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8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23. 구원받고,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믿습니다 》
롬 8:14~17
〈 구원받고 〉
오늘 설교제목은 “구원받고,”라는 조건절로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일평생 사는 내내 구원을 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첫째, 추위나 더위 등 ‘기후’로부터 구원받아야 합니다.
_추위나 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알맞은 옷을 입지 않으면 죽습니다.
둘째, 굶주림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합니다.
_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셋째, 안식할 수 있는 터 즉, 집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의식주’입니다.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것이 ‘구원’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의식주를 해결하고자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평생 살아갑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갈등이 있습니다. 반목하고 대립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도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반목과 대립은 전쟁으로 비화되기도 합니다.
‘갈등 관계’에서도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만 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하며, 자기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삶을 삽니다.
자존감이 떨어지면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자존감의 문제’에서도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이외에도 구원을 받아야 할 문제는 많습니다.
질병에서도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도 구원은 필요합니다.
수많은 위험으로부터도 보호받아야 하고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많은 구원의 문제 중, 가장 근본적인 구원은 무엇일까요?
자기가 지은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가장 근본적이고, 궁극적이며, ‘구원의 본질’입니다.
구원의 본질은 ‘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왜 죄에서의 구원이 본질적 구원일까요?
죄에서 구원받으면 그 사람의 신분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바뀝니까?
① ‘죄인’에서 ‘의인’이 됩니다.
② ‘사탄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 피조물 사람, 창조주 하나님 〉
의식주에서 구원받고, 갈등관계에서 구원받고, 자존감에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질병, 고난으로부터도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구원이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죄인에서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악한 영, 사탄의 자식에서, 선한 영, 성령의 자녀로 거듭나야 합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신분을 변화시키는 구원이 ‘죄에서 구원’입니다.
죄에서 구원받을 때, 죄인이 의인이 되고, 사탄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구원 중에서 이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구원은 없습니다.
이 구원을 위하여 성자 하나님, 예수께서 이 땅에 희생제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 이 사실이 믿어지면, 이 진리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 《 구원받고,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믿습니다 》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그 자체로서 힘이 있습니다. 되뇌일 때마다 은혜가 샘솟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아,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릅니다! 할렐루야~
오늘 설교 본문은 로마서 8장입니다.
로마서는 서기 57년경, 바울 사도가 고린도에 체류하면서 로마교회 성도에게 쓴 편지입니다.
바울 사도는 《 구원받고,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믿습니다 》이 진리를 전합니다.
바울은 이 진리 즉, 죄인이 의인 되어, 하나님의 자녀 됨을 어떻게 설명할까 고심했습니다.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저는 다음 예화가 참 마음에 듭니다.
거지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의 기억에는 부모도 형제도 없습니다.
철이 들면서 자기의 신분을 보니, 거렁뱅이였습니다. 현실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깡통을 들고 거리에 나섰습니다. 어느날 한 사람을 만납니다.
이 사람은 어린 자식을 잃고, 수년 동안 그 아들을 찾아헤맸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거렁뱅이 소년을 찾았고, 유전자 검사를 거쳐 친자임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심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을 놓쳤습니다.
그리고 거렁뱅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자녀이다. 나는 너의 아버지다!”
〈 바울 사도의 선포 〉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우주만물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중에서 사람은 특별히 하나님이 사랑의 파트너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방식으로 모든 사람은 아버지의 자녀로 태어나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아버지 없이 태어나는 이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아버지에게서 태어나는 이치는, 하나님의 사람 창조에 대한 ‘유비’입니다.
‘내가 아버지가 되어 너희를 창조했으니, 너희는 대대로 아버지에게서 태어난다.’
우리가 아버지로부터 태어남을 안다면, 그 아버지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알았으니,
《 구원받고,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믿습니다 》
바울 사도는 이에 대해 어떻게 선포합니까?
(14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어서 독특한 한 단어를 차용하여 선포합니다.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니 태생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다!”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양자(養子)’라는 단어를 씁니다.
사실 양자는 친 자식이 아닙니다. 남의 자식을 내 자식으로 들이는 것이 양자입니다.
바울 사도는 왜 굳이 양자라는 단어를 가져왔을까요? ~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친 자식이 아버지의 뜻을 모두 받들지 못하는 현실 때문입니다.
둘째는 양자가 친자식 이상으로 모든 것을 이어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7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세속에서 아버지와 자녀 사이는 ‘적당히 멀어져 있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별개의 삶을 삽니다. 이 관계는 양자만도 못할 수 있습니다.
〈 양자의 속뜻 〉
바울이 로마서를 쓰던 서기 57년경은 로마제국이 지중해를 중심으로 다스리던 때입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이 당시 최고의 권부는 말할 것도 없이 로마 황제입니다.
역사에서 로마의 황제는 신격화되리만치 대단한 위세를 떨쳤습니다.
그러나 황제 역시 사람이었고,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황제가 죽고나면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모든 것을 물려받아 차기 황제로 등극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귀하신 이후 성령이 강림했습니다.
초대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신약성서가 쓰여집니다. 서기 1세기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 로마 황제의 승계 문제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황제의 친아들이 다음 황제가 되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황제가 살아있는 동안 후계자를 물색하여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 양자가 다음 황제가 되는 전통이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친아들보다 이렇게 양자로 이어지는 황제의 전통으로 세상을 통치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를 하나님의 친자보다 양자로 선포하는 이유입니다.
17절을 다시 읽습니다.
(17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입니다.
친자가 더 잘합니까, 양자가 더 잘합니까?
바울 사도는,
우리가 본디 하나님의 피조물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친자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대 로마제국의 황제 승계를 보니, 친자 승계는 족족 실패합니다.
양자 승계가 로마제국을 번영시키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를 보면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이다!” 강조합니다.
친자랍시고, 아버지의 유업을 탕진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됨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모든 것을 바르게 승계하는 ‘양자의 유업’ 그것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 양자같은 친자 〉
친자에게는 교만이 있습니다.
어차피 자식은 나 뿐이니, ‘아버지는 나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어’ 하는 교만입니다.
그 교만이 아버지의 유업을 훼손합니다. 바르게 승계하지 못하고 탕진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구원받은 우리입니다.
우리는 친자가 가진 교만으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만을 싹 빼버리고, 겸손으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어야 합니다.
친자이면서 친자의 교만을 버린, 양자와 같은 겸손으로 상속자가 되어야 합니다.
서기 1세기 어간, 로마제국의 황제 세습에서 드러났습니다.
친자가 아닌 양자가 황제를 승계했을 때 로마 제국이 더 번영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 구원받고,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믿습니다 》
구원받은 우리, 하나님의 친자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보다 먼저 조상과 부모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부모님을 통하여 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상속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교만으로 하지 말고, 상속자로서 오직 겸손으로,
하나님의 영광도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기왕이면 하나님의 영광만 받도록 하시지, 왜 고난까지 받으라 하실까?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좋은 것만 싹 뽑아서 누리겠다는 심보는 교만입니다.
고난도 함께 할 때, 그것이 겸손이고, 그래야 하나님의 진정성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 우리는 양자(養子)같은 친자(親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제 자리를 찾은 것입니다.
제 자리를 찾지 못하면 물 위에 떠다니는 부초와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초같은 인생’을 당연히 여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떠돌이 인생으로 이 땅에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 구원받고,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믿습니다 》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