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 때인가, 그 때 쓴 글이라 굉장히 조잡합니다. 모 통신사 역사 동호회 전쟁사 소모임에 올린 글입니다. 지금도 제 글이 조잡하긴 하지만 옛 글을 다시 읽으니까 감회가 새롭네요.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비판에 소홀히 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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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항쟁이 끝난후, 고려는 원의 속국이 되어버렸다. 몽골풍습을 따라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친원파들도 속속들이 등장했다. 이리하여 공민왕 즉위 이전까지는, 고려의 침체기였다고 볼수 있다.
공민왕은 1352년에 즉위했다. 아내는 그 이름도 유명한 노국공주이다.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자주회복운동을 천명을 한다. 공민왕 즉위때 국제정세는 상당히 어지러운 때였다. 남에서는 왜구가 해안지방을 따라 인가를 노략질했고, 겁없는 상당수의 왜구들은 해안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곳까지 쳐들어오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북에서는 원과 홍건적(한인봉기집단군)이 싸우고 있었다. 공민왕은 먼저 왜구떼를 깨부수기로 한다.
먼저 원년 3월에 고려 수군은 왜군 선단과 맞서 그들을 격퇴시킨다. 또한 몇몇 간헐적인 소탕전도 진행되었다. 그후 왜구는 잠시 잠잠해졌으나, 그걸로 공민왕에게는 충분한듯 했다. 왜냐면 공민왕은 왜구 소탕 즉시 북쪽으로 진로를 바꿨기 때문이었다.
공민왕은 압록강부근에 있는 8참이라는 요충지를 공격했다고 한다. 이는 본격적인 국토수복운동의 시발점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그런 공민왕에게 걸림돌이 나타났다. 바로 홍건적이었다.
10만의 홍건적이 고려로 남침했다. 공민왕으로서는 막기 버거웠던지, 개경을 버리고 피난할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열을 가다듬은 고려군은 이듬해에 홍건적을 개경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당시 지휘관이었던 형부상서 김진과 환관 김현, 그리고 상장군 이방실는 용맹을 발휘하여 적들을 도처에서 섬멸시켰다.
그리고 고려군은 홍건적을 서경성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하게 된다. 홍건적이 서경성에 갇히자 고려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서경성 공격을 감행한다. 당시 고려군의 수는 2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는 몹시 추운 겨울이었다. 그래서 고려군의 서경성 탈환은 매우 어려웠었다. 서경성에 틀어밖혀있던 홍건적은 1만에 달하는 고려인 포로들이 밖에 있는 고려군과 협조해서 자신들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을 모두 학살(!)해버린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군은 분노가 폭발했다. 서경성을 즉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홍건적은 요격을 감행했고, 이 전투에서 홍건적은 패배하여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홍건적의 침입은 그치지가 않았다. 간헐적으로 국경지방을 공략하더니, 공민왕 10년에는 20만에 달하는 홍건적이 고려를 대대적으로 침입을 해왔다.
고려의 응전태세는 신속했다. 안우, 이방실, 황상, 한방신, 이여경, 김득배, 안우경, 이귀수, 최영 등 당시 용맹을 떨치던 장수들을 주축으로 하여 20만의 방어군을 이끌고 응전했다. 최영의 용맹은 이때부터 세상에 들어난다.
그러나 20만의 방어군이 움직이는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수도는 함락당한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고려군은 당장 수도 개경을 탈환한다. 그때 날씨는 악천후였다고 한다. 그 악천후가 고려군으로써는 그야말로 100만대군을 얻은듯한 효과를 얻었을것이다. 악천후와 진눈깨비를 동반한 날씨에 홍건적의 방비는 헤이해졌고, 이여경과 쌍성 총관부 공략의 1등 공신인 이성계의 용맹을 선두로 한 고려군의 공성전이 펼쳐졌다. 이 도성 탈환전은 대군과 대군의 회전인지라 새벽에 시작되어 저녁이 되어서야 막을 내렸다고 한다. 홍건적의 대쟝격인 사류와 관선생은 고려군 병장기의 밥(!)이 되어버렸고, 10만의 홍건적이 도륙을 당했다.
나는 이 전투에서 고려군 전력의 상당부분이 정상화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20만도 20만이지만, 10여명에 가까운 무장들의 용맹함도 드러났기 때문이다. 고려는 고구려의 대를 이은 국가. 고구려의 상무정신도 본받았다. 이 상무정신이 공민왕때에 이르러서야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것이며, 그에 따라서 고려군의 전력이 회복기에 온것이라고 본다. 이 상무정신의 지속기간이 짧았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1368년(공민왕 17년), 중국의 세력다툼은 크나큰 변화를 맞이하게되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원나라의 방어선들을 허무하게 무너뜨리며 원나라를 북부지방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원나라는 명나라를 맞이하여 마지막 반격준비를 하고있었으나, 그전에 원군의 최후 보루격인 섬서성, 호남성 등지가 이따라 무너짐과 함께 원나라는 중국본토의 세력권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
이런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공민왕이 아니었다. 당시 동녕부에 주둔하고있던 평장사 기새인티무르는 그의 부친인 기철이 고려에게 죽임을 당한 원한을 풀이하게 위해서 고려의 북방을 침범하였다. 그러자 공민왕은 즉시 대응하여 이성계를 동북면원수, 지용수를 서북면원수로 삼고 기병 5천과 보병 1만을 이끌고 원나라의 동녕부를 치게 하였다. 황초와 설한 두 영을 넘고 압록과 파저의 두 강을 건넌 고려군은 우라산성을 포위, 공격을 감행하였다. 당시 우라산성을 지키던 군사들은 고려군이 오자 즉시 항복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장격인 고안위는 얼마의 군사를 이끌고 저항을 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산성에 접근, 옆에서 수행하던 무사에게 말했다.
