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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묘행무주 원문보기 글쓴이: 묘하
제6강 여리실견분/설우스님
오늘은 제 5분입니다.
여리실견분이라고. 둘이 아닌 참 모습이다. 그 참모습은 일심의 모습이겠죠.
오늘 이 여리실견분이 내용은 짧지만 금강경 경전을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진실한 내용이 들어있고. 부처님의 참 전하고자 하는 뜻이 오늘 여기 이 분에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잘 한 번 들어보세요.
수보리여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몸의 형상으로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서는 여래를 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여래께서 지금까지 말씀해 오신 것이 사실 몸의 형상이 아닌 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이죠.
몸의 형상이 아닌 것을 말씀을 하셨는데 그 아닌 것을 오늘 무엇인가 여러분들하고 잘 이해가 되야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 육신의 모습으로서 여래를 볼 수가 있겠느냐?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왜 이런 이야기를 갑자기 부처님이 하셨을까요?
지금까지 부처님 말씀이 무주상 보시를 해야 된다.
보살은 상항 조건과 어떤 대가를 바라고. 어떤 마음에 상을 일으키고. 상이라면 했다는 어떤 생색을 내고. 이러한 그 마음으로 남에게 좋은 보시를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참으로 마음을 다 비우고 일체조건없이 아무 바램 없이 구하는 마음 없이 그냥 순수하게 남을 도와주는 것이 보살의 행이고 그것을 무주상 보시다 그렇게 함으로 인해가지고 그로 인해서 그 받는 공덕은 저 허공을 끝이 없다고 생각하듯이 그 공덕과 복덕이 그와 같이 허공같이 끝이 없이 많다.
이렇게 부처님이 쭈욱~ 말씀을 하셨는데.
수보리가 그걸 들으면서 사실 수보리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이 생각 할 때 아~ 그렇게 무주상 보시를 이렇게 함으로 인해가지고 참 그 조건도 없고 번뇌 망상도 없이 부처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 무심으로 보시하고. 그렇게 해서 부처님의 상호가운데 32상이라든지 80종호라든지 이런 좋은 덕상을 갖춘 것이. 그 이마에 지혜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미간백호상도 그렇게해서 아마 이루어진 것이고. 또 부처님께서 일체 모든 번뇌 망상 이러한 집착 차별심이나 또 대립하는 마음이나. 이런 것들이 갈등이 없이 아주 비어있는 공심으로 그러한 보시를 하셨기 때문에. 그 공덕으로 인해서 그런 중생과는 달리 이 머리에도 저렇게 우뚝 솟은 육계상도 있고.
이런 것들이 좋은 32상의 덕상을 갖추고. 80가지의 여러 가지 좋은 상호를 갖추었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이미 그걸 알아보시고. 32상과 80종호를 갖추었다. 갖춘 것이 그 갖춘 것을 보고 그것이 여래의 참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물은 거에요.
그러니까 수보리는 벌써 알고.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몸의 특징적인 신체, 모양으로는 부처님의 진실한 참모습은 저희들이 거기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정리를 하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사실 이 몸뚱이라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죠.
이게 뭐 지수화풍 4대 원소로 인해가지고 다 이루어진 것이고. 이것만큼 무상한 것도 없지요.
그래서 이것은 인연이 다 하면은 또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기본 상식이죠 뭐.
이거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이 몸이라는 것도 하나의 상으로서 우리가 여기에 본래 인연에 의해서 이것이 이루어졌다는 것도 우리가 알아야 되겠지마는. 좀 더 깊이 들어가면은 어려운 문제가 뭐냐 하면은 이 생각으로서 만들어내는 상이 있다는 거에요.(생각 想상)
이것은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것을 색이라 그러잖아요. 색, 색상이라 그러고.
그리고 오온이라 할 때 수상행식. 느낌과 생각하고 상상하고 판단하는 그 인식, 그 인식의 상이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또 세운다는 거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그 보면은, 처음 봐도 좋은 사람은 보면은 또 친절하게 해주고 싶고. 그것도 자기가 인식에 좋다는 생각을 일으키니까 그 상이거든. 분별심이. 이렇게 해서 인식의 상이 있는데. 그 인식의 상을 깨뜨린다는 것, 없앤다는 것. 그것은 참 우리가 어려운 것이라.
