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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과 심리로 보는 칠죄종] 질투(시기) (1) 질투(시기)란 무엇인가
악마가 리비아 사막을 지나다가 소수의 사람이 한 순례자를 몹시 괴롭히고 있는 곳에 오게 되었다. 그 순례자는 그들의 악한 제안을 쉽게 떨쳐 버렸다. 악마는 그들이 실패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좋은 수를 알려 주려고 앞으로 나왔다. “너무나 유치하게 행동하고 있잖아, 내가 해 보겠네.” 악마는 그 순례자에게 가서 속삭였다. 네 형제가 방금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다.” 그 순간 순례자의 고요했던 얼굴은 악의에 찬 질투로 험악해졌다. 악마는 지켜보던 자들에게 말했다. “이게 바로 자네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방법이지.” - 고든 맥도널드의 「영적인 열정을 회복하라」 중에서
질투의 자화상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순간을 한 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성공 소식에 잠시 말문이 막혔던 순간이나 타인의 기쁜 일을 함께 기뻐해 주지 못했던 순간, 남의 좋은 일에 마지못해 축하 인사를 건네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는 내가 그렇게 되지 못한 것에 마음이 불편했던 순간, 나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이가 실패하기를 바랐던 순간, 질투하는 마음을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은밀히 포장하거나 질투하는 내 자신이 형편없이 느껴져 부끄러웠던 순간 말이다.일본의 작가 츠지 히토나리는 「질투의 향기」에서 인간을 ‘질투하는 동물’이라고 표현하면서 아이나 어른이나,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어떤 성인군자도 시기나 질투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반려 동물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동물도 질투(시기)한다.2014년 미국의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는 반려견들을 대상으로 무엇에 질투(시기)하고 그 반응이 어떠한지를 연구했다. 흥미롭게도 반려견들에게서 인간의 질투(시기)와 거의 같은 모습이 관찰되었다.
질투(시기)의 대상을 발로 밀어내고, 주인의 관심을 끌려는 행동을 하거나 신발을 물어뜯는 등 분노의 모습을 보이며 질투(시기)의 대상과 주인 사이에 끼어들기도 하고, 급기야 우울증까지도 걸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질투(시기)하며 살아왔다. 부모님께 좀 더 사랑받는 형제에게, 공부를 잘하고 선생님들께 칭찬받는 친구에게, 좋은 직장에 취직한 아들을 둔 엄마들에게, 좋은 차에 명품 옷을 누리는 친구나 나보다 능력 있는 동료에게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질투(시기)에서 자유로운가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면서 부정적인 자신의 언행을 멈추도록 특별한 은총을 청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발견되는 그 모습 앞에서 좌절하기도 한다. 심지어 질투(시기)의 대상이 사제와 수도자나 열심인 교우들에게로 향하고, 방법 또한 더 교묘해짐을 느끼면서 큰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동시에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질투(시기)를 받기도 한다. 첫 번째로 받는 질투(시기)는 동료 신자들에게서 온다. 이를테면 본당 공동체에서 봉사에 열심인 이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지적하거나 미워하기도 한다. 이러한 지적과 미움은 대부분 질투(시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받는 질투(시기)는 비그리스도인에게서 온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덕과 가치, 평화로운 삶에 대한 부러움에서 기인한다.
이따금 비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이런 모습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방해하면서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며 연륜이 쌓여도 질투(시기)의 감정이 올라오거나 누군가의 질투(시기)를 받을 때 그에 반응하는 방법이 달라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사제인 나 또한 질투(시기)를 하기도, 받기도 한다. 또 나로 말미암아 서로 질투(시기)하는 모습도 본다. 그럴 때면 “사제로 말미암아 질투(시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찌해야 할지 방법을 모르겠다.”고 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사제뿐만 아니라 수도자와 공동체의 봉사자도 자신들의 질투(시기)를 잘 다스려야 하며, 자신도 다른 이들로부터 질투(시기)받는 사람임을 알아 지혜롭게 처신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질투(시기)는 한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파괴하기도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질투(시기)로 말미암은 공동체의 분열을 특별히 강조하셨다. 이를 ‘악마의 무기’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독으로 공동체를 오염시켜 분열을 일으킨다고 말씀하셨다.
용어의 문제
칠죄종에서 언급되는 ‘Invidia’는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여 미워하는 감정으로 다른 사람의 선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 적의 그리고 다른 사람의 선을 마치 자기의 악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하느님께서 주신 최고의 계명인 ‘사랑’에 위배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칠죄종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악한 생각’(logismoi)의 여덟 가지 목록에는 ‘Invidia’가 빠져 있다. 이 항목은 그레고리오 1세 교황님이 후대에 첨가하신 것이다. 아마도 ‘Invidia’는 초기 수도 생활을 중심으로 성찰한 ‘악한 생각’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확장하면서 점차로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Invidia’를 ‘시기’ 또는 ‘질투’로 번역하면서 함께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 둘의 의미는 약간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시기’(phtbonos)는 상대방이 잘되거나 또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상대가 가졌을 때 느끼는 좌절감과 미움인 반면, ‘질투’(zelos)는 상대방이 가진 것을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해 슬퍼하고 속상해 하는 것이다(「수사학」, 1387B, 1388A 참조).
