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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묘행무주 원문보기 글쓴이: 묘하
제5강 묘행무주분/설우스님
안녕하세요. 저번 주에 이어서 오늘은 제 4분 묘행무주분입니다.
묘행이다. 無住무주다. (없을 無, 머무를 住) 머무름이 없는 보살님의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죠?
그래서 오늘 강의 할 본문을 제가 한 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수보리야. 보살은 어떤 대상에도 집착 없이 보시해야 한다. 말하자면 행색에 집착 없이 보시해야 하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도 집착 없이 보시해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하되 어떤 대상에 대한 관념이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보살이 대상에 대한 관념에 집착 없이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때문이다.
수보리야.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동쪽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남 서 북방 사이사이 아래위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대상에 대한 관념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수보리야. 보살은 반드시 가르친대도 살아야 할 것이다.
이게 오늘 여러분들하고 강의할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본문 중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 중요한 것을 제가 가려서 말씀을 잘 풀어드려야 됩니다.
저 번 시간에 선현기청분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을 수보리가 했거든요.
부처님이시여. 착한 남자 착한 여인이 발심을 해서 부처님과 같은 마음으로 그 모습으로 삶을 살려고 하는데. 그럴 때 저희들이 이 마음을 어디에다 머물러야 되며. 이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물었죠.
그래서 오늘 이 묘행무주분에서 부처님께서 그것을 가닥을 잡아 주는 거에요. 수보리야 마음을 어디다가 머물러야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부처님은 무주라고 말씀을 했거든.
마음은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리고 어떻게 그런 마음을 다스려야 됩니까?
그랬을 때 모든 나눔을 가질 때 보시를 할 때 어떤 조건과 바램과 그 구하는 마음으로 하지 말고. 그냥 깔끔하고 깨끗하고 그리고 양명하고 그렇게 좀 기분 좋게 그런 마음으로 그냥 보시해라.
그게 부처님의 보시하는 마음이니까. 그런 마음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려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제가 구체적으로 정리를 좀 해 볼게요.
먼저 부처의 마음으로 인생을 살고자 하는데 어떻게 그 마음을 우리가 다스려야 합니까? 할 때. 먼저 말했던 것이 뭐냐 하면은 발심을 했다 그랬거든.
그래서 그 발심이 어떤 발심을 했느냐? 이걸 우리가 한 번 생각을 해 봐야 되는 거요.
어떤 발심을 했을까?
조금 한문으로 말씀 드리면 무상무구 발심을 했느냐? 유상유구 발심을 했느냐?
無像무상이라 할 때는 (없을 無, 모양 像) 여기에서 무상이라는 말은 양변이 없는 거를 무상이라고 그러거든요.
두 가지 마음이 없는 거. 두 가지 마음이 없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한다. 미워한다. 또, 이익기 되는가 손해가 되는가? 그리고 추함과 깨끗한가? 저 사람이 덕인인가?
또는 망인인가? 성인인가? 또 이런 두 가지 마음이 없는 것을 무상이라고 그래요.
그리고, 無求무구라는 것은 (없을 無, 구할 求) 바라는 마음 없이. 또 뭔가 쟁취하고자 하는 이익심을 가지고 보시하는 마음이 있는지.
이런 것이 없는 것을 무상무구의 발심이거든.
그리면 그렇게 두 가지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고. 바라지도 아니하고. 그렇게 조건을 따지지도 아니하고. 그리고 계속 그 베푼 마음에 그 스스로가 자꾸 상을 가지고 붙들고 있는 이런 마음이 없는 것을 여기서는 무주라고 그런 거에요. 무주.
유상유구는 뭐냐?
유상유구는 정 반대지요.
유상(있을 有, 모양 像) 여기서 모양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좋은 게 뭡니까?
그 오욕락이지 않습니까? 명예라든지. 권력이라든지 제물이라든지. 다 이런 이익 관계되는 이러한 것을 집착하고. 이런 것을 우리가 원한다든지 바란다든지 이것이 참 마음이 강하거든요.
그런데 그게 사실은 그렇게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부자가 되느냐 하면은. 괜히 부자도 안되고 스스로 자꾸 괴롭기만 하는 상황이 벌어지거든.
그래서 그걸 유상이라 그러고. 유구라는 것은 그것을 내가 취하고자 한다고 해서. 그게 그렇게 내 욕심대로 다 채워지는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머리가 좋고 경제에 상당히 머리가 뛰어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잘 사는 건 아니에요. 경제학 교수가 다 그렇게 잘 사는 건 아니에요. 못하는 사람도 많다 이 말이야.
