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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묘행무주 원문보기 글쓴이: 묘하
제4강 대승정종분/설우스님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금강경 3단, 대승정종분이다 이렇게 펴보시면 됩니다.
대승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 대승이라고 하는 뜻은 부처님 근본 정신 그 참뜻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대승이라고 할 때는 부처님의 근본 참뜻을 잘 드러내는 법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부처님의 대승의 참 진리의 법을 초기 불교 때 부파불교 소승 수행자들이 이것을 좀 이해하고 또 실천하는 과정에 있어 가지고 모든 생명세계를 다 이렇게 도와주고 이타행을 할 수 있는 그러한 점이 부족한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 부처님의 근본 정신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어떤 방법으로 부처님의 법을 한 번 드러내보자 해서 일어난 불교가 대승불교죠.
그런데 대승불교의 주요사상이 많이지만 오늘 제가 3가지를 말씀 드린다면은 대승불교에 들어오면은 많은 부처님들이 경전에 출현을 합니다.
그래서 소승경전에서는 부처님이라는 한 분 밖에 안 계시는데, 대승경전에 들어오면 그 많은 부처님이 출현하시거든.
그건 왜 그러냐 하면은 우리 모두가 다 여기 부처의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다 모두가 부처라는 뜻을 밝히기 위해서 다불신앙이라고 그러죠.
그래서 많은 부처님이 출현합니다 대승경전에는.
두 번째는 대승경전의 근본 그 사상이 바탕이 뭐냐 하면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법이 공하다는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법공사상이다 그러는데, 반야지혜 그 자리는 본래 텅 비어있는 자리다.
그러면 그것이 어디 딴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 마음자리가 본래 텅 비어있는 이치를 밝힌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보살도의 수행을 실천을 해야 된다.
그래서 텅 빈 마음자리에 부처님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는 자비심과 그리고 또 원력이 중요하거든. 원력을 세워야 되는 거에요.
황소가 아무리 힘이 좋아도 주인이 끌어주는 그 지혜가 있어야 되고. 안내가 있어야 황소가 그 역할을 하지. 그래서 원력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근본정신으로 돌아 갈 수 있는 바른 그런 이끌림이 되니까.
그래서 그 원력과 그리고 보살도의 실천사상 이런 것이 거기에서 살려내는 것이죠 텅 빈 우리 마음자리에서. 이것이 대승불교의 가르침의 특징이다.
요지를 말한다면 그렇다 이 말입니다. 자~ 그러면 오늘 이 대승정종분에 들어가면서 먼저 말씀 드려야 될 것이 뭐냐 하면은 이 대승경전 가운데 금강경이 반야사상을 드러낸다는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선가에서도 달마스님의 전법을 받은 그 예를 들어서 5조 홍인대사나, 6조 혜능대사께서도 금강경 한 권만 잘 이해하고 가르침대로 실천하면은 성불할 수 있다.
그것이 중국 불교 선 사상의 남종선의 사상에서 이 금강경이 소위 경전이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우리 불교도 조계종이 선종이거든. 이 선종에서 소위경전이 금강경에 들어가는 거에요.
그런데 그 금강경 속에서도 오늘 이 대승정종분이라는것이 뭔 말이냐 하면은 본론으로 들어가는 말이기 때문에. 그 본론에서도 가장 중요한 말이 있는데. 저번 시간에 수보리 제자가 부처님께 '부처님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러야 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아야 됩니까?' 이걸 물었거든.
그러니까 금강경의 내용에 가장 핵심이 되는 말씀이 이 말씀이야.
과거에 무착보살의 동생인 세친 보살이 이 금강경에 27개의 의문을 풀어주는 해석도 있지만은 그렇게 많이 의문을 늘어 놓을 거 없어요.
딱 핵심이 되는 거는 발보리심한 선남자 선여인이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러야 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아야 됩니까? 요 말이거든.
이 말이 참 중요해서 오늘 한 번 더 내가 강조를 하려고 그래요.
그래서 나중에 말씀을 드리지만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러야 됩니까 하는 말은. 뒤에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 육바라밀가운데 보시바라밀있죠? 그 보시바라밀이 무주상 보시잖아요. 그렇죠?
상이 없는 보시. 그 무주상 보시 하는 그 마음에다가 머물러야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항복받는것은 무엇에다 항복을 받아야 되느냐 하면은 마음이라는 것에는 본래 인연이 와서 경계가 접하면 그 인연과 경계가 접하면서 마음이 일어난다는 거죠.