쉽게 말해, 시기는 ‘타인이 가진 것을 미워하는 것’이고, 질투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슬퍼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기(envy)는 그 장점을 찾기 어렵지만 질투(jealousy)는 잘만 조절하면 좋은 동기로 승화시킬 수 있다.
이를테면 질투는 성장하는 데 좋은 동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선생님의 사랑을 받는 학생을 질투하여 더욱 열심히 공부할 수도 있고, 일 잘하는 직장 동료 때문에 업무에 더욱 매진하며, 온유한 사람의 모습을 질투하여 자신도 온유함을 지니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실제로 라이벌 관계에서 질투로 자신을 더 성장시킨 경우도 많다.
하지만 질투 또한 부정적이거나 위험한 태도와 만나게 되면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미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 범죄의 20%가 질투 때문에 일어나고, 이혼한 부부의 30%는 질투가 원인이라고 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부유층이나 권력을 지닌 이들에 대한 질투가 증오의 감정으로 이어져 끔찍한 사건을 일으키는 경우가 이따금씩 소개된다.
최근에는 질투로 말미암은 ‘스토킹’이나 ‘데이트 폭력’ 등이 사회적인 문제로도 이어지고 있다.
초기 교회의 교부들은 칠죄종을 성찰하면서 우리를 죄로 이끄는 부정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려고 ‘시기’(envy)의 어원격인 ‘Invidia’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성경, 교부들의 저술, 현대 심리학을 비롯한 많은 인문 서적과 일반 생활 안에서는 시기와 질투를 크게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필자 또한 시기와 질투를 특별히 구분해야 할 경우가 아니라면 그 둘을 같은 의미로 보면서 이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영성과 심리로 보는 칠죄종] 질투(시기) (2) 가톨릭 전통 안에서 보는 질투(시기)
성경에 소개된 질투(시기)
성경에는 인간의 질투(시기)에 대해서도 쓰여 있다. 하지만 ‘시기’와 ‘질투’를 유사한 뜻으로 나란히 쓰거나 구분해서 사용하기도 하고, 문장에 따라 ‘열정’이나 ‘열성’(요한 2,17; 로마 10,2; 2코린 9,2; 11,2) 등과 같이 다른 단어로도 사용했기에 각각의 의미를 정확하게 구분하여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오늘날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사용하는 「성경」은 이 두 용어 사이에 약간의 차이점을 염두에 두면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성경」에는 ‘시기’에 비해 ‘질투’라는 단어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단어가 주로 사용된 부분도 약간 차이가 있는데, ‘시기’는 구약과 신약 전반에 걸쳐 두루 사용되는 반면 ‘질투’는 주로 구약과 서간에서 사용된다. 또한 시기와 질투의 주체에서도 차이가 있다. 시기는 주로 인간이, 질투는 대부분 하느님께서 주체로 등장하신다.
그 차이점을 찾고자 각각의 특징적인 부분을 살펴보았다.
먼저 ‘시기’라는 용어로 번역된 부분을 보면, 시기는 개인을 파괴시키고 지혜와 함께할 수 없으며(지혜 6,23 참조), 허무한 일이다(코헬 4,4 참조). 그리고 죽음의 원인이며 죄의 원인이다(지혜 2,24 참조).
특별히 죄의 원인으로서 시기를 언급한 성경의 내용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악마의 유혹(창세 3장 참조)과 카인과 아벨의 범죄에서 소개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첫 번째 범죄를 반영한다(창세 4장 참조).
또한 시기는 “육적인 사람”(1코린 3,3)과 타락한 인간(로마 1,29 참조)의 특성이고 육정의 열매(갈라 5,20 참조)이며 이방 민족의 것(로마 11,11 참조)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새 생활과 함께 공존할 수 없으며(로마 13,13 참조), 사랑의 열매도 아니다(1코린 13,4 참조). 또한 성령의 지도에 따라 사는 이들이 유의해야 하는 것 가운데 하나다(갈라 5,26 참조).
한편 ‘질투’라는 용어로 번역된 「성경」 본문에서는 대부분 하느님께서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당신을 계시하시는 모습에서 등장한다(탈출 20,5; 34,14; 민수 25,11; 신명 5,9; 6,15; 29,19; 32,16; 여호 24,19 등 참조).
하느님에 이어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질투의 주체는 부부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일어나는 질투로 민수기에서는 ‘질투에 관한 규칙’도 소개된다(5,14-31 참조).
성경에 나타난 질투나 시기와 관련된 사건을 중심으로 그 특징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친밀한 이들 안에서 발전
‘카인과 아벨’(창세 4장 참조), ‘에사우와 야곱’(창세 27장 참조), ‘요셉과 형제들’(창세 37,11 참조).
