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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시명 작가님이 쓴 "풍경이 있는 우리 술 기행"
3년전 모놀과 정수라는 여행동호회에서 경북 영천으로 포도주빚는 체험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특이한 체험인지라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저 신기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이 여행에는 현 여행작가 협회 회원이신 허시명 작가님이 동행을 하셨고, 올라오는 길에 퀴즈를 맞춰서 허시명 작가님이 쓰신 책을 한 권 선물받았습니다.
'풍경이 있는 우리 술 기행' 우리나라의 전통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술은 그저 마시고자 하면 먹기만 할 뿐 애주가는 아닌지라 대충 덮어두고 있다가 문득 받아둔 책이 생각나 한장 두장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나서 우리나라 전통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겼습니다. 우리의 문화와 전통은 차치하더라도 술 속에 숨어있는 숱한 역사와 이야기들, 그 속에는 술을 빚는 사람들의 서글픈 시간들과 인내와 고통에 곳곳에 숨어 있었습니다. 맥주와 소주가 판치는 세상에서 점점 잊혀져 가는 우리 술에 대해 관심이 생겨난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여행할 때마다 그 지역의 특산 전통주를 한 병씩은 꼭 사옵니다.
어쨋든 이번 진도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진도홍주를 만날 수 있을거라는 것입니다. 40도가 넘는 붉은 빛의 증류주...40도라는 단어만 들어도 일단 오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도수 높은 증류주라는 사실과 다른 투명한 증류주와는 달리 붉은 빛 머금은 술이라는게 참 매력적이었습니다.
★ 진도홍주를 붉게 만드는 재료... 지초
진도홍주가 붉은 이유는 바로 지초라는 약재때문입니다. 붉은 염료로 쓰이기도 하는 이 약재는 지치과 다년생 초본으로 진도에서 많이 자생했으나 현재는 진도,제천,금산 등지에서 재배된다고 합니다. 지초는 성질이 차기 때문에 열을 내리고 독을 풀고, 염증을 없애 새살을 돋아나게 하는 작용이 있고, 특히 항 당뇨기능작용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줏고리에서 증류되어 나오는 원액은 깨끗한 천에 받쳐진 지초를 통과하게 되는데 지초를 통과하면서 붉게 물듭니다. 지초의 효능때문인지 몰라도 진도홍주는 독주임에도 술이 깨지않는 불상사는 없다고 합니다.
★ 문화관광 해설사이신 허상무 선생님께서 만들어주신 일출일몰주...
진도를 찾아간 첫 날 점심부터 때아닌 진도홍주의 공습을 받게 된것은 어쩌면 진도 분들의 진도홍주에 대한 자부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진도에 왔응께 진도홍주로 시작해야제" 변형적이긴 하지만 40도의 진도홍주는 진도를 찾아온 여행객들에게 맥주에도, 사이다에도 섞여 상 앞에 놓였습니다. 비중때문인지 절대 가라앉지 않는 특성으로 붉은 기운은 항상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결국 저녁에는 일출 일몰주라 하여 동서화합주로 하루를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진도홍주의 첫 만남... 술잔이 입술에 닿고, 목을 타고 흐르면 고량주처럼 타들어갈 듯한 느낌과 속에서 확 올라오는 느낌이 들줄 알았는데, 입안에서 독한 맛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고, 속으로부터 화염처럼 확 치솟는 느낌도 없었습니다. 속을 차분히 다독이며 올라오는 느낌은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오묘한 느낌의 선홍색 빛깔은 열정적이다 못해 지나치게 야한 느낌마저도 들었습니다.
★ 집에서 연출해본 진도홍주...
진도홍주는 조선 성종 시절로 올라갑니다. 허 종이란 분에게 청주 한씨 부인이 있었는데 홍주를 잘 빚었고, 그 비법을 대대로 전했다고 합니다. 조선 성종이 비인 윤씨를 폐하기 위해 어전회의를 열고, 허종 또한 입궐하여 참석해야 했습니다. 부인인 청주 한씨는 나중에 큰 화가 미칠것을 예견하고 허 종에게 홍주를 마시게 했는데 술이 워낙 독한지라 입궐하는 도중 말에서 떨어져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후에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고 폐비 윤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자 당시 어전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가려 죽이게 되는데, 다행히 허 종은 어전회의를 참석하지 않아 화를 면했다고 합니다. 이런 유래로 봐서 당시 한양에서도 홍주가 빚어진 걸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선조에 이어 공빈 김씨의 둘째인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첫째인 임해군을 정적제거 차원에서 진도로 유배를 보내게 되는데, 임해군의 처인 허씨 부인은 조카인 허대를 불러 같이 진도로 내려가 임해군을 보살피라고 부탁했습니다. 마침 광해군은 자신의 형님을 너무 먼곳까지 보내는 처사가 가혹하다며 진도에서 강화도로 유배지를 옮기게 됩니다. 하지만 허 대는 이미 진도에 내려가 있었고, 다시 올라오지 못하고 진도에 눌러 앉게 되는데, 허대가 양천 허씨 가문의 시조가 됩니다. 허대가 진도로 내려오면서 술을 좋아하는 임해군을 위해 소줏고리도 가지고 내려오게 되는데 아마도 여기서 진도홍주가 탄생한 모양입니다.
