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마르트르 테르트르(Tertre) 광장에 전시된 그림
▶ 2012년 8월 5일(일), 맑음, 오후에는 비
- 몽마르트르, 에펠 탑, 팡테옹(Pantheon)
마침내 길었던 유럽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오전에 아내와 아들은 이곳 교민 교회에 가고 나는
혼자서 시내구경에 나선다. 몽마르트르를 가보기로 한다. 그동안 전철표 사는 것까지 아들에게
일임하고 그저 아들 뒤만 쫓아 다녔던 터라 난감하다. 전철표 자동판매기에 영어로 하겠느냐는
자막과 버튼이 있어 꾹 눌렀더니 카드를 넣으라고 한다. 혹시 잘못 되어 카드가 나오지 않으면
고약할 것 같다. 다행이 유인창구가 보인다.
열차 문을 스스로 열고 올라타야 한다. 내려야 할 역을 어떻게 알까? 열차가 역을 지날 때마다
차례로 세어나가는 것은 쪽팔린다. 열차 문 위의 역 표시에 불빛이 차례로 깜박이다 역을 지나
면 꺼진다. 앙베르(Anvers) 역에서 내린다. 몽마르트르 오르는 행렬 따라간다.
두 블록을 지나서 사크레쾨르 사원(Basillique du Sacre Coeur) 입구다. 해발 130m인 사원은 언덕
바지여서 후니쿨라가 다니지만 다수는 걸어간다. 나는 표 사기가 귀찮아서 걸어간다. 흑인들이
관광객에게 접근하여 물건을 보이는 척하며 소매치기하려는 행태는 20년 전이나 똑같다. 그러
다 경찰을 보았는지 황급히 달아나기도 한다.
사크레쾨르 사원은 1870년 보불전쟁의 패배와 파리코뮌으로 암울했던 사회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1877년부터 40년에 걸쳐 지어졌다고 한다. 안을 둘러본다. 스페인에서 보던 성당 내부와
는 달리 소박하다. 사원을 나와 왼쪽 뒷길로 가서 베를리오즈의 집과 고흐가 살았다는 아파트
를 가늠해본다.
1133년에 지었다는 생 피에르 교회는 세월의 무게가 버거운지 허름하다. 교회 옆 테르트르
(Tertre) 광장이 몽마르트르의 명소역할을 한다. 늙수그레한 화백들이 더러 이젤 세우고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즐겁다.
달리의 미술관(Espace Dali) 앞 또한 관광객들이 잠시 서성거리는 장소다. 초현실주의의 거장이
라는 그의 예술에 대한 이해는 내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라서 나도 미술관 앞에서 서성인다.
에펠 탑에 가까운 Trocadero 역에서 아내와 아들을 만난다. 역 앞 사요 궁(Palais de Chaillo)은 무
료입장이다. 들어가면 0.00유로라는 입장권을 나누어 준다. 사요 궁은 고적박물관으로 사용하
고 있다. 프랑스의 고적을 축소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하였다. 하도 정교하고 고색이 역력하여
몇 번이나 긴가민가하였다.
에펠 탑은 2층 바닥에 실내 링크장을 만들려다 무너지는 사고가 일어나서 탑 오르는 엘리베이
터를 제한적으로 운행한다. 줄 선 사람들이 워낙 많아 우리는 탑 오르기를 포기하고 ‘자유의 여
신상’을 알현하러 간다. 세느 강 삼각주로 형성된 조그만 섬 끄트머리이자 그르넬(Grenelle) 다
리 중간에 있다.
비리캠(Bir Hakeim) 다리에서 ‘백조의 작은 길(Allee des Cygnes)’로 간다. 아닌 게 아니라 강가에
는 백조 일가족 5마리가 유영하고 있다. 자유의 여신상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 뒤태만 보인다.
앞모습을 비스듬히나마 보려면 멀리 돌아 강변으로 가야 한다. 의지의 한국인 남녀 두 사람이
그리로 가는 것을 보았다.
