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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정은과 푸틴이 모스크바에서 회담을 합니다. 쉬는 시간에 장난끼가 발동된 두 사람이 자기 경호원들 가운데 누가 더 충성심이 강한지 내기를 했습니다. 푸틴이 자기 경호원 이반에게 “이반, 여기가 20층이야 뛰어내려.”하고 명령했습니다. 이반이 창문을 열고 밑을 내려다보더니 떨어졌다간 뼈도 못 추릴 것 같습니다. 이반이 무릎 꿇고 “대통령님 왜 이러십니까? 제게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습니다.”라며 애원했습니다. 푸틴이 “그래 우리가 장난한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에 김정은이 자기 경호원 리강에게 “자네 뛰어 내려.”라고 명령하자 경호원은 “네. 즉각 순종하겠습니다.”라며 옷 벗고 구두 벗더니 창문을 열고 사정없이 몸을 날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푸틴이 급히 리강을 끌어안고 “자네 왜 이러나? 우리가 장난한 거야.”하고 말렸습니다. 그랬더니 리강은 “놓으라우. 내레 아내가 있고 아이들이 있지비.”라고 말합니다. 푸틴 경호원이나 김정은 경호원이나 처자가 있는 상황은 똑같지만 명령에 대한 현실적 대응, 반응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러시아와 북한의 지도자의 위상, 사회적 상황을 풍자한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2장 38절은 “그 때에”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그 때”는 오늘 본문의 전 내용 즉 “바알세불 논쟁”이 있었던 그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을 보며 사람들은 “어~ 이분이 아무래도 다윗의 자손인 것 같다”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려왔던 ‘메시야’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사건을 두고 그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라며 예수님을 비방합니다. 즉 예수님의 사역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사탄과 사탄이 싸우면 사탄의 나라는 망하는 것이고 자신이 한 일은 사탄의 일이 아닌 성령에 힘입어 귀신을 내어쫓고 성령에 힘입어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일이기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우리들 중에 혹 이런 질문을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무당이 굿을 하여 귀신을 쫓아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귀신이 귀신을 힘입어 행하는 일 아닐까요? 그렇게 보일 수 있을 듯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과 무당이 굿을 해서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은 엄연히 시작이 다르고 과정이 다르고 궁극적인 목적이 다릅니다. 무당은 정말 귀신을 힘입어서 굿을 하고 귀신을 쫓아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권위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무당은 귀신과 내통하여 사기로 사람들에게 귀신을 내쫓는 것처럼 보여지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 귀신을 내쫓는 권세가 있는 것으로 가장하여 결론적으로도 귀신을 섬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시고 실제적으로 귀신을 완전히 내쫓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귀신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만드는 목적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무당의 행위와 예수님의 사역은 시작이 다르고 과정이 다르고 목적이 다릅니다. 귀신이 하는 짓은 짜고치는 고스톱같은 것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완전한 회복의 역사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왜 바리새인들은 이런 비방을 할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사건을 해석하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사역을 보면서 어떤 것으로 우리의 신앙가치관을 채워야 할 지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가르쳐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가 예수님 사역을 통해 깨달아야 할 신앙, 우리 심령속에 채워야 할 신앙을 분명히 발견하고 제대로 된 신앙으로 우리 속을 채워 바른 신앙생활을 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속에 채울 신앙, 첫째는 요나의 표적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9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종교지도자들로서 겉으로는 거룩한 척했지만 실제로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맞으면 표적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 전에 수 없이 많은 표적을 보여줬음에도 다시 또 다른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 만큼 그들은 가능한 믿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보이는 것도 믿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부를 때 항상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랍비’라는 호칭입니다. 위대한 스승을 부를 때 쓰는 용어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간혹 학교 선생님이나 모르는 사람들을 편하게 부를 때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런 ‘선생님’이라는 호칭과 성경의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가 쉽게 이해하려면 뭔가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뭔가 특별한 길을 가르쳐주시는 ‘현자’, ‘지식인’, ‘박사님’ 등을 부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바른 이해가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보이기에도 예수님은 특별하신 분은 맞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2장 39절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전반적 하나님의 평가일 것입니다. 