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57
8월19일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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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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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TreCQKtRs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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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장 아름다운 예복은 깨끗한 마음과 흠 없는 양심, 진실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는 우리 인간 각자를 향한 하느님의 호의(好意)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성대한 구원의 잔치를 손수 마련하셨습니다. 산해진미를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놓으셨습니다. 잔치의 여흥을 돋울 재미있는 프로그램도 세팅이 되었습니다. 한명 한명에게 전달할 푸짐한 선물도 준비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초대는 하느님으로부터의 초대였습니다. 교황청이나 청와대, 백악관으로부터의 초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영광스럽고 황송한 초대임에도 불구하고,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의 태도가 심드렁했습니다.
골프 약속이 있다, 가족 여행이 미리 잡혔다, 텃밭을 가꾸어야 한다, 특근을 해야 한다며 다들 손사래를 쳤습니다. 잔치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의 심정이 어떠할지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야말로 진노(震怒)하셨습니다. 불벼락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공ㄹ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오 복음 22장 8~9절)
죽음의 나락을 향해 걸어가는 당신의 자녀들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깝게 여겨졌던 하느님 아버지께서 오늘도 애타는 마음으로 구원의 초대장을 지속적으로 보내고 계십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강렬한 구원 의지에 끝끝내 응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오늘 우리들로 인해 그분의 마음은 그야말로 산산이 찢어질 것입니다.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를 손님 없이 치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임금은 다른 사람들을 부르러 종들을 보냈습니다. 종들은 거리로 나가서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아무나 만나는 대로 데려왔고 잔칫집은 손님으로 가득 찼습니다.
잔칫집에 와있다고 해서 모두 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몸은 잔치에 와 있지만 잔치에 함께 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 즉 마음은 세상 일로 가득한 악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는 결국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현세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들의 종점은 마지막 날에 극명하게 구분될 것입니다.
결국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큰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잔치에도 참석해야하겠지만, 악한 사람이 아니라 선한 사람으로 잔치에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잔치에 참여한 이상 잔치에 걸맞은 예복을 잘 차려 입어야겠습니다.
어쩌면 거룩한 성찬례와 그 성찬례가 실현되어야 하는 고통중인 이웃들의 삶은 또 다른 의미의 혼인잔치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예복은 깨끗한 마음과 흠 없는 양심, 진실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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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YzW7NP9Jy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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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하느님임을 모를 때 벌어지는 일>
오늘 복음에서 임금은 아들의 혼인 잔치를 위해 많은 이들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돈을 버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임금의 사랑을 거부한 것에는 ‘사랑’을 자기 마음대로 정의한 원인이 큽니다. 자기 기준으로 임금의 사랑을 정의한 것입니다.
초대에 응했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임금이 그들을 사랑하여 초대하였지만, 그는 자기가 와 줘야 잔치가 잔치다워지니 임금이 자기가 필요해서 초대했다고 믿었습니다. 이 사람도 임금의 순수한 사랑을 자신의 변질된 사랑의 기준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순수한 사랑 자체이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우리 자아에서 나오는 독, 곧 세속-육신-마귀의 욕구 때문에 변질됩니다. 그런데 만약 자기 기준으로 사랑을 정의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사랑? 결국은 다 자기 행복을 위한 거야!”
이렇게 되면 하느님의 순수한 사랑도 다 이기적인 사랑으로 여기고 그래서 자기를 초대하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해줌이 하느님께 이용당해 준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렇기에 사랑을 규정한다는 말은 하느님을 내 기준으로 심판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진리와 선함, 그리고 사랑은 순수한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기준으로 규정할 때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이 만든 수준의 우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수한 사랑의 초대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순수한 사랑이 우리의 변질된 사랑을 심판하고 규정할 수 있지, 우리의 변질된 사랑이 그분의 순수한 사랑을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쉰 포도주만 먹은 사람이 어떻게 값진 포도주를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조금씩 덜 쉰 포도주를 마시며 참 포도주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초대에 온전하게 응답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무척 가난한 사람이 소금장수를 해서 먹고살았습니다. 그는 벚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다녔는데 하도 오랫동안 쓰다 보니 무슨 나무인지 모를 정도로 반들반들 닳았습니다. 하루는 무거운 소금 짐을 짊어지고 지팡이에 의지해 산을 오르다가 중턱에서 휴식도 취할 겸 주먹밥을 먹는데 그 아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얼까 살펴보니 무덤 주변에서 하얀 여우가 웬 해골을 닥닥 긁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우가 그걸 뒤집어쓰는 순간 할머니로 변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상하게 여긴 소금장수는 지팡이를 들고 몰래 여우 뒤를 밟기 시작했습니다. 여우가 큰 마을의 혼인 잔치가 열린 집으로 들어가자 소금장수도 밥을 빌어먹을 핑계로 따라 들어갔습니다. 얼마 뒤 가마를 타고 도착한 신부가 안방으로 들어갔는데 잠시 후 안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비명소리가 났습니다. 소금 장수가 안을 들여다보니 할머니가 신부의 배를 쓰다듬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말릴 틈도 없이 작대기로 할머니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 말리는데도 소금장수는 계속해서 할머니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잠시후 할머니가 쓰러져 죽으면서 꼬리가 희끗희끗한 여우로 변했습니다. 여우가 죽고 신부가 살아나자 사람들은 소금장수를 칭찬했습니다.
“이보시오. 당신은 어떻게 저 할머니가 여우인 것을 알았소?”
그러자 소금장수가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다 몇 대째 내려온 이 지팡이 덕분이지요.”
그러자 동네에서 크게 농사를 짓는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 지팡이를 내게 파시오. 값은 후하게 쳐 드리겠소.”