그런데 그 인식의 상을 우리가 쉽게 말해서 뭐라고 그럽니까? 그것을 하나의 업식상이라 그러죠.
업이 형성된 상이다. 또는 쉽게 말하면 과거의 다 지나간 사연들이고 내용들이었지 만도. 그것이 내가 체험으로, 체험을 했었기 때문에. 그러한 기억 정보가 나에게 머리 속에 있어가지고.
언제든지 그 기억 정보가 드러날 때는 그것이 나를 또 상당히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고 힘들게 한다 이 말이오.
그런 것들이 다 업식의 하나의 상이에요.
이 업식의 상이라는 것이. 이게 사실은 선가에서는 이것이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래가지고 괜히 착각해서 그렇지. 실상은 원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없는 것이라고는 이해는 가는데 사실은 경계에 부딪히면 이게 없는 것이 아니에요. 경계가 부딪히면은 그 업식상으로 인해가지고 화도 나고. 또 남에게 상처도 줄 수 있고.
부모 자식간에도 원수도 될 수가 있고.
이게 전부 다 생각의 상에 의해가지고 내가 거기에 끄달려 가지고. 사람의 인성이나 품성의 꼴이 말이 아닌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들이 다 생각의 상 때문에 그렇다 이 말이오.
생각 상. 이 생각 상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인데 그걸 왜 내가 실체가 없는 것에 자꾸 이렇게 끄달리는가? 그 왜 그럴까요?
그것은 중생은 항상 구하는 생각이 쉬지를 못해요. 또 그리고 바라는 생각이 그게 또 쉬지를 못해요.
그리고 항상 뭔가 의지하려고 하는 생각이 그게 또 쉬지를 않는단 말이오.
그 참 묘하제. 그렇죠.
그런데 이걸 비유를 좀 쉽게 해 드리고 싶은데 여러분들이 혹시 집에 애완용 강아지 키우지 않습니까?
강아지 키우면은 그냥 때가 되면은 사료 주고 그러면 되는데. 특별한 음식, 맛있는 걸 주기 위해서 강아지를 부를 때. 요령을 한 번 흔든다 이 말이오.
요령을 흔들면은 처음에는 강아지가 주인이 오늘 왜 요령을 흔드는가? 거의 생각이 없겠죠.
관심이 없겠죠. 그런데 그 요령 흔들고 나서 아주 맛있는 치즈를 가져다 주는 거에요.
그러면 강아지가 처음에는 ‘오늘 맛있는 치즈가 나왔구나.’ 그런데 그 다음날도 또 요령소리가 나거든요.
그래서 강아지가 생각할 때 ‘ 아 어제 요령 소리 나더니 맛있는 거 나오더니 오늘도 그럴랑가? ‘ 그랬더니 역시나 치즈가 또 나오는 거에요.
그렇게 몇 번하다 보니까. 강아지가 요령소리 날 때까지 기다리는 거죠.
그것이 본래 강아지 생각에는 머리에는 없었던 건데. 길들여져 가지고.
그 생각이 굳혀지면서 그것이 당연하게 그것은 하나의 자기에게 꼭 필요한 것이고 자기에게는 그것이 꼭 있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믿는 거에요.
그래서 또 요령만 흔들면은 강아지는 침부터 삼키는 거요. 맛있는 게 나온다.
그런데 이제 주인이 무슨 생각을 했냐 하면은. 요령을 딱 흔들어 놓고는 오늘은 치즈를 안주는 거에요.
그러면 강아지가 어떻게 생각 하겠어요.
이상하네. 그게 치즈가 나와야 되는데 왜 치즈가 안 나오는가? 거기서부터는 강아지가 스트레스를 받는 거에요.
사실은 그 치즈가 요령으로 인해서 온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지혜가 있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에 대한 정견이 있으면은 주인이 이렇게 물어 볼 겁니다..
강아지야 오늘은 요령을 흔들었는데 내가 치즈를 안주는 데 기분이 어떻느냐? 이렇게 물었을 거 아니에요?
그럼 강아지가 부처님의 이 금강경을 잘 봤으면은 그것은 본래 없던 것을 주인님이 장난한 거죠.
거 뭐 주면 주는 것이고, 안주면 안주는 것이고. 그게 뭐 준다 안 준다 법이 정해진 게 있습니까?