구약성경 예레미야나 에스겔을 보면 하나님을 남편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아내로 비유합니다. 한 남편의 아내는 남편만 생각하고 남편과만 사랑을 나누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한 남편의 아내가 자신의 남편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남자에게 감정을 빼앗기고 성적인 교감을 나눕니다. 자신의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그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빼앗긴다면 그건 범죄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아내임에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사랑하고 숭배하였기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허구의 신을 신이라고 생각하거나 각종 조형물을 만들어 그것을 신이라고 생각하고 섬기며 절하고 복을 비는 이스라엘 사람이 악하고 음란한 범죄자였습니다. 이런 일은 마치 오늘날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은 큰 죄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조용기 목사님이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으로 시무하시고 계실 때 그 교회의 한 권사님이 목양실로 목사님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권사님은 “목에 후두암이 생겨 지금 목소리도 안 나오고 암투병하면서 몸이 너무 힘들다”고 말하였습니다. “목사님께서 기도해 주면 낫겠다”라며 목사님을 찾아와 기도부탁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안수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했어도 바로 그 자리에서 낫지는 않았겠죠? 뭐 예수님도 아니고... 며칠 째 권사님이 찾아와 “목소리도 나아지지 않고 병원에서도 진단이 그대로입니다”라며 목사님을 계속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께서는 ‘권사님 주님을 믿으셔야 낫지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권사님이 하시는 말씀은 ‘목사님, 병이 고쳐지고 증상이 없어야 믿죠.’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병도 치유되지 않고 계속 쉰 목소리만 나는데 어떻게 믿음이 생길 수 있냐?’는 뜻입니다. 이 말을 듣고 목사님께서는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 권사님께 숙제를 냈다고 합니다. “펜과 공책을 가지고 오산리금식기도원 찾아가 골방기도실에서 계속 기도하면서 ‘주님이 내 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라는 글을 공책에 천 번 써서 다 쓴 공책을 가지고 오라”고 했답니다. 얼마 뒤 그 권사님이 공책을 들고 “목사님, 목사님”하면서 헐레벌떡 뛰어옵니다. 그 이유는 숙제 다 해서 기뻐서 뛰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그 권사님 목소리를 듣고서는 “권사님 목소리가 어떻게 그렇게 쩌렁쩌렁하고 맑습니까?”라고 했더니 권사님이 “그러게요, 내 목소리가 왜 이렇게 맑지?”. 생각해 보니 쉰 목소리도 안 나오고 목도 하나도 안 아프고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보니 실제로 병이 다 나았다는 소견을 들었습니다. 글을 쓰다가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표적을 보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으면 보여지는 것이 표적입니다.
요한복음 20장 30,31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선생님’ 정도로 생각해서는 구원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2장에서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보여달라’는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노라’라고 하십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있다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동안 무덤에 묻혔다가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해 예시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라고 하신 말씀은 세상의 어떤 신비롭고 놀라운 사건보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시는 것이 진짜 표적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현상적 기적을 표적으로 찾아다니지만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모든 일이 가장 위대한 기적이며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표적입니다. 인류 역사상 이 땅에 있었던 최고의 사건은 이 땅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을 언급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의 부활을 구약에서 미리 보여주신 상징적 사건입니다. 신약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속의 완성을 의미하는 최고의 기적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신구약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표적이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에 대해 온전히 깨닫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요나의 표적이 최고의 표적인 것을 알고 죽었다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님이 진정한 구원자이심을 믿을 때 우리에게 날마다 예수님의 표적이 있음을 깨닫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속에 채울 신앙, 둘째는 말씀에 대한 사모함입니다.
