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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의 38년된 병자
요한복음 5:1-15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예수님은 왕의 신하의 아들의 죽을 병을 고쳐주시면서 그 가정 전체를 지옥을 향하는 삶에서 구원하여 천국을 보장 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때 왕의 신하의 믿음은 표적을 의지하는 신앙에서 오직 예수님의 인격 및 그분의 말씀을 믿는 신앙으로 변화함으로 구원받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주시기 위해 우리 주 예수님은 그 신하의 아들이 있는 가버나움까지 가지 않고 그곳에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가나에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있은 후 얼마의 기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께서 명절을 지키시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이유는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시기 위함이었고 또한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작은 죄라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첫 사람 아담과는 달리 둘째 아담으로서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순종하셔야 했습니다. 그분의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율법을 완전하게 행하셨다고 확신합니다. 주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나중에 십자가 속량을 치르실 때 하나님 앞에서 흠 없는 어린양으로 우리를 위한 죗값을 치르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후 그를 믿는 자들에게 대제사장으로서 그들에게 자기 의를 전가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 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에 이른 생명, 곧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완전한 순종을 이루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한편,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문은 8개가 있었는데 그 성문의 이름은 미문이라고도 불리는 황금문, 시온문, 동물을 가리키는 양문(또는 사자문), 다메섹문, 욥바문, 새 것을 뜻하는 새문, 오물을 의미하는 분문, 그리고 헤롯문이 있었습니다. 양문은 미문이라고 불리는 동문의 위 방향으로 연결된 사자문이었습니다. 즉, 양문은 예루살렘 성의 동쪽에 있는 성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는 굵은 기둥들 위에 지붕을 얹어놓은 행각이 다섯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행각 안에는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 등, 여러 종류의 불구자들과 병자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베데스다 연못에 천사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천사가 그 연못에 내려오면 연못의 물이 움직이게 되는데 그때 누구든지 가장 먼저 연못에 들어가면 걸렸던 병이 낫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행각 안에는 38년된 병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베데스다의 행각에는 병자들이 대단히 많았는데 오직 그 38년을 앓던 병자 한 사람만 구원 받았습니다. 사실 질병의 치유는 표적이고 그 표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한 사람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주권에 의하여 일어나는 사건이었습니다.
한편, 8절에서 예수께서 그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그 병자는 다리가 완전히 쪼그라든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는 38년 동안 병을 앓으면서 걷지 못하였고 따라서 다리에는 근육이 없고 혈액 순환도 거의 없었을 것이며 관절은 굳었을 것입니다. 그는 전혀 걷지 못함으로 누군가가 들것으로 옮겨주어야 자리 이동이 가능했습니다. 물론 7절을 보면, “내가 가는 동안에”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두 팔로 기어서 연못에 가려고 시도했던 적이 대단히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자, 38년 동안 병자로 살아가며 걷지도 못하고 항상 누워있는 가련한 한 인간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그는 예수님의 연령보다 더 많은 기간을 병을 앓으며 자리에 누운 채 살아왔습니다. 얼마나 가련하고 비참합니까! 또한 얼마나 더러운 냄새가 나고 보기에 흉측하고 지저분하였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누워있는 그 병자를 보시고 그에게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병이 대단히 오래된 줄을 아셨습니다. 이때 그 병자를 불쌍하게 여기신 우리 예수님은 그의 질병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를 구원하시려면 무엇보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생기게 하려면 소망을 주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믿음은 소망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하는 믿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알고 믿어야 하기에 우리 주님은 그에게 표적을 나타내기로 뜻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병자는 완전히 절망 상태에 있었습니다. 삶의 의욕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에 주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6).
이 물으심은 그 병자에게 소망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질문으로 병자에게 소망을 주시며 의욕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병자는 자신에게는 연못에 들어갈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의욕을 가질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 5:7).