그게 머리로 가지고 한다고 해서 세상이 잘 살아 지는 건 아니다. 그러면 결국은 뭐냐?
마음에 내 스스로 안락을 가질 수 있는 진리를 내가 담아야 된다. 이런 이야기거든.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무주는 뭘 말하겠습니까?
머무름이 없다는 말은 마음을 비운다는 이야기거든. 비운다는 것은 무얼 말합니까? 진공이다. 이 말이죠.
진공. 그러니까 진공에서 그 집착과 애착과 그 바램과. 어떤 그 상에 매이지 아니하고. 깨끗하게 그냥 흐르는 물처럼 보시하고 공덕을 많이 지어라. 이것을 묘유라 그러잖아요?
머뭄이 없는 빈 공간에서 그 그런 부처의 불심의 마음이 흘러 나오니까. 이게 묘행무주라는 말은 진공묘유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쉽게 말한다고 그 진공을 텅 빈 마음을 무심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거에요.
무심하다고 해서 관심 없는 소리가 아니에요.
그런 집착과 애착과 구하는 마음이 없으니까. 텅 비어서 그게 무심하다는 것이고.
그 무심한 그 마음을 바탕으로 해서 깔끔하게 깨끗하게 아주 순수하게 그리고 양명하게 뒤끝이 아주 앙금이 없이 너무 맑게. 그렇게 하는 것을 평상심이다 이러는 거요.
우리가 말하는 평상심하고는 조금 다르겠죠. 그걸 말하는 겁니다.
이것을 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은 좀 와 닿는 것이 딱딱할 겁니다.
그런데 장자외편에 양생주라는 편에 보면은 장자가 문항에게 문항이 장자에게 그런 말을 해요. 오래 좀 살고 마음을 편안하게 양생하는 법이 있는냐? 물었으니까. 그때 장자가 그 문항에게 누구를 소개 시켰냐 하면은 포정이라는 사람을 소개를 시켰는데. 그 포정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은 소를 전문으로 잡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하루에도 소를 몇 마리씩 잡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도살 업을 하는 사람이다 이 말이야.
그래서 그 도살 업을 하는 사람이 문항을 만나니까. 문항이 어떻게 하면은 마음이 편안해서 금강도 좋고 내가 장생불사 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웰빙의 방법이 있느냐 이렇게 물었겠죠?
그러니까 그 포정이 하는 말이 임금이시여. 제가 칼을 들고 소를 잡은 지가 한 몇 십 년 되는데. 처음에 칼을 들고 소를 잡을 때는 제 눈에는 소만 들어오더라는 거에요.
그냥 소가죽하고 소 살만. 그래서 그냥 억척 같은 마음으로 힘을 용기를 내가지고 그것을 가르기 시작했고 그랬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것이 한 5~6년 지나가니까. 그때는 살가죽은 보이지 아니하고 소의 뼈만 보이더라는 거요.
그래서 그 뼈를 또 가르느라고 계속해 왔는데. 한 10년 넘게 지나다 보니까. 이제는 살도 보이지 아니하고 뼈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 뭐만 보이느냐? 살하고 뼈하고 붙은 거 같아도 그것이 공간이 있다는 거요.
살하고 뼈하고 붙은 거 같아도 공간이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이 도의 경계에 이르면은 그 공간이 고속도로처럼 넓게 보인다는 거요.
그래서 처음에 내가 살과 뼈가 보일 때는 소 한 마리 잡는데 칼을 하루에는 몇 번을 갈아야 되는데. 지금 10년이 넘었는데도 한 번도 내가 칼을 갈지를 않습니다.
왜? 공간만 다니니까
이 말은 양생에 대해서 한 말이지만. 우리가 마음을 비운다는 사람이 마음을 비우면 무슨 공덕이 있고 무슨 이익이 있고 무슨 기쁨이 있겠느냐? 즐거움이 있겠느냐? 이 말이죠.
그런데 사실 이 포정과 같이 마음을 그렇게 비웠을 때. 내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마치 허공에 구름 없이 그냥 마냥 서방으로 가는 그 달 모습과 같이. 마음이 얼마나 유의스럽고 한가하고 좋겠느냐?
그렇다고 이 사람이 직업 없이 그냥 마냥 놀고 할 일 없이 그냥 노는 그런 뜻에서 한 말은 아니거든요.