마치 거울이 맑고 고요하게 심성을 가지고 있다가 경계가 오면은 그 경계를 드러내듯이 우리마음이 경계가 오면은 드러내는 거요.
그래서 이것을 뭐라 그러냐 하면은 연생연멸이다 그러는데. 인연에 의해서 생하고 인연에 의해서 멸하는 것이다.
이것을 잘 알면은 무생법인을 알게 된다 그랬거든요.
무생은 남이 없다는 소리거든(없을 무. 날 생). 남이 없다 이것은 무엇과도 같으냐 하면은 이런 말들이 조금 어렵죠. 그런데 이런 말들을 여러분들이 근본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소양도 갖추어야 됩니다.
이 대승경전을 이해 하시려면은. 그러면은 왜 남이 없다고 하는가? 다 이렇게 나고, 다 이렇게 존재하고, 다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이 뚜렷한데. 왜 나도 난 바가 없고, 멸해도 멸한 바도 없다고 그러느냐 하면은.
예를 들자면 그런 거에요. 금이 이렇게 있는데 그 금은 우리의 본성과 같은 겁니다.
비유를 하자면. 그런데 그 금을 반지로 만들었을 때는 금에서 반지가 하나 생긴 것이죠. 그럼 이걸 생했다고 보는 것이죠.
그런데 그 인연이 다 해가지고 반지를 녹여가지고 목걸이를 만들었다고 했을 때 반지는 멸해버리고 목걸이가 생했다고 우리는 생각하는 거에요.
중생심에서 볼 때는. 그런데 사실은 금의 입장에서 볼 때는 반지도 금이고, 목걸이도 금이고. 그러니까 인연에 의해서 모양이 바뀌었다 뿐이지. 금 자체에서는 생멸이 본래 없었다.
이것을 우리가 무생법인이라 그래요.
그래서 이 무성법인을 잘 알려면 연기법에 대한 도리를 잘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그 연기법 도리는 이 시간에 다 못하거든. 그래서 나가면서 서서히 제가 말씀을 드릴 거에요.
그래서 이러한 연기의 도리를 잘 알면 그 마음을 항복 받을 수 있다는 것이죠.
항복 받을 것도 없어요. 괜히 항복 항복하지. 항복받을 것도 없어. 알고보면 이제.
그래서 저번시간에 수보리 제자가 묻기를.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어떻게 그 보리심을 발해야 되며 또 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어디에 머물며 그 마음을 항복 받아야 됩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 오늘 부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냐 하면은.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다음과 같이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이렇게 나오거든.
그럼 이게 경구절이 이상한거야. 수보리가 부처님께 물을 때는 선남자 선여인이라고 물었는데. 부처님은 뜬금없이 지금 보살 마하살은 그 마음을 이렇게 다스려야 된다고.
선남자 선여인이라는 말이 보살 마하살로 바뀌어 버렸어요. 그렇죠?
요런 걸 여러 분들이 잘 챙겨 보셔야 되. 그런데 이게 어려운 게 아니에요.
선남자 선여인이라 이 말이 착할 선자를 쓰거든. 그런데 이것을 복잡하게 이야기하면은 어려워요.
그런데 쉽게 내가 비유를 하자면은. 선가에서도 그러고 우리 불법에서는 착할선자를 많이 쓴는데.
예를 들어서 착할 선자를 세 번을 쓰면서 부처님의 근본 마음자리에 들어가는 방법을 내가 비유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
처음에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우리가 이런 착한 행을 하고. 착한 선업을 좀 짓자. 부처님의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다고해서. 쭈욱~ 법문을 했을 때. 그것을 듣고서는 공감이 가면서 아~ 참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해서. 성격을 고쳐 가면서 착한 행업을 많이 한다 이 말입니다.
그랬을 때 세월이 좀 더 지나가지고 누가 이야기 도중에. 그래도 지난 날 되면은 많이 착해진 거 아니겠어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자기가 착해진 것을 안다는 것이죠. 요게 첫 번째 착한 것이지. 좀 하근기로서 착한 것이죠.
두 번째 착한 것은 뭐냐 하면은.
그 착한 것에 대해서 정말 마음 깊이 내가 아주 가치를 느끼면서. 그 착한 걸 해 보니까. 내가 굉장히 편안하고 긍정적이고 밝아지고 행복한 생각이 많이 들고. 많이 내 생활에 도움이 되고. 성격에 좋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그것을 계속 착한 행업에 즐기면서 즐거워하면서 하는 거에요. 요것이 두 번째 착한 것이죠.