마태복음 12장 42절입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태복음 12장 4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적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갑자기 솔로몬 통치기에 남방에서 찾아온 여왕, 우리가 흔히 ‘시바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여인의 방문을 말씀하십니다. 성경에는 시바의 여왕이 아닌 ‘스바의 여왕’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바’가 어디냐? 어떤 학자는 ‘에디오피아’라고 하고 어떤 학자는 ‘예멘’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그 먼 나라에서도 참 지혜로운 말씀을 사모하며 솔로몬에게 달려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0장에 보면 솔로몬왕 통치기에 아프리카대륙 남쪽에 위치한 스바에서 여왕이 찾아왔습니다.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 지혜를 들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솔로몬의 지혜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번제 제사를 드린 후에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시겠다고 했을 때 솔로몬은 지혜를 요구했습니다. 그 지혜는 역사상 전무후무할 정도로 위대한 지혜였습니다. 솔로몬 이전에도 그런 지혜자가 없었고 그 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쓴 글, 솔로몬이 행한 행위, 솔로몬이 말 한마디가 전 세계에 퍼져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혜자 중 한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때 남방 스바를 다스리고 있던 여왕이 그를 만나보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스바의 정확한 위치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찾아오기 쉽지 않은 먼 거리의 나라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 스바에서 여왕이 솔로몬의 소문을 듣고 멀리서 예루살렘까지 왔는데 솔로몬의 지혜의 말씀을 듣기 위해 왔습니다. 그 때 솔로몬의 지혜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시편 119편 2,3절입니다.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참으로 그들은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사도행전 17장 11절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의 성경말씀에 대한 훈련을 칭찬하였습니다. 그들이 말씀에 얼마나 진심이었는 지를 사도행전 17장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스바의 여왕을 비유하며 이스라엘 신앙을 책망하신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저와 여러분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 시대 수 많은 예배를 드리고 엄청나게 많은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속 깊은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며 성경에 추가된 지혜의 책들이 무수히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 영상매체, 언론매체, 인터넷정보를 통해 자칭 타칭 한국 최고라고 말할 수 있는 목사님들의 성경공부와 설교를 듣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성경적 지식을 습득하고도 변화되지 않는 우리의 신앙, 아직도 유치한 수준에 머물고 있는 우리의 영적 수준들, 걸핏하면 낙심하고 시험들어 넘어지고 그것도 만족하지 못해서 어디에 또 다른 진리가 있지 않을까? 기웃거리는 우리의 행태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그럴까요? 정말 말씀에 대한 간절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포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스바여왕을 언급하셨을까요? 놀라운 지혜의 말씀이 선포된다는 그 한 마디에 그 멀고 험한 길, 지금의 형편으로도 쉽게 가기 힘든 그 길을 영광스러운 예배, 놀라우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간절함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간절함으로 말씀묵상을 하고 있는 지 우리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너무 쉽게 접하는 설교, 성경공부, 인터넷 예배를 드리며 육신적인 편안함만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 어떤 댓가를 지불하고 어떤 몸부림을 치며 살아가고 있는 지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편 81절입니다.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스바 여왕의 지혜에 대한 사모, 말씀에 대한 간절함을 비유하시면서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신 걸까요? 그것은 어떤 표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기적을 만나든, 어떤 상황을 만나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요나의 표적을 통해 변화된 니느웨 백성, 스바 여왕이 발견한 하나님의 지혜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말씀을 전하는데도 믿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예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과 스바여왕처럼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는 요나보다 크시며 솔로몬보다 크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간절함이 있으십니까? 정말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기적만 볼 것이 아니라 말씀을 사모하며 진리를 간절히 추구하며 참 지혜를 깨닫기를 소망하며 말씀을 통한 역사, 말씀이 우리를 치유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속에 채울 신앙, 마지막 셋째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입니다.
마태복음 12장 44절입니다.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은 ‘빈집 비유’로 마무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며 예수님께서는 왜 빈집 비유를 말씀하실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빈집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더러운 귀신이 들어가 살만한 사람을 찾아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닙니다. 이곳저곳 헤메어 다니다가 옛날 쫓겨나기 전에 살았던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의 속은 비었고 집수리도 되었고 청소도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귀신은 다른 악한 일곱 귀신까지 데리고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사람은 이전에 한 귀신이 지배할 때보다 더 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평가하시죠.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이렇게 되리라”라는 단어는 미래형으로 쓰여 있습니다. 