즉, 돕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서 질병에서 나을 가망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질문을 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그가 어떤 분인가 하고 궁금해졌습니다. 또한 혹시 이 분이 나를 낫게 할 수 있는 메시야는 아닌가 하는 기대를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 병자의 기대가 믿음으로 변하면서 열매를 맺을 것을 아시고 ‘말씀’으로 도전하십니다. 이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그가 예수님을 믿을 것인지와 연결됩니다. 즉,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으면 주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며 도리어 주께 화를 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믿는다면 주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것이며 이때 그 순종은 그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참 믿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순간, 그 사람에게 믿음이 주어지고 곧바로 병이 나았습니다. 그 병자는 주의 말씀을 듣자마자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려고 했고 그 순간 그는 병에서 나아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었습니다. 이 38년 된 병자는 아직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분을 만나 그가 그리스도인 것을 느끼며 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병에서 나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를 38년 된 병마에서 구원해 주신 분이 누구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찾으니 주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유대인들이 이 표적을 보고 그 날은 안식일이라 이 병자에게 와서 따졌습니다.
“야, 이 병자야. 네가 어떻게 안식일에 병에서 나을 수 있다는 말이냐!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걷는 것은 안식일을 범한 죄로다”(요 5:10)
유대인들은 왜 이런 판단을 합니까?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다니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성경에 있습니까?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은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고 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일입니까?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이란 물건을 나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에는 짐을 지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렘 17:21 참조). 하지만 '짐'에 대해서도 정의가 필요했습니다. 얼마나 무거워야 짐인 것입니까? 이런 문제를 규정하기 위해 장로들이 모여 장로들의 전통이라 불리는 수많은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금지된 일을 39가지로 분류했습니다. 그리고 장로의 전통은 하나님의 율법 수준으로 격상되었습니다. 결국 성경에 없는 인위적인 규정들이 모든 사람에게 구속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38년 된 병자가 자리를 들고 베데스다 연못의 행각에서 떠나자 그가 안식일을 어겼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 병자가 누웠던 자리는 더럽고 얇은 보잘것없는 누더기 침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자리를 38년 동안 꿈쩍도 못하며 앓던 병자가 벌떡 일어나 들고 나갔다고 해서 이 유대인들은 그가 안식일을 어겼다며 시비를 거니, 이런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안식일에 '일하게' 만드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다른 치유 사례에서 보여 주셨듯이, 예수님은 실제로 안식일을 그러한 선한 일을 하는 날로 삼으셨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많이 하시며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눅 6:9)라고 군중에게 물으셨습니다. 이처럼 안식일은 회복과 쉼과 예배를 위한 하나님의 날입니다. 안식일은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날입니다. 따라서 그 날에 누군가를 고통과 병마로부터 치유하는 것은 가장 합당한 일입니다!
이에 치유를 받은 그 병자가 대답합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안식일에 대한 전통적인 규정보다 그를 고쳐준 분의 말씀이 더 권위가 있다고 대답합니다.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하시더라”(참조, 요 5:11).
이 말은 “너희 안식일 규정이 뭐라 하든 나는 그 규정을 초월하는 어떤 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이렇게 정상으로 회복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치유를 받은 병자에게 묻습니다.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한 사람이 누구냐”(요 5:12).
병자가 대답을 하려는데 사실 그는 자기를 고쳐준 분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물론 그는 메시야가 오셔서 그를 고쳐주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병자를 치유하여 주시고 유대인들이 몰려오자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치유 받은 병자는 누가 그를 치유하여 주었는지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 후 어느 날, 우리 예수님은 친히 사랑하셔서 회복 시켜준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셨습니다. 14절을 잘 보면, 치유 받은 이 사람이 성전 안에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치유 받기 전에는 성전 밖의 양문에 항상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병에 걸린 후에 단 한번도 성전 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는 율법에 따른 유대 사회의 조치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7 … 누구든지 너의 자손 중 대대로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니라
18 누구든지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하지 못할지니 곧 맹인이나 다리 저는 자니라.