일상생활 그대로 하면서 그렇다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무주라고 그랬을 때. 제가 또 무상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상이 없는 것이다. 이런 뜻이거든요.
그럼 여기서 말하는 상은 뭐냐?
이 금강경에서 가장 알아야 될 4가지 큰 상을 들먹인다면은 아상과 인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이라는 거에요.
그럼 아상이라는 것은 무엇을 아상이라 그러느냐? 이 사상을 잘 정리하고 아셔야 됩니다.
그래야 계속 여기는 상을 척파시키는 말씀이기 때문에. 상을 해체시키는 말씀이거든요.
그래서 첫째 아상이라는 것은 내가 사랑한다, 미워한다, 이익 된다, 손해 된다. 이러한 두 가지 생각을 가지고 분별심을 가지고 항상 사는 그 모습의 생각이 나의 모습이고 그것이 내 마음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살면 그게 아상이 되고. 그걸 집착한다 해서 아집이라고 그러는 거에요.
그런데 사실은 그것은 인연에 의해서 그 상황에 맞게끔 잠깐 일어난 현상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사실 나의 참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죠.
이것을 나의 모습이라고 착각을 하기 때문에, 내가 붙들기 때문에,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은. 꿈꾸는 사람이 꿈에서 아주 보석을 많이 주었을 때 기분이 좋죠.
그런데 그 기분 안만 좋아도 그 보석은 내 것이 아니거든요.
내가 꿈에 정승벼슬을 한다고 해서 기분이 좋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은 정승이 내가 된 거는 아니거든요.
그것은 허상이고 허구에요. 내가 이렇게 분별하고 그러한 집착하고 애착하고 그 애욕을 가지고 이러는 것들이 사실은 그것을 가짐으로 인해서 그것들이 나를 지켜주고 그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고 그것들이 나를 편안하게 해 줄 것 같은 기대감 속에서 그것을 내가 붙들고는 있지만도.
그것은 눈병난자가 허공을 바라보고 아지랑이를 보고 착각하는 것과 똑같다 이 말이야. 왜?
그것은 절대 오랫동안 머물지를 안아요.
그것을 객진번뇌라고 하는데. 객이라는 것은 밖에서 들어 온 사람이라 이 말이야. 들어온 게 아니라 손님이다 이 말이야.
손님은 반드시 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갈 때는 어떡하겠어요? 그냥 괴로운 거야.
그래서 옛날에 어떤 선비가 아주 높은 벼슬을 했는데 그 벼슬을 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선물이 많이 들어오죠.
창구가 가득가득 차는 거지. 그러니까 그 선비가 아침마다 출근을 하면서 창구 쪽을 바라보고 돗자리를 깔아놓고 항상 절을 하고 나가는 거에요.
부인이 바라보니까 벼슬을 하두만은 사람이 어떻게 조금 이상해 졌다고. 그 창구보고 왜 자꾸 절을 하느냐?
그래 그 선비가 하는 말이 들어 올 때 내 허락도 없이 저렇게 들어왔는데. 갈 때도 내 허락 없이 그냥 온다 간다 소리 없이 깔끔하게 깨끗하게 우리 집에 아무 손해 끼치지 말고. 그냥 나가시라고 내가 아침마다 부탁한다 그러거든.
그게 아상 인상을 우리가 붙들고 참 어리석죠. 그죠? 그 허덕이다 한 평생. 그냥 허덕이다가 가는 거야.
그리고 인상이라는 것은 내가 항상 그 이 사람과 이 자연과 분별을 일으키는 거에요.
그래서 이 모든 생명세계는 사람이 근본이고, 사람이 제일이고,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된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사람을 살아가게끔 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러한 물건들이고 현상이지.
그러니까 사람이 마음대로 관리하고 써도 된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사실 서구방식이야.
동양생각은 그렇지를 않아요.
사람 역시도 이 생명세계, 이 자연과 같이. 같이 존속하고 같이 공생하면서 똑 같은 평등한 입장에서 같이 살아가는 입장이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사람이 제일이라고 생각할 때 여러분들이 보시는 보모가 돌아 가셨다든지. 사랑하는 참 사람이 죽었다든지. 이랬을 때 못살 것 같죠?
그런데 지금 혼자 사시는 분 물어보세요. 못사는가? 잘 살아요. 잘 산다고.
