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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다시 보기] “폭행당하다”(마태오 11,12)와 “힘쓰다”(루카 16,16)
- 마태오 11,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당하고 있다(βιαζεται - 비아제타이). 폭력을 쓰는 자들이(βιασται - 비아스타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 루카 16,16: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는 요한까지다. 그 뒤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데, 모두 이 나라에 들어가려고 힘을 쓴다(βιαζεται).
βιαζεται(비아제타이)라는 동사가 마태오에서는 수동태로 “폭행당하다”라는 뜻으로, 반면에 루카에서는 능동태로 “힘쓰다”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성서 희랍어에서는 동사의 형태가 3가지로 구분됩니다: 능동태, 수동태 그리고 중간태. “중간태”란 동사 변화의 모양이 수동형태의 모습이지만, 그 뜻은 능동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단어를 마태오는 수동태로 “폭행당하다”로, 루카는 중간태로 “힘쓰다”로 즉 그 뜻을 능동태로 알아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오 11,12의 우리말 번역본 8개를 - (가톨릭 4개: 신약성서(1962년), 공동번역(1977), 200주년(1991) 새번역(2005); 개신교 4개: 관주(1961), 표준(1993), 개역(1998), 새번역(2001) - 모두 살펴본 바에 의하면, 개신교에서는 관주와 개역은 수동태로 표준과 새번역은 능동태로, 가톨릭에서는 신약성서(1962)를 제외하고는 모두 수동태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마태오에서 상기 구절은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피력하시는 대목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는 예언자이고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인물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라고 소개하는 대목에서입니다. 그와 예수님 자신이 하늘나라를 선포하시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훼방꾼들이 있고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방해꾼이나 훼방꾼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되는 것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적대자들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대사제들, 바리사이들, 율법 학자들, 혁명당원들 또는 예수님이 미쳤다고는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온 그분의 친척들(마르 3,21)이나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루카에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런 대목은 없고, 예수님의 어록들(16,9-18: 재물에 대하여,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 율법과 하느님의 나라,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 가운데 하나로 이 말씀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이 나라에 들어가려고 힘을 쓴다”에서 “들어가다”를 뜻하는 단어는 없고, 희랍어 본문을 직역하자면, “그것으로 모든 이가 힘쓰고 있다”입니다. 그것을 의미하는 것은, 앞에 나온 하느님의 나라이고, “으로”를 뜻하는 희랍어 전치사는 “εις(에이스)”인데, 이 단어는 방향을 가리키는 “으로”나 “향하여”라는 뜻도 있지만, 어떤 목적을 의미하는 “위하여”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기를 힘쓴다는 의미도 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힘쓴다는 의미로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 즉 천당이 아니라, (그것을 루카 23,43에서는 “낙원”(παραδεισος - 파라데이소스)이라고 묘사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알아듣는다면, “하늘나라가 폭행당하고 있다”는 말씀은 하느님의 복음 전파가 쉽지 않고 방해받고 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오와 루카를 함께 보면서, 그 말씀 선포자의 의도를 그 전달자들이 제대로 전달하는가? 또한 그 청취자들은 어떻게 듣고 이해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듭니다.