주면 고맙고 안주면 고만이죠.
이게 강아지가 그렇게 되면은 강아지는 전혀 지난날 그 요령으로 인해 치즈를 얻어 먹었다 하더라도. 그게 전혀 자기한테 습이되고 업이되고 그런 것이 전혀 형성이 안단 거에요.
생각의 상이 이걸 식상이라고도 그럽니다. (알 識식) 생각의 상이 이렇게 세워지지를 않는다 이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고정관념이 이렇게 형성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마음이라는 이 작용에 대해서 모를 때는 분명히 이것은 줘야 된다는 법칙성이 딱 서버리는 거에요.
왜 경험에 의해가지고 그것은 주게끔 되어 있는데 왜 질서를 안 지키고 법도를 안 지키고 안 주느냐 말이지.
그러면서 화가 나는 거에요.
그럼 이건 누구의 잘못이에요? 강아지 스스로가 강아지 스스로가 거기에 기대하고 바라고 또 거기에 의지하는 중생심리에 의해가지고. 그래서 강아지 스스로가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우울하게 만들고, 화나게 만드는 거요.
그러니까 주인하고는 상관이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쉽게 말해서 세상을 내가 바꿀 수는 없는 거에요. 그렇지 않아요.
이 세상이 이런 그대로, 자연의 이치대로 돌아가고. 내가 생활하는데 또 나에게 찾아오는 인간관계라든지 물질 관계라든지 또는 형제 부모 자식관계라든지. 그로 인해서 나에게 찾아오는 경계는 항상 밀물과 썰물같이 왔다가 가고 왔다가 가고. 생활 속에 그 경계는 항상 오는 거에요.
그러나 그 자체를 내 힘으로는 없앨 수는 없는 거에요.
그러나 그것은 항상 오는 것이 자연의 순리 이치다 이 말이야.
그래서 그 경계가 오는 것을 없앨 수는 없지만은 그것을 내가 그대로 받아가지고. 내가 어떻게 판단하느냐?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어떻게 지혜롭게 그것을 잘 마음을 대처를 해서 마음에 상처도 입지 아니하고, 마음을 항상 편안하게 안심된 자리로 내가 지킬 수 있냐.
이것은 내 지혜와 내판단에 딸린 것이지.
내가 그걸 안에서 잘 지혜롭게 하면은 세상은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이게 금강경에서 가리키는 이게 원리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법을, 부처님이 가르치시는 금강경의 원리를 잘 모르면. 자꾸 세상을 바꾸려고 그러는 거요.
그리고 오는 경계를 자꾸 원망을 해요. 왜 저런 것이 나한테 자꾸 오느냐 하고. 그것은 바닷가에 서 가지고 왜 자꾸 저렇게 썰물이 들어오고 밀물이 나가고 자꾸 이렇게 하느냐 이 말이지.
그거 하는 생각이나 똑같아.
뭐 어떻게 들어오든 나가든 간에 내가 마음을 딱 비울 수 있는 지혜가 있으면. 세상사는 게 그렇게 편안하고 그렇게 자유롭고 그렇게 좋다 이 말이야.
그러면 그 좋은 것은 누가 좋은 것이냐 하면은. 내가 나에게 참 사랑해주는 순간이 되고. 내가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순간이 되고. 내가 나를 참 안락하게 만들어 주는 시간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 금강경에 부처님의 뜻이, 이 공사상이 그래서 참 좋다는 거요.
그런데 우리가 일상 생활 하면서 이 생각이라는 이치는 뻔하게 스님한테 법문 들으나 안 들으나 내가 이 마음이라는 놈한테 속지 말아야 되고. 마음이라는 것은 다 허상이고. 이게 참 경전에서도 말씀 하셨듯이 물위에 뜬 거품이고. 풀잎의 이슬이고, 잠 자다가 꿈꾸는 잠꼬대 같은 것이고. 다 이 번뇌망상은 부질없는 것이다. 이것 번연히 알죠.
이거 아는데 왜 자꾸 우리가 여기에 끊지 못하느냐 이 말이야.
이 끊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고민을 할 줄 알아야 되.
그 고민을 통해서 그것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될 거 아니에요.