● 부메랑이 되는 질투
사울은 다윗에게 지녔던 질투로 자신이 파괴된다(1사무 18장 참조). 하만이 모르도카이를 질투하여 그를 죽이려고 말뚝을 세웠으나 결국 자신이 매달리게 된다(에스 5,9—7,10 참조).
●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유의해야 할 것
시기나 질투가 없는 모습을 하느님 백성 공동체의 평화로운 모습이라고 소개한다(1마카 8,16 참조). 또한 성경은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이들 안에서도 시기심과 경쟁심이 작용할 수 있는데 이 또한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필리 1,15 참조).
● 하느님의 사람이 받게 되기도
구약에서는 요셉과 다윗이 형제와 선대왕으로부터 질투를 받는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 바오로 사도,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질투의 대상이 된다.
교부들의 가르침
칠죄종에서 새롭게 부각된 질투(시기)와 관련해 교부들은 다양한 각도에서 이를 다루었다. 여기서는 특별히 치프리아노 교부와 베네딕토 성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치프리아노는 질투(시기)와 관련하여 후대 교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교부이다. 두 번째는 베네딕토로 그리스도인이 받을 수 있는 질투(시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보여 준 성인이다.
먼저, 치프리아노는 저서에서 시기와 질투를 다루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강조하고 있다(「선행과 자선, 인내의 유익, 시기와 질투」, 분도출판사, 2018).
● 모든 악의 근본
치프리아노는 시기와 질투를 모든 악의 근본이자 파멸의 원천이고 구원의 적이며, ‘죄악의 못자리요 죄의 재료’라고 하였다. 또한 시기에서 미움과 적개심이 흘러나오고 탐욕에 불을 놓아 야심을 자극한다. 이로써 감각을 눈멀게 하고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을 하찮게 여기게 한다. 시기는 끊임없이 지속되는 악이며 죄다.
● 악마의 화살
다른 사람이 지닌 덕이나 행복을 시기하는 독성은 누군가를 비밀스럽게 공격하는 악마의 화살이 될 수 있고, 시기심으로 다른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제 칼로 자해하는 것과 같다.
● 일치를 깨뜨림
질투(시기)는 형제적 사랑에 흠집을 내고 진리를 오염시키며 일치를 깨트린다.
● 질투(시기)하는 사람의 모습과 대가
시기(질투)하는 이들은 위협적이고 험상궂으며, 낯은 창백하고 입술은 파르르 떨리며 이를 간다. 또 분노로 가득한 말과 고삐 풀린 욕설을 쏟아 내며 언제든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손을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서 질투(시기)는 사라지는 법이 없고 가슴은 밤낮 없이 찢어진다.
질투(시기)에 대한 베네딕토 성인의 반응
베네딕토 성인은 질투(시기)를 매우 많이 당했다. 성인의 수도 생활에 대한 명성이 높아지고 소문이 널리 퍼지자 많은 이가 성인을 질투(시기)하였다. 얼마나 질투가 심했던지 심지어 독을 넣은 빵을 성인에게 보내기에 이르렀다. 이 사실을 안 성인은 까마귀에게 빵을 던져 주며 물어다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내다 버리게 했다.
베네딕토를 없애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그들의 질투(시기)는 다른 제자들을 향한 유혹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수도원 정원에 벌거벗은 일곱 처녀를 들여보내 제자들의 마음에 사악한 욕정이 타오르게 하였다. 성인은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 증오를 피해 수비아코를 떠나 몬테카시아노로 가게 된다.
한편 베네딕토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하던 이는 테라스가 무너져 내리면서 깔려 죽는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성인은 크게 탄식했다고 한다. 첫 번째 이유는 그가 죽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 소식을 들은 제자가 기뻐했기 때문이다. 성인은 그 제자에게 보속하라고 명하였다(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베네딕도 전기」, 이형우 옮김, 분도출판사 참조).
질투(시기)는 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도 선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악에 빠질 수 있다는 교훈을 잘 보여 준다.
장상의 질투(시기)
질투(시기)를 받은 경험이 많은 베네딕토 성인은 수도 규칙서를 집필하면서 ‘질투’(시기)와 관련된 항목을 포함시킨다.
수도원장들에게 강조한 규칙이라는 점이 특이한데, 성인은 수도원장들에게 “질투와 시기심으로 영혼을 불태우지 않도록 해야 한다.”(베네딕토, 「수도 규칙」, 65항)고 가르쳤다. 장상의 질투(시기)는 자칫 동료들의 작업 분위기를 망치고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
종종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질투(시기)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윗사람의 질투(시기)는 오히려 더 큰 영향력을 가진다
[영성과 심리로 보는 칠죄종] 탐욕 (3) 탐욕의 심리와 치유제
탐욕과 심리
▶ 탐욕, 항문기 고착 –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색한 이들은 ‘항문기 고착증’이다. 부모가 대소변을 지나치게 통제하면 아동은 ‘항문 보유적 성격’이 발달하여 강박적이고 인색하게 된다. 돈을 모으기만 하는 성격이 된다. 반대로, 배변을 훈련하지 않은 아이는 ‘항문 폭발적 성격’이 되어 아무 때나 배설하게 되는데 훗날 돈을 낭비하는 성격이 된다.