그리고 세 번째 착한 건 뭐냐 하면은 그렇게 하면서 마지막에는 내가 그 착한 행업을 하는 것이 성숙되가지고 익어가지고 자기화 되 버리니까. 내가 착하다는 자체를 몰라버리는 거에요.
그냥 그 착한 것이 나 자체가 되어 버리는 거에요. 요것을 세 번째 착한 거라 그러는 거요.
요것을 선가에서는 이런 말들을 다 끊어버리고 요것을 중도라 그러고. 요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단어가 무엇을 말하냐 하면은 우리의 본성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의 본, 참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본래 본 마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그랬거든. 그러면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말이 참 중요하기 때문에. 오늘 한 번 더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마음이 라는 것이 거기 들어가 보면은 그 마음은 어떤 것인가. 궁금하잖아요.
이게 한마디로 말하면 불심이죠. 부처님 마음이죠.
그런데 그 부처님 마음을 오늘은 내가 3가지를 가지고 말씀을 한 번 드릴께요.
첫째 우리 본성자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그 자리에는 첫째 짝을 세우지 않는다는 것이죠. 짝이라고 그러면 상대를 말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기서 짝을 세우지 않는다는 말은 선한 것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악한 것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또 중생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부처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또 깨끗하고 추한 것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요 양변을 내가 다 초월한다는 이야기거든. 이 양변을.
이 양변을 다 초월하면은 오로지 그 자리는 무슨 자리냐 하면은 일심이라는 자리입니다.
일심. 양변에 머물지 않는 자리를 우리가 일심이라 그러거든.
그러면 그 양변에 머물지 아니하면은 어떤 이로움이 있을까? 우리는 양변에 머물러 있으면 착하다 악하다. 또는 사랑한다 미워한다. 이런 양변은 우리에게 뭘 주느냐 하면은. 갈등과 대립과 내가 나를 괴롭히는 고통을 만들어줘요 그게.
그래서 그것은 중생심이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버리자는 것이죠.
그래서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우리가 잘 체험을 해 보면은 요것은 진공자리를 이렇게 말하죠 우리말로는.
이 진공자리를 잘 체험해보면은 거기에는 갈등과 대립과 고통이라는 그런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가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진공자리에는 물듦이 없다는 것이죠. 오염이 안 된다는 이야기에요.
저번시간에도 말씀 드렸죠? 중요하기 때문에 오늘 또 말씀을 드리는 거다. 요지가 이거거든.
그래서 그러면 물듦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미운 사람이 있고. 또 보기 싫은 사람도 있고. 화가 나고 이러는 거는 다 내가 어리석어 가지고 없는 것을 갔다 가 자꾸 내가 만들어 가지고 고통을 받는 것이지.
허공에는 본래 그런 구름이 상주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죠.
구름이라는 것이 인연따라 잠깐 와서 생겼다가. 또 지혜의 바람이 불면 없어져 버리거든.
내 마음에도 그런 그 어떤 오염된 생각. 이 나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런 모습들을 사실은 누구나가 다 벗어나고 싶은데. 마음은 그렇지만 잘 안 벗어나 지잖아.
왜 안 벗어나 지느냐 하면은 이 정법을 몰라서 그런 거야.
그리고 정법을 또 우리가 안다는 것은 내 믿음이 그 만큼 많이 깊어졌다는 이야기이고.
불교는 믿음만 확실하고 깊어지면 아주 간단해요.
빨리 우리가 부처님의 이치를 알 수가 있는 거에요. 그래서 이 마음자리는 물들래야 물들 수도 없고. 오염 시킬래야 오염 시킬 수가 없다는 거죠.
왜? 허공과 같기 때문에. 그래서 마음이라는 것은 인연이 오면 한 번 이렇게 탁 경계를 맞아서 소리를 내고 모양을 내다가.
인연이 가고 나면은 그것은 찾아 볼 수도 없고. 어떻게 붙들어 놓을 수도 없고.
그것은 흔적자체가 없는 거에요. 없는 것을 나는 자꾸 있다고 고집을 하는 거에요.
얼마나 안타깝고 그러냐 이 말이야.
옆에서 항상 이야기하죠. 꿈꾸는 사람이 꿈에 자꾸 그것이 있다고 자꾸 잠꼬대를 하고, 가위에 눌려가지고 고함을 지르고, 일어나서 발질을 하고, 손뼉 질을 하다가 자고 그러거든. 심한 사람은.
