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을 담근 날
박원자
어머니와 고향이 그리울 땐 구수한 된장국이 떠오른다.
특히나 서리가 내리는 초겨울 문턱의 시래기와 서리 맞은 어린 호박잎과 줄기로 끓여주셨던 된장국은 그 어느 고깃국보다 더 맛이 있었다.
어린 시절 언제나 메주를 쑬 때마다 어머니가 들려주셨던 말씀
반세기도 전에 오갈 데 없는 장 씨네 가족들이 임시로 머물도록 내어 주었던 사랑채
거기 서까래에 메주를 매달아 띄우는데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사람들이라 그 메주를 밤마다 조금씩 야금야금 먹어버려 그 해에 메주를 다시 쒔다는 어머니 말씀이 장을 담글 때마다 생각이 나곤 했다. 그 시절은 각 가정마다 장독대에 간장과 된장 항아리를 보고 그 집 살림을 가늠했다고 하는데 우리 집은 장과 된장을 풍부히 담그는 그래도 여유 있는 집이었다.
우물 옆에 넓게 자리 잡았던 우리 집 장독대가 눈에 선하다.
금년에는 우리 가족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는 맛있는 장과 된장을 담그고 싶어 이름 있는 여러 장인들은 어떻게 하는지 검색을 해 보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세련된 새로운 방식보다 어느 조그만 사찰의 여자스님의 촌스러운 방법이 내게 와 닿았고 그게 바로 어머니가 하시던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촌스러운 방법을 택했다.
어제는 장을 담근 지 53일이나 되어 된장과 장을 가르지 않으면 안 되는 날이었다.
메주는 전통방식에 가깝게 잘 띄운 집이라고 우체국 임 여사가 소개해 여섯 덩이를 사서 담갔는데 아니라 다를까 중간중간 우러나온 빛이 아메리카노 커피의 중간색처럼 곱게 우러나왔고 맛도 어렸을 때 먹었던 장맛에 가까웠다. S 언니께 장맛이 좋다 하니 그건 메주가 잘 띄워져서 그렇다는 것이다. 작년의 장맛과는 확연히 달랐다.
S 언니가 고추씨 가루를 넣으면 더 맛있다고 하여 읍내 방앗간에 가서 고추씨 가루를 사려 하니 김장철이 지나버려 없다고 해서 돌아서려다 저번에 성당 교우라고 했던 사람이라 하니 그 아주머니 정색을 하며 반기고 모자와 마스크를 써서 몰라봤다며 없다던 고추씨 가루를 그냥 주는 것이었다. 돈을 아무리 준다 해도 사양을 하기에 못 이기는 척 받아 왔지만 다음에 읍내 나갈 때 과일이라도 사다 주려고 한다.
된장을 가르기 전에 콩 3Kg을 물에 잘 불려 압력솥에 삶아 잘 으깨고 천일염과 메주가루, 물에 불린 다시마 . 고추씨 가루, 비닐봉지를 준비했다. 이번만큼은 남편이 무거운 것들은 옮겨주는 수고도 해주며 여느 종갓집처럼 씨 간장을 만들자 고도 했다.
잘 불리어진 메주를 건져 위에 재료들을 넣고 적당히 간장과 소금을 넣어 짤박짤박하게 버무린 다음 시루떡 앉히듯 조심스럽게 된장독에 넣었다. 된장 위엔 소금을 듬뿍 부리고 그다음은 다시마로 덮고 다시 비닐봉지로 덮고 소금을 뿌린 다음 덮개를 덮고 드디어 된장 담그기를 끝냈다. 다시마를 덮은 이유는 어떤 분이 된장과 비닐봉지가 맞닿으면 기분이 좀 그래서 다시마로 먼저 덮는다는 말이 일리가 있어 보여 그렇게 했다.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8 년,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1년이 지났지만 두 분 어머니께서 끓여주셨던 된장국은 늘 향수처럼 그립기만 하다.
어젯밤 딸에게
“엄마 오늘 된장 담았다.” 하고 전화하니
“그래? 엄마가 만든 된장국 정말 맛있어.”
“이번에는 더 맛있을 거야.”
나름 좋은 간장과 된장을 만들고 싶었던 것은 우리 딸이 오랜만에 와서 끓여준 된장국을 먹으며 정말 맛있다고 한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된장의 구수한 맛은 어머니의 맛이기 때문이다.
2021 .4. 17
첫댓글 선생님의 장독대가 부럽습니다.
태평양 건너 이민의 삶은 된장을 담그기도 어렵지만 된장국이나 된장찌개는 끓여 먹기는 더 어렵답니다.
선생님의 '된장 담근 날'은
언제 어디서나 된장국과 김치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어머니의 나라 대한민국을 더 그립게합니다.
주바라기 님 . 정말 반갑습니다. 제가 하늘빛 너의 향기에 남긴 글을 읽고 너무 부족한 저에게 그런 마음을 주시니 몸둘바를 몰랐답니다. 조만간 폰에 저장하여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방금도 아는 언니와 통화하며 주바라기 님이 쓰신 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답니다.
인터넷이란 이렇게 멀리 계신 분과도 순식간에 소통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요. 졸 글을 읽고 잠시나마 향수를 불러일으키셨다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평안함으로 가득 채워진 아름다운 남은 시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