그게 부처님은 뭐라고 하셨냐 하면은. 모든 이 물질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도 결국은 알고 보면은. 그것이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고. 또 내가 머리에 가슴에 가지고 있는 생각의 상도 그게 다 경계를 접하면서 경계와 그 마음과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다.
이것을 뭐라 그러냐 하면은 연생연멸이라고 그런다.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고. 인연에 의해서 멸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고 인연에 의해서 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옛날의 성인들도 맹자는 사람의 마음이 본래 착한 것이다.
그래서 성선설로 이야기를 했거든. 사람의 마음은 본래 착한 것이다.
착한 것이기 때문에 항상 착한 일을 할 수가 있고. 착한 선행도 할 수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런데 순자는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성악설이다 즉, 악한 것이다. 악한 마음, 본래 마음이 악하기 때문에 자꾸 선생을 하고 착한 일을 해서 그 악한 것을 착한 것으로 변형시켜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거든.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가 뭐냐 하면은 부처님께서 바라보는 그 시각은 둘 다 틀렸다는 거에요. 왜 틀렸느냐?
마음이라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딱 정해 버리면은 선법으로 정한 법이 되어 버린다 이 말이야.
그렇지 않아요? 그 정한 법이 될 때는 그렇다면은 절대 악한 생각이 나오면 안되는거요.
나올 수가 없는 것이죠. 착한 것으로서 법이 정해져 있는데 악한 것이 나오면 안되죠.
그리고 순자의 말처럼 마음을 본래 악한 것이다 악한 것이기 때문에 선한 것을 해가지고 그것이 선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했는데 선한다는 하나의 법이 개체가 본래 불변하게 있는 거 같으면은 그것은 아무리 변형시킨다 해도 악한 것은 선으로 완전히 변해 질 수가 없는 거에요.
악한 그 자체가 하나의 개체성으로서 절대성으로서 그것은 영원불변한 하나의 악한 마음으로서 그 존재가 남아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부처님은 뭐라고 하셨냐 하면은 이것이 다 마음은 본래 거울과 같이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뭐라 그럽니까? 空空寂寂공공적적하다. 비우고 비우고 비워서 고요하고 고요하다. 그러면서 거기에 昭昭靈靈소소영영하구나. 그러면서도 신령스럽게 사물을 바로 보고 알고 하는 작용이 있다. 이 보고 아는 작용이 있다는 이것을 우리는 지혜라고 그러잖아요? 반야지혜다 이러거든.
그러면은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기에 굉장히 깊은 철학이 있어요.
무엇이냐 하면은 마음이라는 것은 선하다고도 정하지 마라. 마음이라는 것은 본래 악한 것이라고도 정하지 마라. 마음은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不思善불사선 不思惡.불사악하라.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말라는 선가의 말이 있거든요.
그건 왜 그러냐?
마음은 본래 텅 비어 있어 가지고. 본래 선도 악도 정할 수가 없는 그대로 이렇게 마음은 거울처럼 비어 있는데. 선한 쪽으로 생각하면 거기서 불현듯 선이 나오고 악한 쪽으로 내가 생각하면은 불현듯 악한것이 거기서 나온다는 거요.
그런데 그 나오는 것은 사실은 불변하는 실체성이 있어가지고 그것이 선한 것이고 악한 것이라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에요.
그런데 그것은 선한 것도 근본실체가 없는 것이고. 악한 것도 근본 실체가 없는 것인데. 우리가 그것이 악한 것을 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본래 이 마음에 실체, 본래 이 마음의 존재의 원리를 우리가 몰라서, 속아서 그렇다는 거요.
예를 들어서 거짓말을 한다. 또는 죄를 짓는다. 또는 번뇌 망상 미워하고 증오하고 이런 생각이 악한 생각이라 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것은 선한 생각이라고 할 때.
이것을 천수경에서는 뭐라고 했어요?
罪無自性從心起죄무자성종심기다. 이런 말 많이 하잖아요. 그렇죠?
罪죄라는 것도 마음이라는 것을 쫓아서 일어난 것이다 이 말이야.
그런데 마음이라는 것을 쫓아서 일어나지만, 죄라는 것에는 본래 죄의 실체는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쫓아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허공에 본래 텅 비어 있는 허공에 어느 날 구름이라는 것이 잠깐 뜬 것과 같은 것과 같이. 허공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에요.