[성경에서 희년을 보다] 모압 여자 룻의 속량과 수숙혼(嫂叔婚)
룻기는 구약성경에서 드물게 이방인의 이름이 제목으로 붙은 책입니다. 이 책은 베들레헴의 기근을 피해 모압으로 이주했다가 남편과 아들을 잃은 나오미와 귀향하는 그를 끝까지 따라가 봉양한 모압 며느리 룻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고부의 운명을 반전시킨 배경은 옛 이스라엘에 존재했던 속량 제도입니다. 레위기의 희년법(25,23-31)에 따르면, 속량 제도는 ‘백성이 가난 등의 이유로 가산을 팔았어도 언제든 되살 수 있다.’는 것이 원칙입니다. 본인에게 능력이 없으면 형제나 친족이 대신 치러줄 수 있는데, 이런 대속자를 성경에서는 “구원자”(레위 25,25)라 칭합니다. 룻은 나오미의 조언에 따라 위험을 무릅쓰고 보아즈 곁으로 가서 “어르신은 저의 구원자이십니다.”(룻 3,9)라며 자신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룻기에는 나오미의 밭과 룻의 수숙혼이 모두 속량의 대상으로 나오는데(4,3-6), 수숙혼이 속량과 관련되는 일은 룻기에만 등장합니다. 수숙혼이란 신명기 율법(25,5-10)에 따른 것으로, 고인이 된 형제의 아내를 맞아들여 대신 자식을 낳고 망자의 이름을 이어주는 옛 관습입니다. 밭의 속량은 레위기(25,23-31)에 나오지만, 과부 속량법은 오경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명기(25장)의 수숙혼도 직계 형제 간의 율법으로, 고인의 형제가 수숙혼을 거절한다고 그 의무가 다음 형제나 친족에게 넘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신명기에 따르면(25,7) 과부가 나서서 시숙의 수숙혼을 촉구할 수 있는데, 룻기에서는 룻도 나오미도 보아즈에게 그런 촉구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밤을 틈타’ 보아즈의 구원자 권리 수행을 유도하는데, 보아즈가 스스로 하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룻에게는 보아즈보다 “더 가까운 구원자”(룻 3,12)가 있었으며, 그 역시 밭의 속량뿐 아니라 ‘과부의 속량’, 곧 룻도 구원해야 함을 모르고 있었습니다(4,5-6)
룻의 수숙혼은, 유다인 시어머니와 이방 며느리 사이에 형성된 특별한 고부 관계에 감동한 보아즈가 자비심으로 행한 일로 보입니다. 보아즈는 밭의 속량권에 룻의 수숙혼이 포함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친족으로서 도덕적 의무감에 둘을 묶은 듯합니다. 다시 말해, 법적 강제력은 없지만 그 임무를 행하여 고인이 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이름을 잇고 나오미에게는 며느리와 자손을, 룻에게는 보호막을 제공해준 것입니다.
상대에 대한 연민과 자비가 사랑으로 발전한 보아즈와 룻의 후손은 다윗 가문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인류를 위해 스스로 희생하신 구세주의 계보로 성화되기에 이릅니다.
[성경 73 성경 통독 길잡이] 갈라티아서
코린토 교회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갈라티아 교회 공동체에도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로 인한 혼란이 빚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따르지 않으면, 그중에서도 특히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이방인들에게 할례에 대한 규정을 면제해 주기로 한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것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지적하고 이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는 갈라티아 지역의 교회 공동체에 올바른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편지를 작성하였습니다.
먼저 1장 1-10절은 여느 서간과 마찬가지로 머리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를 향한 인사와 감사 없이 곧바로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사도직이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먼저 밝힌 뒤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1장 11절-2장 21절은 바오로 사도의 사도직과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전해줍니다. 그는 먼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다른 누군가에게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계시로부터 직접 전해 받은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서두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재 갈라티아에는 바오로 사도의 권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오로의 사도직을 예루살렘의 사도들에 못 미치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르치는 십자가 구원을 두고서도 율법과 계명의 중요성을 간과한 가르침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즉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이를 통한 하느님의 위엄을 선포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계명에 대한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한쪽 측면만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비판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율법 준수를 뜻하는 외적 표지인 할례의 중요성을 갈라티아 교회 공동체에 이야기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사도직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이며, 사도가 된 다음에도 기존의 사도들을 만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방문하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로써 자신이 사도들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며, 그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뒤이어 2장에서 바오로 사도는 예루살렘 사도 회의의 내용(이방인에게 할례 강요 금지, 완화된 음식 규정 적용)을 갈라티아 교회 공동체에 알려줍니다. 또한 안티오키아에서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할례 받은 사람들이 찾아오자 분란을 피하고자 잠시 자리를 피했던 적이 있었는데, 바오로는 이때 베드로의 행동이 마치 이방계 그리스도인들과 식사를 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오해를 살 수 있으며, 이는 그들에게 할례나 율법을 강요하는 것이 된다고 지적했던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결론으로 율법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 가르칩니다.
3-4장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경 본문을 풀이하고 여기에 담긴 의미를 밝혀주는 미드라쉬 방법을 사용해서 자신의 정당성을 밝힙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브라함을 언급하면서 그가 의로운 사람이 된 것이 율법을 잘 준수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들이 네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3,8)라고 약속하셨는데 여기서 모든 민족은 혈족으로 이어진 후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뜻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율법은 믿음을 따르는 삶일 뿐, 율법 자체가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는 모세의 계약과 율법은 본질적으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추구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어쩔 수 없이 율법의 지배를 받아야 했고, 율법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으며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을 통해 우리는 율법의 멍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뒤이어 우리 모두가 이스마엘과 같이 아브라함의 육의 자녀가 아니라 이사악과 같이 하느님 약속의 자녀이며 옛 계약이 아니라 새 계약을 이룬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다시금 하느님을 알지 못하던 예전 종살이로 돌아가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5장부터 6장 10절까지는 갈라티아 교회 공동체를 향한 구체적인 권고가 이어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으로 의로워지려고 하지 말고 성령을 통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자 노력할 것,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고 선포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말 것, 육의 행실을 따르지 말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아가면서 사랑으로 서로 섬길 것, 타인의 잘못을 보았을 때 비난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온유한 마음으로 도와줄 것을 당부합니다.