"활과 편전을 다오."
화살을 활에 장전한 이성계는 적들을 향해 사격, 70여순을 쏘앗다. 이 70여순은 단 한발도 빗나가지 않고 적군을 꽤뚫었다. 그러자 겁을 집어먹은 고안위등은 도망을 치고 말았다. 이리하여 우라산성 공략전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동녕부는 본래 고려의 영토였다. 그러나 고려의 신하였던 최탄이라는 장수가 원나라에 항복하면서 서경을 비롯한 북계의 54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西海道)의 6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한것이었다. 원나라 쿠빌라이(세조)는 때를 놓치지 않고 자비령을 경계를 삼아 그 이북의 지역을 모두 원나라 영토로 만들고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한 후, 최탄을 동녕부총관(摠管)에 임명하였다. 이에 원종은 원나라의 수도 연경에 가 세조에게 자비령 이북 지역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았고, 충렬왕때에 동녕부를 오히려 동녕부총관부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고려의 끈질긴 요구를 받아들여 이 지역을 고려에 돌려주고, 동녕부를 요동으로 옮긴것이다. 그리고 이성계의 고려군은 요동의 동녕부를 공략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우라산성 공략과 함께 분산되었던 지용수와 양백연의 군대와 함께 합세하게 되었다. 고려군은 다시 진군했다. 그리하여 같은 해 11월에는 지용수와 합세하여 요동의 중심지인 요동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경기병 3천을 투입하여 초반 공략에 나선 고려군은 요동성을 기세좋게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요동성을 지키고있던 원군은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이성계는 사신을 보내어 항복할것을 권유했으나, 추장인 추밍은 이를 거절했다. 결국 이성계는 요동성 탈환 명령을 내렸다. 이미 명궁으로 이름난 이성계와 부장인 이원경은 자신들의 활솜씨를 유감없이 드러내며 고려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요동성... 고구려가 멸망한지 6백여년만에 되찾는 옛 강토였다.
하지만 요동성 수복기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쪽에서는 다시 왜구떼가 극성을 부렸고, 겨울인지라 추위와 기근으로 군수보급이 어렵게되자 더 오래 머무르지 못하게 된것이었다. 이성계는 어쩔수 없이 부근 주민들에게 고려에 귀순할 것을 권고하고 회군하였다. 이는 마치 동북 9성을 수복했으면서도 철수한 윤관과 같은 순간이라고 볼수 있겠다. 이리하여 동녕부를 정벌만 하였을 뿐 장기적으로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처럼의 정벌은 아무 효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결국 랴오허 동쪽의 땅은 중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고려는 결국 요동을 수복하지 못했다.
당시 고려군은 비약적인 상승세에 있었다. 그런 고려군이 이성계라는 명장이 지휘함에도 기병 5천과 보병 1만이라는 군세에도 요동을 수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전쟁사를 연구하는 우리에게 크나큰 교훈을 남겨주는점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첫째로, 군수보급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체로 예로부터 벌어졌던 전쟁 대부분은 군수보급 차질에 의해서 패배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것이다. 특히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그 예일것이다.
둘째로, 치밀한 군사작전과 행동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고려군이 요동성을 일시수복할수밖에 없었다는 데에는 이점도 있을것이다. 둘째점은, 첫째점과도 일치한다고 볼수 있을것이다.
셋째로, 주변정세에 대해서 치밀한 탐색이 있어야 되겠다는 것이다. 공민왕은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기를 틈타 요동수복을 개시했다. 비록 실패했기는 하지만, 공민왕의 이와같은 결정은 주변정세에 대해서도 민감해야 될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넷째로, 생산력과 경제력의 기반이 없는 대외 원정은 물거품이 된다는 점이다. 당시 고려는 군사력에서는 비약적인 발전에 있었지만, 왜구의 노략질로 기본 생산력과 경제력은 추락하고 있었다. 고려가 충분한 생산력과 경제력이 있었다면 요동수복은 성공했을거라는 생각과 함께 아쉬운 점이 남는다.
다섯째로, 방비를 튼튼히 다져야 되겠다는 점이다. 이성계가 요동을 수복하러 가자, 왜구는 노략질을 다시 재개하기 시작했다. 고려로서는 왜구에 대해서만큼은 엄천난 골칫거리였다. 결국 왜구를 해결하지 못한 고려는 다시 이성계를 불러들인것이었다.
첫댓글 고1때 이런분석을 하다니...요즘 고등학생들과 비교할때 흐뭇하다니 생각이...^^
과찬이십니다. 참고했던 자료들의 질이 좋았던거죠.
이야아~~^^* 한수 배우겠습니다.
너무 길어 읽다 포기..ㅡㅡ;; 잘 쓰신듯~
저도 지금 고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