허공에는 선이라는 뿌리도 거기에는 내릴 수도 없고. 악이라는 뿌리도 내릴 수가 없다는 거요.
마음은 본래 허공과 같이 무엇도 거기에는 이렇게 올려 놓을 수가 없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것을 무엇이라 하느냐 하면은 선가에서는 무소유라 그러는 거에요.
우리가 재물을 안 가진다 해서 무소유라 하는 것은 그건 그냥 쉬운 이야기고. 철학적으로 깊이 들어가면 우리 본래 본성은 미운 것도 착한 것도 거기에는 소유할 수가 없는 자리다 이 말이야.
요것을 우리가 잘 알아야 되요. 이것을 저는 항상 지금까지 법문 해오면서 이것을 무심한 자리라고 그러는 거에요.
무심이라 하면은 관심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런 모든 것을 올려 놓을 수 없이 텅 비어 있는 자리이다 이 말이오.
그래서 무엇이든지 소유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또 무엇을 밖에서 얻어와 가지고 무엇을 창조해 만들어가지고 그러한 자리를 이룬 자리도 아니라는 거요.
그래서 반야심경에는 텅 비어 있는 자리를 以無所得故이무소득고라 그런 거에요. 그렇죠?
조금도 얻어가지고 만들은 자리도 아니라는 거에요. 뭐냐? 본래 그렇다는 거에요. 본래.
본래 그런 그 자리에 인연에 의해가지고 악도 생한것이고. 인연에 의해가지고 선도 생한것이고. 그래서 다만 연생연멸할 뿐이었다 이 말이오.
그러면은 이 연생연멸하는 이 도리를 알고 이대로 살면되는데. 요대로 못사는 건 뭐냐 하면은 우리가 집착 때문에 그렇다는 거요. 집착. 모든 고통은 어디서 오느냐 하면은 집착에서 오는 거에요.
집착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의 식상이라는 것이 형성이 된다는 거에요.
식상은 다른 말로 하면 업상이라. 업이 형성이 된다는 말이라.
그러면 그 업이 형성이 되면은 그 업에 의해가지고 매 오는 순간을 대할 때 마다 그 업으로 인해서 매 순간 대할 때 화를 내면은 화내는 내가 세계가 벌어지니까 지옥이 되어버리고.
또 내가 그 오는 경계로 인해가지고 그 경계를 참으로 즐겁게 내가 판단을 잘하면 그 경계로 인해서 그 순간에 내가 천상이 되 버리고. 또 그 오는 경계로 인해서, 그 업으로 인해서, 그 업에 맞게끔 상당히 남을 괴로워하고 미워하고 고통을 준다고 생각하면은 그 자리가 내가 지옥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 육도가 이 하나의 허상 된 나의 업상으로 인해가지고. 그 오는 경계가 그 쪽으로 서로 이루어 가지고. 그렇게 육도를 만들어 버리는 거에요.
육도가 지금 이렇게 만들어 지는 거야. 윤회를 하는 거요.
그러니까 이것을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우리가 자꾸 여기에 벗어나지 못하느냐?
이게 믿음이 약해서 그런 거에요.
본래 이 업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하는 믿음이 약하니까.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이 업을 없앨 수가 없어요.
예를 들자면 깨끗한 물인데도 물은 자유롭잖아요.
여기에 담으면 원형이고, 모난 그릇에 담으면 사각이 되는 것이고, 삼각그릇에 담으면 삼각이 되는 것을. 물은 정한 법이 없어요. 그 우리 본성과 같은 것이지.
그런데 이것이, 물이 어느 한 업에 의해가지고 딱 정해 버리면. 그것이 뭘로 되느냐 하면은 얼음으로 변해 버린다 이 말이야. 얼어버린다 이 말이야.
그럼 그 얼어버린 얼음도 알고 보면 물이거든. 그런데 그 얼음을 우리가 녹여가지고 물로 쓸려면은 불을 많이 때야 되는데.그 불이 뭐냐 하면은 그 불이 부처님 불법을 믿는 믿음이야.
법문을 들어서 이것이 참 그렇겠구나 하고 확실히 믿는 믿음이 불길이 강하면은 얼음보다도 불길이 강하면 그 얼음은 녹는데. 불길이 약하면은 조금 타다가 말아버리면 그 얼음은 안 녹는다 이 말이오.