](레 21:16-18)
그런데 성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던 38년 된 병자가 이제는 치유를 받고 성전 안에 있습니다. 이 뜻은 그가 죄 사함을 받고 깨끗해졌다는 외적인 표시입니다. 즉, 그는 치유 받음으로 정상적인 유대인으로 여겨져서 이제는 성전 안으로 들어갈 권한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온전하게 회복된 그 사람에게 우리 예수님은 단 한 가지 부탁을 하십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5:14).
이 병자에게는 38년 전에 반복적으로 저지르던 고약한 죄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38년 전에 어떤 죄악을 저지른 상태에서 병에 걸렸습니다. 아마도 중풍일 것입니다. 그리고 병자 상태에서 베데스다 연못에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일 때 그 연못에 먼저 들어가면 어떤 병이든 낫게 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베데스다 연못에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가 얼마나 오래 전부터 이 연못을 찾아오게 되었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상당 기간 그곳에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를 치유해 주시고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38년의 병마에서 회복된 이 사람은 지금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를 불행하게 만든 어떤 특정 죄성의 죄악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제는 그의 고질적인 죄성뿐만 아니라 죄라 불리는 어떤 것도 상습적으로 짓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죄에 물들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거룩한 삶을 살라는 요구와 같습니다. 즉, "38년의 어둠 속에 속한 비참하고 더럽고 괴롭고 외로운 고통의 삶을 마무리하고 이제 새로운 생명을 얻어 새 삶을 살게 되었으니 더 이상 어떤 죄도 계속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한편, 여기서 ‘더 심한 것’은 이 땅에서 더 심한 병을 얻는다는 뜻도 되지만 지옥 형벌과 유사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혹은 구원을 받은 줄 알았지만, 결국 가룟 유다처럼 거짓 신자로 드러나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구원 받은 후에 계속 죄에 머무는 이런 부류의 사람에 대해 엄중히 경고합니다.
[
19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벧후 2:19-22)
그러므로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친히 38년 된 병자의 병을 고쳐주시면서 그의 과거의 죄악을 모두 다 용서하여 주신 사실을 알려주고 있고, 또한 그가 고침 받은 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으며, 이처럼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도 만일 거룩한 성품과 삶에 힘쓰지 않고 안일하게 죄악된 삶을 지속한다면 더 큰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에 히브리서 기자 역시 동일한 경고를 합니다.
[
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2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히 2:1-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값 주고 사신 바 된 우리 역시 우리 주 예수께서 엄중하게 하신 이 경고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이에 우리는 말씀 되시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믿음의 연합 가운데 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이렇게 예수님을 성전 안에서 만나 간곡한 부탁을 받은 고침 받은 이 사람은 이제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쳐준 분이 예수라고 정확하게 알려줍니다.
“나를 38년 된 병마에서 고쳐준 분은 예수입니다”(요 5:15).
병 고침을 받은 이 사람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도록 이 사실을 그들에게 고자질한 것이 아니라 변화된 새사람으로서 정직하고 책임 있는 변화된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그가 안식일에 치유 받은 사실에 대해 매우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도 그들 역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사실을 알고 믿을 수 있도록 메시야의 역할을 뚜렷하게 행하신 예수님을 증거한 것입니다.
