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外飾, hypocrisy]
‘휘포크리노마이’(···인 체하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원래 가면을 쓰고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 즉 연극배우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성경에서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거짓으로 행동하는 것, 곧 종교적(도덕적) 가식(假飾)이나 위선(僞善)을 뜻한다(마 6:5; 23:27; 눅 6:42; 갈 2:13).
예수께서 특별히 이 외식하는 자에 대해 책망하셨는데, 구제(마 6:2), 기도(마 6:5; 막 12:40), 금식(마 6:16), 판단이나 비판(마 7:5), 부모 공경(마 15:5-7),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거나(마 15:8), 율법을 준수하는 일(마 23:23)에서 표리부동(表裏不同)함을 지적하셨다.
이처럼 외식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눈을 먼저 의식하기 때문이며(마 6:4-6, 18; 23:28), 타인으로부터 영광과 칭찬을 받고자 하기 때문이고(마 6:2; 23:5, 7),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이며(마 15:7-8), 간사함과 악함과 불의가 충만하기 때문이고(마 22:18; 23:25, 28), 믿음을 배반했기 때문이다(딤전 4:1-2). 이처럼 외식하는 자들은 그 하는 일에 이미 상을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서 상을 기대할 수 없다(마 6:2, 5). 외식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을 의식하며, 은밀히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일해야 한다(마 6:6, 18).
라이프성경사전
외식ὑπόκρισις에 대하여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특별히 대적자들인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모습을 ‘외식’이라고 하고, 그들을 외식하는 자라 비판한다. 외식이라는 헬라어는 후포크리시스(ὑπόκρισις)인데, 여기에서 영어 hypocrisy가 유래하였다. 외식하는 자를 후포크리테스(ὑποκριτής)라고 쓴다. ‘외식하다’라는 동사는 후포크리노마이(ὑποκρίνομαι)이다. 후포크리시스(ὑπόκρισις)는 형태상, ‘∼로서, ∼ 아래에’라는 뜻의 접두 전치사 후포(ὑπό)와 ‘결정, 심판, 재판’이라는 뜻의 크리시스(κρίσις)의 복합어이다. 이 단어는 고전 헬라어에서 말을 가지고 설명하다, 해설하다, 대답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에서 만들어진 명사이다. 이것을 하는 사람을 후포크리테스(ὑποκριτής)라고 하는 데, 이 사람은 시인의 시들을 말로서 해설하거나 설명해 주는 사람들이었고, 후에는 연극에서 말과 행동으로서 연기하는 사람, 곧 배우(actor)를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연극 무대에서 연기(acting)를 할 때, 마스크를 쓰고 주어진 역할을 하는 것을 후포크리티케(ὑποκριτική)라고 하였다. 후포크리시스는 고전 헬라어에서 전혀 부정적인 말로 쓰이지 않았고, 단지 말과 행동으로 설명하거나 연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헬라어 구약성경(LXX)에서 후포크리시스(ὑπόκρισις)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과는 반대 되는 악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마카비하 5:25, 6:21). 즉 하나님에 대한 불경건한 마음, 두 마음을 가진 악을 말하였다(시편 12:2; 벤시라 5:14, 32:15). ‘불경건한, 악한’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하네프(חָנֵף)를 후포크리시스(ὑπόκρισις)를 사용하여 번역하고 있다(욥 34: 30; 36:13). 신구약 중간시대에 나타난 외경이나 유대문헌에는 후포크리시스는 전적으로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었고, 신약성경에서도 부정적으로 사용되었다. 외식(ὑπόκρισις)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공관복음서 각각에 한 번씩 나타나고, 서신들에 세 번 나타난다. 동사 후포크리노마이(ὑποκρίνομαι)는 눅 20:20에 단 한 번 쓰였다. 외식하는 자(ὑποκριτής)는 공관복음서에 18번 쓰였는데, 마태복음에서 압도적으로 14번 쓰였다. 외식에 대한 주님의 비판은 한 마디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거짓된 모습이나 악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거짓 없는’이라는 뜻으로 쓰인 아누포크리토스(ἀν-υπόκριτος)는 "외식 없는"이라는 말보다는 ‘거짓이 없는 진실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롬 12:9; 고후 6:6; 딤전 1:5; 딤후 1:5; 벧전 1:22; 약 3:17).
막 12:14에서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사람을 보내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ὑπόκρισις)을 아셨다고 말한다(막 12:15). 여기에서 외식이라는 뜻은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불순한 의도와 속임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또한 바리새인들의 그럴듯한 겉모습과 달리, 속은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존재라고 비판하였다(마 23:28). 여기에서 외식이라는 뜻은 밖의 깨끗한 모양에 맞지 않는 안의 더러움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눅 12:1) 고 하였을 때, 그것은 감춰진 불경건한 악을 말하고 있다. 복음서 저자들이 각각 사용하는 후포크리시스(ὑπόκρισις)는 단순히 위선이나 겉치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죄악과 의도, 그리고 행하는 악한 행위를 포괄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외식이라는 단어는 거짓(deception), 불법(lawlessness), 악함(wickedness) 등과 같은 동의어가 될 수 있다.
마태복음은 외식하는 자(ὑποκριτής)에 대한 주님의 엄중한 경고를 특별한 메시지로 강조하고 있다. 마태복음 6장은 유대인들의 세 가진 경건행위인 기도, 구제, 금식을 예로 들면서 외식하는 자의 경건행위를 비판하고 있다(6:2, 5, 16). 이들은 마치 사람들에게 배우들이 연기를 보여주려고 기도 구제 금식을 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이 보여주는 경건행위는 하나님이 청중도 관중도 아니고, 사람들만이 청중이고 관중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보이려 하지만, 하나님께 숨기려하기에 죄인 것이다.
경건행위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청중과 관중이 되어야 한다. 마 7:5에서 "외식하는 자여,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타인의 허물보다 자신의 큰 허물을 보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이것은 "용서"의 주제와도 연관된다. 자신의 만 달란트나 되는 큰 죄를 용서해 준 주인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동료 종의 백 데나리온의 작은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 악한 종의 비유와 연관되는 말씀이다(마 18:21-35).
자신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았다고 믿으면서도, 형제를 용서해 주지 않고 사는 한국 교회의 모습이고, 이 모습은 한 마디로 외식의 죄이다. 주인의 모든 소유를 맡은 종이 주인이 더디 오리라 고 생각하며, 동료들을 때리고, 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악한 종을 주님은 외식하는 자(후포크리테스 ὑποκριτής)가 받는 벌을 받을 것이라 경고하였다(마 24:51). 주인의 달란트와 은혜를 자기 홀로 독식하며 오히려 형제나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일을 하는 자의 죄를 "외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외식은 단순히 겉과 속이 다른 배우 이야기도, 바리새인의 위선 이야기도 아니다. 한 분 청중과 관중이신 하나님의 눈과 귀를 생각하지 않고 사는 그리스도인, 용서할 줄 모르는 교인, 영적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형벌의 죄목이 "외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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