집착이라는 것이 참 무서운 거야. 이 집착도 질이 있어요. 여러 질이 있어요.
거친 집착이 있고. 거친 집착은 욕계에서 소위 말하는 탐심, 욕심, 명예욕, 권력, 제물욕 이런 것들은 거친 업으로 인해가지고 만들어 지는 거거든 물질의 세계에서.
그런데 공부를 많이 해서 그 거친 업은 다 녹였지만도 미세한 마음에 그런 그 이치를 알면서도 끄달려 가지 않으려고 굉장히 생각하면서 마음의 형상이 일어나면은 또 지워버리고 일어나면 지워버리고 이러거든요.
그것은 아주 미세한 식상이거든요.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도.
그것도 선가에서는 아주 질타를 하거든요.
선한 생각도 선한 그것을 집착하면은 그것도 금가루가 안만 좋아도 눈에 들어가면 병이 된다는 거요.
옛날에 어느 공부 잘하는 수행자가 선방에 앉아서 공부를 하다 보니까 어디서 나오는지 연꽃향기가 코로 들어오는 거에요.
그래서 이 연꽃향기가 어디로 들어오는가 하고서 이렇게 나가보니까. 연못에서 꽃이 피어가지고 연꽃향기가 들어온단 말이야. 연꽃향기가 좋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맴 돌았어요.
그러니까 그 연못에 있는 화신이, 연못신이 나와가지고. 스님은 공부 하신다는 분이 왜 이 향기를 도적질 합니까?
그러니까 그 스님이 하시는 이야기가. 아니 그 흘러가는 바람에 맡으나 안 맡으나 지나갈 건데 그걸 뭘 도적질 한다 그러냐?
그러니까 그 연못의 신이 하는 말이 스님이 그 향기를 탐착하는 집착이 내가 걱정이 돼서 그렇지. 그 향기가 오고 가는 것이 아까 와서 그런 게 아니다.
스님은 그 아주 미세한 그 미세한 번뇌도 그것을 완전히 뿌리체로 흔적 없이 지워버려야지 스님이 열반에 들어 갈 수가 있지.
그것도 스님이 나중에는 스님을 괴롭히는 하나의 번뇌 종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거든.
그러니까 우리가
자~ 수보리가 참 공에는 밝다고 했거든요.
그럼 수보리도 공부를 많이 해서 이것이 전부다 텅 비어있는 이 세상이다 이 말이야.
모든 것이 연생연멸하는 거니까 그 이치를 알거든요.
그런데 수보리도 선실에 앉아서 공부를 하는데 아주 마음을 텅 비웠어요.
아무 실오라기 하나 식상, 업상, 이 생각의 인식의 상을 조금도 세우지 아니하고 무심하게 공을 관한 것이죠.
그런데 순야타신이(허공신) 수보리를 보고 있으니까. 제석천이 수보리가 마음을 비우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니까 제석천이 너무너무 환희심이 나는 거야.
너무 좋구나 싶어서 제석천이 수보리가 앉아있는 자리에다가 꽃을 뿌리기 시작한 거요.
너무 환희스러워서. 그러니까 허공신이 수보리를 보고 질타를 했어요.
너는 어째서 열반을 정득하고자 하는 사람이 그 텅 비어있는 공심을 너는 또 즐기느냐?
그걸 즐긴다는 그것도 또 알고 보면은 집착이라는 거요.
야~ 참 이게 마음이라는 것이 쓴다는 것이 참 미묘한 거라. 그렇죠?
그런데 뒤에 가서 부처님이 결론을 뭐라고 내렸냐 하면은.
凡所有相범소유상이 皆是虛妄개시허망이니 若見諸相非相약견제상비상이면 卽見如來즉견여래니라.
이랬다 이 말이오.
모든 현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 허망하다는 것은 인연으로 와서 인연으로 돌아간 거니까 다 그것이 공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러한 것이 공인 줄 알면서 여러 분들은 왜? 괴로워하세요? 왜 미워하세요? 왜 화내세요? 응?
이게 아까 말했지마는 여러분들이 이 법문을 들으면서도 이 법문을 가슴으로 너무너무 깊게 믿음을 가지고 못 듣기 때문에 그런 거야.