그런데 정말 못살 일이 뭐가 못사는 일이 벌어지냐 하면은. 예를 들어서 저 태양이 문제가 생겨서 없어졌다. 예를 들어서 지하수가 고갈이 돼서 물이 없어졌다. 우리는 이 공기가 없어졌다. 10분을 못살아요.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자만하고 오만하고 환경을 다 이렇게 파괴하고 난 개발하고 이렇게 오염시키고. 이러느냐 이 말이야.
그러면서도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은 우리가 자손을 위해서 그런다 거든.
그런데 사실은 그 자손들이 볼 때는 그 웃기는 이야기야. 그 자손들이 어떻게 살라고 그래? 그렇죠?
그리고 중생상이라는 것은 이 중생은 말이죠. 이 참 불성의 지혜가 이렇게 열리지 않으면 중생은 항상 이기심을 벗어 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이기심 끝에 결론이 뭐냐 하면은 잘 되고 성공하고 내가 존경 받고 모든 것이 잘 성취됐을 때는 다 내가 잘나가지고 내가 능력 있어 잘 된 걸로 생각을 하고.
내가 무엇이 좀 잘못되었을 때는 나는 머리가 좋고 나는 잘했는데 상대가 잘못해서. 그래서 잘되면 내 탓이고 못되면 부모 탓이라고 그러잖아. 그게 중생의 속심이라.
그리고 수자상이라는 것이 뭡니까?
수자상은 본래 우리의 이 마음이라는 자리는 생멸이 없는 자리야. 죽고 사는 자리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죽고 산다고 할 때 여기서 생멸이라는 말은 번뇌 망상이 일어났다가 또 그 번뇌망상이 잠깐 머물렀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이런 것이 생사고 생멸 심이라 그러지.
본래 우리의 그 불성, 아주 그 광명에 빛나는 금강과 같은 반야 지혜의 자리는 그것은 생멸이 없는 자리라는 것이죠.
그러한 생명이 없는 자리가 죽고 사는 것이 어떻게 영향을 끼치겠느냐? 이렇게 해서 그 근본자리를 모르니까 우리가 죽는 갚다. 죽으면 괴롭다. 불안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요.
그건 형상만 보고 그러는 것이지.
그래서 이러한 사상이 있으면 중생이고. 이러한 사상이 없으면 부처님이시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자 부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주는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잘 그렇게 베풀어라 이렇게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러면 그 머무는 바 없이 베푸는 그 방법을 금강경에서는 육바라밀을 말씀을 했어요. 육바라밀.
이 육바라밀이라는 수행이 대승수행에 참 중요한 수행덕목이거는요.
이걸 여러분들이 잘 들으셔야 됩니다.
육바라밀을 이야기를 할 때. 먼저 반야바라밀을 제가 말씀을 잘 드려야 되요.
반야. 반야는 지혜를 말하는 거잖습니까? 그러면 이 금강경이 말씀하시는 그 요지가 뭐냐 하면은 반야바라밀의 삶을 살으라는거에요.
반야라는 것은 지금 말씀을 드렸듯이 무주의 마음이 반야고. 무상의 마음이 반야고. 그렇죠?
또, 예를 들어서 그 무상, 무주, 그리고 그 마음에 조금도 사상이 없는 걸 말하는거지 않습니까?
이러한 것이 없는 것이 반야거든.
그러니까 반야라는 것에는 항상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은.
사물을 이렇게 보면은 그 사물의 본질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이죠.
그 본질을 바로 본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모든 것은 연생연멸하는 것이다.
인연에 의해서 생겼다가 인연에 의해서 멸하는 것을 그 본질을 바로 본다는 것이에요.
그것을 지혜라고 그러는 것이죠.
그러면 그것이 본 실체가 없고 인연에 의해서 생기고 인연에 의해서 멸한다는 것을 잘 알면은 거기에 집착하고, 거기에 애착을 하고, 거기에 구속을 받을 일이 없는 것을 반야의 삶이다.
그리고 바라밀이라는 것에는 그렇게 살면은 내 마음이 아주 안심된 마음이 되고, 행복한 마음이 되고,
그리고 그렇게 적멸심에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이죠.
그건 적멸심에 들어가면은 하는 일마다 모든 것이 흔적을 안 남긴다는 것이죠.
우리는 사랑하면 사랑하는 흔적을 남기잖아요. 미워하면 미워하는 흔적을 남기잖아요.
욕심부리면 욕심부린 만큼 흔적이 남게 되어 있어요. 냄새가 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반야의 삶을 살면은 그런 흔적이 없어요.