▶ 돈과 인간의 정서 - 돈과 관련한 연구가 드물었던 심리학 영역에서 20세기 후반부터 다양한 실험과 연구가 시작되었다. 연구자들은 돈에 대한 신념과 태도, 감정, 대인 관계 안에서 역할, 병적인 유형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리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골드버그와 루이스는 돈에 대해 개인이 가진 정서를 안전과 힘, 사랑, 자유 등의 네 가지 형태로 구분했다. 곧 돈은 불안을 줄이는 주요 방법(안전)이고 자신의 가치와 우위, 통제를 얻는 방법(힘)이다. 또한 애정의 표현과 대체(사랑),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수단(자유)이다.
인간은 돈에서 안전과 힘, 사랑, 자유를 정서적으로도 체험한다. 결국 돈은 인간의 심리와 정신 활동과도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 병적인 행동 유형 - 포먼(Forman)은 돈과 관련하여(벌고 쓰고 모으는 과정) 나타나는 병적인 행동을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행동 유형으로 구분했다.
첫째, 구두쇠(Miser) 유형. 자신이 천한 대우를 받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돈을 잃는 것에 큰 공포를 느끼며 남을 믿지 못하고 돈의 혜택을 누리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다.
둘째, 낭비가(Spendthrift) 유형. 강박적으로 소비하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 특히 우울하고 자존감이 떨어질 때 더 그렇다. 소비하면 짧은 시간 만족감을 느끼지만, 곧 죄책감을 느낀다.
셋째, 돈을 버는 것에만 몰입하는(Tycoon) 유형. 권력을 얻고 지위와 인정을 받는 길은 돈을 버는 것으로 생각한다. 돈이 많을수록 세상을 통제할 수 있고 더 행복해진다고 생각한다.
넷째, 싸고 질 좋은 물건을 지나치게 찾는(Bargain Hunter) 유형. 강박적으로 할인 판매를 찾아다닌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에 대해서도 그렇다. 싸게 사면 우월감을 느끼지만 정상 가격으로 사거나 깎을 수 없을 때는 화가 나고 우울해진다.
다섯째, 도박꾼(Gambler) 유형. 내기 같은 모험을 할 때 흥분하고 이겼을 때는 권력감을 느낀다. 권력감 때문에 돈을 잃더라도 중단하기 어렵다.
현재 정신 의학에서는 강박적 소비나 중독(쇼핑, 도박 등)을 제외하고는 위에서 언급한 유형들을 정신 질환에 포함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 우리 삶에서 어떤 이들은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 불안과 같은 심리적 문제에서 위에서 언급한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어 이러한 행동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탐욕의 치유제
▶ 재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 지니기 - 성경은 우리에게 재물을 쫓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코헬 5장; 잠언 23장)인지를 알려 준다. 예수님 또한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들은 종종 재물을 가치 없는 것, 부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극단적 이원론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실제로 신앙인 가운데는 재물을 부정적인 것이라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돈에 집착하기도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교부는 우리에게 재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게 도와준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재산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재물은 ‘소유할 가치가 있는 것’이고 ‘어떤 것을 할 수 있게’ 하며 ‘유익’하고 ‘의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인간을 위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재물이라는 도구를 ‘잘 사용할 줄 알아야’ 하고 그것에 대한 책임은 돈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어떤 부자가 구원받는가?」, 35쪽 참조).
재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우리 삶을 채우는 다양한 가치 안에서 그것의 적절한 자리를 찾게 하는 데 가장 필요하다. 재물이 어디서 온 것이고 자신이 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알고 실천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다.
▶ 현재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기 - 바오로 사도는 당시 믿음의 공동체가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1디모 6,8)라고 당부한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교부는 진정한 부자는 재물을 많이 모은 사람이 아니라 재물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만족하는 사람이며, 정말 가난한 자는 재물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탐욕이 가득해서 만족하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말한 바 있다(「부자」 참조).
그리스도인은 탐욕의 죄에 빠지지 않으려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소유에 대한 이상적인 기대가 있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가진 것은 ‘지금’이다. 현재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는 이는 감사하게 된다.