이는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에 따르면 저는 자를 치유하는 것은 메시아가 오셔야만 나타나는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
4 보라너희하나님이오사너희를구하시리라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 35:4-6)
즉, 치유된 이 사람은 자신을 치유한 그러한 큰 권능과 자비는 오직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가능하지 않은데 그분이 나를 치유하셨으니 그는 메시야시며 바로 그 메시야가 예수라고 교만하고 악한 유대인들에게 담대히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메시야의 증거가 나타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오직 유대인들의 책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영과 육에 치유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것은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셔서 시작하신 일이고 지금도 영광의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쉬지 않으십니다. 물론 육의 치유보다 무한하게 소중한 것은 영혼의 치유 및 구원입니다. 지금도 복음과 함께 그리스도의 영은 이 일을 쉬지 않고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의 재림의 때에는 이 썩을 몸도 영원히 썩지 않고 병들지 않는 강한 몸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고전 15:42-44)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특히 그 마음이 흠이 없이 맑고 거룩하여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단번에 보혈을 흘리시며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후 부활하셔서 주의 생명과 영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
한편, 놀라운 것은 여리고 근처에서 사역하시다가 갈릴리로 내려가실 때만 하더라도 유대인들의 과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지만, 이제 적절한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더 이상 박해를 피하지 않으시고 서서히 그들의 눈에 띄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띄십니까? 메시야의 역할을 하심으로 그들 눈에 뚜렷하게 띄십니다.
우리 주께서는 38년 된 이 병자를 죄의 저주인 병과 비참에서 자유롭게 하시고 생명을 주시면 유대인들의 눈에 띄어 그들로부터 견제와 방해와 박해를 받을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38년 된 이 택함 받은 자를 안식일에 고치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즉, 때가 차매 예수님은 이 치유 사건을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행하심으로 유대인들의 공격을 야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안식일에 가장 합법적인 일을 하시고 유대인들은 그것을 불법이라고 믿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주관하는 마귀의 역사입니다. 가장 거룩한 계명을 왜곡시켜 그 계명을 세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공격하니 참으로 악하고 참으로 지독한 모순입니다. 즉, 우리 예수님은 죄로 인해 비참을 겪는 가련한 사람들을 고쳐 주셨는데 놀랍게도 그 일 때문에 고난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서 원수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러나 원수의 손에 죽임 당하심으로 우리 주님은 결국 자기 백성의 죗값을 속량하셔서 죄 사함과 영생을 주시는 구주가 되셨습니다. 할렐루야!
이로 보건대, 참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과 주권은 사람이 전혀 헤아릴 수 없는 지극히 높은 차원의 역사입니다.
[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행 2:22-24)
[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 2:6-9)
[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 11:33-36)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주의 말씀에서 나오는 소망은 의욕을 생기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의욕을 잃으면 폐인이 됩니다. 죽음만을 기다리며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살아가는 비참한 인생이 됩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사람은 의욕이 있어야 힘차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목사도 의욕이 있어야 성경을 가르칠 수 있고 성도들도 의욕이 있어야 찬양도 하고 봉사도 할 수 있습니다. 의욕이 있어야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의욕이 있어야 전도도 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주님은 자기 백성에게 선하고 거룩한 의욕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한 영혼이 주의 나라를 위해 섬기도록 의욕을 주십니다. 사실 의욕을 주시기 위해 우리 주님은 말씀을 선포하시고 성령으로 의욕을 일으키십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물으시고, 그 후 곧바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기도하고 주께 헌신하기 전에, 또한 주님의 놀라우신 치유와 도움을 체험하기 전에 반드시 우선되어야 할 것이 ‘의욕’을 되찾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즉, 낫고 싶어하는 의욕, 은혜 받고 싶어하는 의욕이 주께서 베푸시는 치유와 도움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삶의 강한 의욕이 회복되지 않으면 우리는 어떠한 난관도 뚫고 나갈 수 없습니다. 항상 그 자리에 똑같이 맴돌며 그저 세월을 보내는 38년 병자와 다를 바 없게 됩니다. 의욕이 없으면 매우 작은 시련 앞에서도 가장 비참하게 좌절하며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삶의 의욕을 잃습니까?
38년의 오랜 고통은 삶의 의욕을 잃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38년 된 병자의 마음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없는 삶에 찾아오는 오랜 질병이나 고통은 삶의 의욕을 앗아갑니다. 현실 속에서 닥치는 계속되는 경제적인 어려움 및 좌절되는 상황은 사람들로 의욕을 잃게 합니다.