마치 맑은 물이 병에 들었을 때 하루 종일 흔들어도 그 맑은 물은 조금도 오염이 안되고 형상도 남기지 아니하고 흔적이 없듯이.
그래서 반야의 삶을 선에서는 몰정족이라 그래요. 종적을 남기지 않는 삶이다.
그걸 바라밀이라 그래요. 마치 새가 허공을 날아가듯이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반야 바라밀의 삶이다.
그래서 이 마음을 바탕으로 해서 남에게 보시하는 것을 보시바라밀이다 그러는 거에요.
그래서 보시바라밀이라고 할 때 내가 예를 들어서 남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한다 그랬을 때. 봉사하는 내 마음도 그 반야의 지혜로서 비우고.
그리고 그 반야의 지혜의 마음으로 하니까 그 내용의 물건도 그 내용의 사정도 내가 잊어버린다는 것이죠.
귀하고 천하고 가치에 대해서 내가 집착 안하고. 또 그것을 받는 대상에도 사람에게도 그 사람이 받을 만한 사람인가 받지 못할만한 사람인가 또는 줄만한가 또 주어서 다음에 나한테 저 사람이 조금 그래도 도움이 될 건가.
이런 분별심이 없이 하는 것을 3가지가 공했다. 그러한 마음을 비우고 하는 것을 보시바라밀이라 그러잖아요.
이 보시바라밀을 잘 하면은 이 자체가 엄청난 공덕이 되고 이게 굉장히 생활 속에 살아있는 산부처의 모습이고 산 그대로 살아있는 수생입니다 이게.
수행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거든요.
그런데 이 보시 바라밀수행이 가장 수행중에서 으뜸이 되는 수행이에요.
그리고 지계바라밀이라는 것이 있거든.
그 지계바라밀은 뭐냐하면 계를 잘 지켜야 된다는 말인데.
여러분들이 오계, 십계를 받지만은 그러한 것도 계율이지만은 중요한 것은 뭐냐?
그 근본이 되는 건데. 마음에 심지계를 잘 지킬 줄 알아야 된다.
예를 들어서 생활하는데 경계가 왔을 때 그 경계를 부딪혔을 때 여러 분들이나 부족한 저나 생각할 게 뭐냐 하면은 아~ 경계가 왔는데 이것이 내가 오욕락을 성취하고 기쁘고 성내고 또 감정 이런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것이 도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 이 경계를 가지고 먼저 그 순간적으로 내 머리가 돌아가는 것이 아주 전광석처럼 돌아가요.
그러면서 경계에 내가 매하는 거에요. 경계에 붙들리는 것이죠. 경계에 머무는 것이죠.
경계에 머물면 무주가 아닌 거에요. 경계에 머물면.
그런데 그 경계가 왔을 때 아~ 이것은 여기에 붙들리면은 내가 유주가 되고 무주가 아니구나.
그럼 이건 중생심이지 하면은. 이미 그 경계와 내 중생심은 없어져 버리는 거에요.
없어지면서 그 마음은 무주의 마음으로, 그 마음은 불심의 마음으로, 텅 비는 거에요.
텅 비었으면은 텅 빈 그대로 삶을 보살행을 하라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알면서도. 아니야 그러면서 자기 익힌 습관과 업습대로 자기가 마음을 돌리는 거에요. 방향을 돌리는 거에요.
그러면 그것은 마음의 본래 원을 져버리는 거니까. 불심의 원을 져버리는 거니까. 그 계를 파하는 거에요.
그것이 근본 마음의 계를 내가 무너뜨리는 거에요. 이게 계바라밀이라는 거에요.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그 순간적으로 나에게 닥쳐온 그 비어있는 마음. 무주의 마음. 그 불심의 마음을 봤으면 고대로 잘하면 지계바라밀이 되는 거에요.
왜? 아주 깔끔하고 깨끗하고 순수하고 순박하고 그렇게 사니까 뒤가 깨끗하다 이 말이오.
그래서 바라밀이라고 그러는거에요.
그리고 인욕바라밀이라 그러니까. 인욕바라밀은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어떤 경계가 부딪혀서 또 상황이 벌어졌는데 나한테 이익이 되든지 손해가 되든지 그런 계산이 의해가지고 화가 났다. 그런데 이 화를 목구멍까지 올라 왔는데. 그래도 사람이 모양새는 지켜야지. 그래서 억지로 참는다 이 말이오.
그걸 우리가 인욕이라 그러잖아요.
그런데 불가에서 육바라밀에서 말하는 인욕은 그런 게 아니에요.