6장 11-18절은 맺음말로 머리말과 마찬가지로 인사와 당부 대신 앞선 내용을 요약하면서 율법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며, 할례받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이를 믿음으로써 주어지는 새로운 사람으로서 누리게 되는 은총을 자랑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갈라티아 교회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을 전하며 편지를 마칩니다.
[열두 소예언서의 지혜] 하바쿡 예언서
시대 배경의 이해
지난 호, 나훔 예언서에서 아시리아가 얼마나 무자비한 폭력으로 다른 민족을 억압했는지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시리아의 권세가 기울어 갈 무렵, 이집트와 신흥 세력 바빌론이 패권 다툼을 위한 힘겨루기가 있었습니다. 결국 기원전 612년에 수도 니네베를 무너트린 바빌론은 609년에 아시리아를 완전히 점령하고, 605년에 카르크미스 전투에서 이집트의 파라오 느코를 물리침으로써 근동의 패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로써 유다를 괴롭히는 나라는 아시리아나 이집트가 아니라 바빌론으로 교체되었습니다.
한편 기원전 609년에 이집트의 힘을 등에 업고 유다 임금이 된 여호야킴(기원전 609-598)은 나약하면서도 무자비한 독재자였습니다. 원래 친이집트 세력이었던 그는 바빌론에게 대항하기 위해 이집트와 동맹을 맺으면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지만 오히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바빌론의 견제를 당하게 되었고, 결국 기원전 605년 이후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꼭두각시가 되어 자국민들에게 폭정을 일삼았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정치권에서는 친이집트파와 친바빌론파 간의 세력 다툼이 벌어지던 시대였습니다.
하바쿡의 탄원과 하느님의 응답
유다를 억압하는 외부의 적 바빌론과 백성들에게 고통을 가중시키는 임금 여호야킴, 그리고 예루살렘 내에서 벌어지는 친이집트파와 친바빌론파의 정치 놀음이라는 다각적 불의와 고난 속에서 하바쿡 예언자는 두 가지 질문으로 탄원하며 하느님께 응답을 요구합니다. 악이 가득하고 불의가 만연한 현실에 관한 질문을 악을 부추기는 죄인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던지며 그 해답을 찾으려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상황을 개선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바쿡 예언자의 첫 번째 탄원은 “언제까지~”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 당신께서 구해 주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폭력이다!” 하고 소리쳐야 합니까?”(1,2) 분명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인간이 바라는 세상은 아름답고 정의롭고 선한 것으로 채워진 세상인데 “왜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처벌받지 않고 지속되는가?”를 질문형식으로 호소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당시 ‘칼데아인들’이라고도 불리던 바빌론을 일으켜 폭력과 횡포를 휘두르는 정치 지도자들과 권력자들이 장차 무서운 벌을 받게 될 것이라 응답하십니다. ‘표범보다 날렵하고 저녁 이리보다 민첩한 기병’(1,8 참조)처럼 강력한 위력을 과시하는 바빌론은 하느님 심판의 도구로 적격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바빌론은 하느님 심판의 도구로 적합했을까요? 만약 바빌론이 정도를 넘어선 폭력과 불의를 자행한다면 그것은 원래의 악을 새로운 악으로 대체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바쿡 예언자의 두 번째 탄원은 “어찌하여~”입니다. “당신께서는 눈이 맑으시어 악을 보아 넘기지 못하시고 잘못을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시면서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바라보고만 계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이를 집어삼켜도 잠자코 계십니까?”(1,13) 하느님께서 유다를 벌하기 위한 심판의 도구로 삼은 바빌론이 ‘배신자가 되어’ 아시리아처럼 다른 민족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사람들을 모두 낚시로 낚아 올리는 악한 파괴자’와 같은 착취와 학살을 저지르자, 예언자는 “어찌하여 하느님은 심판을 위해 악한 도구를 사용하는가? 어찌하여 의로운 이가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면서 악행을 묵인하는 하느님 때문에 괴로워하며 ‘보초처럼 성벽 위의 초소에 서서’(2,1 참조) 하느님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끈질기게 기다리며 버티겠다는 하바쿡을 향한 하느님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2,3) 하느님께서는 기다리라고 하시며, 곧바로 실현되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실현될 환시를 누구나 막힘없이 읽을 수 있도록 판에다 기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느님의 정의가 즉시 눈앞에서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언젠가 반드시 오고야 말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며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2,4)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며, 그 악으로 인해 의인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세상이 이렇게 불의 속에 숨을 헐떡이는데,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이런 고통을 침묵으로 허용하는 하느님이 어떻게 선하신 분일 수 있는가?”