그러면 그 꿈 안 꾼 사람 입장에서 볼 때는. 왜 저 아무것도 없는 저 허상을 가지고 저렇게 자다 말고 일어나서 저렇게 저런 행동을 하느냐? 안타깝잖아요 그렇죠?
그게 부처님이 보는 눈과 중생이 겪고 있는 이런 문제점들이라는 것이죠. 그렇죠?
그래서 거기는 물듦이 없고. 오염되는 것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합장을 하는 거에요. 합장은 연꽃을 말하잖아. 연꽃은 연못에 살아도 물듦이 없다. 요것을 표현하는 거고.
세 번째는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에 그 마음자리에는 조작이 없다는 거에요. 조작이.
인위적으로 뭘 꾸미고 이렇게 하는 조작이 없는 거에요.
그러면 무엇과도 같으냐 하면은. 아주 천진한 어린아이와 같이 아주 순수하고 진실하고 정직하고 있는 그대도 드러내는데. 모르는 건 모르고. 아는 건 안다 그러고. 그렇게 아주 솔직 담백하게 꾸밈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너무 많이 꾸미다 보니까 내가 복잡해지는 거에요.
그래서 이런 것들은 본래 주인공의 본 모습이 아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이 정도라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는 이런 공덕이 있다는 것. 이 공덕을 오늘 여러분들이 아셔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아까 선을 3번 얘기해서 이 자리를 좀 비유를 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된 사람을 수보리는 선남자 선여인이라 표현을 한 거에요.
그런데 부처님은 선남자 선여인을 보살마하살이라고 표현을 한 거에요.
보살이라는 말은 일체 생명들을 다 공경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보살이라 하거든.
왜 일체 생명들을 공경 하겠습니까? 그도 그 나름대로 전부 다 그 생명의 그 절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절대성이라는 것은 부처가 될 수 있는 절대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은 다 모두가. 우리가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의 마음으로 내가 그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들을 공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을 잘 표현한 것이 법화경의 상불경보살을 비유를 들은 거에요.
상불경보살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항상 부처님 이시여.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그러면 사람 놀린다고 때리면 맞으면서 도망가면서도. 그래도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그러는 거에요.
그게 보살이라는 거에요.
그런데 부처님은 그것이 너무 훌륭하고 위대해서 부처님은 그를 경칭를 써가지고 마하살 대보살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요.
그래서 이런 아상과 인상과 중생 수자상이라는 그 꾸밈과 조작 된 그런 헛된 상이 없는 것으로써 보살 마하살 대보살이라 하는 분도 있고. 또 아상 인상 중생 수자상 꾸밈과 헛된 조작이 많아가지고 대 보살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있어서 안되겠죠.
그래서 우리가 대 보살이라는 말을 들을 때. 아~ 내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고. 모든 그 생명들을 내가 공경하고. 참 내가 하심하는것으로서 대보살이 되야 된다 이 생각 하면 되는 거죠. 뭐. 그렇죠?
자 그리고 그 다음에 뭐라고 나옵니까?
그러면서 보살마하살은 다음과 같이 그 마음을 다스려야 된다. 알아서 태어나는 것이나. 태에서 태어나는 것이나. 습기에서 태어나는 것이나. 연화하여 태어나는 것이나. 형상이 있는 것이나, 형상이 없는 것이나, 생각이 있는 것이나, 생각이 없는 것이나, 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 없는 것도 아닌 모든 중생들을 내가 다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하리라.
참 이거 듣기만 해도, 뭐가 있다했다, 없다 했다. 참 복잡하고 그렇죠?
이것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제가 오늘 이것을 그 달마스님의 정법을 받은 육조혜능스님이 요것을 어떻게 풀이를 하셨냐 하면은. 그 분이 또 풀이하신 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말씀하신 걸 내가 조금 바탕으로 해서 각색을 해가지고. 요즘 현실에 맞게끔 또 내가 한 번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이게 다 알에서 태어나고 습기에서 태어나고 생각이 있는 것이나 형상이 있는 것이나. 형상이 없는 것이나. 이런 것들이 다 뭐냐 하면은. 중생심에서 일어나는 그런 모든 현상들을 이렇게 나누어 논것이거든.