★ 진도홍주... 사진 찍느라고 아침에 한 잔 마셨네요...ㅎㅎㅎ
여러모로 진도홍주가 자리를 잡게 된데는 전후사정으로 비추어 볼 때 우선 몽고군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빚어마셨던 소주가 고려시대때 전해지고, 조선 사대부가에서 자리잡았던 술이 유배지나 다름없었던 진도로 내려오게 됐고, 유배를 내려온 사람들도 한양의 술을 마셨을테니 홍주를 알았을 터입니다. 이렇게 자리잡은 진도홍주는 그 이후에도 계속 빚어지면서 진도의 명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진도군청에서 동행해주셨던 분들이 첫 만남의 자리에서 진도홍주를 내놓는 것은 그래서 더욱 무리가 아니었을 겁니다.
★ 현대식으로 만들어지는 진도홍주...
진도에서는 홍주를 참 많이 빚습니다. 전문 제조업체도 많습니다. 양주병같은 두툼한 술병에 담겨진 진한 루비색같은 진도홍주는 이미 선물용으로도 많이 팔려나갑니다. 하지만, 이 술들은 대체로 기계로 빚어내는 술들인지라 옛 전통에 조금 엇박자가 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물론 술을 빚는 노력이야 대단하겠지만, 그 옛날 허종의 목숨을 살리고, 귀양가는 임해군을 위한 술도 아닐테고,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가 흥선대원군에게 진상했던 술은 아닐겁니다.
★ 진도홍주를 내릴때 쓰는 소줏고리(고조리라고 부릅니다)
진도에서의 2박 3일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귀경하기 전 전남 무형문화재 26호로 지정된 허화자 할머님 댁에 잠시 들렀습니다. 진도홍주를 가장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진도홍주도 사고, 이야기도 들어볼까해서 입니다. 쌍정리 신용협동조합 맞은 편 골목으로 들어가니 무형문화재 간판이 외롭게 서 있습니다. 담배가게의 안방에 마침 할머님이 계셨습니다. 다행히 못 뵙고 올라가는 불상사는 면했습니다.
★ 허화자 할머님이 내주신 오래된 진도홍주...
진도홍주 한 병 사러왔다고 했더니 대뜸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십니다.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안채로 일행을 이끄셨습니다. 사는 건 사는 거고 진도홍주 한 잔 하고 가라시며 툇마루에 자리를 잡으십니다. 담근지 오래된 술이라며 한 병 꺼냈고, 냉장고를 열어 진도홍주 마실 때는 '괘기'를 먹어야 한다며 소고기며, 명태전이며, 귀하디 귀한 우럭 말린 것도 내 주십니다. 냉장고 안에 있던 것들이라 차디 찬 고기들인데 홍주와 어울리는 맛은 정말 기가 막힐 정도였습니다. 소주잔에도, 대접에도, 밥공기 뚜껑에도 붉은 진도홍주가 담깁니다. 같이 간 일행은 운전때문에 못마시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저 혼자 거의 독차지했습니다.
술자리 속에서 이런저런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야기 하시는 도중 갑자기 설움에 복받치셨는지 눈물을 지으십니다. 그동안 진도 홍주가 알려지면서 유명세도 많이 타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답니다. 툇마루 한쪽에 있는 바구니에는 그간 다녀갔던 사람들의 명함이 어지러이 쌓여 있었습니다. 찾아온 사람들도, 진도군청에도 그간 담아두었던 설움이 많이 복받치신 듯 손주뻘 되는 객들 앞에서 그렇게 계속 눈물을 지으셨습니다. 외로우셨을 테고, 천태만상 '징헌' 사람들도 많이 보셨을겁니다. 그 마음 깊이 헤아리고 싶었지만, 너무나 길고 길었던 할머니의 삶을 한 순간에 담을 순 없었습니다.
★ 진도홍주를 빚을 때 필요한 곡자(누룩)
일흔이 훨씬 넘은 허화자 할머니는 이제 몸이 성치 않아서 홍주도 내리기 힘드시다 합니다. "소주 내릴때 제가 내려와서 도와드릴께요" 라고 건네자 불화와 같은 한소리 '머헌다고.. 햇짓거리하고 자빠졌네..."ㅠ.ㅠ 광에서 또 한병 홍주를 손에 쥐고 나오셨습니다. 지금 마신 것 하고는 차이가 있을거랍니다. 지금껏 마신건 담근지 오래된 건데, 지금 이것은 담근지 얼마 안된거라며 밥공기 뚜껑에 또 한잔을 따라주십니다. 소주 자체가 증류주 인지라 확실히 오래된 것이 맛의 깊이가 있었습니다. 담근지 얼마 안된 홍주는 오래된 것에 비해 가볍고 눅눅한 맛이 들었습니다. 벌써 들이킨 술잔만 대여섯 잔이 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몽롱한 가운데서도 정신이 멀쩡합니다. 두근반 세근반 되어야할 속은 잔잔한 바다처럼 고요합니다.
★ 허화자 할머니가 직접 내린 진도홍주(50,000원)
분홍색 보자기로 동여매주신 진도홍주 댓병짜리를 안고 할머님 댁을 나섰습니다. 없는 살림 거덜내고 나서는 것 같아 어찌나 죄송스럽던지... 나중에 다시 진도를 찾으면 할머님 주전부리나 안겨드려야 겠습니다. 진도의 한과 설움이 녹녹히 베어있는 허화자 할머니는 말 그대로 진도의 대표성을 갖기에 충분합니다. 할머님 부디 건강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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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진도 홍주 마시고 있습니다 ~~~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