▶ 가진 것을 나누기 - 초대 그리스도교가 복음을 실천했던 구체적인 방식 가운데 하나는 ‘공유’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함께 공유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 4,34).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단순히 누군가에게 내가 가진 것을 주는 행동이 아니라 ‘재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믿음의 표지’다. 또한 자신이 ‘재물의 노예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소비해야 할 항목이 점점 늘어가지 않는가? 어느 것 하나 뺄 수 있는 것이 없어 숨이 막히고 마음은 점점 각박해진다. “뭣이 중헌디!”라는 영화 속 대사처럼 돈을 사용해야 할 우선순위가 혼란스러워진다. 그게 어디 개인뿐이겠는가? 사회와 정부, 교회도 그럴 수 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기득권층의 고삐 풀린 사치와 부자들의 탐욕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의 제대가 금으로 된 잔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리스도(=가난한 사람)께서 굶주림으로 돌아가신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먼저 배고픈 이들을 충족히 채워 주고 난 다음 그 나머지 것으로 제단을 장식하십시오. … 살로 된 성전이 돌로 된 성전보다 훨씬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마태오 복음 강해」, 50).
소비의 우선순위가 혼란스러워지면 정체성이 혼란스러워지기 쉽다. 그 우선순위의 끝이라도 가난한 이에 대한 나눔을 넣고 흔들리지 않는 틀이 되게 하자.
▶ 재물 다스리는 훈련하기 - 클레멘스 교부는 부자 청년의 비유를 설명하면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소유물을 포기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청년의 영혼에서 재물에 대한 애착, 지나친 욕망, 병적인 불안, 걱정, 생명의 씨앗을 자라나지 못하게 하는 세속적인 삶의 가시를 떨쳐 버리라는 명령이라고 말했다(「어떤 부자가 구원받는가?」, 30쪽 참조).
‘돈을 지배하지 않으면 돈이 당신을 지배한다.’라는 말이 있다. 어릴 때부터 돈을 절제 있게 사용하고, 누군가와 나누며 성실하게 일해서 돈을 버는 법, 의미 있게 사용하는 법을 훈련해야 한다.
노예의 삶에 익숙해지지 말자. 하느님 이외에 그 어떤 것에도 삶의 주도권을 내어 주어선 안된다.
[마음이 머무는 피정 - 마리아의딸수도회 서울 마리아니스트 영성 센터] 예수님의 덕행 안에서 성장하기, ‘참행복의 길’ 피정
“막 구운 따끈한 빵을 손으로 뜯어 먹는 것, 오후의 햇빛이 나뭇잎 그림자를 그리는 걸 바라보며 브람스의 실내악을 듣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무라카미 하루키는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이런 게 바쁜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고 평범한 행복이라 했다. 이 행복을 주제로 하는 피정이 있다. 서울 마리아니스트 영성 센터에서 실시하는 ‘참행복의 길’ 프로그램이 바로 그것이다.
서울시 양천구 목동중앙본로30가길 20, 도심 속 조용한 주택가에 마리아의 딸 수도회(마리아니스트)본원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보물처럼 서울 마리아니스트 영성 센터(이하 영성 센터)가 자리한다. 검소한 성당과 제대, 그 안의 평온한 고요는 시끄러운 세상 속에 머물던 그리스도인에게 분주한 일상과 고민을 내려놓고 하느님 사랑에 흠뻑 젖어 들게 한다. 그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새 기운을 북돋아 주는 치유의 공간이자 쉼터가 된다.
이 영성 센터는 수도회의 두 창립자(복자 윌리암 요셉 샤미나드 신부와 복녀 아델 드 바츠 드 트랑퀠레옹 수녀)의 영성을 기초로 신자들의 내적 쇄신과 영적 성숙을 도모하고자 주로 올바른 성모 신심 교육과 그리스도인 덕성 교육, 영성 교육(마리아의 영성, 성경 등)등의 강좌와 피정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특별 강좌로는 ‘성경 속의 마리아’, ‘성모 마리아의 일생과 행복’,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 기도」’, ‘창세기(1-3장) 안에서 바라보는 마리아’, ‘마리아니스트 영성’ 등이 있다.
정기 피정 프로그램은 올해부터 ‘참행복의 길’ 피정이라는 제목으로 5월부터 11월까지 매월 첫 일요일에 열린다. 이 프로그램은 2004년부터 2017년까지 진행한 ‘하느님 현존 피정’의 후속 프로그램이다.