자 그러면 알에서 태어나는 것은 여러분들이 더 잘 알 것이고. 태에서 태어나는 것도 그렇고. 습기에서 태어나는 충이나 곰팡이 같은 것도 잘 아시는데. 이해가 잘 안가는 부분이 변화해서 태어난다는 것이 좀 이해가 안 가죠?
이 변화한다는 것을 여러 각도로 모두가 해석을 하는데. 저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 하면은.
여러분들이 지금 이 법문을 듣고 있는 이 순간은 여러분들이 모두 부처님이세요. 그렇죠?
그대로 부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부처님이 저 문을 열고 나갔을 때. 누구하고 시비가 딱 붙었었다 이 말이야.
그럴 때는 그냥 화가 나거든. 화가 나고. 집에 가서도 가정사에 서로 의견이 조금 달라졌다든지 서로 뜻이 안 맞아서 화가 나서 막 싸운다 이 말이야.
싸웠을 때는 상처도 줄 수도 있고. 물건도 부수고 이렇게 화풀이를 하잖아요.
그럴 때는 부처가 뭘로 화했느냐 하면은 아수라로 화해 버린 거에요. 그렇죠?
아수라로 화해 버린 거에요. 그리고 또 예를 들어서 다 부처님인데 뼈다귀 하나를 놓고도 어미하고 새끼하고 다투는 강아지도 있잖아요.
그것을 보면은 부처가 축생으로 화해져 버린 거에요.
그런데 이거는 강아지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도 살다 보면은 그런 경계가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처가 한 순간에 축생으로도 화하고 아수라로도 화하고 지옥으로도 들어가고 아귀로도 하고. 이런 것들이 어디서 일어나느냐 하면은.
다 이 마음. 이 순간. 인연이 접하는 이 경계에 따라서 한 순간에도 천차만차로 지금 이렇게. 천 번 생각이 멸하고 천 번 생각이 일어나면서 변화 화하는 거에요.
요것을 잘 들여다 봐야 되는 거에요. 요걸 잘 들어 다 보는 사람이 마음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그 마음에 속지를 않는다. 그럼 참 좋겠죠. 그런 말이고.
그러면 색상이 있는 것이 있다 이 말이오. 색상이 있는 것이 있다는 말이 뭐냐 하면은.
우리가 불문에 들어와서 그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은. 아예 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는 것이죠. 그래서 현실 생활 속에서 실제적으로 물질적으로 나한테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 살아가는데 나한테 도움이 다느냐? 이런 현실적인 문제만 계속 가치관을 두고 물질에 어떤 가치관을 두면서 정신적인 면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여기서는 유색으로 봐야 되는 거에요 그렇죠?
물질 자체만 중요시 여기는 사람들. 그리고 무색이라 할 때 색이 없는거거든.
그럼 이건 또 무슨 말이냐 하면은. 불문에 들어오기는 들어왔는데. 정법을 아직 몰라가지고. 길흉화복에만 너무 치우치는 사람이 있어요.
길하면 좋고 흉하면 싫고, 극락은 좋고. 지옥은 싫고. 복된 것은 좋고 재앙은 싫고. 맹목적으로 그것만 자주 매달리면서. 그것만 원하면서 그것만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근본 대승진리를 몰라서 그렇죠.
좀 더 이런 사람들은 젖꼭지를 떼고. 내가 항상 말했듯이. 좀 대승으로 나와야 된다고 제가 처음에 얘기했죠? 그래서 거기서 초월할 수 있는 거를 말하는 거요.
그래서 그 선에서 머물고 있으면 나는 무색이구나 이리 생각하시면 되는 거에요.
그 다음에 유상이라는 것이 있잖아 그렇죠? 유상.
유상이라는 것은 불교를 접하면서도 어떤 종교에 대한 신행생활이라든지. 신앙 성이 바탕이 되는 것이 아니고. 책을 통해서라든지 철학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불교를 많이 접하면서. 이 불교가 머리 불교가 되어 버린 거에요. 그렇죠?
머리불교가 되가지고. 이런 사람들은 부처님전에 우리가 예를 들어서 불교는 종교지 않습니까?
종교는 예식이 있고 의식이 있잖아요.
그래서 부처님께 우리가 다 찬탄하고 예배 드리고 공경하고 이렇게 하거든요. 삼보를 존경하고. 특히나 승가를 우리가 공경 예배하고 이러는 것이 있는데. 이러는 것을 안 한다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그것은 법상이 많아가지고 자기 아상이 많아서 그렇거든요.
