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ution!!
독일 사람 사위감 고를 때 같이 산을 오른다죠,,,
체력,인내 테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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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적 상상을 자극하는 그림이다.
18세기 중엽 파리 예술 사교계의 공기를 느낄수 있다.
리스트는 이날 주인공으로 피아노를 치고있다.
바로 옆에선 연인인 마리 다구가 우아 자태로 시선을 그에 보낸다.
쇼팽의 연인 상드는 뒤에서 비스듬이 앉아있는데 어딘지 남장이 부조화이다.
그녀 손은 알렉산드로 뒤마 시니어의 악보 위에 놓여있다.
바로 뒤 시원한 마스크가 빅톨 위고이다.
대머리 로시니는 미식가 답게 볼살이 오동통하다.
셔츠 깃을 세우고 팔장 끼고있는 이는 파가니니다.
리스트-다구를 중매 선 베를리오즈와 화가 드라크루와는 화장실 갔을까,,,?,,안보인다.
쇼팽은 4년 후 이들과 합류한다.
로시니 바로 뒤 액자 속에도 인물이 있다.
영국 낭만 자객 바이런이다.
근데 리스트의 시선은 건반 위가 아니다.
빛이 드는 창문을 향하고 있는데 바로 베토벤 흉상이다.
베토벤 등 음악가 초상을 많이 그렸던 오스트리아 출신 단 하우저(1805-1845)의 1840년 작품이다.
제목이 <리스트 家의 저녁>이다.
배경은 1830년 저녁 리스트 집이다.
1830년은 리스트-다구가 처음 만나던 해이다.
한 음악가 집에 한시대를 풍미하던 문학,예술를 한곳에 집중시키는 파리의 문화적 역량이 느껴진다.
근데 왜 베토벤은 마치 예수의 모습처럼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일까?
그림은 철저히 낭만 시각으로 그렸다.
예술에 있어 낭만주의는 주관자의 느끼는 정서,감정을 담뿍 담아내는 사조이다.
그래서 낭만주의는 사조,양식이라기 보다는 정신적 태도에 가깝다.
단 하우저는 베토벤을 시대의 우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바이런 초상,베토벤 흉상처럼 상징물들은 낭만주의의 전형적인 기호이다.
1845년 고향 본에 세워진 베토벤 동상.1940년엔
짤스부르크에 모짜르트 동상이 세워졌다.음악가의 천부
권리를 만방에 선언한 것이다.
베토벤은 평소 피아노 위에 부르투스 흉상을 두고 지냈다.
독재자 시저를 죽인 부르투스를 공화 정신 시각으로 보아서이다.
미켈란젤로도 부르투스상을 작업실에 놓고 지냈다.
당시 낭만주의 음악가들에 베토벤은 시대의 우상이였다.
작업실에 그의 흉상,초상을 두었다.
베토벤 사후 1845년 고향 본에 베토벤 동상이 세워졌다.
앞서 1840년에는 짤스부르크에 모짜르트도 세워졌다.
음악가들의 만천하 천부권리 선언이다
이때 리스트는 베토벤 동상기금마련 연주회를 열고 전액 기부했다.
리스트는 베토벤 교향곡 전곡,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했다.
베를리오즈에 헌정했는데 둘간 큰 인연이 되었고 베를리오즈는 마리 다구를 소개한다.
리스트-다구가 만난 시기는 낭만주의가 막 꽃피우던 1830년이다.
그림에서 리스트는 <환상 교향곡>이나 베토벤 교향곡을 치고 있을 것이다.
낭만주의는 고전의 균형,조화 보다는 개인적인 감성,정신,사랑,열정,기교가 존중된다.
그래서 조화의 협주곡,실내악 보다는 독주 악기의 솔로곡이 인기였다.
비르투오조 시대이다.
바이올린계 악마 파가니니는 현란한 개인기로 동료들로 하여금 고전주의 숲에서 빠르게 빠져나오게 했다.
쇼팽 특히 리스트는 음악에서 삶까지 온통 낭만 자객이였다.
파가니니,쇼팽,리스트는 비루투오조 원조에 전범이였다.
베토벤은 낭만주의 대부나 마찬가지였다.
바이런은 영국 낭만주의 문학의 적자였다.
돈주앙에 카사노바적 삶이었음에도 그리스 독립전쟁의 전장서 죽을 만큼 격정의 삶이였다.
알렉산드로 뒤마 시니어는 이보다 재밋을 수 없는 <몬테크리스트 백작>을 썼다.
어린이,농부의 삶을 유난히 좋아했고 인습에 도전한 남장의 상드였다.
마리 다구도 당대 알아주는 문장가였고 남편이 있음에도 리스트에 열정을 쏟았다.
<레미제라블>,<노틀담의 곱추>의 빅톨 위고,,,
빵 한조각에 19년 옥살이의 장발짱! 낭만적 요소가 다분하다.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는 수금을 들고있다. 그가 수금을 켜면 산천초목이 그쪽으로 돌렸다.바위도 물러지고 감성에 젖였다. 오르페우스를 주신으로 모시는 오르픽교가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남부 이태리에 퍼졌다. 예수가 수금을 들고 있는 모습이 있는데 바로 오르픽교 영향이다.
