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치사에 뗄래야 뗄수없는 큰 발자욱을 남겼던 3金(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지난 23일 김종필 전총리위 92년生 마감으로 모두 역사속으로 사라졌는데...
3金시대를 거치면서 때로는 政敵으로,때로는 協力者로 얼키고 설켰던 40여년간은 "대한
민국 정치사 그자체"로 우리 정치가,경제가 한단계 발전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0.5.16 혁명 설계자
육사8기로 4.19직후 처삼촌 박정희와 거병의 뜻을 모으던중 "정군운동" 배후조정자로 강제
예편된 직후,5.16군사혁명에 참여,"은인자중하던 군부는 今朝 未明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로 시작되는 "5.16 혁명공약"도 그의 손에의해 작성되었다.
61년6월 중앙정보부를 창설,초대 중정부장이 되고,62년 오히라 일본외상과 "대일청구권 자금
협상'물꼬를 트고,오히라가 독도문제를 꺼내자 "독도를 폭파했으면 했지 줄수없다" 강수
0.민주공화당 총재
63년 중정부장을 그만두고,민주공화당을 창당,6대 총선때 부여에서 당선,공화당총재를 거쳐
71년부터 4년6개월간 국무총리를 지내고,72년 박대통령의 유신선포이후,그의 위상은
"박정희의 동지"에서 조력자로 내려 앉았다.
김종필의 생정 인터뷰 "박대통령은 이후락,윤필용,하나회처럼 경계해야할 대상을 옆에 세워
놓고,쓸데없이 나를 경계"했다며, "그것이 권력종말의 시작이였다"고 했다.
10,26사건으로 유신정권의 붕괴, 그의 정치인생 1막도 끝나고,
0.3당 합당과 분당,DJP연합
87년 신민주공화당 창당,대선출마 4위로,다음해(88) 13대 총선에서 35석을 얻었으며,민정당
(노태우)는 절반의석 못미치는 125석을 얻어,여소야대구도에 갇히자,노태우는 90년 1월 김영삼
김종필과 "3당합당"을 결정했다.
92년 YS대통령때 상도동계의 집중 견제로 95년 민자당을 탈당했다.
이듬해 총선에서 김종필의 자민련50석,신한국당은 절반 못미치는 139석,김대중의 새정치국민
회의는 79석을 얻어"신3金여소야대"체제 등장으로,"양김"사이 케스팅보드를 쥔 김종필은 92년
대선에서 DJ의 손을 들어줘,27년만에 두번째 총리에 올라 정치인생 2막 전성기.
0.政治는 虛業(총리 2번,9선의원,네정당 총재,대표)
2000년 총선에서 17석을 얻으며 참패,2004년 선거에서 4석을 얻는데 그쳐 그는 '이제 완전히
연소돼 재가 됐다"며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九十而知 八十九非) 라 했는데...
"아흔해를 살았지만,지난 89년이 헛된것 같은 생각을 떨칠수 없다"
0.만년 2人者,처세의 달인,JP의 평가
민주당 추미애=김 전총리는 DJP연합으로 정권교체하는 큰시대의 책무를 다한 어르신
한국당 김성태=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JP의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기린다.
日本 아베 총리= 고인은 오늘의 한/일관계 초석을 쌓으신분
# 結 語
3金 그들은 이나라를 선진국문턱에 끌어올리고,민주주의를 이땅에 자리 잡게하는데 큰역할을
했으나,산업화,민주화 세력이 충돌하는 와중에,그 어느 한편에서서 투쟁을 이끌던 3金씩
리더십으로는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도전에는 현실적으로 맞지 않을터인즉.이제
우리는 그들을 떠나 보내고,새 시대를 담아낼 더 멋진 정치인들이 요구된다.편히 잠드소서!!!
첫댓글 오히라 일본외무상과 대일청구권 협상을 할 때,
오히라 외상이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우리나라에는 왜 저런 젊은이가 없지....하고 고개를 저었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뒤에는 김종필 총리의 보이지 않는 공적이 있었던 간 사실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문제는 3김을 대신할만한 인재가 없다는 겁니다.
찬규형님! 씰데없는 소리 떠나다니,니나이가 어때서, 족히 20년은 더 공덕을 쌓으셔야지...
찬규,창수형! 좋은글/멋진 사진으로 공덕 많이 쌓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