불교를 신앙심과 신행생활, 이러한 종교성을 바탕을 두지 아니하고 불교를 철학적으로 학문적으로 익히기 때문에 마음에 변화가 없어지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 사람은 내 마음이 곧으면 됐지. 그게 뭐 그리 필요하냐?
그러면 그 곧음 이라는 것이 내용적으로 들어가보면은 이기심이야.
자기 편한 쪽으로만 자꾸 합리화 시키고 이기심으로 들어가는 성격이 있거든.
그러니까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보면은 선지식도 만나도 선지식도 법문이 자기 비유와 성격에 맞춰서 해주면 선지식도 좋고. 내 자존심을 건드리면 선지식도 그 날로서 인연이 끊어지는 것이고.
부처님의 불법이라는 것도 내 마음이 즐겁도록. 그것은 결국은 뭡니까? 정을 주고 받는 법문이 되야 되거든. 그렇지 않아요?
정을 주고받는 법문은 생활법문 쪽으로 우리가 좀 이해는 쉽지만도. 그것이 부처님의 근본 정신은 아닙니다. 그렇죠?
정을 주고 받는 법을 이야기를 해 주다 보면은. 그것은 어느 날 사람과 사람끼리 주고받는 불법이 되다 보니까. 서운해지고 원수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것은 비유를 하자면은. 풀을 돌로 눌려놓는 거에요. 그럼 그 풀이 없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정법을 가르쳐주고 정견을 이야기하고 마음 다스리는 근본 핵심을 마음자리라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잘 가르쳐 주는 것은. 이것을 정견이다 그러거든요.
이것을 알면은 풀을 돌로 눌려놓는 게 아니고 풀을 뽑아 내 버리는 거에요.
풀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는 거다 이 말이오. 요것을 잘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그 불교를 학문이나 이런 쪽으로만 하면서 머리불교가 되고. 가슴으로 받아 들이지 못하고. 가슴으로 받아 들이지 못하니까 내 마음에 변화가 안 일어 나니까. 그것은 공덕이 없어요.
그것을 유상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그 다음에 무상이라는 것이 뭐냐? 생각이 없는 것.
무상은 또 뭐냐 하면은 법문도 많이 들어요. 법문을 많이 들으니까 아주 고준한 법에 대한 이해는 가죠.
가고. 그러면서 행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참선을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뭘 하면서. 항상 자꾸 내가 일어난 망념을 갖다가 번뇌를 없애려고만 하는 공부에만 치우쳐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화두들고 참선을 하든지. 기도 염불을 하든지 뭐 봉사를 하든지 하더라도 일어난 번뇌 망상을 그걸 없애려고 하는 거에요.
그럼 일어난 번뇌를 없애려고만 하면서 한평생 수행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불교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에요.
그럼 일어난 망상은 없애려고 할 필요도 없어요. 지가 없어져요. 머물 자리가 없기 때문에.
비유를 하자면 바닷물이 파도가 일어나잖아. 일어난 파도를 왜 자꾸 두드려 없애려고 그래.
두드려가지고 없애려면 또 그게 파도가 되는 거야. 그냥 두면 그것은 저절로 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러니까 이 마음에 근본자리를 잘 알면은 공부하는 것이 거기다가 없애려고 하지 말고. 본래 이것이 인연으로 인해서 생기고 인연으로 인해서 멸하는 무생이라는 것을 갖다가 잘 알 때. 그것을 우리는 불생불멸의 이치를 잘 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에요.
이 도리를 모르고 자꾸 일어난 망념을 번뇌를 없애려고 하고 없애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수행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건 정견을 몰라서 그렇단 말이야. 이런 사람은 무상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고요.
그 다음에 비유상 비무상.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선정력을 많이 키우면서. 고요한 것은 자꾸 익히면서. 염불을 하든 참선을 하든 우리가 기도를 하든, 그 하는 순간에는 참 고요하잖아요.
그 고요한 것만 즐기는 거에요. 그러면서 거기서 보살의 원력이 나오질 않고. 생활 속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 타행을 안하는거에요.
그리고 그 많은 생명들을 내가 헌신해주고. 보살로서 우리가 도와주고 베풀지를 않는다 이 말입니다.
이렇게 선정력만 익히는 사람은 부처님도 많이 질타를 했어요 경전에 보면은. 그래서 대승불교가 나온 거에요.