기원전 6세기경 페르시아에서 조로아스트는 조로아스트교를 창시했다. 이전의 토착 종교를 사상 체계화 한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짜라투스트라가 바로 조로아스트이다.
인간의 사후 세계를 최초로 정형화한 종교이다. 육신서 영혼이 분리되고,심판을 거쳐 천당과 지옥가고, 죽어 암석에 묻히고,부활하고,영혼을 천사가 인도하고,,, 기독교 많은 종교관들이 여기서 유래됐다는 게 신학의 정설이다.
기원전 587년에 '바빌론 유수'가 일어난다. 유대인들이 지금의 이라크 지역인 바빌로니아에 노예로 끌려간 것이다.
바빌로니아는 이집트보다 앞선 인류 最古 문명이다. 이때 유대인들이 접한 종교가 바로 조로아스터敎이다.
기독교의 많은 종교 의식들도 이도교의 풍속을 차용했다. 동방박사가 황금,몰약,유황을 바친 것도 흰두교 크리슈나神에 바친 것에 유래한다. 태양신의 날 sunday는 主日에 앞서 로마의 태양신을 모시는 날이였다. 천사,성모 마리아 뒤에서 빛나는 광채는 바로 태양신이다. 여신 이시스가 아들을 안고 있듯이 성모가 아기 예수를 안고있다. 성탄절 12월 25일은 이집트 신 오리시스와 주신 디오니소스의 생일이다.
불교는 임진왜란 후 혼란기를 타 다시 힘을 얻기 시작한다.
민간 신앙을 사찰에 끌여들이는 포교전략을 편다. 사찰 내 칠성각,산신각이 그것이다.
사찰서 부처님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조상의 신위를 모신다.
알렉산더가 인도 북부까지 진출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니 소위 간다라 미술이다.
불상도 인간 모습에서 신을 찾은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받아서 생겨났다.
용당수에 빠진 심청은 연꽃서 부활한다.
불교서 연꽃은 만물의 탄생 근원으로 애초 이집트의 세계관이였다.
세상사 독불장군 없고 영향을 주고 받는다.
순혈의 종교도 없는 판에 예술계,문학계야 오죽하겠는가.
18세기 중엽 파리 예술계도 저리 장르 간 자유로운 소통이 있었다.
그림,음악,문학 간 행복한 만남이 이루어지고,시너지를 극대화했다.
베토벤 사후 불타오른 낭만주의도 타 예술 장르의 영향을 받아서이다.
음악가들은 특히 낭만주의 문학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림에 보듯 음악가 주변엔 위고가,상드가,다구가,문학적으로도 일가를 이룬 드르쿠르아가 있었다.
마리 다구(Marie d Agoult)
프란츠 리스트,Lithografie von Devéria作,1832
프란츠 리스트(1811~1886,헝가리),,,그는 18세기를 온전히 낭만으로 살았다.
당시 파리는 화려한 낭만주의 꽃밭이였다.
그는 꽃밭을 주름 잡던 미드필더였다.
가족과 함께 빈을 거쳐 파리에 입성했다.
빈에서 베토벤의 제자로 빈 최고 음악 선생 체르니에 피아노를 배웠다.
살리나르에겐 작곡을 배웠다.
초기엔 흄멜을 사사했는데 레슨비가 비싸 포기했다.
마음씨 좋은 체르니는 레슨비도 받지않고 애제자로 삼았다.
11세때 빈에서 체르니 소개로 베토벤 앞에서 연주 후 이마에 키스를 받았다.
멘델스존은 8세 때 연주 후 할아버지 친구 괴테로 부터 받았다.
16세에 파가니니 연주에 충격먹고 다짐했다.
'나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
17세에 파리에 입성하자 마자 파리를 휘어잡았다.
연주 후 귀부인들은 꽃 대신에 보석을 연단에 던졌다.
탈렌트적 기질로 쇼맨쉽도 뛰어났다.
연주 후 즐겨 쓴 검정 장갑을 건반 위에 두고 가곤했는데 귀부인들 서로 차지할려고 난리였다.
베르테르의 검은 복장,파가니니의 모자 처럼 그의 검은 장갑도 유행코드였다.
'피아노는 나 자신이고,모국이고,삶이다.내 열 손가락은 수백명의 연주자들이 만들어낸 소리이다."
리스트 말이다.
Keine höhere Auflösung vorhanden.리스트의 왼손 쳐든 쇼맨쉽이 탤런트 자체이다.
연주에 열광하는 광경이 요즘과 다를게없다.망원경까지 보인다.
영국 연주회에서는 개인 연주회 즉 리사이틀이라는 말을 탄생시켰다.
28세에 고국 헝가리에 금의환양했는데 의원들은 의사일정도 포기하고 음악회에 참석했다.