참행복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담당자 송 아가타 수녀는 이 피정의 명칭과 프로그램이 생겨난 경위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피정은 마리아니스트 영성과 시대적 요구가 어우러져 생겨난 것입니다. 복자 샤미나드 신부님에 관한 영성 서적 가운데 퀸틴 하켄워즈 신부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덕행 안에서 성장하기」란 책이 있는데 이 책이 한국에서는 「참행복의 길 - 예수 그리스도의 덕행 안에서 성장하기」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지요. 이 제목이 저에게 와 닿아서 피정의 이름을 ‘참행복의 길’이라고 지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항에서 우리가 창조된 이유를 ‘행복’이라고 했다. 그리고 책의 끄트머리에서는 진복팔단에 나오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거룩함’이라는 말로 바꾸어 놓았는데, ‘행복’은 곧 ‘거룩함’이기 때문이다. 교황의 바람은 ‘거룩함’, 곧 ‘성덕’의 소명이 다시 한번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시대는 공동 운명체로서의 자각이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안팎에서 한계 상황을 체험하면서 사람들은 혼자서 행복해질 수 없는 세상,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야 하는 세상임을 더욱 절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참행복’, 그리고 ‘참행복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죠. 그리스도인의 목적, 소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복에 참여하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닮아 가는 것’입니다. ‘참행복의 길’ 피정의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덕행 안에서 성장해 나가는 것.’”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하는 침묵
지난 9월 2일 첫 일요일 영성 센터를 찾았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 ‘내 안의 평화를 찾고자’, ‘나를 더 깊이 알려고’ 찾아온 이들 28명이 모였다. 성체 조배로 시작한 ‘참행복의 길’ 피정은 강의, 묵상 기도, 미사, 나눔 그리고 봉헌의 편지 등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
“강의, 식사, 그리고 짧은 휴식 시간 모두가 기도의 시간입니다. 모든 순간을 기도로 엮어 가시기 바랍니다.” 아가타 수녀의 안내에 따라 이내 깊은 고요의 세계로 들어간다. 모든 기도가 성령과 성모 마리아의 도움으로 시작되어 하느님 현존 안으로 들어간다.
피정 내내 침묵이다. “침묵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도록 우리 안에 모든 경솔한 소리를 잠잠케 하려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침묵은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그리스도의 덕행 안에서 성장해 가는 길
“‘참행복의 길’ 피정은 ‘영성의 기초 단계’로 시작된다. 이 단계에서는 하느님과 나 자신(인간), 피조물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 관계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 참행복과 덕행에 대한 올바른 인식, 믿음의 기도, 마리아론의 기초 등을 다룬다.
그런 다음 ‘성모 마리아의 덕행’을 습득하는 단계로 들어간다. 피정자들은 성모 마리아의 덕행을 바라보며, 배우고 묵상하면서, 자신의 모습과 삶을 성찰하고 변화시켜 나가게 된다.
“이 ‘참행복의 길’에서 우리는 ‘성경 속의 마리아’를 만나게 됩니다. ‘성경 속의 마리아’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강생에서부터 그분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드님과 온전히 결합하신 분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의 덕행들을 따라 한 발자국씩 걸어 나가는 이 여정 안에서 성모님을 닮아 가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더 일치된 삶을 살아가게 되리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덕행 안에서 성장해 나가는’ 이 피정의 여정을 피정자들은 언제나 성모 마리아와 함께 걸어가게 된다. 성모 마리아는 ‘덕행의 가장 탁월한 모범’으로서, 또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영적 모성과 중재자의 역할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행복을 가장 먼저, 가장 충만하게 체험한 선구자로서 이 길을 동반하고 도와주신다. 이것이 마리아니스트의 영성이라고 한다.
복자 샤미나드 신부는 이러한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 봉헌되어 충실히 사는 이의 행복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오, 하느님의 어머니께 특별한 방법으로 속해 있는 그 행복을 내가 당신에게 깨닫게 해 줄 수만 있다면….”
‘참행복의 길’ 피정은 결국, “성모님을 더 잘 알고, 사랑하고 본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덕행 안에서 성장해 나가는 길”이다.
영적 에너지의 저장소, 나의 아지트 같은 곳
피정이 끝난 뒤 피정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마음이 복잡할 때 참여한 첫 피정은 무척 힘들었어요. 그런데 수녀님의 강의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어요. 답이 그 안에 다 있었지요. 그 뒤로 여러 차례 피정에 참석했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편안했어요. 소풍 가는 아이처럼 피정이 기다려져요.
참행복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 자신까지도 주님께 맡겨 두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이 피정은 영적 에너지의 저장소라고 생각해요”(이향순 효임 골룸바).
“5월 피정에 처음 참여했습니다. 가까운 시내에 이런 조용한 피정 시설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어요. 바쁜 일상을 잠시 접고 몇 시간 만이라도 성경 말씀에 몰입하는 일정이 참으로 가슴에 다가왔습니다. 다시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피정에 참여하게 되었지요.
‘참행복의 길’ 피정은 삶에 지친 이들이 걸림돌을 정리하고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과 만날 수 있는 평화의 시간과 달콤한 휴식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김성하 요셉).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겼을 때 주보를 보게 되었고 바로 신청했어요. 기도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고민이 해결되었어요. 침묵 피정이 마음에 들었고, 분위기도 좋았어요.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참행복의 길인 것 같아요. 오로지 주님만 보고 조금씩 실천하며 살아갈 거예요”(신옥례 클라라).
어떤 피정자가 말했다, 서울 마리아니스트 영성 센터는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아지트 같다.”고. 또 그이는 “정신적으로 방황할 때 훌쩍 다녀올 수 있는 곳, 마음이 우울하거나 내적 어두움 속에서 빛을 찾고자 할 때 떠오르는 곳”이라고도 했다.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편히 기댈 수 있는 주님의 존재는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힘이 된다.
성모님을 사랑하고 본받는 삶, 예수 그리스도의 덕행 안에 성장하는 삶, 그 참행복으로 가는 길이 가까이에 있다.