1. 몽마르트르 사크레쾨르 사원
2. 몽마르트르 사크레쾨르 사원
3. 몽마르트르 테르트르 광장에서
4. 몽마르트르 테르트르 광장에서
5. 몽마르트르 테르트르 광장에서
6. 살바도르 달리
7. 사요 궁전의 고적박물관에서
8. 에펠 탑
팡테옹으로 간다. 비 내리기 시작한다. 위인들의 묘지 참배하기에는 적당한 날씨다.
AUX GRANDS HOMMES LA PATIE RECONNAISSANTE
우람한 열주 24개가 떠받친 건물 앞면에 대자로 새긴 글이다.
“조국이 위대한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라는 뜻이라고 한다.
팡테옹 입구에 비치된 리플릿에 의하면, “507년 크로비스 왕(Clovis, 프랑크 왕국의 초대 국왕)
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이 터에 그와 그의 왕비인 크로틸드(Clotilde)의 무덤으로 사용하고자
성당을 지었으며, 512년 야만족(barbarian)의 침입으로부터 파리를 지킨 성녀 주느비에브가 안
장되어 그녀의 무덤은 성지순례의 장소가 되었다.
1744년 루이 15세는 중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곳에서 기도를 드리고 완치되자 최고의 교회를 지
어 성녀 주느비에브에게 바치겠노라 맹세하였으며, 이듬해 수플로(Soufflot)에게 설계를 맡기는
등 건축에 착수하여 1790년에 완공하였다. (…) 1885년 빅토르 위고의 장례식을 거행하고 그의
유해를 안장하면서 위인들의 유해를 모시는 묘지로 사용되었다.”
건물 정중앙에는 ‘푸코의 진자’가 오늘도 지구가 자전하고 있는 중임을 증명하고 있다. 과연 그
런지 다른 곳을 구경하다가 이따금씩 와서 확인해 본다. 맞다.
한쪽 벽에는 1967년에 프랑스 정부가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에게 추서하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A HENRY BERGSON
MDCCCLIX MCMXLI
PHILOSOPHE DONT L'OEVVRE ET LA VIE
ONT HONORE LA FRANCE ET
LA PENSEE HVMAINE
“앙리 베르그송(1859~1941)에게
그는 생활과 행동에서 프랑스의 명예와 인간에 대한 사유를 드높인 철학자였다."
벽에 새긴 이 글의 뜻을 알고자 호텔프런트 직원과 만나는 객실 손님들을 붙들고 한글은 그만
두고 영어로 번역 좀 해주십사 부탁하였으나 만족할만한 답을 얻지 못해 내가 불어사전을 찾아
서 억지로 꿰맞추어 본 것이다. 회원 여러분의 질정(叱正)을 바란다.
팡테옹 지하에 조국 프랑스가 감사하는 마음을 바친 위대한 인물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군인, 학자, 정치가 등 위인 70명이다. 내가 알만한 위인은 위고, 볼테르, 루소, 뒤마, 에밀 졸라,
미라보, 생텍쥐페리, 퀴리 부부에 불과하다. 헌화(獻花)는 퀴리 부부의 안치실 관 위에 가장 많
이 놓여 있다.
지하 한쪽에는 비디오 영상이 위인들의 생전의 모습과 장례식 장면을 보여준다.
팡테옹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파리는 비 내린다.
9. 팡테옹 뒤쪽
10. 팡테옹 앞
11. 팡테옹
12. 팡테옹, 앞에 푸코의 진자가 있다
13. 빅토르 위고, 지하의 관 입구에 있다
14. 에밀 졸라
15. 팡테옹 벽화
16. 볼테르
17. 성녀 주느비에브의 임종
18. 퀴리 부부
【맺는 말】
오늘로 유럽유람 연재를 마칩니다.
그간 저의 보잘 것 없는 유람기를 읽어주신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유럽유람 동안의 소회를 간략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무래도 여행의 즐거움은 여행가기 전과 여행 갔다 온 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여행가기 전 나날의 설렘과 여행 갔다 온 후의 아쉬움이 즐겁습니다.
여행 자체는 사실 일거수일투족 고행의 연속입니다.
이번 여행 중 아내와 아들에게 특히 미안했습니다.
숙소에 돌아오면 저는 아예 컴퓨터에만 달라붙어 있었고, 그도 모자라 새벽에는 그들의 잠을
설치게 했습니다. 제 머리가 천생 아둔하거니와 천학비재한 터라 그날의 여행 감상을 늦어도
익일까지는 정리해야 했습니다.