수많은 군중이 숙소인 호텔까지 따랐다.
머무른 동안 헝가리 민속,집시 음악을 채록했고 <헝거리 광시곡>을 작곡했다.
몇차례의 사랑에 빠졌고,23세 때 6년 연상의 유부녀 마리 다구를 베를리오즈 소개로 만났다.
2년 후에는 뭇시선을 피해 사랑의 도피를 떠났다.
문학 예술계 최고 러브 스토리는 당연 쇼팽-상드였다.
리스트-다구는 버금이였다.
10년간 스위스,이탈리아를 누볐는데 이때 음악 기행집인 <순례의 해>1,2집을 작곡했다.
사랑도 권불십년일까? 둘은 헤어졌다.
교황청의 이혼 허락 거부로 결국 혼외정사로 3명의 아이를 낳았고 둘째가 코지마이다.
코지마는 당대 명 피아니스트에 최고 지휘자 한스 폰 뵐로에 시집갔으나 바그너가 낚아챘다.
차이코프스키는 <피아노협주곡 1번>을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 헌정했으나 연주불가라며 초연을 거부했다.
보스턴에서 초연이 대성공을 거두게 한 장본인이 폰 뵐로이다.
리스트-뵐로-바그너,,,
셋은 음악적 동료로 시작해 두 사위에 한 장인이 되었다.
리스트는 몇차례 더 사랑에 빠졌고 말년은 흑의(黑衣)를 입고 수도사의 삶을 살았다.
<순례의 해> 3집인 이탈리아 편이 이때 나왔다.
바그너의 성지 바이로이트서 딸 코지마 품에서 숨을 거뒀고 그곳 시립묘지에 뭍혔다.
당시 코자마-바그너 부부와 이웃사촌이였다.
화가 앵그르,시인 하이네,동화작가 안데르센과도 절친했다.
화가 앵그르는 파가니니의 초상(사진)도 그렸다.
리스트는 교향시의 창시자이다.
교향시란 말 그대로 시를 음악으로 표현하는 장르이다.
문학적인 식견이 필요하다.
슈만 등 많은 낭만주의 음악가들은 하이네(1797~1856)의 시에 곡을 썼다.
고전주의 화가 앵그르作 파가니니 초상.조화,이상미를
추구하는 고전주의 답게 파가니니 얼굴이 평온하다.
파가니니(1782~1840)는 콜롬부스의 고향 제노바 항구서 태어났다.
바이올린의 귀신이였다.
당시는 개성,기교가 존중되는 낭만주의의 꽃봉우리가 막 펴던 시기였다.
파가니니類 초인적 기교가 환영받던 시기였다.
슈베르트,베를리오즈,슈만,리스트,쇼팽,슈만,바그너,브람스,,,,최후의 낭만주의자 라흐마니노프까지.
많은 이들에게 파가니니를 앎 이전과 이후의 음악적 성향은 달랐다.
괴테는 빈에서 파가니니 연주를 본 후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천사의 음성을 들었다' '유성이 떨어진 것 같았다'
슈베르트는 책을 팔아가며 파가니니 연주장을 찾았다.
쇼팽,비에나프스키,라핀스키는 파가니니의 폴란드 연주에 갔다.
쇼팽은 5만 루블린을 선물했고,'파가니니 추억'이라는 소품을 남겼다.
비에나프스키는 충격으로 한동안 바이올린을 들지도 못했단다.
16세에 처음 연주를 본 리스트는 다짐했다.
'나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
이후 연주 스타일을 완전 바꿨고 꿈을 이뤘다.
이쯤이면 파가니니는 악마의 조수가 아닌 음악을 풍성하게 한 신의 은총이다.
파가니니는 로시니(1792~1868)와 절친했다.
로시니는 '세빌리아 이발사'로 대박을 터트린 후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베토벤의 철옹성에 당시 음악가들은 비쥬얼한 오페라로 눈을 돌렸다.
시류도 서서히 그리 흐르기 시작했다.
베토벤 말년 현악4중주類는 눈길도 주지 않고 오페라 하우스만 문지방이 달았다.
헨델과 함께 대표적 미식가로 놀기 좋아했고 게을렀다.
그에겐 고향인 이탈리아를 떠나 화려한 파리 사교계가 적격이였다.
37세에 오페라 <윌리암 텔>을 끝으로 작곡을 멈추었다.
속물 근성이 심했는데 말년에 '동상을 세우겠다'며 모금해오자 '내가 동상에 서겠다'며 달라했단다.
18세기 최고 휴머니스트 드라쿠르와作
1834년 조르드 상드(상),1838년 쇼팽(하)
프레드릭 쇼팽(1810~1849)은 리스트 보다 한해 먼저 태어났다.
20세에 러시아 지배하의 폴란드를 떠나 파리에 입성했다.
친구들 주선으로 고별 연주회가 있었다.
그는 피아노협주곡 1번을 연주했다.
바르샤바 음악원 시절 제자 콘스탄치아는 로시니의 <호반의 미인> 중 카바티나를 불렀다.