그것은 병드는 인욕이야. 그것은 우리 한국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화병이라는 게 있어요.
그 옛날 사람들은 적이라 그러 대. 그게 이렇게 속에 뭉친다고. 그게 뭉쳐있으면 굉장히 큰 병이 되는 거요.
화병이 되는 거라. 그 요즘 말로는 스트레스라고 그러잖아요.
요기까지 올라온 것을 억지로 참는 거는. 그건 인욕이 아니에요.
이 불가에서 말하는 인욕이라는 것에는 아까 제가 말씀을 드렸듯이.
모든 내 마음 앞에 다가오는 이 경계들은 전부 다 인연에 의해서 오는 거에요.
인연에 의해서. 어떤 조건과 상황에 있어가지고 이것이 잠깐 일어났다 이 말이야.
일어났는데 이것을 어떻게 봐야 되느냐 하면은. 이것을 번갯불 같이 봐야 되고. 이것을 허공의 아지랑이 같이 봐야 되고. 이것을 물위에 뜬 거품같이 봐야 되고. 이것을 꿈꾸는 꿈속의 일같이 봐야 된다는 거에요.
이렇게 보는 것이 아주 순발력 있게 봐야 된다는 거에요.
경계가 왔을 때. 이 둔한 사람은 순발력이 없으면요 거기에 붙들려 버리는 거야.
그래가지고는 영 모양처리가 잘 안 되는 거에요. 그래서 색깔이 아주 다양하게 변하죠.
그리되면 안 되는 거야. 아주 순발력이 있어야 되. 딱 오면은 아 이건 실체가 없는 것이 왔구나.
그러면 이놈한테 안 속는 거지.
그런데 이 놈한테 속으며 사람이 인품이 꼴이 말이 아닌 거에요.
그래서 고걸 아주 순발력 있게 할 때. 요 순발력 있는 것이 뭐냐 하면은 지혜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이 지혜의 삶. 반야 바라밀의 삶이라는 것이 이렇게 좋은 거에요.
탁 오면 반야로서 탁 보는 거에요. 아 이것이 나를 또 속이러 왔구나.
그런데 내가 지혜가 있는 사람은 속을 일이 없죠.
아 여기서 나가가지고 길을 잘 아는 사람이 누구한테 괜히 가서 물어보고 뭘 합니까? 그냥 내가 갈 뿐이지.
그러니까 오면은 지나가게 끔 만들어 주는 거에요. 그것을 없애려고 하고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아니까 속지 않는다 이 말이야.
내가 네 정체를 알아 버렸는데. 내가 너한테 속을 일이 뭐 있으며. 내가 네 정체를 알았는데. 너로 인해서 내가 상처받을 일이 뭐 있느냐?
이렇게 되면 아예 이게 여기서 올라오지를 않아. 화가. 그것을 인욕바라밀이라고 그러는거요.
그래서 정진바라밀이라 우리가 그러잖아요.
정진 바라밀이라고 할 때 우리가 이러한 지혜가 일상생활 속에서 여러 분들이 그대로 잘 이렇게 쓸줄아는 사람이 정진을 잘 하는 사람이야. 정진이라고 해서 우리가 물론 고요한 장소도 좋죠
또 숲이 많고 그런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고요하고 숲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데 요즘 찾아 가 보세요.
그러면요 거긴 집도 못 짓고 그래요. 그린벨트가 되어가지고. 국토이용 법칙이 있어가지고. 그런 데는 허가도 안 납니다.
그것을 찾아 다닌다고 평생 허덕이다가 또 한 생이 가는 거야.
그런데 그 숲 좋고 물 좋고 공기 좋고 그 좋은 도량을 어디서 만들어야 되냐 하면은 여기서 만들어야 되는 거야. 여기가 어딥니까?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있는 곳이 어딥니까? 생활이야. 생활을 떠나서는 무엇을 구하려고 하면은 그것은 무엇과 같으냐 하면은 토끼 뿔 구하는 거와 같고. 거북이 털 구하는 거와 같애. 생활을 떠나가지고 뭘 자꾸 구해본들 그게 구해지느냐 이 말이야.
또 내가 공부한다는 그 자체도 내가 생활 속에서 내 스스로 내 자신을 사랑하고. 내 스스로 내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내 스스로 내 자신을 안심된 인생을 살기 위해서 내가 공부 하는데. 굳이 내 마음을 떠나서 어디서 토끼 뿔을 구하고 거북이 털을 구하려고 그렇게 평생을 신발을 달구면서 다니느냐 이 말이야.