하바쿡 예언서는 이 같은 문제에 구체적인 답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존중해야 할 신비로 남겨둘 뿐입니다. 그러면서 의로운 사람은 성실함을 간직하라고 가르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받아들일 수 없는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믿으며, 그분 약속에 희망을 걸고 기다리는 성실한 사람이 의인이라고 가르칩니다. 성실함이란 어떤 어둠과 고통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신뢰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기다려라.”하신 하느님의 응답은 낙담과 좌절 속에서 잠자코 있으라는 수동적 태도가 아니라 불의와 악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말씀에 충실하라는 역동적 태도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하바쿡 예언서는 다섯 가지 불행 선언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때가 반드시 도래할 것을 확신하며 기쁨에 찬 아름다운 노래(3장)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자신의 메시지를 마무리합니다. 희망찬 기다림이기에 예언자는 무화과나무가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하느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약속이 성취될 기미가 보이고, 정의가 실현될 증거가 보여서 기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믿고 희망하기에 기쁠 수 있다는 것이 하바쿡 예언서가 우리에게 던지는 지혜가 아닐까요?
인류 역사 안에서 불의와 악이 없었던 시대가 과연 있었을까요?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언제까지? 어찌하여?’라는 탄식과 함께 각자의 시대를 살아냈습니다. 이런 탄원이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허망한 탄식의 소리이지만,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는 희망찬 탄원이어야 합니다. 빛이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조차 희망을 잃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들어달라고 구하는 신앙의 탄원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는 사람의 기다림은 절대 지치지 않습니다.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26) 작은 두루마리(요한 묵시록 10장)
지금은 하느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시간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이 울려 퍼지기 전, 작은 두루마리를 펴 들고 있는 천사가 나타난다. 구름에 휩싸인 천사의 모습은 마지막 시대 메시아의 개입을 알리는 ‘사람의 아들’(다니 7,13 참조)과 닮았고 당신 백성 앞에 장엄히 나타나시는 하느님에 대한 서술과도 닮았다.(탈출 16,10; 1열왕 8,10 참조) 천사는 땅과 바다를 발판 삼아 서 있다.
천상과 지상의 공간적 구분은 천사의 형상 안에서 희미해지고, 희미해진 만큼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인간 역사 안에, 백성들 삶 한가운데 천상의 섭리가 천사를 통해 구현된다. 천사의 머리 위 무지개는 그래서 특별하다. 하느님과 인간 세상을 연결하는 계약의 상징인 ‘무지개’(창세 9,13 참조). 천사는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이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는 메타포로 등장한다.
천사를 둘러싼 시간적 구성도 매한가지다. 천사가 등장하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묵시 10,6 참조)이다. 우리말 성경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 번역했지만, 그리스말 본문은 ‘더 이상 존재할 시간이 없는 시간’을 가리킨다. 머뭇거리거나 기다릴 시간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 시간은 도대체 어떤 시간일까. 천사의 모습을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한다.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기다릴 시간이 없는 그 시간에 천사는 창조의 하느님을 호출하고 그분을 두고 맹세한다. 이 맹세는 마지막 때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을 두고 맹세한 대목과 겹친다(다니 12,7 참조). 다른 시간을 허용하지 않아 더 이상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그 시간은 사실 마지막, 완성의 시간이(어야 한)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시는 하느님께 맹세하는 천사는 마지막 종말의 때를 이야기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온다. 처음과 끝이 하나가 된다.