그래서 마지막으로 제가 정리를 해 주는데 항상 일상 생활 하면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고 그랬죠?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까 세상은 전부 다 경계가 온다 이 말이야. 경계가 온다 이 말이야.
경계가 올 때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은 경계가 오면은 그 경계를 그대로 이것이 인연에 의해서 다 이루어 진 것이니까 이것은 내가 붙들만한, 믿을만한, 의지할만한 실체는 없는 것이다. 요렇게 보라는 것이죠.
형상을. 요렇게 보라 이 말이야. 그러니까 처음에는 이게 잘 안되니까 분석하는 거에요.
저것도 인연에서 온 것이고. 이것도 인연에서 온 것이고.
예를 들자면 컵을 딱 볼 때 컵이 나한테 눈앞에 탁 들어 왔으니까 내 마음에 컵이라는 이 하나의 식상이 생겼다 이 말이야.
그러면서 내가 이 컵이 예를 들어서 순금 금강으로 됬다하자.
그러면은 금강이 됐으면은 이것을 보는 순간에 내가 이치적으로는 다 인연인 줄 알면서도 공으로 돌아갈 줄 알면서도 다이아몬드라 하면 내가 집착을 나는 거요.
집착 안 합니까? 집착이 나는 거요.
그러면서 아~ 스님 법문을 들었으니까 이건 집착할 건 아니구나.
이건 흙에서 온 것이고, 이건 물에서 온 것이고, 이것은 열기에서 온 것이고, 이것은 사람의 손길에서 온 것이고, 인연이 화합되어서 온 것이다.
이렇게 처음에 공부할 때는 그렇게 관하는 거에요.
그렇게 해서 차츰 차츰 생각을 비우는 거에요. 자기를 자기마음을 다스리는 거다 이 말이야.
그런데 이것이 프로가 되면은 프로가 되면은 어떻게 되느냐?
이걸 그대로 보면서 이 컵이 그대로 공한 것을 그대도 봐버리는 거야.
경계가 오면은 경계에 그대로 받으면서 그대로 경계를 공으로 봐버리는 거요.
그러면 공으로 보면은 또 수보리처럼 그 공을 즐겨가지고 공에 집착하고 있으면 안되는거요.
그래서 부처님은 그 공을 그대로 공으로 보면서 그 색을 보면 그대로 색을 보면서 공을 보라고 그랬잖아. 인연이니까.
그러면은 공을 보면서 공 그대로 색을 보라는 거요. 알겠어요?
요것을 반야심경에는 뭐라고 했습니까? 색 그대로 공으로 봐버리고. 색을 없애가지고 공을 만들려고 하지 말고.
생각을 없애가지고 이미 미운 생각이 일어났고. 이미 분한 생각이 일어났고. 이미 아주 괴로운 생각이 일어난 거를 일어난 거를 자꾸 없애가지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지 마라 이 말이야.
없애려고 하는 그것도 괴로움을 자꾸 더해주는 일 밖에 안 된다 이 말이요.
없애려고 하는 그것도 괴로움에서 일어난 생각이기 때문에 자꾸 괴롭게 괴롭게 자꾸 자기를 더 학대하고 괴롭히는 거다 말이야.
그러니까 괴로움의 생각을 없애가지고 편한 마음을 가지지 말고. 일어난 그 괴로움 그것을 그대로 실체가 없는 것이니까 이것은 믿을 것이 없는 것이니까 그대도 인연에 의해서 생긴 것이니까 그대로 공을 보라는 거. 그대로 편안한 공심으로 보라는 거야.
요것을 다른 말로는 뭐라 그럽니까? 번뇌적 보리다 이렇게 하는거요.
요것을 번뇌가 그대로 보리심이다. 요것을 뭐라 했냐하면은 여기에서는 이것을 뭐라 했냐 하면은 즉비라 그런거야. 즉비.
이 금강경에서 즉비라는말이 이게 참 중요한 거야.
곧, 그 즉비라는 말은 내가 부처라는 마음 불심이라는 마음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그게 긍정이거든요.
그런데 그 긍정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일단 부정을 한 번 겪어가지고 거쳐가고 긍정을 만들어 내는 것을 즉비 논리라고 그래.
그럼 부정을 거친다는 것은 왜 부정을 거칩니까?