소금장수는 이것으로 먹고산다며 안 팔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물러서지 않고 큰돈을 쥐여주며 뺏다시피 소금 장수에게 지팡이를 샀습니다. 부자 농부는 지팡이를 써먹을 길을 찾는데 마침 어디서 혼인 잔치를 한다는 얘기가 들려왔습니다. 그가 그 집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데 방에서 신부가 배 아프다고 야단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가 병을 볼 줄 안다면서 들어가 보니 신부 옆에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가 앉아있었습니다. 부자 농부는 “이놈의 여우 죽어봐라!” 하면서 할머니를 마구 쳤습니다. 잠시 후 할머니가 죽었는데 보니까 여우가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생사람을 잡은 부자 농부는 한순간에 홀랑 망하고 말았습니다.[출처: ‘옛이야기로부터 배우는 성공법칙’, 유튜브 채널, ‘북올림’]
사실 ‘지팡이’가 없었다면 소금장수는 그 산 위까지 오를 수 없었고 해골을 뒤집어쓰는 여우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소금장수가 할머니가 여우인 것을 알게 된 것은 지팡이 때문인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 지팡이는 소금장수가 사용할 때만 효과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역사와 존재가 다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부자 농부는 단지 지팡이를 자기 관점에서 규정하여 자신도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소금장수까지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사용하실 때야만 온전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규정한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믿는 사람은 자기 수준 안에서 그것을 휘두르기 때문에 결국 타인에게 해를 끼치게 됩니다. 물론 하느님 사랑도 자기 기준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그 초대에 응하지도 않고 응했더라도 그분에게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사랑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얼마나 많은 폭력이 있습니까? 아이들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도,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다 그 근본 에너지는 자신들이 규정한 사랑에서 나옵니다. 규정할 수 없기에 자기 마음대로 규정하면 된다는 식의 교만이 세상을 망치는 것입니다. 일단 규정하면 발전이 없습니다.
겸손하게 배우는 자세로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순수한 사랑이나 진리, 선함이라 여기고 그것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배워나가는 처지에서 궁금해해야 합니다. 사랑이고 선함이고 진리이신 분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몸에서 빛이라도 나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물고기가 바다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선생님!’이라고 부른 막달라 마리아처럼, 사랑은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맛보고 배워가는 것입니다. 좋은 포도주를 먹을수록 나쁜 포도주는 맛이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사랑하시는 것을 배워가는 것이 사랑의 전문가가 되는 길입니다. 소금장수와 지팡이가 하나인 것처럼 그리스도와 사랑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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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2,1-14 : 혼인 잔치의 비유
주님의 잔칫상은 그 자리에 참석하고자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이 잔치에는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모두 참석한다.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혼인 잔치에 비길 수 있다. 그분은 당신의 종들을 보내어 당신의 친구들을 잔치에 초대했다. 처음에는 예언자들을 보내셨으나 오려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사도들을 보냈다.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 버렸다. 밭으로 간다는 것은 세상일에 몰두하는 것이고, 장사하러 가는 것은 세상에서의 활동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다른 것에 몰두해 있기 때문에 임금이 차린 혼인 잔치에 가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초대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를 전하는 이들을 박해하기까지 하고, 더러는 죽이기까지 하였다.
임금은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들을 불살라 버렸다.”(7절) 임금은 살인자들을 없애고 박해자들을 죽여 버린다. 또 그 고을을 불살라 버린다. 그들은 지옥의 영원한 불속에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오지 않았다고 잔치가 아무도 없이 치러질 수는 없다. 그래서 임금은 종들에게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8-9절)
종들은 거리로 나가서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고, 잔치는 손님들로 가득 찼다. 이 잔치의 모습은 악인들과 선인들이 모여 있는 현세의 교회를 의미한다. 이 잔치에 참석한 삶들을 둘러보려고 임금이 왔다. 임금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한다. 여기서 혼인 예복은 사랑이다. 믿기는 하지만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사람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그분이 지니셨던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13-14절) 손과 발을 묶는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바깥 어둠은 거룩한 영광과 완전히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옷은 의로움의 옷이며 준비를 갖추지 못하면 많은 사람 가운데 추궁당하고 손발이 묶여 바깥으로 던져진다.
또한 하느님의 부르심이란 혼인잔치와 같은 기쁨 넘치는 만남의 초대인 것임을 우리는 생활 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초대에 응한다는 것은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영원을 내다보며 기쁨으로 바꿀 줄 아는 믿음의 자세를 보이는 것을 뜻할 것이다. 우리 마음 안에서 이미 언제나 긍정적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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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십여 년 전 위령의 날 미사에 참례하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에게 인사를 더 잘하고 싶어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거울 보고 웃는 연습도 하였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반갑게 신자들을 만날 생각을 하며 식당 쪽으로 갔는데,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복잡해서인지 막상 인사를 건네는 분이 없었습니다. 어깨를 부딪혀도 가벼운 눈인사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길을 내려와 마당에 이르니 저쪽에서 큰 가마솥을 걸어 놓고 국밥을 퍼 주고 있던 몇몇 신자가 국자를 내팽개치고 달려와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신부님, 제 딸이 시집을 갔어요.” “신부님, 남편이 냉담 중이에요.” 하며 제 어깨를 쓰다듬고 손을 잡고 반가워하며 이야기를 건넵니다. 그러고는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다시 국밥을 퍼 주러 뛰어갑니다. 그분들은 첫 본당 신부 시절에 만난 신자들이었습니다.