정신 차리고 꿈 깨라 이 말이야. 알겠습니까?
그 생활 속에서 잘 하라는 거요. 그런데 그것이 이 수행법이 아주 단순하게 잘 만들어 놨어요.
그 단순하게 만들어 놓은 수행 법이 뭐냐 하면은 염불하는 법이에요.
이 수행법은 복잡하면은 잘 안 해요.
예를 들어서 천태지지선사 같은 분들이 그 수행하는 수행법을 아주 체계적으로 잘 구조적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그런데 그 수행법이 지금 그렇게 대중적으로 잘 하지를 않거든요.
예를 들어서 유식학 같은 거. 이 유식학이 마음을 분석하고 마음 다스리는 법을 참 아주 섬세하게 잘 해 놨지만 너무 복잡해.
그래서 사람들이 그걸 잘 안 해.
그런데 제일 잘 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아주 단순하게 하는 거요. 나무아미타불 10번만 불러도 극락왕생한다. 그런데 일심으로 불러라. 그 일심은 뭡니까? 무상의 마음이고 무주의 마음이고 그런 것이거든.
여기서 말씀 드렸듯이. 무주상 보시하는 마음. 이런 것들이 다 일심이거든.
그 일심으로 그냥 나무아미타불 부르면 되는 거요.
그리고 참선하는 사람은 복잡하면은 참선이 될 수가 없어요.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참선은 어째서 모든 생명이 다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부처님은 그렇게 말씀했는데 조주 스님은 개는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 왜? 어째서 개가 불성이 없는가? 아주 단순해요. 이게 수행 법입니다.
그러니까 여러 분들이 염불을 안하고 참선을 안 하는 분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일상생활 속에서 자원봉사를 많이 하시는 거에요. 자원봉사하고. 생활 속에서 그 생활을 하되 어떤 정진을 하느냐?
아까 말씀을 드렸듯이 모든 일어나는 현상 일들을 구름과같이 봐야 되고. 이슬같이 봐야 되고. 번개같이 봐야 되고. 거품같이 봐야 되고. 꿈같이 보라는 거요.
그러면 거기에 내가 거기다 대고 내가 그렇게 목메어 가면서 구하려고 하고. 그것을 그 구하려고 괴로워하고. 그걸 구하려고 내 스스로 내 자신을 지옥을 만들고. 밤잠을 못 자고. 그짓을 안 한다는 거에요.
그러니 이 생활 속에서 하는 공부에요 이것은. 요것을 아주 지혜를 가지고 직관을 잘 보라는 것이죠.
이걸 연기법을 잘 본다는 겁니다. 이게 처음에는 잘 안되도 순발력이 생기면은 탁 오면 알아버려요.
그렇게 해서 자꾸 익어지는 게 정진바라밀이고.
그것이 내 생활 속에 들어와가지고 항상 생활 그 자체가 항상 무심과 평상심으로 잘 이렇게 경계에 속지 안하고 이렇게 하는 사람을 우리가 뭐라 부르느냐?
그걸 선정바라밀이라 그러는 거요.
선정이라고 해서 내가 가만히 앉아서 고요한 것을 맛을 보는 것 자체도 선정이지만도 그 고요히 앉아서 내가 그 선정의 맛을 본 그것이 생활 속에 들어와서도 그 선정이 그대로 고요함이 바탕이 되가지고 생활을 할 때는 그것이 선정바라밀이 살아있는 선정 바라밀이 되지만.
그것은 그거대로 그때 맛을 본 것은 그대로 그 순간에 놔둬버리고. 내 생활은 내 습관과 내 버릇과 관습대로 그냥 허덕이면서 내가 사는 거는. 이건 아무 선정바라밀이 아니죠.
그래서 이 생활과 법하고는 항상 하나가 되야 되요. 이게 지혜로운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여러들에게 마지막으로 정리 해 드리고 싶은 게 뭐냐 하면은.
오늘은 이 마음을 무주심을 가지고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 부처님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이거거든요.
그러면 그 무주심을 가지고 살면은 어떤 마음이 되느냐.
제가 비유를 하나 할게요. 도장을 가지고 허공에다 도장을 찍으면 어떻게 될까? 깔끔하겠지. 흔적도 없어요.
뒤가 없어요. 아주 매너가 좋아요. 그리고 그 도장을 가지고 물에다가 도장을 탁 찍으면 어떻게 될까요.