성령을 모독하고 예수님을 거역한 사람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거역하면 어떤 존재로 살아가는 지를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의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완악한 심령들을 지적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처음에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살아보려고 했지만 결국 점점 형식화된 율법주의에 틀에 매여 오히려 더 많은 죄를 짓고 더 악하게 사람들을 판단하며 결국은 자신들의 죄는 잊어버리고 타인의 죄를 더 크게 만들어 처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함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이라고 불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킨다’라고 생각하면서 그동안 그들이 만들어놓은 전통을 토대로 형성된 율법적 편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과 성령이 역사한 이적마저도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행한 것’이라고 모독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는 신앙과 교리는 악한 영의 지배를 받게 되며 결국은 인간의 영혼을 파멸케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빈집 비유’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지성적으로 윤리적으로 사상적으로 양심적으로 잘 청소되고 수리가 되어 있다 할지라도 내 인생의 집에 예수님께서 들어와 계시지 않는다면 악한 귀신의 입주를 허용할 수 있다고 사실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어떤 존재의 지배속에서 상태가 바뀔 수 있음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4~36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로버트 멍어(Robert Boyd Munger)라는 사람이 쓴 “My heart Christ’s home”「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이란 책이 있습니다. 책의 저자는 자기 마음을 아무리 깨끗하게 하려고 몸부림해도 날마다 때가 묻고 먼지가 쌓이고 더러워지는 것을 어느날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예수님 오셔서 아예 내 집을 다스려 주시옵소서.’ ‘내 집의 주인이 되어 주시옵소서.’ ‘서재를 주님 앞에 내어 드립니다.’ ‘주방을 주님 앞에 내어 드립니다.’ ‘침실을 주님 앞에 내어 드립니다.’ ‘벽장 구석 구석 모든 공간을 예수님께 다 내어 드립니다.’ 예수님과 함께 서재로 갑니다. 서재는 집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조종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무관한 책들이 많습니다. 보지 말아야 될 영화도 있습니다. 서재가 너무나 어지럽고 지저분하여 예수님께서 그것을 다 정리하고 성경과 말씀으로 서재를 채우기 시작합니다. 그의 생각은 맑아지기 시작했고 마음은 깨끗해 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방으로 옵니다. 주방은 식욕과 욕망의 방으로 집에서 가장 큰 공간입니다. 식탁에 차려진 메뉴는 돈과 증권과 명예와 지식과 인기와 학력과 자기를 높이고 자랑하고 싶었던 메뉴로 꽉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드실 수 없었습니다. “얘야, 이것을 치우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으로 내가 이곳을 채워주마.” 주님께서 식탁을 새롭게 채워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주님을 기뻐하는 묵상으로 그 식탁을 가득히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침실과 벽장 등 구석구석을 예수님의 가치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이 기뻐하는 것으로 가득히 채워졌을 때에 “My heart Christ’s home” 내 마음은 예수님의 집으로 변화되기 시작한다는 내용이 핵심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주인되어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세상의 어떤 것들로 채우지는 않았습니까? 내 마음이 비어있다고 한다면 세상에서 어떤 권력, 명예,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거기에 귀신이 찾아들고 내 인생은 귀신의 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탄마귀가 우리 속에 들어와 있으면 우리는 외형으로는 거룩한 척, 외모로는 아름다운 척 보여줘도 우리 자체는 지저분한 몸이고 파멸을 향해 걸어가는 죽음으로 뒤덮인 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몸에서 악한 영을 쫓아내 주시면 우리 인생은 리셋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새로 청소한 집, 새로 수리된 집입니다. 그 때 우리는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완전히 새로워진 우리의 심령에 우리 주님께서 들어와 사실 때 우리는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안전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신 것을 느끼기 원한다면 우리 믿는 자들은 날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살아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말씀을 읽고 조금이라도 항상 기도하며 조금이라도 항상 찬양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께서 내 속에 살아계심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예수님께서 내 속에서 살아계시고 주인으로 역사한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이 나의 주인인 듯, 세상의 모든 사치와 방탕과 음란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물질과 권력과 온갖 욕망이 나를 지배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냐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의 욕심을 비우고 우리의 온갖 세상적 갈망을 내려놓고 우리는 비어있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비어있을 때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어 주시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시면 우리의 마음에 참된 쉼이 임하고 참된 능력이 역사하고 참된 지혜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29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정말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이 되어 참 신앙인의 모습이 나타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주인된 인생은 멸망의 인생이고 사탄마귀가 틈탈 인생이 될 것입니다. 내가 주인된 것을 내려놓고 우리 주이신 예수님께서 나의 인생을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며 항상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시는 역사를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우리는 어떤 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왔습니까? 참 신앙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오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참 구원을 경험하며 살아왔습니까? 혹여나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책망하신 것처럼 어떤 기적을 볼 때만 믿고 예전의 은혜는 잊어버리며 살아가지 않았습니까?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닥치면 불신앙으로 돌아갔다가 또 해결되면 그제서야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살아가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음란한 세대’라고 말씀하시면서 요나의 표적과 남방 여왕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요나의 전도를 받은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와 솔로몬의 지혜를 경험하며 믿음을 가지게 된 남방 스바 여왕의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요나보다 솔로몬보다 크신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며 기적을 보여주셨을 때도 깨닫지 못하는 세상의 악함을 책망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상적 지식에 매이고 세상적 욕망에 미여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더럽혀진 신앙가치관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척 하지만 세상적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심령속에 이제 예수님이 주인되신 예수님의 집으로 우리의 생각, 우리의 생활, 우리의 말과 행동이 되시기를 소망하며 진정 저와 여러분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빛과 소금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