몇 날 며칠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어깨를 스친 신자들은 고개만 끄덕하고, 국밥을 퍼 주던 신자들은 멀리까지 달려와 인사를 하는가?’ 그러다가 ‘아, 사람과 사람이 맺은 인격적 관계의 깊이 때문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신부라도 서로 인격적 관계가 맺어져 있지 않으면 데면데면하지만, 아픔과 기쁨을 함께한 사람을, 그런 신부를 만나면 그리 반가운 것이구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 갖추어야 할 혼인 예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 맺는 인격적 관계입니다. 힘들 때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고, 울고불고 난리를 친 뒤 그분에게서 힘과 지혜와 용기를 얻어 하나하나 극복해 나갔던 일. 내어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닮고자 나 또한 내 것을 내어 주고, 그래서 그 사랑이 되고자 한 노력들 ……. 그러한 노고의 땀방울들이 모여서 만들어 낸 하느님과의 친교의 깊이가 바로 우리가 마련해야 할 혼인 예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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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혼인 잔치의 비유>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임금은 하느님이고, 임금의 아들은 예수님이고, ‘잔치’는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고, ‘초대’는 복음 선포이고, ‘혼인 예복’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 즉 충실한 신앙생활입니다. ‘혼인 예복’을 하느님과 맺는 인격적 관계, 하느님과의 친교의 깊이로 해석하는 이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의 뜻과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해석입니다.) 충실한 신앙생활은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생활이고, 하느님과의 관계와 친교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더 깊게 만들어야 하는 ‘신앙생활의 목표’입니다. 그 관계와 친교는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해서 잔치 음식을 먹게 될 때 완성됩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마태 22,2-5)
1) 비유의 내용을 보면, 잔치 초대는 전에 이미 했고, 여기서는 잔치 준비가 끝났으니 참석하라고 연락하는 상황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사람들은 초대장을 이미 받은 사람들이고, 잔치에 참석할 준비를 한 상태에서 잔치 준비가 끝났다는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로 해석됩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시대 때에 이미 메시아 예고를 들었고, 메시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막상 메시아께서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시자, 그들은 그 복음을 믿지도 않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부한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은, 예수님이 나자렛 출신의 가난한 목수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고, 자기들의 생활을 바꾸는 것을, 즉 회개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회개하는 것을 싫어했다는 것은, 그들이 진심으로 메시아를 기다린 것은 아니었음을 나타냅니다.>
2)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라는 말에 초점을 맞춰서, 비유에 나오는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는 관심이 없고, 현세에서 먹고사는 일만 신경 쓰는 사람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음을 들어도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로 생각하면서 흘려듣거나 듣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을 향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마태 24,38-39)
(이 말씀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라는 말씀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있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마태 22,8-10)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유대인들로 생각한다면, 나중에 길거리에서 초대받은 사람들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 즉 이방인들입니다. (앞의 사람들을 구원에 관심이 없어서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사람들로 생각한다면, 뒤의 사람들은 구원받기를 희망해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비유의 표현만 보면, 유대인들이 참석하기를 거부해서 초대장이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간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유대인들 대신에 잔칫방을 채우려고 동원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복음이 선포된 순서가 ‘유대인들 먼저, 이방인들 나중에’ 라는 것은 맞지만,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처음부터 하느님의 계획이었습니다.(창세 12,3) 우리는 ‘아무나’가 아닙니다. 여기서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라는 말은, 그냥 단순하게 ‘모든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1-14)
(“길거리에서 갑자기 초대를 받았는데, 혼인 예복을 안 입었다고 쫓아내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예복을 안 입은 사람은 하나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따라서 길거리에서 초대받은 사람들은, 예복을 미리 입고서 초대받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혼인 예복은 앞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 즉 충실한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응답의 시작 단계’일 뿐입니다. 응답한 사람답게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응답이 완성됩니다. (우리 교회의 세례성사는 졸업식이 아니라 입학식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신앙생활을 잘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만 세례성사가 완성됩니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라는 말씀은,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은 처음부터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부한 사람과 같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라는 말씀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후회’와 ‘절망’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라는 말씀은,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는데,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고, 응답했지만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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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컴퓨터, 노트북, 스마트폰이 우리 삶 속 깊이 들어와 있으면서 손으로 글 쓸 기회가 적어졌습니다.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쉽게 문자를 보낼 수 있고, 기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일정표에 기록하는 정도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신학생 때는 타자기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손으로 글을 썼습니다. 논문도 원고지에 썼습니다. 3학년 때입니다. 신약성서를 가르치는 신부님께서 시험을 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대신에 4복음서 중에 하나를 방학 중에 필사해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성서를 읽었지 쓰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유를 잘 몰랐습니다. 방학 숙제로 마르코 복음을 썼습니다. 다른 숙제도 많았지만 성서필사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저는 숙제로 성서 필사를 하였지만 아버님과 어머님은 신앙 때문에 성서를 필사하였습니다. 아버님께서 쓰신 성서를 보았습니다. 아버님의 힘과 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님이 쓰신 성서를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숙제로 성서를 쓰는 대신 신앙으로 성서를 썼다면 성서를 쓰는 시간이 더욱 풍요로웠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보에서 성서를 필사한 자매님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서 필사로 몇 가지 생활의 변화가 생겼다. 우선 틈날 때마다 성서를 펼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럴수록 천주교 신자는 성서와는 먼 사람들이라던 말에 부끄럽게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미사 때마다 듣던 성서 구절을 다시금 새겨 읽으면서 구약의 약속과 계명들이 삶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시편의 내용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새김이 그대로 생활에 반영되진 못했지만 반성의 기회가 잦아졌고, 주변에 대한 애정의 시선도 늘었다. 글씨에 정성을 들이게 된 것도 또 하나의 좋은 변화다. 성서를 쓰는데 글씨를 함부로 휘갈길 수는 없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옮긴다는 생각 탓에 글씨를 반듯하게 쓰려고 노력했다. 한 자 한 자 또박 또박 반듯하게 썼다. 이런 정성은 생활 전반에 시나브로 스며들었다. 그릇을 닦는데도 조심스러워지고, 걸레질도 꼼꼼해졌다. 왁자하던 목소리는 줄이고 말하기보다는 듣기에 신경 쓰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성서를 쓰면서 가지게 된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활 전반으로 옮겨지는 것 같다.
발목 수술로 입원이 길어져 거의 일 년 동안 필사는 엄두도 못 냈다. 빨리 써야한다는 강박관념에 누워 지내면서도 성서를 펼쳤다. 읽는 것 밖에 할 수 없었음에도 성서가 위안이 됨을 새삼 깨달았다. 스스로 정한 기한의 벽은 자연스럽게 허물어졌다. 꼭 정한 시간에 정한 양의 밥을 먹어야 영양공급이 제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성서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새기고 행하느냐에 따라 영혼의 양식이 되느냐 마느냐가 정해지는 것이었다.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의지도 생겼다. 나이가 들면서 익숙하던 것 외에는 크게 흥미를 갖지 못하던 터였다.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 때문에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가 두려웠다. 성서 필사는 이런 조바심을 조금씩 사라지게 했다. 두께만 봐도 위압적인 이 책의 필사만으로도 대단한 도전인 듯하다. 이제 절반쯤 필사를 진행하고 보니 꼭꼭 눌러쓰기만 해도 힘이 생긴다. 어떠한 일에도 좌절하지 않을 것 같다. 나를 다시 일으켜주실 주님을 날마다 만나기 때문이다. 만군의 주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와 예복’을 이야기하십니다. 혼인잔치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입니다. 예복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성서필사를 하는 자매님은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예복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성서필사를 하면서 생각이 변하였고, 변화된 생각이 삶으로 드러났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아직도 우리 곁에 있습니다. 이 시간을 혼인잔치에 필요한 예복을 준비하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성서필사도 좋은 예복입니다. 이웃의 아픔에 함께하는 봉사도 좋은 예복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것도 좋은 예복입니다. 잘 들어주는 것도 좋은 예복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남에게 해 주는 것도 좋은 예복입니다. 우리가 예복을 준비한다는 것은 현실의 삶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복을 준비한다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 기쁨, 자유를 얻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를 현실의 삶에서 이미 천상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 역시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오만한 자들과 어울리지 않고, 거짓된 자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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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당시 유대교의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의 이야기 속의 사건은, 유대인들의 관습에서 볼 때, 으례 있는 일 중에 하나인 것이다.