찍는 그 순간에 인주가 붉은 그 인주 있죠? 그것이 물에 잠깐 표가 나는 거에요. 그렇죠.
그리고 도장을 가지고 진흙에다 찍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 진흙에 도장 표가 굳어지겠죠. 그게 말라 놓으면 없어지지도 안 하거든.
마음이라는 것을 참 반야의 삶으로 지혜롭게 이러한 것이 다 사상이 부질없다는 거. 이런 것을 하는 사람. 이걸 알면서도 열심히 사는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되요.
여러분들이 공부 잘못하면 그러면은 베풀 것도 없고. 공덕을 닦을 것도 없고. 뭐 아무것도 좋은 일 할 것도 없다.
마음이 머무는 바가 없는데 공덕을 받을 자리는 어디있겠느냐?
이렇게 생각이 되면은 여러분들이 할 일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려요.
그러면 뭐가 오는 줄 압니까? 치매가 와요. 이런 걸 알면서도 너무너무 기뻐하면서 열심히 배풀고 열심히 공덕을 지어야 되는 거요.
안 지으면 여러분들이 아주 가난한 보를 받고. 아주 빈천한 복 없는 생활을 하는 거에요.
지어놓은 복이 없는데 그럴 수 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여러분들이 생각을 해야지. 마음이라는 게 머무는 것이 없이 흘러가버리는데 어디서 복을 받을 자리가 있고. 아예 내 마음만 내가 잘 지키면 되지. 절에 갈 것도 없고 보시 할 것도 없고 선행자원봉사 할 것도 없다.
그러면 그 사람은 외로움 속에서 그 사람은 굉장히 고통 속에서 오는 것은 치매만 와요. 할 일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럴수록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여러분들이 공덕과 보시와 좋은 선행, 성공공덕을 많이 지어야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렇게 하려면 마음을 항상 허공에 다 도장을 찍는 마음으로 살으라는 거에요.
그게 부처님의 삶의 모습입니다.
허공에다 도장 찍는 방법이. 그리고 이제 공부 조금해서 마음을 조금 길들이고 조금 아는 사람들 있잖아요. 번뇌가 좀 없어지고 마음이 좀 편안해 지고. 이런 사람은 물에다 도장 찍은 격이야.
물에다 도장 찍으면 그래도 잠깐은 있거든.
그게 뭐냐 하면은 전에 누가. 참 스님스님 저는 이런이런 좋은 일을 많이 했는데. 아무도 모르게 했습니다. 우리 신랑도 모르고 부모님도 모르고 내 가장 흉허물없이 지내는 친구에게도 말 안 했습니다.
내 오늘 비로서 이야기 합니다. 그러거든. 그러면서 참 장하시다 그러니까. 장할 것도 없습니다.
내 마음 내 부처가 알고 있으면 되지요 뭐.
내 마음 내 부처는 또 왜 거기다 또 알아야 되는지 말이지.
그거 꼭지를 떼야 되거든. 그게 물에 도장 찍는 거야. 알겠어요?
그런데 이제 그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한 거에 대해서 계속 바램을 가지고. 또 구하려고 하고. 그것을 되돌려 받으려 하는 심성 있잖아요. 그건 참 솔직히 말해서 좀 치사하지.
그것은 그 마음을 가지고 좋은 선행공덕을 하면은 안 하는 것 보다는 낫지만 도. 그것은 할수록 내 모습이 궁해져요. 그리고 추해져요.
왜 그러냐 하면은 그 대가를 바라기 때문에.
그래서 연말 연시에 좀 하고 나면은 그것도 대문짝처럼 내 주기를 바라고. 그 자꾸 상을 내고 싶어하거든. 그것은 진흙에 도장 찍는 거야. 그래서 이 마음 하나 가지고 다 모두가 이루어 지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 부처님 되는 도량이. 도량이 어디 있느냐? 도량이 여기에 있어요.
이 도량이 내가 꾸미고, 내가 만들고, 내가 아주 허공처럼 얼마든지 쓸 수 있게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도량이.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도량이 여기에 있는 거에요.
밖에 있는 도량은 내 뜻대로 할 수가 없어.
여러분들이 이 마음을 잘 관하는 공부를 지금부터 들어가야 된다는 거요.
성불하입시다.
출처 :진불선원 () 선불교대학 원문보기▶ 글쓴이 : 법흥(法興)
첫댓글 나무아미타불_()_
관세음보살_()_
관세음보살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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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