은잔에 담아온 흙,그녀의 리본을 평생 간직했고,결국 그 흙은 파리 장례 때 가슴에 뿌려졌다.
파리서 폴란드 귀족 딸인 16세의 마리아 고진스키를 흠모했으나 드레스텐으로 가버렸다.
그녀 위해 <이별의 왈츠>를 선물했다.
마리아는 음악,시,그림에 뛰어났는데 쇼팽 초상화도 그렸다.
드라쿠르아 것과 더불어 쇼팽 2대 초상화이다.
들라크루아는 1838년 쇼팽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쇼팽을 만나기 전 조르주 상드를 1834년에 먼저 만났다. '되몽드' 잡지의 편집장은 독자들을 위해 상드의 초상을 들라크루아에게 부탁했다.
그래서 상드는 센 강변의 볼테르街 들라크루아 아틀리에에 자주 들렀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걸까?
리스트는 음악적 충격을 몇번 먹었다.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파가니니와 쇼팽 연주였다.
환상교향곡은 교향시를 낳게 했고,파가니니는 그의 연주 스타일을 바꾸게했다.
리스트와 쇼팽은 숙소도 같이 할만큼 영향을 주고 받았다.
쇼팽이 파리 음악계,사교계에 안착하는 데에는 리스트의 가이드가 있었다.
그래서 쇼팽은 연습곡집 1번은 리스트에,2번은 다구에 헌정했다.
호탕,외양의 리스트,,,, 섬세,내향의 쇼팽이였다.
베를리오즈는 쇼팽에 죽을 때 까지 다정다감했다.
한번은 무대 불도 켜지않은채 리스트 독주회가 열렸다.
연주가 끝날 무렵 상드는 뒤에서 촛불을 두손에 움켜쥐고 피아노 쪽으로 다가왔다.
관객들 탄성이 터져나왔다.
촛불에 비친 얼굴은 리스트 아닌 쇼팽이였다.
리스트와 상드가 쇼팽을 돋보이게 하려는 즉석 이벤트였다.
노앙에서의 쇼팽과 상드/쇼팽에 있어 상드는 어머니 품이였다.
'영원한 여성이 남성을 이끈다'했던가,,,쇼팽에 상드가 그랬다.
26살 되던해 쇼팽은 6살 연상에 두 자녀를 둔 상드(1804~1876)와 세기적 사랑에 빠진다.
둘이 처음 만난 곳은 마리 다구 집이였다.
쇼팽은 마리아로 마음의 상처가 남아있던 시기였다.
상드는 쇼팽을 얻기 위해 다구에 많은 조언을 구했다.
쇼팽은 처음에는 탐탁치 않아했으나 2년에 걸친 헌신적인 구애에 마음도 움직였다.
쇼팽양,상드군과 열애에 빠지다!
당시 언론 한토막이다.
당시 사람들은 상드를 여류 돈후안이라 불렸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19세기 사람이지만 이미 21세기를 산 상드였다.
불성실한 첫 남편과 이혼을 위해 교회에도 저항했다.
괴테는 90 평생 9명의 여자를 거쳤다.
그에게 세상 구원의 주체는 순결表 여성이였다.
피카소는 여자의 변천사가 곧 화풍의 변천사였고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충격에 한 여자는 권총 자살을,한 여자는 음독 자살했다.
그러나 '상드=여류 돈후안'이라는 등식은 남성적 시각일뿐이다.
그녀는 만나는 남자 마다 모성애로 최선을 다했다.
쇼팽과 해어진 후 만난 연하의 조각가 망소가 성공했던 데에도 상드의 헌신이 있었다.
90여권을 저서를 남기며 경제적 자립에 노력했다.
실제적인 최초 커리어 우먼이었는지도 모른다.
남성 패권의 예술계는 그녀를 남장에 시가를 물게했다.
당시 파리서 카페는 문화,예술의 용광로였다.
모여 토론하고 사고했다.그러나 카페에 여성은 없었다.
당시 사교 살롱에 익숙한 귀부인들은 신생 카페에 들렀다 줄행랑쳤다.
날이 서는 시대적,문학적 토론에 기가 죽어서이다.
카페에서 유명 여성으론 상드가 최초였다.
대한민국은 1970 년대에도 남장한 국회의원이 있었다.
할머니 밑에서 자랐고 수녀원에 들어가 신비주의에 빠지기도했다.
유난히 자연,어린이,농부를 좋아했다.
주민들은 그녀를 노앙의 착한 여인으로 불렀다.
발자크,위고,드라쿠르와 등 당대 지성과 어깨를 나란히 했으며 혁명기에는 민중의 편에 섰다.
러시아 뚜르게네프,바쿠닌을 소개하기도했다.
리스트 연주에 감동 피아노 밑으로 기어들어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나의 가슴은 언제나 붉은 색이였다"
죽기 2주전 남긴 말이다.
'팜브 파탈',,,남자에 치명적인 여성을 말한다.