이들의 풍습에서 보면 혼인 잔치와 같은 큰 잔치에 있어서 초청할 만한 사람들에게 미리 초청을 해 두지만 시간을 정해주어 알리는 것은 아니고, 잔치 준비가 다 되면, 손님들을 부르기 위해 종들을 보내서 오라고 알렸던 것이 그들의 관습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이와 같은 풍습을 잘 알고 계셨기에, 하느님의 진실한 초대에 응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이와 같은 생활 속의 일을 예로 하여,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아들의 복음이라는 말씀의 잔치에 유대인들은 먼저 불림을 받아 초청 되었으나,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그를 따르고 영접하도록 유대인들을 초대했지만, 그들은 소홀히 여겨 그 초청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로 임금님의 아들의 잔치의 초대는 길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인들과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초대를 당시 그들의 생각 속에는 기대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임금님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대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잔치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잔치에 초대 받음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임금님의 관대한 아량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요, 어디까지나 은혜의 초청이요, 거져주는 은혜의 부름인 것이다.
그런데 먼저 초청을 받은 자들은, 그 초대를 거절했다. 이유는 그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가고, 어떤 사람은 초대하러 온 종을 때리고 죽이곤 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도 있다. 우리 모두에게도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하시는 부르심이 있지만, 이 세상 일에 분주하여 영원한 것을 외면하기 일 수이고,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되어 보이지 않는 것을 소홀히 하기 쉽고, 강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기회를 놓치기 쉬운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현세 생활에 너무 분주하다 보면, 영원함에로 부르시는 참 삶 그 자체를 잃어버리는 비극에 떨어지는 결과가 온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이란 혼인 잔치와 같은 기쁨이 넘치는 만남의 초대인 것임을 우리는 생활 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서도 그 잔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듯이,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한다는 것은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영원을 내다보며 기쁨으로 바꿀 줄 아는 믿음의 자세여야 하는 것임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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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예복을 준비하라>
예수께서는 요르단강을 따라 여러 마을들을 거쳐 예리고(요르단강 서쪽 10Km, 예루살렘 북동쪽 36Km)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다.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식도 있었다.(마태 21,1-11) 이제 예수님의 활동무대는 이스라엘의 도성 예루살렘이다.
환전상들과 장사꾼들로 오염된 성전까지도 정화하셨다. 예수님의 대담 상대자는 막연한 군중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인 원로들과 대사제들로 바뀌었다.
예복을 준비하라.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바로 이들에게 들려준 ‘혼인잔치의 비유’이다. 마태오복음에 의하면 나귀를 타고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성대한 행렬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21,1-11)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일(21,12-16) 때문에 이미 백성의 지도자들과 한바탕 대립을 벌였다.(21,23-27)
이어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두 개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두 아들의 비유’(21,28-32)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21,33-43)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는 숨을 돌릴 틈도 없이 곧바로 ‘혼인잔치의 비유’가 잇따른다. 이 비유가 오늘의 복음이다.
이 시점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정리를 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마태오복음 20장부터 22장까지에서 모두 네 개의 비유를 대면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상경 중에 제자들을 상대로 말씀하셨던
① 포도원 일꾼의 비유(20,1-16), ② 예루살렘에 와서 백성의 원로들과 대사제들에게 들려주신 두 아들의 비유(21,28-32), ③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21,33-43), 그리고 ④ 혼인잔치의 비유(22,1-14)이다. 네 개의 비유는 모두 하늘나라에 관한 은유법이다.
예복을 준비하라. 예복을 준비하라. 그런데 비유내용의 강도에 주의해야 한다. 포도원 일꾼의 비유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구약의 백성과 신약의 백성 모두가 초대되어 똑같은 차원의 후한 대접을 받지만,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와 오늘 혼인잔치의 비유에서는 구약의 백성들이 대접을 받기는커녕 이미 차지한 특권마저 빼앗기고 추방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물론 그 잘못과 책임은 백성의 지도자들 측에 있다.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혼인잔치의 비유에서는 구약의 백성들이 맞이하게 될 종말의 심판이 한층 고조되고 있다. 이는 다른 복음서에 비해 마태오가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이다.
오늘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부분은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을 위해 베푼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제각기 변명과 이유를 둘러대고는 오기를 거부하자,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아무나 불러들여 잔칫집을 가득 채운다.(1-10절)
이 대목을 거듭 읽어보면 이스라엘의 역사와 딱 맞아떨어짐을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예언자들, 신약시대에는 사도들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계획을 알렸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을 배척했고 때로는 죽였다.
예복을 준비하라. 예복을 준비하라. 이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는 실제로 기원후 70년 로마군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육하고 성전을 불태우는 사건으로 드러났다. 그들이 구원받을 자격을 스스로 상실한 셈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역사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여시는 것이다.
임금의 종들이 거리로 나가 아무나 잔치에 초대한다는 것은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선인이나 악인이나 할 것 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초대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둘째 부분은 임금이 손님으로 가득 찬 잔칫집을 돌아보다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집어내어 추방하는 장면이다.(11-14절) 이렇듯 길바닥에서 아무렇게나 초대해온 사람들로부터 ‘예복’을 운운하는 임금의 처사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비유의 사실적 표현에서 눈을 떼어 비유의 우의적 표현으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예복을 준비하라. 예복을 준비하라. 여기서 예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외적 치장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내적 자질을 말한다.
이는 곧 예수께서 내리신 산상설교의 가르침으로 무장된 정신이다. 이 정신은 단순히 ‘굳게 마음먹음’이 아니라 ‘실제로 행함’이요, ‘덕행의 열매’를 말한다.