부정을 거친다는 그 말 속에는 무슨 뜻이 들어있냐 하면은 저것은 인연에 의해서 생긴 것이고 저거는 다 연생연멸이다. 저거는 믿을 것이 없다. 이건 전부다 부정이죠.
부정을 거치면은 그 부정을 거친 그 상태에서 그대로 컵은 그냥 컵으로 보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 그대로 이렇게 보는 거야.
사실 그대로 보는 거요. 그게 집착을 안 일으킨다 이 말이오. 이게 즉비의 논리라는 거요.
그래서 생 그대로 보고, 그대로 하라는 거요.
이게 금강경에서 아주 말하는 色卽是空색즉시공이고 空卽是色공즉시색이고. 번뇌 그대로 실체가 없다는 것을 보면은 그 자리가 번뇌를 없애가지고 보리가 되는 게 아니고. 번뇌 그대로 보리로 관해버린다 이 말이야.
자 합장 하입시다.
西川十樣錦서천십양금 添花色轉鮮첨화색전선
(서천의 열무의 비단에 꽃수를 놓으니 색이 더욱 곱도다)
欲知端的意욕지단적의 北斗面南看북두면남간
(분명한 뜻을 알고자 하는가 남쪽을 향해 북두를 보는구나)
이 중국의 서천이라는 데가 비단이 참 많이 나는 곳이라. 그 비단이 참 곱죠.
그 비단이 고운데다가 또 수를 잘 놓는 사람이 꽃수를 놓으면 비단이 더 빛이 나겠죠.
자 무슨 말이냐 하면은 우리가 색이 그대로 무상한 줄을 알고 거기에 속지 아니하고. 공도 역시 공 그대로 일상생활에서 그냥 또 사물을 그대로 보는 생활을 하는데. 거기에다가 그것을 아는 것을 예를 들어서 비단이라고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질 좋은 비단이라고 할 것 같으면. 거기다 꽃술을 놔야 되는데. 그 꽃수는 뭐냐 하면은 거기다 아무 조건 없이 아무 생색 없이 무주상 보시를 요즘 말하면 자원봉사를 그냥 그대로 헌신하고. 그대로 남을 위해서 베풀어주고. 배려해 주고. 사랑을 주고. 이렇게 하는 것은 그 비단 위에다가 그 수를 놓는 거와 같이 더 좋겠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가 이 공부를 하는데 색에도 집착하지 말고. 공에도 집착하지 마라. 그러면서 거기에 아주 자유롭게 항상 공덕을 많이 지어야 된다는 거요.
왜 공덕을 많이 지어야 되느냐? 알게 모르게 그래도 우리가 은근히 익혀온 식상, 업상. 이게 있는데. 그 업상을 그대로 물려 내는 데는 무주상 보시 그저 음덕을, 그 표 안나는 선한 행위를, 그것을 자꾸자꾸 많이 함으로서. 그것이 그 업상을 자꾸자꾸 밀어 내버리는 거야.
그러면서 그 좋은 업상, 무주상 공덕에 그 성근 공덕이 딱 자리를 잡는 거에요.
그래서 이 자리잡는 이것이 무엇과도 같으냐 하면은 봄 동산에 눈송이가 하나하나 떨어지는 것이 그것이 무슨 영험이 있겠나 싶으죠?
그러나 한송이 한송이 떨어지는 그 눈송이가 아름드리 소나무 가지도 턱턱 부러뜨리는 거야.
그게 오늘 한번 하는 선행, 오늘 한 번 짓는 공덕, 오늘 한번 짓는 참으로 무주상보시.
아무 생색 없는 그 보시가 한번하고 두 번하고 하는 것이 한 송이 두 송이 눈송이와 같이. 그 몇 천년 굳혀온 몇 천생을 굳혀온 내 습관, 업상. 이것을 그것이 부러뜨리는 거야.
없애버린다 이 말이야.
그래서 이 공덕이 결국은 뭐냐 하면은 아무 상없이 우리가 자꾸자꾸 봉사 많이많이 하시라고 그것이 오늘 부탁의 말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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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불선원 () 선불교대학 원문보기▶ 글쓴이 : 법흥(法興)
첫댓글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관세음보살_()_
관세음보살_()_
좋은 공부 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