도반이었던 다섯 명의 동료부터 찾아 나서서 가르침을 베풀었다. 불교라는 종교는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전법(傳法=포교布敎)을 중요하게 여긴다. 수행하고 깨달았으면 전법하는 포교를 해야 하는 것이 불교의 생명인 것이다. 부처님은 《열반경》에서 모든 일체중생은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으므로 붓다가 될 수 있다고 설파하셨다.
붓다는 45년간 전법을 하다가 길에서 대열반(입적=죽음)에 들었다. 2566년 전에 인도 쿠시나가라에서 제자들은 스승을 다비(화장)하고 사리를 수습해서 봉안했다.
현대세계불교 ②
상좌부의 적통종가嫡統宗家, 미얀마 불교
大同小異한 13개의 크고 작은 파 존재
미얀마 불교는 오랫동안 버마불교로 불리어왔다. 국명이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뀐 것은 미얀마가 ‘미얀마 연방공화국’이기 때문이다. 미얀마는 연방공화국인데, 다민족 국가이다. 버마족이 70%가 넘는다. 나머지 30%는 샨족, 카렌족, 친족, 카친족, 몬족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구 5천만 명에 89%인 4천 5백만 명 이상이 불교도이다. 버마족의 70%에 샨족 대부분이 불교를 신봉한다. 50만 명 정도가 승려이다. 이 가운데는 사미(20세 이전)와 띨라신((thilashin여승)을 포함한 숫자이지만, 상좌부에서는 승려수가 가장 많은 곳이 미얀마다.
미얀마 불교에는 약 13개의 크고 작은 파가 있는데, 대동소이하다. 다만 어느 정도 경전(經典)과 율장(律藏=계율)에 충실하냐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쉐진 니카야파는 가장 근본주의적인 전통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비교적 비나야(율장)에 철저하다고 정평이 나있는 투담마(수담마라고도함)파 보다도 더 근본주의를 추구하는 파가 쉐진파이다. 쉐진은 마을의 이름인데, 본래 투담마파에서 분리했다. 쉐진파는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1900년대 브리티시 버마의 반식민지운동에도 무반응을 보였는데, 개화파의 성향을 보이면서도 불교의 정통주의를 고수하는 근본주의 파였다고 하겠다. 대외개방은 하되 불교의 정통성은 더욱 더 강화한다는 장로보수파의 경향을 띠었다. 1960년대 네 윈(1911~2002)이 권력가로 부상하면서 이 파의 고승으로부터 자문을 받자, 이 파의 근본주의적인 승원공동체가 버마 전역 불교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쉐진파의 승려가 10%밖에 안 된 5만 명이었지만, 버마 승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불교정통주의와 네 윈의 혁명사상이 맞아 떨어져서 불교사회주의적 성격의 국가 정체가 한동안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미얀마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역사는 기원전 3세기경으로 소급된다. 그 후 버마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주로 인도와 스리랑카에서인데, 처음엔 버마족의 선조격인 퓨족과 하버마 지역의 태국 캄보디아에 흡수된 몬족들이 불교를 먼저 받아들였다. 오늘날의 미얀마 불교는 바간왕조(849-1297)시기에 정착되었다. 이 시기에 주로 실론(스리랑카)에서 상좌부 불교를 수입했는데, 수도 바간은 실론의 불교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같을 정도로 실론 불교를 복사해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최근 지진으로 수십 개의 사원들이 피해를 입었는데, 바간에는 천불천탑(千佛千塔)이 건립될 정도로 중세시대에는 남방 상좌부의 센터 역할을 했다. 동남아의 여러 나라에서 유학을 올 정도로 불교가 한 때 전성을 이뤘다.
미얀마 불교는 태국 불교와 함께 남방 상좌부의 양대 산맥이다. 부처님 승가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는 불교가 미얀마 불교와 태국 불교이지만, 미얀마 불교가 더 원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미얀마 불교는 실론에서 불교가 집중적으로 전해졌는데, 버마(미얀마)에 전해질 때의 실론 불교는 인도불교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던 상좌부의 종가집이었다. 1861년 비구 빠나사미(Paññāsāmi)의 저술인 《사사나 왕사(Sāsana Vaṃsa:僧團史)》나 실론에서 저술된 왕통사(王統史)인 《마하왕서(Mahavamsa大史)》에 따르면, 기원전 228년 아소카 대왕은 불교 전도단(傳道團)을 파견할 때, 비구 소나(Sona)와 우따라(Uttara) 두 장로를 미얀마의 옛 이름인 수바나부미(Suvarnabhumi)에 다른 비구들과 함께 경전(암송)들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원후 7세기 경, 빨리어 산스크리트어 비문에 따르면, 퓨(Pyu)와 몬(Mon) 지역인 버마의 중부와 하 버마 지역에 불교가 이미 전파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확실한 것은, 11세기에서 13세기 바간(Bagan)시대에 불교는 전성을 이뤘다. 이 시기 왕과 왕비들은 2200여개의 탑과 사원을 건립했을 정도로 불심이 극에 달했다. 이런 강력했던 버마 불교도 몽골제국(원나라)의 침공으로 파괴되었고, 불교는 만달레이로 이동하게 되는데, 바간에는 불교유적이 화려하지만, 현대 미얀마 불교의 중심지는 만달레이 지역이다.
바간 왕조가 멸망하고 3국이 병립했지만, 불교는 그 나름대로 실론과 유대를 이어갔으나 실론 또한 16세기가 되면 유럽 열강의 식민지 개척으로 큰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버마 땅에서는 정치적 상황과는 다르게 상좌부 불교는 그대로 지속되고 있었다. 실론과의 외교관계는 원활하게 유지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인도 이후 상좌부 불교의 명맥을 이어가는데 이 두 나라의 불교교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버마 불교사적으로 보면, 바간 왕조와 꼰바웅 왕조 시대의 불교가 큰 획을 긋는다. 따웅우 왕조에 이어서 꽁바웅 왕조가 18세기 중엽 버마족의 얼라웅퍼야가 개창한 후 19세기 후반까지 대를 이은 미얀마 최후의 왕조이다. 수도는 이라와디 강 중류에 있는 슈웨보, 아바, 아마라푸라, 만달레이 등으로 전전하였고, 한 때는 팽창정책을 펼쳐 태국 아유타야까지 원정했고, 미얀마 최대의 판도를 누렸다. 그러나 영국 세력과 충돌하여 3차에 걸친 영국-미얀마 전쟁이 있었고, 결국 1885년 제10대 왕인 시보가 영국군에 포로가 되자 이 왕조는 133년 만에 멸망하였다. 미얀마의 근.현대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의 불교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큰 족적을 남겼다.
아무래도 현대 미얀마불교를 좀 더 소개할 필요가 있어서 차회에는 만달레이 불교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다만 미얀마 불교는 인도의 상좌부 불교의 원형을 실론(스리랑카)에서 받아들였고, 다시 실론에 전해준 역사를 갖고 있는데, 현재 상좌부 불교의 적통 종가(宗家)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철저한 승원공동체주의와 교학(敎學=빨리 경전어) 그리고 명상수행의 센터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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