교회는 거룩하나 그 안은 별의별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종말에 이르기까지 그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종말이 오기 전에 ‘예복’을 잘 갖추어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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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기흠 토마스 신부님]
어제에 이어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마태 22, 14)라고 이스라엘 대사제들과 백성들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란 주님께 뽑히기 까지 그 삶의 수고를 다해야 하지만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그들이 그렇지 못함을 간접적으로 탄식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하늘나라란 ‘한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는 비유로 시작하십니다. 임금님 아들의 혼인잔치인지라 '모든 것'(4절)은 그야말로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런 자리는 여러 번 반복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나 초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임금이 초청한 사람들만 갈 수 있는 자리이며, 개인에게는 그러한 자리에 초청을 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러한 왕의 초청을 거절한 간이 아주 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첫 번째 왕의 초청에 '오기를 싫어하였습니다.'(3절) 왕이 다시 두 번째로 초청하였을 때 그들은 아예 그 초청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4절) 그리고는 각자 자기의 일터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5절) 더욱 기가 막힌 일은 그들은 왕이 보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였다고 했습니다.(6절)
그러자 그 대단한 사람들에게 임금이 노하였고,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라버리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어찌 감히 임금의 명령을 거절한단 말입니까? 더욱이 보낸 임금님 자신의 종들까지 욕을 보이고 죽이는 극악무도한 일을 저질렀으니 그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임금은 그 잔치에 빈자리를 원치 않으시고, 초청받지 못한 다른 사람들이라도 그 자리를 채우라고 명하십니다. 나쁜 사람 좋은 사람 구별 말고 만나는 누구든지 다 데려오니 혼인 잔치 자리에 이제야 손님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왕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은 언제나 버림을 받겠지만, 반대로 그들이 업신여겼던 '이방인'들에게 그 행운이 넘어왔고, 죄 많은 우리 역시 이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임금님의 잔치에 초대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초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격이 없는 사람이 초대를 받는 것은 오직 초대하신 분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인 우리가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된 것은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하늘나라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어울리는 예복은 반드시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잔치가 시작되기 전 손님들을 맞으러 나왔던 임금님의 눈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임금님의 눈에 띄었던가 봅니다.
그가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종에 의해 아무렇게나 불려온 그들이 임금님의 수많은 종들에 의해 좋은 예복으로 잘 입혀 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복 입기를 완강히 거절하였기에 쫓겨 나갔다고 가정해보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임금님의 호통에 의해 그는 손과 발이 꽁꽁 묶여 바깥 어두움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거기서 통곡하며 슬피 울고 후회한들 이미 엎질러져 담을 수 없는 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꼭 입어야 할 그 예복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갈라 3, 27)
우리가 받은 세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예복’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똑같은 예복을 입었다는 것은 우리가 한 공동체이며, 나뉠 수 없는 연대를 상징합니다. 과연 우리는 하늘나라와 관계된 불가분의 시민들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마태 22, 14)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예복을 잘 갖춰 입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정의로 살아야 할 산 신앙은 더욱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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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축하합니다. 성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대축일을 맞아, “연합회 최초의 사료들에 나타난 올리베또 영성의 요소들”을 중 두 가지만 간단히 보고자 합니다. 곧 ‘관상’과 ‘친교정신’(‘한몸’ 정신)에 대해서 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연합회 최초의 사료들”이란 1319년에 3월 26일에 이탈리아 아레쪼 교구장 귀도 타를라티로부터 최초로 교회법적인 인정을 받은 가장 오래된 사료로 “몬떼 올리베또 성모 마리아 수도원”의 창설을 선언하는 문헌이라 할 수 있는 [창설인가서]이고, 또 하나는 1344년 1월 21일, 끌레멘스 6세 교황으로부터 받은 “성 베네딕도 몬떼 올리베또 성모 마리아 연합회”의 [연합회창설인가서]와 [새 (지역)수도원창설인가서]입니다.
위의 첫 번째 문헌에서는 연합회의 정신으로 “관상”을, 두 번째 문헌에서는 “친교”을 보여줍니다. 먼저, 첫 번째 문헌인 [창설인가서]의 “전문”(前文)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간택된 이들이 더 고요히 그들을 간택하신 분의 관상에 항구할 수 있게끔 그들은 스스로를 하느님께 봉헌했고 재물을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내어 놓았다.”
여기에서, 창설자들의 카리스마가 ‘관상’과 ‘친교’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안토니오 다 바르가의 <연대기>에서는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영감으로, 심오한 내적 열망에 사로잡혀 시에나 사람들인 고귀한 친구들 빠뜨리찌가의 빠뜨리찌오 및 프란치스코 그리고 암브로죠와 함께 살면서 밤낮으로 천상 것을 열망하였다. 그들은 함께 하찮은 세상사에 등을 돌리고 뇌성벽력의 하느님(욥 37,5 참조)을 섬기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 하였다”(<연대기> 2)
또한, <상서관 연대기>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독 속에서 마음의 통회와 기도에 몰두하기를 뜨겁게 갈망하였다. 그래서 혹자는 숲 속에서, 혹자는 작은 경당에서, 또 다른 이들은 외딴 장소에서 침묵과 한적함을 찾았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홀로 기도하며 하느님께 순결한 손을 들어 올렸고, 자기 영혼의 내밀한 기도를 주 하느님 앞에 쏟아놓았던 것이다.”(연대기 11)
그리고 두 번째 문헌인 [연합회 창설문헌]와 [새 (지역)수도원 창설문헌]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수도원들은 '지체들이 머리와 맺는 관계처럼'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에 예속되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올리베또 연합회’를 특징짓는 “친교”(communio), 곧 '한 몸'(Unum Corpus)의 이상은 ‘그리스도의 신비체’로 표상되고 있습니다.