여행기간이 길고 들리는 곳이 많다보니 하루라도 미루면 헷갈려서 엉망이 될 것 같아서입니다.
아둔한 머리는 하루를 정리하는 데 그날 찍은 사진정리까지 포함하여 매일 꼬박 3시간 이상이
소요되었습니다. 안내책자, 현장의 팸플릿, 리플릿 등을 사전(辭典) 찾아 해석하여 참고했습니
다. 또한 볼 때마다 첨삭할 거리가 생깁니다. 일부러 미리 선답자들의 여행안내서는 읽지 않았
습니다. 그들의 시각에 매몰될까 염려되어서입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컴퓨터 작업한다고 불을 켜자니 곤히 자고 있는 아내와 아들의 수면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아들은 자동차 운전이 일평균 262㎞이니 숙면이 절실한데 말입니다. 숙소의 전등
은 간접등으로 한 개인 경우가 많습니다.
늦어도 새벽 4시 30분에는 일어나고, 어떤 경우에는 새벽 2시, 3시에도 일어났습니다. 37일간
을 빠짐없이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저에게는 더할 수 없이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뿌옇게 여명이 밝아오던 이국의 새벽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습니다.
유람기를 유람일 익일 카페에 올리려고 했으나 현지 인터넷 사정이 원활하지 못하여 그러지 못
했습니다. 무엇보다 인터넷 속도가 무척 느렸습니다.
읽어주신 여러분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카페 회원 여러분의 건승을 빕니다.
드류 올림
첫댓글 울나라처럼 컴 빠른나라가 없죠...승질이 급해서 그런지...컴 느리면 속터지지만...그간 여러가지로 고생이 많으셨구먼유 덕분에 공짜 유럽일주도 하구유
여행다니는 것보다 하루하루 여행기 쓰는게 곤혹이겠습니다... 37일간의 일정이 눈 앞에 그려집니다..
여행 휴유증으로 얻은 두통은 다 나았는지요.... 빨리 좋아지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글 연재 막 마치신 심경이 죽을힘 다해 산 정상에 올라 느끼는 환희와 다름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결실과 보람을 얻기위해 그런 수고 마다하지 않으셨겠지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덕분에 편안하게 앉아 견문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허하셨으므로, 불어 오탈자 및 번역 다음과 같이 조금 끼적여봅니다. 훗날 드류기행문 출판시 조금이나마 참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먼저, 팡테옹(Pantheon)신전 앞의 문구 "Aux Grands Homme La Patie Reconnaissante" 에서 'Patie' 는 'Patrie(조국)'의 탈자입니다. 뜻은 기술하신 바와 같습니다. 다음으로, 프랑스 정부가 베르그송(Bergson)에게 추서한 글씨가 문제인데... 첫째줄 "A Henri Bergson"은 추서답게 "베르그송에게"란 의미, 즉 영어로 To Bergson 의 의미입니다. 문제는 두번째 줄인데, 거기에 정말 저렇게 써있는지 의문인데 무슨 암호같아 저로서는 해독불가합니다. 세번째 줄에서 L'oevvre를 L'oeuvre로, 마지막 줄에서 Hvmaine를 Humaine로 오자 수정하여 셋째줄 부터 마지막줄까지 전체를 번역하면,
"(당신의)작품과 삶에 투영된 철학은 (조국)프랑스와 인간의 사유를 고상하게 하였습니다" 정도가 되겠네요. 드류기행문 유럽편 다시한번 감사하옵고, 연이어 남미, 아프리카 등 기행문 다시 연재되는 날 고대하겠습니다. ^^*
대단하십니다...형님의 고행 덕분에 유럽의 일부를 즐겁게 앉아서 여행을 했습니다..감사합니다.
햐~~~ 대단 대단 대단하십니다. 형님.... 덕분에 유럽 구경 다~~~ 했습니다. ㅎㅎㅎ 두고 두고 천천히 또 또 음미하겠습니다. ㅎㅎㅎ
광장에 전시된 제목없는 여인의 옆모습 그림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긴 시간 준비했을 듯한 가족여행 부러운 맘으로 즐감하였으며
수고많으셨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