양귀비,장희빈,트로이를 멸망케한 헬레네,다윗왕이 빠진 밧세바,삼손의 머리카락를 자른 데릴라.
작품 속의 카르멘,로리타까지,,,
흔히들 '상드-쇼팽' 관계도 그리 말하곤했다.
그러나 쇼팽에 있어 상드는 축복이였다.
파리 입성 후 2년만에 상드를 만났다.
만난지 2년만에 열애에 빠졌고 헤어진 후 2년만에 죽었다.
<빗방울 전주곡>은 쇼팽이 그녀에 얼마나 의지했는지 잘 보여준다.
사랑에 빠진 후 지병인 결핵도 도졌다.
겨울이라 따스한 지중해 마조르카 섬으로 요양을 떠났다.
당시 폐병은 흑사병 처럼 두려운 전염병이였다.
우기가 겹쳐 콜록콜록이 심해졌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 결국 일주일만에 인근 폐수도원으로 옮겼다.
당시 생활상은 상드의 <섬에서의 한 철>에 잘 묘사되어 있다.
상드는 인근 마을로 생필품을 사러갔는데 야밤이여도 돌아오지 않았다.
심적으로 불안해진 쇼팽은 연신 기침을 했다.
시간을 잊으려는듯 피아노에 열중했다.
이윽고 비에 흠뻑 젖은 상드가 들어왔다.
얼마나 반가웠으면 그랬을까?
쇼팽의 멘트가 슬프다.
" 당신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며 작곡했지,,,"
확실히 영원한 여성은 격정의 남성을 침잠시키고 고양시킨다.
당시 상드가 쇼팽에 어떤 존재였는지 다음의 쇼팽 글을 보면 잘 알수있다.
'너를 위하여 나는 땅바닥을 기여도 좋다.너를 위해서만 음악을 울리고 싶다.
사랑하는 이여,너의 흐린 눈으로 너무 잔혹하게 되어주지 말라!'
둘은 3개월만에 상드 별장이 있는 고향 노앙으로 돌아온다.
노앙엔 친구들도 자주 들렀는데 절친했던 드라쿠르와는 <회상록>에서 이리 술회했다.
'상드는 소설을,쇼팽은 작곡을,나는 그림을 그렸다.
많은 남자를 섭렵한 그녀가 어떻게 저리 얌전할 수 있을까?
분명 음악적 영감을 얻고있을 게다.
근데 요즘 발자크는 왜 안오는 거지? 모두들 행복해 하는데,,,,,'
상드와 헤어지고 2년을 더 살았다.살았다지만 덤의 인생에 불과했다.
제자 초청으로 영국으로 건너갔고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 연주도 했다.
그러나 영국의 습한 공기는 병을 악화시켰고 파리로 돌아와 죽음을 받았다.
"죽음을 뚫어지게 보고 싶다" 피카소의 臨終言인데 화가로서 사물을 깊이도 보고 싶었나 보다. "나에게 더 많은 빛을,,," 괴테로 대 사상가답다.
알콜 중독의 베토벤은 제자가 좋은 포도주를 침대에 올려놓자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속삭였다.
" 이젠 늦였어...."
'자연으로 돌아가라!' 외쳤던 루소여서 일까,,,.
"낙심하지 마시오,하늘을 보시오,어쩜 저리 맑죠?,,난 그곳으로 갑니다."
퇴계 이황은 도산서원서 조카에게
"저 매화에 물줘라" 였다.
" 죽거든 관 양쪽에 구멍을 뚫어 나의 빈손이 보이게 하라! "
아리스토 텔레스를 스승으로 모시고 3년의 제왕학 학습을 거친 알렉산더이다.
인도 북부~로마 까지 재패한 그였지만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현지 문화를 존중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일까,,?
공수래 공수거를 나이 30에 실천한 알렉산더이다.
서산대사는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멸에 들었는데 끝맺음도 선승다웠다. 자신의 초상화를 바라보고는,
" 80년 전에는 네가 나더니,80년 후엔 내가 너로구나" 김시습은 초상화를 직접 그려 놓았다. 초상화를 바라보며,
"네 모습 지극히 약하며,네 말은 분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텅이 속에 너를 버릴지어다" 시니컬한 아웃사이더 지식인답다.
그러면 유명인의 임종언은 얼마나 진실일까? 영웅들의 죽음은 시대의 필요에 의해 강하게 채색된다.
특히 문화,예술인은 상업적으로 더 굴절된다.
죽음 직전서 '더 많은 빛을 달라' 절규했을까?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며 비장해 했을까?
자연으로 돌아간다며 즐거워했을까?
관속의 빈손을 보여달라했을까??
글쎄,,,,,,,,,,,,,,,,,,,
쇼팽은 사망 두달전 파리에서 첫사랑이였던 델피아에 단테 <신곡>의 다음 구절을 적어주었다.
결국 상드가 아닌 그녀 품에서 죽었다.
"불행할 때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 보다 슬픈 것은 없다"
쇼팽은 하이네,멘델스존을 좋아했고 특히나 모짜르트 음악을 사랑했다.