[마음이 머무는 피정 -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 소사 성분도 은혜의 집] 나와 대면하는 시간 - 나를 만나는 휴가 피정
더웠다. 너무 더웠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는 찌는 듯 무더웠다. 한 달 넘게 계속된 불볕더위가 전국을 달구었다. 지난 칠팔월이 그랬다. 연일 최고 온도를 기록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폭염과 열대야를 피해 산과 바다, 계곡으로 휴가를 떠났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질문을 안고 피정의 집으로 ‘휴가를 떠나는’ 이들도 있다.
나를 만나는 휴가 피정
“직장 · 학교 · 군대 따위의 단체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쉬는 일. 또는 그런 겨를.”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휴가에 대한 정의다. 그렇지만 그런 사전적 정의로 휴가의 의미를 모두 표현할 수 있을까?
휴가는 누구나 기다려지고 또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말이다. 그래서 휴가 앞에는 보통 ‘행복한’, ‘신나는’, ‘즐거운’, ‘꿈같은’ 따위의 수식어가 앞선다. 그리고 그 길 끝자락에서 심신을 달래고, 마음의 여유와 평화 속에 다른 사람이 된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를 만나는 휴가 피정.’ 지난 7월 15일자 ‘서울 주보’에 실린 제목이 그랬다. ‘나’를 ‘만나는’ ‘휴가’라고, 그런데 그게 피정이라고….
“내가 가진 물건도 내가 만나는 사람도 다 지나가지만, 끝까지 나와 함께 머무는 대상은 나 자신입니다. 현재의 나를 받아들이며 내가 편안해져야 내가 나에게 또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고 관계 형성도 잘 할 수 있어요. 나에게 일어나는 갈등과 혼란은 내면에서 비롯하는데 문제를 밖에서 찾으려 하니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상태를 보면서 나와의 관계 너와 우리와의 원만한 관계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소사 성분도 은혜의 집(이하 소사 은혜의 집) 양선일 폴리나 수녀가 밝힌 피정을 마련하게 된 배경이다. “나 자신과 만나려면 일상을 떠나 휴가를 해야 하고 나와 잘 지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에 ‘나를 만나는 휴가 피정’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의 요청으로 시작한 피정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소사 은혜의 집은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옆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소사로 320번길 35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지역에 수녀회 분원이 설립된 것은 1949년 11월 무렵이다. 1979년 수도 생활을 하며 농사를 짓는 수녀들에게 인근 본당의 신자들이 찾아와 기도를 요청했다. 이를 계기로 수녀원에서는 함께 기도하고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는 영적 말씀을 나누기 시작해 1981년 소사 은혜의 집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1990년 5월 나지막한 동산과 잘 가꾸어진 정원으로 둘러싸인 지하 1층, 지상 2층의 아담한 피정 공간이 마련되었다.
수녀원에서 어떤 목적을 갖고 피정을 준비한 게 아니라 지역 신자들의 요구와 지역 사회에 문을 열고 더불어 살아가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피정’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요즘에는 위탁 피정을 주로 하며, 단체 피정을 위해 장소를 빌려주기도 한다. 그리고 지난해부터 해마다 8월에 단 두 차례 ‘나를 만나는 휴가 피정’을 진행한다.
하느님 안에서 나를 보라
지난 8월 4일 열린 올해 첫 ‘나를 만나는 휴가 피정’에는 전국에서 열여덟 명이 참여해 참자기와 대면하는 시간을 가졌다.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져 해답을 얻으려고”, “마음을 잘 다스리는 방법을 알려고”, “투병 중인 남편을 간호하고 지켜보는 게 힘들어서”, “영적으로 충전하려고” … 그렇게 다양한 사연을 간직한 이들이 피정에 참여했다. 혼자나 성당 동료와 같이 오기도 하는데, 제주에서 딸과 함께 피정에 온 어머니도 있다.
“쉬러 오셨지요? 편안하게 쉬러 오셨는데 할 게 많아요. 전해 드리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요.” 양 수녀가 첫 만남 시간에 한 말처럼 1박 2일 동안 진행된 피정은 꽤 많은 내용으로 채워졌다. 두 번의 강의와 나눔, 몸풀기와 산책, 그리고 개인 작업 등으로 쉴 틈 없이 진행되었다. 주일 미사를 아침 6시 50분부터 시작할 정도다.
“현재의 나에게 어린 시절의 환경은 무척 중요해요. 내 몸에 지난날이 다 들어있어요. 우리는 지금도 어린 시절의 환경에서 살고 있잖아요. 부모님이 하셨던 것을 지금 내가 답습하고 있다고 봐요. 그게 좋은 것일 수도, 나쁜 것일 수도 있지요. 피정을 통해 그걸 보게 해 주는 거예요.”