사실, 첫 번째 인용문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들의 삶은 “밤낮으로 천상 것을 열망”하는 관상의 삶과 형제들 안에서 봉사와 친교로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곧 톨로메이와 그 동료들은 ‘함께’ 지상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갈망하며, 신적 지혜를 추구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관상의 삶’의 추구가 그들이 “함께” 아코나로 물러가게 한 요인이었습니다. 이처럼 연합회의 기원부터 그들은 함께하는 “친교” 속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들의 ‘친교’는 어디로부터 흘러나온 것일까? 이를 “성 베르나르도 희년”(2013.7.11.~2014.8.19.)을 맞으면서, 한국 올리베따노 수녀원에서는 편찬한 “친교의 비밀”-성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의 생애와 정신-이란 소책자 제2부인 “성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와 초창기 몬떼 올리베또”에서는 “친교의 비밀”이 성인의 “겸손”에 있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겸손이야말로 베르나르도의 ‘거룩함’이었고, 초창기 몬떼 올리베또의 눈부신 성장의 비밀, 곧 ‘친교의 비밀’이었던 것이다.”(98쪽)
그리고 성인의 “겸손”은 하느님의 앞에서의 죄에 대한 참회에서 오고 있음을 성인의 [편지들] 곳곳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특히 편지 1과 7). 곧 그들의 “친교”는 하느님과의 친교와 관상에서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형제간의 친교와 세상과의 친교는 하느님과의 친교인 관상에서 흘러나온 자연스런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두 가지 특성을 전 세기의 연합회 역사가 스카르피노는 “복자 베르나르도의 생애”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베르나르도의 영성은 바로 천상적 생활과 지상적 생활이 만나 조화를 이루는 곳에 있다.”.
또한, 교종 베네딕도 16세께서는 그의 시성식 강론에서, 이러한 ‘형제들을 향한 봉사로 이끄신 하느님 관상’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그의 삶은 형제들을 향한 겸손한 봉사로 이끄신 하느님 관상에 완전히 바쳐진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의 시성 청원관이었던 레기날도 그레고리오는 성인의 생애를 이렇게 정리하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그의 수도승들에게 거룩한 삶과 영웅적인 덕을 실천하는 모범을 남기셨고,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와 관상에 바쳐진 삶이었다.”
그러니 성인을 뒤따르는 우리의 삶 또한 그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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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22,2)
<초대와 합당한 준비!>
예수님께서 '혼인 잔치의 비유'를 들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혼인 잔치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초대와 합당한 준비'입니다. 잔치를 준비한 사람은 잔치에 필요한 준비를 해 놓고,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래서 잔칫집은 초대를 받은 사람들로 가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초대받은 사람들 역시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잔칫집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임금이 잔치를 준비해 놓고 사람들을 초대하지만, 사람들이 이 초대에 응하지를 않습니다.
임금은 크게 진노하면서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종들은 거리로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옵니다.
그런데 초대 받은 손님들 가운데에서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가 잔칫집에서 쫓겨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마련해 놓으신 '하느님의 나라'라는 잔치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잔치 초대에 응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지적이고, 이 잔치 초대에 합당한 준비를 하지 않고 응하는 이들에 대한 지적입니다.
매일매일 주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잔치가 '성체성사(미사)를 통해' 벌어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잔치를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나는 이 초대에 얼마나 기쁘게 응하고 있고, '합당한 예복'을 갖추어 입고 있는가?
'합당한 예복'은 주님을 만나기 위한 '외적인 꾸밈'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예복은 오늘 내게 오시는 주님을 만나기에 합당한 '마음의 준비', '마음의 꾸밈'입니다.
주님께서 구원의 잔치를 마련해 놓으시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초대에 얼마나 기쁘게 응답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보면서, 날마다 나를 살리시기 위한 구원의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갖추어 입고 기쁘게 참여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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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나라>
마태오 22,1-14 (혼인 잔치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하늘나라>
누구든지
오세요
마음껏
즐겨요
이곳에
맞갖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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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를 아십니까? 토끼와 거북이 중에 누가 이겼을까요? 거북이입니다. 분명 토끼가 훨씬 더 빨라도 중간에 잠들어서 결국 거북이에게 승리를 빼앗긴다는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먼 훗날, 이 토끼의 후손이 거북이에게 이겨서 역사를 바꾸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문제는 토끼는 금세 피곤함을 느껴서 중간에 잠들어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끼는 잠이 오지 않는 약초를 구해서 경기 직전에 먹었습니다.
이 약효 때문인지 토끼는 거북이보다 여유 있게 먼저 결승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토끼는 너무 기뻐서 만세를 외쳤습니다. 한참 뒤에 거북이도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거북이는 도착하자마자 또 이겼다면서 만세를 외치는 것이 아닙니까? 토끼는 “내가 이렇게 먼저 와 있는 것이 안 보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거북이는 크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너는 약물 복용으로 실격패야!”
맞습니다. 약물 복용으로 실격패가 맞습니다. 사실 우리는 승리를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승리가 진정한 승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얻은 승리가 아니라면, 큰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승리 자체보다 승리를 위한 과정을 먼저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는 과정을 밟고 있는 지를 말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임금이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초대받은 이들이 각종 이유로 초대에 응하지 않고, 그것도 부족해서 부르러 간 종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당연히 임금이 화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살인자를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립니다. 당연한 조치로 보이지 않습니까?
사실 성경에서 혼인 잔치는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기쁘고 결정적인 일치의 상징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초대에 응답하지 않고, 거부의 표시로 임금의 종을 죽이기까지 하는 폭력을 행사합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랑의 삶으로의 초대를 거부하는 모습, 그리고 거부의 표시로 하느님께서 싫어하는 죄를 범하는 모든 것이 바로 커다란 폭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초대는 아무런 조건이 없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초대받은 이들은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혼인 예복을 차려입지 않는 사람들이 쫓겨나는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실천이 바로 혼인 예복입니다.
각종 죄를 범하면서 세상에서 첫째 자리만을 차지하려 한다면, 하늘 나라에 결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실격패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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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의 중요성>
학창 시절에 제가 좋아했던 과목은 수학이었습니다. 대부분이 싫어하는 과목을 저는 이상하게도 좋았습니다. 문제 푸는 것이 싫다고 친구들은 말하지만, 저에게는 다른 과목과 달리 몇 개의 공식만 외워서 적용하면 정확하게 풀리는 이 수학이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수학이라는 과목이 ‘암기과목’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공식을 외워야 하니까요.
수학에서 공식을 외우고, 이 공식을 잘 응용할 수 있는 사람의 성적이 잘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공식도 못 외우고 응용도 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고 어려운 과목이 될 수밖에 없겠지요.