죽기 직전 모짜르트 음악을 들려달라했고 장례식 때 모짜르트 레퀴엠 연주를 유언했다.
모짜르트 레퀴엠은 슈베르트,흄멜 장례식 때도 연주되었다.
" 어머니,불쌍한 나의 어머니!!"
38세 쇼팽 마지막 말이다.
마들렌 성당서 보름만에 장례식이 치뤄졌는데 수천이 애도했다.
늦여진 데는 레퀴엠에는 여성 솔로 파트가 있는데 여성은 성당 출입금지였기 때문이다.
관이 성당에 들어오자 마이어 베이 지휘로 그의 소타타 2번 3악장 <장송행진곡>이 관현악 편곡으로 울렸다.
드라크루아는 참 인간적이였나 보다.
그 열광하던 파리 여성들도 쇼팽이 폐인으로 돌어오자 모두를 고개를 돌렸다.
쇼팽은 사망 2년전 상드와 헤어졌고 들라크르와는 위로차 자주 그를 찾았다.
당시 그의 일기는 쇼팽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들라크르와는 쇼팽이 죽은지 12년이 지났는데도 그의 부재를 일기에서 이렇게 아쉬워했다.
'대체 누구와 함께 쇼팽과 같은 천재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까요?
하늘이 우리에게 마지 못해 보내준 사람,,,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고
신성한 멜로디를 들을 수 없기에 더욱더 그를 생각하게 됩니다.'
마들렌 성당서 열린 장례식 실제적 상주는 드라쿠르아였다.
Princesse de Broglie,1853,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앵그르作,로코코의 화려,우와에 고전주의 이상미가 넘친다.
앵그르(1780~1867)는 드라쿠르와 보다 20살이나 많다.
파가니니 초상화도 그렸듯 리스트-드라쿠르아 그룹과 친밀한 관계였다.
당시 보를레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시대 파리서 드라쿠르아에 비할 수 있는 화가는 캐리컬쳐 작가인 도미에와 앵그르 밖에 없다"
당시 고전주의 앵그르,낭만주의 드라크르아로 양분되어 있었다.
고전주의 화풍은 사물을 이상화하는 특성을 지닌다.
그래서 그가 그린 파가니니 초상은 어디에도 악마 모습은 없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들라크르아,1830년, 캔버스에 유채, 260 x 325 cm
부재는<1830년7월 28일>로 복고왕정에 반대,봉기한 시민들이 3일간 시가전 끝에 부르봉 왕가를 넘어뜨린 7월 혁명을 주제로한 것이다.드라크루아는 형 샤를 앙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작품 관련 이렇게 썼다.'나는 현대적인 주제,즉 바리케이트戰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나는 조국의 승리를 위해 직접 나서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조국을 위해 이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풍만한 여신이 프랑스 삼색기를 들고 민중을 이끈다.쌍권총 소년,귀족 장총이 인상적이다.
시대의 화가,,,외젠드라쿠르아 자화상.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드라크루아(1798~1863).
그는 많은 문학가와 교류했고 문학,역사적 영감을 화폭에 담았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19세기의 형상화였고 '시대의 아들'이었다.
힘찬 율동,격정 표현,빛깔의 명도,심도있는 강렬한 효과등으로 낭만주의 회화를 창시했다.
자유롭고 유연한 화풍으로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드라크루아가 친구,동료들과 나누었던 편지는 예술에 대한 이상과 사랑을 엿볼 수 있다.
1822년부터 평생 일기를 썼는데 회화,문학,자연에 대한 사색 등 예술의 높은 성찰이 들어있다.
<메두사의 땟목>의 젤리코를 존경했고,후배 쿠루베를 격려했고 인상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
<키오스 섬의 학살>은 1824년 그리스 키오스섬에서 터키군의 학살에 관한 고발이다.
1824년은 바이런이 그리스 독립전선에 뛰어들어 사망한 해인데 사망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유명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그의 사상적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신은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며 프랑스 三色기를 치켜들고 군중을 이끈다.
소년은 그녀 앞에서 쌍권총을,귀족은 뒤에서 장총을 들었다.
여신의 풍만한 가슴은 혁명의 역동성 표현이다.
음악가와 퍽이나 가까왔던 그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관련 이리 말했다.
'색채, 명암 등의 일정한 배열이 낳는 효과가 있다.
이것을 그림의 음악이라 부를 수 있다.'
악렉산드로 뒤마피스(1802~1870)와 절친했다.
뒤마피스는 <몬테크스트 백작>에 <철가면>까지 프랑스 낭만주의를 이끌었다.
아들 뒤마 주니어도 작가였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의 원작자가 바로 뒤마 주니어다.
마네는 <올랭피아>로 기존 화단으로부터 무차별 공격을 받았다.
올랭피아는 바로 라트라비아타(춘희)에 나오는 창녀 이름이다.
둘은 친했는데 드라쿠르아가 죽자 뒤마는 <드라크루아에 대한 한담>을 썼다.