자 이것을 우리가 무상이라 그런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 보살도를 자꾸 행하라고 그러는데. 보살도를 그렇게 행하면 이 상막한 세상에 어려운 이 자본주의 세상에 나만 자꾸 손해보지 나한테 이익되는게 뭐 있겠는가? 두려운 생각이 나죠.
그런데 그것은 법을 알면 그렇지가 않아요. 사람이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어도 사실은 마음이 편안해야 되고. 마음이 행복해야 됩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 위에 앉아 있어도 마음이 안 편하면 그건 삶이 행복하지를 못하다는 여러분들이 보편적인 진리를 아시잖아요.
그렇듯이 보살은 항상 많은 생명을 위해서 이타행을 하는 것이 보살인데.
그 이타행을 하는 것은 무엇과도 같으냐 하면은. 내가 저 밖에 캄캄한 어둠 속에서 길을 못 찾아 헤매는 사람을 보니까 딱하다 이 말이야. 마음이 안 됐어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밝은 등불을 제가 열어주기 위해서 등불에다 불을 켠다 이 말입니다.
켰을 때 그 등불의 불빛이 누구에게 제일 먼저 비춥니까? 켜는 내 자신에게 비추는 거에요.
바로 그것이 보살의 깊은 뜻이고. 보살이 하고자 하는 공덕성이 거기에 있다는 거요. 먼저 불을 밝히면은 그 불빛의 광명을 지혜를 내가 먼저 받는 거에요.
그것은 내가 어리석은 사람을 위해서 보살펴주고 도와 주는 그 자체가 그것이 내 마음을 내가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법을 알고. 내가 나를 편안한 안심된 생활 속에 할 수 있는 공덕을 내가 먼저 보는 거에요.
그것이 공덕이 되어가지고 그것을 수행으로 삼으면서 그러한 공덕 성을 쌓아서 보살은 부처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저번시간에는. 물이 계속 흘러가면서 논에도 들어가고 밭에도 들어가고 그 가문데 들어가고. 그 생명에 들어가서 다 이렇게 윤택하고 살려주고 하고서는. 그것을 살려주고 그 물의 좋은 선행이 그 공덕으로 물은 결국은 바다에 들어간다고 그랬잖아요.
바다에 들어간다는 말은 부처님의 불심바다에 들어간다 이 말이거든요. 그래서 보살은 항상 공덕을 짓는 것으로 사는 거에요.
이 불교를 잘못 알면 여러분들이 아주 선정만 익히려하고. 고요한 것만 자꾸 익힐려하고. 자기 이기심 쪽으로 흘러가다 보면은 그 오히려 소승에 집착하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저번에도 뭐라 했냐 하면은 천둥번개는 많이 치는데 비가 안 온다. 그것은 보살심이 없다 이런 말이죠.
자 그 다음에 뭐라 했냐 하면은 구류중생들을 지금 이거 다 중생심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잖아요.
이 중생들을 보살은 다 부처님의 불심의 세계. 열반의 세계에 다 들어가게끔 하겠노라고 얘기 했잖아. 그렇죠.
그런데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였으나. 실제로는 완전한 열반을 얻은 중생이 없다 이 말이거든.
그러면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사실은 비유를 하자면 그 물이 많은 생명을 위해서 헌신하고 윤택하게 하고 그 생명을 살려주고 다 했지마는 그 물은 내가 살려줬다는 윤택하게 했다는 그런 아상이 없다는 이야기를 저번에 말씀 드렸잖아요.
하늘과 땅이 생명을 다 살렸어도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없다고 그랬잖아요.
이건 왜 그러냐 하면은 보살행을 하면서 공덕을 닦는 사람들의 가장 중심이 되는 사상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은. 보살은 소작복덕을 짓는 바 모든 공덕과 복덕을 탐착하지 않는다. 욕심내지 않는다는 거요.
그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안에는 아까 제가 말씀을 드렸잖아요.
좋은 일을 하면서도 좋은 일에 집착하지 않으니까 물들지 않고. 그렇죠?
아주 조작이 없으니까 천진한 아이처럼 우리 본성 바탕이 그렇다는 거에요. 그래서 보살의 마음은 그와 같이 그렇게 공덕을 짖기 때문에. 해도 한 바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다음 장에는 부처님이 이것을 뭐라고 비유했냐 하면은 육바라밀을 무주상보시를 가지고 부처님은 말씀을 한 거에요.