주님을 따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님을 따르는 공식을 외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공식을 잘 응용해서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때 주님과의 관계가 멀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공식은 주님께서 직접 당신의 몸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나의 입장이 아닌, 상대방이 원하는대로 해줄 수 있는 황금률로, 더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공식을 잘 응용하는 사람이 주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행복이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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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혼인 예복은 마음의 옷>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장가보내기 위해서 혼인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오랫동안 관심과 사랑으로 배려했던 이들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이된 일입니까? 믿었던 이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오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이기에 풍성하게 준비했는데 즐길 사람이 없었습니다. 미쳐 그들의 속을 보지 못한 탓이기도 합니다. 급기야 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초청하여 잔칫방을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받은 은혜보다도 자기 잇속을 챙기느라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갔습니다. 나 하나쯤이야! 그들은 당장 내가 먹고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내가 아니어도 축하객이 많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의 잔치는 매우 성대하였고 귀한 선물도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초대 받은 사람은 핑계 아닌 핑계를 댐으로써 선물을 받을 기회를 놓치고 전혀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 선물을 차지하였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초대받은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선택된 사람은 적었고 이 모습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지만, 결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응답하는 사람만이 들어갑니다.
묵시록 3장20절에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하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드리는 역할은 나의 몫입니다. 그리고 응답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준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잔칫집에 가려면 그에 걸맞은 예복을 입어야 하듯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만한 삶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여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가운데 예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배부르면 산해진미가 귀찮고 배고프면 보리죽이 꿀맛이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헛배가 부르면 정말 먹어야 할 것을 먹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헛배가 불러 다른 것에 관심을 지니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일상 안에서도 미사참례, 성지순례, 피정이나 세미나, 교육,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에 기꺼이 응하는 사람만이 보람과 기쁨을 간직하게 됩니다. 똑같이 주어진 일이지만 은총의 기회로 삼는 사람은 많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며 영적인 풍요로움을 주는 일에핑계를 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고 심지어 죄를 범하는 경우 있습니다. 천국을 소망하면서도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한다면 그는 결국 뽑힌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주님의 뜻을 행하는 예복도 없이 천상을 갈망한다면 허황한 꿈에 불과할 것입니다.
교부들은 혼인예복을 사랑, 선행, 의로움의 실천으로 해석했습니다. 혼인예복은 마음의 옷이며 마음을 어떻게 가꾸었느냐에 따라 아름다움이 더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22,14)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예지에는 의지하지마라. 어떠한 길을 걷든 그분을 알아 모셔라. 그분께서 네 앞길을 곧게 해 주시리라.”(잠언3,5-6)
혹 준비가 미흡하다면 지금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회개와 행동하는 믿음의 예복으로 단장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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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무지無知의 병>
-끊임없는 참된 회개 은총이 약藥이다-
말씀을 묵상하며 강론을 준비할 때 늘 먼저 생각하는 것이 강론 제목입니다. 강론 제목은 몸으로 하면 '눈'과 같고 방으로 하면 '창문'과 같습니다. 눈이 없는 몸, 창문이 없는 방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강론 제목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강론 내용입니다. 그리하여 강론 제목은 그날 삶의 지표가 됩니다.
어제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떠오른 제목은 “무지의 병-끊임없는 참된 회개 은총이 약이다-”였습니다. 참 많이도 강론시 인용했던 말마디가 무지의 병, 끊임없는 회개일 것입니다. 자꾸 잊어버리는 망각의 병에는 끊임없는 반복뿐이 없습니다. 늘 반복하여 깨우쳐야 할 무지에 대한 깨달음이요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통해 비로소 무지의 어둠에서 점차 벗어나 밝게 생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를 마치며 늘 반복하여 바치는 끝기도가 어제는 새삼스럽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전례는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지요! 양심 성찰의 회개로 시작하는 끝기도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가슴을 치며)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로소이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과 형제들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
날마다 새벽 저에게 강론을 쓰는 시간은 새날에 앞서 지난 하루를 뉘우치는 회개의 시간이자 새롭게 태어나는 파스카의 시간, 공부의 시간, 기도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끝기도 후반의 성모찬송가 맨 마지막 라틴어 말마디도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O clemens, O pia, O dulcis, Virgo Maria(오 클레멘스, 오 피아, 오 둘치스, 빌고 마리아; 오 너그러우시고, 오 자애로우시며, 오 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님!)”
참 아름답고 무한한 위로를 주는 성모찬송가를 부른후 잠자리에 드는 수도자들입니다. 너그럽고 자애로우시며 아름다우신 성모님에 대한 묘사 말마디가 얼마나 좋은지요. 참으로 무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참 사람 동정 마리아는 우리 신자들의 모범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성모님을 닮아갈수록 저절로 예수님을 닮게 되어 무지의 어둠으로부터 해방되어 참 자유인이 됩니다. 성모님이야 말로 무지의 병에 대한 참 좋은 답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성모님을, 예수님을, 하느님을 닮아 본연의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참나의 모습에 도달합니까? 바로 우리의 평생과제요 답은 회개뿐입니다. 끊임없는 참된 회개 은총이 무지의 병에 대한 최고의 약입니다. 우리의 끊임없는 기도도 말씀 공부도 끊임없는 회개를 지향합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모두가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보십시오. 오늘 복음의 하늘 나라 혼인 잔치 비유에서 잔치에 초대를 거절한 무지의 사람들이, 또 참석했어도 예복을 입지 않은 준비성 없는 무지한 이가 회개의 표징입니다. 우리의 무지를 일깨워 지혜롭고 겸손하게 만듭니다. 멀리 있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 회개를 통해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 실현되고 있는 하늘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무지에 눈이 가려 절호의 구원 기회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무지에 눈이 멀어 분별의 지혜를 상실하여 초대를 거부한 당대 유대인들을 지칭합니다. 임금은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사르니 바로 70년대 로마군대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이와 같이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어 다시는 재건되지 못했고 그 자리에는 ‘이슬람의 모로크(Islamic mosque)’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어 등장하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자 무지의 사람을 지칭합니다. 복음적 삶의 수행이라는 평상시 마련했어야 할 예복을 무지로 인해 입지 못한, 참으로 태만했고 무책임했던 무지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미사전례 잔치에 참석하기에 앞서, 아니 늘 깨어 오늘 지금 여기서 살펴 봐야 할 내 하늘 나라 잔치의 구원의 예복입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습니다. 부름 받았다고, 세례 받아 미사에 참석했다고 저절로 다 구원이 아니라 하늘 나라 잔치에 합당한 삶이라는 예복을 입었는가가 구원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판관기의 입다는 눈 먼 열심에 경솔히 주님께 서원했고 사랑하는 외동딸을 번제물로 바치니 이 또한 하느님의 뜻과 무관한 무지의 소치입니다. 애당초 이런 인신 제물의 관례는 히브리 종교에는 없었고 주변 이교의 영향을 받은 부정적 결과물입니다. 구약의 하느님은 결코 이런 야만적 인신 제물을 명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설교에서 결코 맹세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정말 입다 판관이 하느님 공부에 충실하여 하느님을 아는 지혜와 겸손을 지녔었더라면 이런 어리석은 서원은 하지 않았을 텐데 어리석은 무지의 병으로 스스로 자초한 우행이 참 안타깝습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탐진치의 무지의 병에서 자유롭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입니다.