뒤마의 드라쿠르아에 대한 일종의 추모사이다.
드라쿠르아가 <회상록>에서 궁금해하던 발자크(1799~1850),,,
쇼팽-리스트가 한살 터울이듯 드라크루아-발자크도 그렀다.
발자크는 음악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1830년 <파리 지붕 위의 한 위인>으로 대박을 터트렸다.
파리의 카페 문화,보헤미안,라보엠이라는 문화 코드를 만들었다.
말년에는,비극적이지만 화려한 삶을 살다간 '보헤미안 4인방'과 절친했다.
하늘의 구름을 사랑했고,상속재산을 탕진하다 친지 소송에 패해 가난한 시인의 삶으로 들어간 보를레르,
사실주의 화풍의 시대적 대변자 쿠르베,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의 원작자 <루돌포와 미미>의 뮈르제,,,가 그들이다.
단 하우저 그림에서 상드와 함께 대표적 문학가 빅톨 위고(1802~1885),,,,
시원한 외모에다 한눈에 문필가적인 이지가 느껴진다.
빵 한조각 훔친 죄로 19년을 감옥서 산 장발짱의 <레미제라블>,
팜브파탈 카르멘의 버전 에스메랄다의 <로틀담의 곱추>,,,
<레미제라블>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뒤마피스,뮈르제,발자크등과 친했다.
단 하우저는 이미 이세상을 떠난 바이런(1788~1824,영국)을 왜 그림에 초대했을까?
그는 소아마비였으나 미남에 승마,수영에도 능통 당시 유럽 사교계의 총아였다.
호탕하고,모험적이고,난봉꾼 기질도 있었다.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로 유명해졌는데 '아침에 깨어나니 유명해졌다'라는 말을 남기게 한 그 작품이다.
바이런은 열정,사랑,자유,반항,응축,비약,,,등등 낭만주의 자체였다.
카사노바,돈주앙의 삶이였음에도 홀연 투르크 침공하의 그리스 독립을 위해 이국의 전장터로 달려갔다.
쿠바혁명 성공 후 오른 장관직을 버리고 볼리비아 밀림전선에 뛰어든 체 게바라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36세에 전장터서 학질로 죽었으니 그리스 독립의 영웅이 되었다.
그래서 일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1/3을 잠으로 보낸 주제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전장서 그에게 1개 사단이 주어졌는데 임종언도 바이런답다.
'전진,전진,나를 따르라!'
그러고 보니 낭만주의 음악가 중 유독 단명이 많았다.
그는 모짜르트 처럼 36세를 살았다.
슈베르트,쇼팽,베버,비제,멘델스존,,,모두 낭만주의 음악가로 불혹을 못 넘겼다.
고전의 조화,균형이 아닌,,,,비약,낭만,자유,열정의 몸버리는 삶이여서일까??
바이런의 죽음은 당대 문필가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나 보다.
괴테는 25세에 불과 3개월 만에 <젊은 베르테르 슬픔>을 썼다.
그리고 유럽을 온통 베르테르 코드로 만들었다.
59년만에 완성한 북부독일 전설을 기초로 한<파우스트>,,,
1부를 마치고 주춤하고 있을 때 괴테로 하여금 펜을 들게 한 계기가 바로 전장에서 바이런 죽음이였다.
사망 6개월 전 탈고하고 봉인했다.사후 개봉 유언을 남겼다.
베토벤이 흠모했던 괴테,,,
그 괴테에 바이런이기에 단 하우저는 베토벤과 동격으로 바이런을 초대하지 않았을까,,,,
베토벤 사후 낭만주의의 발흥도 바로 이같은 주변 예술 장르의 영향하에서이다.
음악의 낭만주의는 낭만주의 문학으로 부터 시작했다.
리스트의 교향시는 시의 음악적 표현이다.
낭만주의 음악의 기수 베버도 유명 문필가였다.
베를리오즈는 마치 소설 쓰듯 곡을 썼다.
그가 남긴 <회상록>은 음악가가 쓴 전기문학 중 걸작이다.
멘델스존은 문학,철학,그림에 일가를 이룬 팔방미인이였다.
슈만은 음악평론의 일인자였고 브람스,쇼팽을 알리는데 일조했다.
생상은 시인,화가,평론,수학,천문학 등 거치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바그너는 자신이 직접 대본을 썼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쇼펜하우어에 탐닉 철학,미학에 일가를 이뤘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다.
리스트,쇼팽은 연인 상드와 다구가 대신했다.
이들은 폭넓은 독서를 했으면 미술등 주변 장르와 교류했다.
오르낭의 장례 (A Burial at Ornans),1849-1850,쿠르베作,실경 크기로 당시 농민들의 장례 풍속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감추고 싶은 농민 생활상의 사실 묘사로 큰 반항을 일으켰다.
넓은 아랑 만큼이나 드라쿠르아는 당시 문화,예술계의 연결고리였다.