또한 외로움에 시달릴 때 삶의 의욕을 잃습니다. 병자가 말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아무도 도울 사람이 없다는 병자의 고백 속에서 우리는 그의 외로움을 볼 수 있습니다. "고독만큼 무서운 살인자가 없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그 만큼 고독은 무서운 것입니다. 외로움이 지속되면 삶의 의욕을 잃습니다.
또한 계속되는 실패와 패배는 사람들로 하여금 의욕을 잃게 합니다. 38년된 병자는 다른 사람과의 경주에서 늘 실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물이 동할 때 훨씬 빨리 달려갑니다. 그러나 38년된 병자는 늘 꼴찌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패배하였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적극적으로 무엇을 할 수 없습니다. 좌절이 병자의 마음을 사로 잡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의 의욕을 상실할 때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증상은 우울증과 기피증과 심한 오해 및 정신 착란 현상입니다. 특히 신자가 우울증에 빠졌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신자들 중에는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이미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삶의 의욕을 잃은 이유를 추적해보면 우상이 있거나 반복적으로 죄의 늪에 빠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는 신자라 할지라도 롯처럼 삶의 의욕을 잃고 성도의 맛을 잃은 무능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한편, 사람들은 믿던 우상을 다 잃고 의욕을 잃었다가 자신이 알지 못하던 색다른 우상을 붙들게 되면서 잠시 의욕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에서 다시 재기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되면서 의욕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욕은 진정한 의욕이 아닙니다. 언젠가 죽음 앞에 서게 될 때 그들은 영원한 좌절과 함께 영원한 우울증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혹시 이 자리에 삶의 의욕을 잃은 분들이 계십니까? 오직 말씀으로 돌아가기 바랍니다. 복음을 붙들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미 다루었지만 왕의 신하가 구원받는 믿음을 갖게 될 때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를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 38년된 병자에게 주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께서 하신 이 말씀은 8절, 11절, 12절에 세 번 반복됩니다. 즉, 예수님의 이 ‘말씀’에 병자가 믿고 순종함으로 그가 그의 불치의 병에서 치유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욕을 잃은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 안에서 영원한 소망과 함께 삶의 의욕을 발견할 때 그 의욕은 말씀에 선 것으로서 영원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 안에서 쉬지 않고 흐르는 생명수를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어떤 상황에서도 영원한 보람을 누리며 감사와 평강과 기쁨으로 차고 넘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욕은 주님을 만나서 그분의 복음을 듣고 믿을 때 생겨납니다. 성령께서 복음과 함께 역사하시면 그 복음을 듣는 자의 마음 속에 의욕이 생깁니다.그리고 믿음의 의욕이 생긴 상태에서 주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게 되면 그 사람은 다시 일어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따라서 변함없이 샘솟는 삶의 의욕을 갖고 싶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 위해 성경을 자주 묵상하고 복음이 선포되는 예배에 참여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살아계신 우리 주께 모든 것을 기도로 아뢰기 바랍니다.
둘째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주님의 말씀은 매우 깊은 말씀으로서 우리의 영육이 다 온전하여질 것을 소망하라는 도전입니다. 원어로 이 말씀을 보면 (쎌레이스 휴기에스 케네스싸이)입니다. “낫고자”라는 원어 (휴기에스)를 프라이버그 원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원래 창조된 때의 모습처럼 균형과 질서가 있는 상태”, “육체적 또는 영적인 건장, 안녕, 건장함”, “교리 또는 진리에 있어서 오류가 없고 온전하고 정확하고 올바른 상태”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를 사용하는 대표적인 구절을 보면 이러합니다.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마 12: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4).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7-8).