기후재앙도 코로나도 궁극엔 인간 무지의 병에서 기인하며, 내전 상태를 방불케 하는 극단의 정치현실이나 분열 현상도 무지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 중에 맑고 밝게 늘 깨어 사는 일이 무지의 병에 좋은 치유제이자 예방제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무지의 병 치유를 위해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가 필요할 때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무지의 병을 점차 치유해주시며 평화의 일꾼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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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인간이 하느님과 얼마나 엇박자를 내며 살아가는지 보여 주십니다.
"주님의 영이 입타에게 내렸다."(판관 11,29)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암몬 자손들에게서 구한 판관 입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주님의 영이 내리자 곧바로 암몬 자손들과 싸우러 나섭니다.
"당신께서 암몬 자손들을 제 손에 넘겨 주신다면 ... 저를 맞으러 제 집 문을 처음 나오는 ... 사람을 제가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판관 11.31)
그런데 입타는 막상 암몬인들을 마주하자 자신에게 현존하시는 주님의 영만으로는 불안했는지 불특정 인물의 목숨을 볼모로 주님께 조건부 서원을 합니다.
자신의 희생도 아니고, 종의 목숨일 수도 있고 가족이나 친지의 생명일 수도 있는 무모한 봉헌이 하느님을 움직일 거라 믿은 걸까요? 이는 신의 마음을 사기 위해 인신 제사가 횡행했던 당시 이교 풍습의 잔재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하느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은 존재지만 그의 하느님관은 상당히 왜곡되어 있었고 신뢰도 빈약했습니다.
"아, 내 딸아! 네가 나를 짓눌러 버리는구나. 바로 네가 나를 비탄에 빠뜨리다니!"(판관11,35)
그런데 암몬 자손들을 무찌르고 금의환향할 때 그를 가장 먼저 맞으러 나온 이는 그가 사랑하는 외동딸이었습니다. 입타는 너무 슬프고 고통스러워 옷을 찢으며 탄식하지요.
그런데 그의 절규를 들어 보십시오. 그는 무모하고 경솔하고 불의한 조건으로 서원한 자신을 뉘우치기보다, 기쁨에 차서 앞장서 아버지를 맞으러 나온 딸을 탓합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유를 그는 여전히 모르는 듯하지요. 혹 종이나 노예가 나왔다면 별 문제가 없었을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하였다."(판관 21,25)
판관기의 마지막 구절처럼, 입타 역시 불완전한 믿음과 자기 식대로의 신심으로 오히려 커다란 비극을 겪게 되었지요. 하느님께서 특별히 불러 주신 그마저도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고 믿음을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으니 보통 사람은 어떠했을지요...
복음은 하늘 나라를 혼인 잔치를 베푼 어느 임금으로 비유합니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마태 22,8)
임금이 혼인 잔치를 열었지만 초대받은 이들은 관심이 없거나 종들을 때리고 죽이며 적대감까지 표출합니다. 기쁘고 흥겨워야 할 잔치가 폭력으로 얼룩지고 말게 되지요. 임금은 자신의 부르심이 제대로 호응받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임금은 오해받고 거부 당하는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일찍이 초대받은 이들은 혼인 잔치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 보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이 성자 예수님을 배척하면서 구원의 길에서 스스로 벗어나려는 것과 비슷하지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부르신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마태 22,12)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아무나" 데려오게 하자,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잔치집을 채웁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번에는 혼인 예복입니다.
혼인 예복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가난이나 무례함의 의미라기보다 혼인 잔치에 참여할 본질적인 자격을 가리킵니다. 새 포도주를 나누어 마시는 새 계약의 잔치상에 참여하려면 성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신앙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지요.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비유 속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듯, 누구에게나 부르심이 선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가 봅니다. 사람이 참 말귀를 못 알아듣는 존재여서 그럴까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그분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잘 모르니 제 식으로 넘겨짚어 입타처럼 오히려 화를 부르기도 하고 유다인들처럼 옛 것을 고집하느라 새 계약을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셔서 함께하고 싶으신 하느님과, 그 마음을 몰라주는 인간의 불협화음은 이렇듯 구원 역사 곳곳에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복음 환호송)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부르고 또 부르십니다. 번번이 거절 당하시면서도 지치지 않고 부르시는 이유는 당신과 함께하는 길이 영원한 생명이고 행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화답송)
우리가 받은 부르심이 선택으로, 또 선택이 구원으로 완성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신뢰와 믿음을 예복으로 입어야 합니다. 그분의 부르심과 선택, 사랑과 자비, 구원을 믿고 그분께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분과 우리 각자가 써나가는 구원의 역사에는 제2, 제3의 조건부 보루는 없어야 합니다. 우상으로 가는 퇴로는 반드시 차단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알아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은총으로 주신 믿음을 충실히 가꾸어 나가다 보면 우리 모두 언젠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함께 모여 기쁨을 나눌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화답송)
우리의 환성을 듣고 기뻐하실 주님이 눈에 선합니다. 그분과 함께 우리는 비로소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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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Z6AHifnaB3I&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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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 14)
하느님 사랑은
어느 순간에도
멈추지 않는다.
하늘 나라가
있고
초대하시는
잔치가 있다.
가장 좋은
잔치에
초대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 모두를
잔치에
초대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 모두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시다.
부르심을 통해
하늘 나라를
보게되고
선택을 통해
하느님 사랑에
우리자신을
맡기게 된다.
믿음의 예복은
잔치에
초대하시는
하느님을
드러낸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우리의
일상이 바로
잔치이다.
깨어나야 할
우리의 신앙이다.
신앙은
선택이다.
그냥 선택이
아니라 당장
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선택이다.
부르심은
화려하지만
선택은
실천을
동반하는
은총이다.
늘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도우심이
선택이다.
부르심과
선택으로
빛과 소금은
구체화된다.
오늘도
선택의
잔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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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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