양 수녀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내면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늘 외면에만 머무른다고 한다. 현재에 살지 않고 허상에 살며, 나를 보지 않고 남만 본다. 나는 이미 나인데 다른 사람이 되려 한다. 나를 보는 기준이 너나 세상의 기대치가 되면 나는 늘 초라해지고 불행해진다. 세상의 기대치를 맞추려니 부족하다고 느끼며 현재가 힘들어진다.
“땅에 필요한 것을 얻으려는 노력, 몸을 위해 갖춰야 할 ‘스펙’을 쌓기보다 하늘에 있어야 할 것들을 얻으려는 노력, 마음과 영혼을 위해 갖춰야 할 ‘스펙’을 쌓는 일이 훨씬 더 소중하다.”는 말이다.
결국 지금 나에게 나타나는 많은 문제는 바로 나 자신에게서 온다. 그러니 자신의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알고, 지금 여기 나 자신을 보는 것이 해결책이다. 하느님 안에서 나를 보고 세상의 기대치와 다른 사람의 기대치만 내려놓아도 많은 것이 해결될 수 있다.
하느님 안에서, 자기 안에서 논다
휴가 피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느님 안에서, 자기 안에서 노는’ 것이다. 내가 하느님 안에서 사는 신앙인이라는 강의를 시작으로 진행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그렇다. 내 안의 결핍된 것과 채워야 하는데 채우지 못한 것을 보게 하고 지금 내가 어떤지 점검하게 한 뒤 나누기를 한다. 자신을 이야기하는 시간과 자신의 아픔을 털어 내는 시간이 꽤 길게 이어진다. 모두 함께 나누기 때문에 피정의 인원은 스무 명 안으로 제한한다.
“몸은 나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 생각해요. 지금의 나의 몸을 존중해야 해요. 음악에 몸을 맡겨 나를 풀어 보고, 어색하지 않게 내 몸으로 뭐든지 표현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몸동작으로 나를 자유롭게 하는 시간을 갖는다. 내가 나를 존중하고 칭찬하고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시간도 있다.
현재의 나를 보고자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자라온 환경과 부모에 대해 살펴보기도 하고, 예수님의 삶 안에서 우리를 보려고 예수님의 일생을 돌아보기도 한다.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하는 분별을 키우는 작업도 한다. 그리고 결론은 이렇다. ‘무엇이 되려고 하지 말라. 이미 나는 내가 되어 있다.’
“나의 과거가 있기에 지금의 나와 미래로 나가려는 내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을 알고 받아들이면 나를 총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날과 오늘, 그리고 미래의 자신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도 있다.
아무런 주제 없이 수녀원의 숲을 30분 정도 그냥 걷는 산책도 한다. 숲속의 산책으로 마음에 여유가 스며들고, 무심코 걷다 보면 정신도 맑아진다.
나 자신도 찾고 하느님도 만나는 피정
휴가 피정에 참여한 이들에게 물었다. “어떤 나를 만났는가?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쉬고 싶은 마음으로 왔어요. 직장과 자녀에게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간이었어요. 직장에서 짊어진 십자가가 너무 크고 무겁다고 생각했는데 피정을 마치며 내 십자가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깨달았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된 것 같아요.”
“지난날을 돌아보며 보고 싶지 않은 내 약한 부분, 외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그동안 힘든 일이 참 많았는데 하느님께서 옹기장이처럼 그런 시련을 통해 나를 빚어주신 것 같다고 생각하니 위로가 돼요. 하느님께서 용기를 내서 다시 도전해 보라고 힘을 주시는 것 같아요.”
“제목만 보고 무작정 신청했어요. 나를 둘러싼 상황들이 절망적이었거든요. 이 피정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 같아요. 오늘 이후 다시는 지난날의 상처를 꺼내지 않으리라 다짐해요. 앞으로는 내 인생을 살 겁니다.”
“모태 신앙으로 성당 안에 있는 게 익숙하고 좋아요. 나를 성당에서 살게 해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려요. 피정하면서 하느님과의 시간을 더 많이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이 투병 중이라 힘든 상황인데 하루 휴가를 주자는 기분으로 왔어요. 흐르는 음악에 몸을 맡기고, 무념무상으로 숲길을 산책하며,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느님께 하소연하는 시간을 보냈어요. 답답하고 어두컴컴한 터널을 혼자 걷고 있다가 시원한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오는 기분이었어요. 한층 편해진 내가 된 것 같아요.”
현대인들은 너무 바쁘고 시간에 쫓기듯 산다. 늘 사회적 지위, 소명, 상황으로 말미암아 ‘나’를 잊고 산다. 이런 때 사람들은 휴가라는 이름으로 자신에게 자유를 선물한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음식을 양껏 먹고, 걱정을 잠시 멈춘다. 휴가는 그런 것이다.
삶이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휴가로 에너지를 재충전하듯 피정도 마찬가지다. 잠시 쉬고, 기도하면서 새롭게 시작할 힘을 얻어갈 수 있다. 그게 나 자신도 찾고 하느님도 만나는 피정, 내면으로의 여정을 떠나는 피정이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나를 만나는 휴가 피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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