우리의 이야기는 ‘일곱 번째 나팔 소리가 울리는 시간’ 또한 소개하고 있다.(묵시 10,7 참조) 혹자는 ‘아직 다다르지 않은 종말의 시간’이라고 해석하고 종말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과도기적 시간이 우리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 관점으로 해석하다 보면 우리말 성경처럼 하느님의 섭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그 완성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식의 해석이 가능해진다. “일곱째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 소리가 울릴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선포하신 대로 그분의 신비가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묵시 10,7)
그러나 그리스말 본문은 ‘과거형’ 동사를 사용한다. 일곱째 천사의 나팔 소리가 울리는 장면은 이야기의 서술상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11장 15절에 가서야 등장한다), 그 시간을 물리적 시간의 미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이고 충만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곱째 천사의 나팔이 울리는 시간은 하느님의 섭리가 ‘이미, 완전히’ 이루어진 것을 가리키는 시간적 지표다.
요컨대, 천사가 외치는 이야기의 현재가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는 ‘진공(眞空)의 시간’이라면 그 시간이 바로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지는 시간이라는 것이고, 하느님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시간이라는 것이다. 사실 믿는 이들의 시간은 늘 ‘완성의 시간’이고 ‘마지막 시간’이다.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이나 다가올 시간에 대한 설렘은 믿는 이들의 몫이 아니다. 믿는 이들은 온전히 지금을 전부로, 마지막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래서 더 이상의 기록은 필요치 않다. 더 이상 읽어야만 하고 그래서 깨달아야 하고, 깨달음을 기반으로 무언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외침이나 환시의 시간은 무용하다.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마지막이고 완성된 시간을 살아갈 ‘주체’, 곧 ‘예언하는 주체’를 소개한다. 천사가 요한에게 제시하는 작은 두루마리는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히기 위해 등장한다.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두루마리를 먹는 행위를 두고 말씀을 받는 것, 그러니까 예언자적 소명을 받는 것으로 이해한다.(에제키엘서 2장 참조) 요한의 캐릭터는 본 것을 글로 옮기는 필자에서(묵시 1,19 참조)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로 변모한다. 글이 말로써 생명력을 얻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선포된다. 이어지는 요한묵시록 11장에 두 증인이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묵시 11,3.6.10 참조)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언자의 운명은 혹독하다. 작은 두루마리를 삼키는 것이 입에는 달지언정 배 속은 쓰리기 때문이다.(묵시 10,10; 예레 15,10.15-18 참조) 예언의 말씀은 고맙거나 기쁘거나 만족스러울 때도 있지만, 때론 반감과 대립의 대상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비난의 근거로 이용되기도 한다.(예레 20,3 참조) 예언의 말씀이 불러오는 반응의 양면성을 이해하기 위해, 오늘 우리의 이야기가 꾸며놓은 시간의 성격을 다시 되짚어 보면 어떨까.
마지막이라서 더 이상의 기대와 바람이 필요 없는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설렘이나 지금에 대한 비판이 아닐 것이다. 빗대자면, 생의 마지막에 내놓아야 할 마지막 말이 앞으로의 계획이나 세상에 대한 비판, 혹은 제 삶에 대한 후회가 전부일 수 없듯이 마지막에 외쳐야 할 예언의 말씀은 그저 마지막 꼭 해야 할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꼭 해야 할 그 말은 머뭇거림이 없어야 하고, 계산이 없어야 한다. 그 마지막 말이 예언의 말씀이라면, 그 마지막 말을 듣고 기뻐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실은 마지막을 살지 못하는 이들의 섣부른 편견 때문이 아닐까. 하느님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이 마지막 시간에 예언자들의 등장은 울려 퍼져야 할 말들을 늘어놓는 도구가 필요해서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두루마리를 삼킨 요한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려주지 않으며 요한묵시록 어디에도 요한이 설파하는 예언의 말씀을 찾아볼 수 없다. 요한은 그저 말씀이 체화된 한 ‘주체’가 된 것이고 그 주체가 있음으로 되었다고, 그것이면 충분하고 그것으로 마지막 시간에 하느님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것이라고 요한묵시록 10장은 우리에게 말하는 듯하다.
말씀의 사람, 예언자는 온 생애 매 순간, 마지막을 살듯 살아가는 사람이고, 삶의 모든 순간에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지길 제 몸으로 증거하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은 제 속으로 삼켜져 말씀 자체로 거듭나는 이가 예언자일 것이다. 예언은 늘어놓는 말과 언변이 아니라 살아내는 인격을 통해 하느님 말씀으로 선포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