그런데 헬라어 (휴기에스)는 구약의 히브리어 단어 (마르페)와 같은 뜻입니다. (마르페)는 히브리어 (라파)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치유를 통한 회복 및 건강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지으신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 단어의 성취는 메시야의 대속을 믿는 자들에게 이루어집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량을 기억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의 십자가 속량의 효력이 여러분의 마음과 몸을 건강하게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죄가 세상에 어떤 비참함을 가져왔는지 38년 된 병자의 고통과 좌절과 비참을 보며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죄를 얼마나 깊이 미워해야 하고 경계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죄는 이 세상의 모든 질병의 근원이며 모든 고통과 비참과 저주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아픔과 고통, 연약함과 저주로 가득한 삶을 살도록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타락의 열매입니다. 죄가 없었다면 질병도 죽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죄에 대해 부주의 하다면 그것은 가장 큰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분명하게 경고하셨습니다.
“더 나쁜 일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도록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
특히 이 경고는 질병 및 고난으로부터 회복된 후에 주어진 경고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괴로움과 저주스런 상황에서 회복된 후에 더욱 죄를 미워하고, 자신의 길을 더 철저히 경계하며,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는 변함없는 목적을 가지고 여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종종 건강을 되찾은 후에, 사업이 안정된 후에, 모든 것이 회복된 후에 고통 가운데 다짐하였던 거룩한 삶을 또 다시 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재기할 수 없는 우상과 죄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신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어려움에서 회복되었다면 더욱 예수님의 경고에 따라 “더 나쁜 일이 내게 임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철저하게 깨어 있기 바랍니다.
셋째는,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자 외에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인간은 참으로 사랑하는 연인이 곁에 있어도 외로움을 느낍니다.
하물며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사람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분명히 외롭습니다. 한없이 외롭습니다. 그 사람은 고립되어 있고 친구도 없습니다. 게다가 아무도 그를 동정하지 않습니다. 뒤처지고, 잊혀지고, 무시당하는 사람들! 그들은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외롭습니다. 외로움은 분명히 이 시대의 지독한 이기심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디에 있든 마음이 고립되어 있고 외로운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한 외로움을 진정으로 덜어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또한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모습을 외로움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치유 받기 전의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도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인간도 우리를 도와주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저 깊은 영혼의 외로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예수님만이 우리의 외로움에 유일한 궁극적인 해결책이십니다. 위대한 의사는 치유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대신하여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죄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대속자가 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분이 없으면 우리는 길을 잃고 외롭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얻으면 우리는 영원한 친구뿐만 아니라 수많은 진정한 친구를 얻게 되면서 외롭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외로움이 전혀 없는 사랑과 따스함의 천국을 누리려면 항상 복음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끝없는 외로움에서 치유하시는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얻는 교훈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이미 우리가 앞에서 다룬 것처럼 이 남자는 38년 동안 병약하다는 이유로 성전 뜰에 들어가지 못했고,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깨끗해졌기에 하나님의 자비에 감사하며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그를 만나셔서 한 마디 말씀하십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14절).
예수님은 구원 받은 신자가 계속 생명과 빛의 길로 다니기를 원하십니다. 신자들이 거룩하기를 바라십니다. 즉,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신 이유는 거룩함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거룩함을 이루는 비결을 알려주었습니다.
[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
4 …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롬 6:1-4, 12-14, 17-19)
그러므로 주의 은혜로 회복되어 새로워진 자들마다 안일해지지 말고 흠 없는 사람이 되는 일에 매진하기 바랍니다.
[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도다
](엡 1:3-5)
[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엡 5:26-27)
이처럼 흠 없고 거룩한 성품을 이루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신 후 모든 신자들에게 당부한 간절한 권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비로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셨다면, 여러분은 죄를 짓지 않고 순종할 수 있는 참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기에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원한 소망을 붙들고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모든 선한 일을 하며 더욱 거룩하여져서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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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감사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 인생을 걸고, 움직일 시기는 지금 뿐입니다,
과거는 잊으세요, 결국은 현실이 가장 소중하고, 미래는 꿈이 랍니다.
오늘 하루도 좋은 마음으로 좋은 꿈 그리시길 기원합니다.💖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