드라쿠르와는 뮈르제,보를레르와 더불어 '보헤미언 4인방'인 쿠르베로 연결된다.
쿠르베(1819~1877)는 사실주의 화풍의 선구자로 마네의 인상파로 이어진다.
쿠르베는 대상은 사실적으로 그려야한다는 신념으로 살았다.
그래서 쿠르베의 누드화는 적나라하다.
어떤 것은 18禁 자체이다.
(궁금하시면 쿠르베 <세상의 기원>을 치시라.차마 이곳엔...)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사상적 배경을 보면 금방 이해가 간다.
1871년 파리코뮌에 참가 체포된 후 스위스로 망명하는 등 화가 최고 정치적 인물이였다.
<화가의 작업실>,<오르낭의 매장>은 하층민에 대한 실경 묘사로 귀족에게는 혐오의 대상이였다.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열린 국전에서 앵그르는 41점, 들라크루아는 35점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쿠르베는 11점인데다 회심작 <화가의 아틀리에>가 낙선했다.
그는 '프랑스 미술의 재앙'이라고 선언하고 박람회장 인근에 별관을 마련, 개인전을 열었다.
회화사 최초 개인전이요,사실주의 최초 전시회였다.
리얼리즘 이라는 용어도 이때 나왔다.
<오르낭의 매장>은 농민의 장례식을 묘사한 것으로,실물 크기의 인물들이 40명 이상 등장한다.
고전주의의 절제되고 이상화된 화풍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전까지의 귀족적,신화적,종교적 인물이 아닌 농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지저분한 농민을 있는 그대로 묘사는 기존 미술계를 열받게했다.
이런 쿠르베를 인정하고 격려한 이가 바로 리스트,쇼팽,상드와 절친했던 드라쿠르와이다.
에밀 졸라가 마네등 인상파를 위해 싸웠듯이.
쿠르베는 보를레르와 절친해 그의 초상화도 그렸다.
<화가의 아틀리에>에는 보를레르와 그의 연인도 그려 넣었다.
바늘 가는 데 실간다.
쿠르베엔 보를레르이다.
둘은 못말리는 보헤미안이였다.
보를레르(1832~1883)는 시집 <악의 꽃> 단 한권으로 세계 문화사를 재패했다.
20세부터 25년간 장고의 결실이다.
상징주의의 경전이요,현대시의 복음서이다.
그러나 당시엔 외설죄로 피소되었고,결국 좌절한 그는 실어증에 반신불수로 46살에 죽었다.
당시 르 피가로紙는 그를 이렇게 조롱했다.
"보를레르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럽다. 이 책은 광란과 온간 부패에 개방된 병원이다"
당시 정황들이 마치 마광수에 우리 언론을 본것 같다.
보를레르는 당시 보헤미안 4인방으로 통했다.
화가 쿠르베,푸치니 라보엠의 원작자 뮈르제,그리고 베스트셀러 <파리 지붕 위의 한 위인>으로
보헤미안,라보엠 문화를 대중화시킨 발자크와 친했다.
쿠르베作,<화가의 아틀리에>,1854,캔버스에 유채,루부르박물관.오른쪽 책읽는 이가 보를레르,앞 여인은 그의
연인이다.쿠르베,보를레르는 당시 파리 '보헤미안 4인방'으로 불릴만큼 절친했다.농민,지식인,귀족,성직자까지
당대 인물상을 계층 갈등적 관점에서 그렸다.
쿠르베의 대표작 <화가의 아트리에>에도 보를레르가 그녀의 연인과 함께 나온다.
오른쪽 끝 책보는 이가 보를레르이고 앞 여인이 그의 연인이다.
쿠르베가 중앙에 있고 그림을 바라보는 누드 모델과 어린 소년이 그 옆에 있다.
쿠르베 옆에 서있는 누드 모델은 어딜 봐도 이상적 아름다움은 아니다.
왼쪽에는 가난한 자,부자,노동자들이 있다.
개와 함께 있는 루이 나폴레옹,맨 왼쪽에 서있는 사람이 국방상으로 혁명 분위기를 묘사했다.
오른쪽은 귀족 중심이다.
계층 간의 갈등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상징주의 음악의 대가 드뷔시는 <목신 오후의 전주곡>을 남겼다.
원작이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이다.
님프의 아름다운 육체를 사모하는 목신(牧神)의 관능적인 몽상을 묘사,육욕의 허무함을 상징한 것이다.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1842~1898)집도 당시 시인,화가들의 회합,토론의 장소였다.
그런데 또 있다.
한강의 원류 찾아 거스르면 오대산 우통수와 태백 검룡소가 나온다.
문화적 현상도 거스르면 반드시 근원이 나온다.
18세기 프랑스 파리에 다양 장르가 저리 꽃필 수 있었던 데에는 '그럴 수 밖에 없는!' 문화의 버팀목이 있었다.
언젠가 프랑스 문화부가 프랑스 3대 문화 상징으로 꼽은 '카페문화'이다.
<下로>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2악장 Romance, Larghet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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