그래서 이와 같이 머물고 이와 같이 항복을 받아라 이렇게 한 것은. 보살은 반드시 그 무주상의 마음으로 무주상하는 보시로 그 마음을 머물라 이 말이야.
그 무주상보시는 또 다른 말로 표현은 여러 가지로 할 수 있겠죠?
뭐냐? 원력에다가 마음을 머물라고도 되는 거에요.
원력이다가. 보살은 원력자체거든. 그냥 그것은 대가를 바라고 하는것은 원력이 아니잖아요.
그냥 내가 내 마음이 본성이 그렇게 밖에 살 수 없게끔 되어 있는 줄 알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거에요. 그렇게 살다 보니까 이것을 내가 그런 사람이 거기에 대한 상이 없으니까 없는 거에요.
기억이 없다 이 말입니다.
왜? 그런 기억이 없기 때문에 또 내가 편안하고. 그렇잖아요. 대가를 안 바라니까. 그냥 그 자체가 행복한 거에요.
그래서 요것을 그렇게 보시면 되고. 또 한가지 이치적으로는 뭐냐 하면 이치적으로는. 본래 모두가 부처이기 때문에 본래 자리로 들어갔는데 없든 것을 만들었다면 새로 만들었다 하고. 없던 것을 새로 이루었다 하면은 이루었다 하겠는데. 본래 그 자리가 그대로 본래 내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도 했다고 하지만은 제도를 받은 것도 아니다라는 거에요.
본래 꿈이 없었는데 무슨 꿈 해석할게 있느냐 이 말이야. 그렇지 않아요?
본래 부처였다 이 말이야. 그래서 요것을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고. 그 다음에 마지막 구절이 아상 인상 중생 수자상이 없어야 된다. 이렇게 말씀했잖아.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아상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에는 제가 말했듯이 물듦이 없고. 조작이 없고. 또 상대적으로 벌려놓는 양변이 없다고 그랬잖아요.
이런 것이 없다는 것에는 진솔한 불성의 참 모습이죠. 우리의 참마음의 모습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라고 믿고 있는 내 모습은 참 나의 모습이 아니죠 그렇죠?
요것을 가지고 있으면 갈등과 괴로움과 항상 고통이 오잖아요. 그리고 윤회가 오고. 이렇잖아요.
그러니까 요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아상이라 그러는 거에요.
그것을 아상이라 그러는 거에요. 그것은 없는 것을 있다고 착각하고. 자기라고 붙들고 있는 것을 아상이라 그러고.
인상이라는 것은 나는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생명세계에 내가 주인이고.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해야 된다 생각을 하고 나 역시도 자연에 한 일부분이라는 것을 받아 들이지 아니하고. 자연을 내 마음대로 회손하고 부수고. 내 마음대로 내 틀에다 주어 맞추는 것을 가지고. 그걸 나는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마음대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런 쪽으로 서구사상의 그것이 인상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중생상이라는 것은 항상 무슨 일이든지 잘되면 내 탓이고. 못되면 전부 다 타인의 탓으로 돌리고. 그리고 또 편리하고 이익 되고 이런 것은 당연히 내가 되야 되는 것이고. 불편하고 이런 것은 다른 사람 쪽으로 가야 되고.
특히나 내꺼 가지고 내 마음대로 남의 그 생활에 배려하고 이해하고 도와주는 보살심이. 그 역시 자기 이기심으로 사는 것을 중생이 가지고 있는 아주 독특한 그런 못된 심보다. 그것을 중생상이라 그러고.
그리고 수자상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수자상이라는 것은 아까 말씀을 드렸듯이. 우리의 본성, 불성은 말이죠. 항상 이것이 연에 의해서 일어나고 연에 의해서 멸한다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반지가 되든, 금 목걸이가 되든, 그 자리에서는 생멸이 없고 수명이 없는 것이죠.
그런데 아상 인상 중생상을 내 모습으로 붙들고 있으면 거기에는. 나고 죽는 수명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 수명에 대해서 굉장히 마음이 불안하게 생각하는 거 있죠.
요것이 수자상이라는 것이죠.
출처 :진불선원 () 선불교대학 원문보기▶ 글쓴이 : 법흥(法興)
첫댓글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_()_
나누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행복한새해 복많이받으세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1.07 18:00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1.07 18:05
감사합니다 -()-
인터넷 서점 ~~~
살펴 보시면 있을거예요
@묘하 제가 컴맹이라서요 죄송하지만 혹시 인터넷 서점 전화 번호 좀 알아봐 주실수 없을 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