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구르드 1세는 노르웨이의 왕이자 뼛속까지 무골인 바이킹 전사였음. 사실 노르웨이는 십자군 전쟁 터지기 전쯤에야 개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왕들도 11세기 초엽에나 가톨릭 세례를 받았을 정도로 기독교가 늦게 들어온 유럽국가였음.
웃긴것은 기독교 개종 후발주자였던 이 바이킹 친구들이 가장 처음으로 왕 주도의 조직적 십자군을 발족했다는 것.
시구르드는 1107년, 약 5~6000명의 병력을 60여척의 배에 탑승시키고 출발했는데, 웃긴건 출발 시점도 딱히 날씨가 안좋은 늦가을이었다는 것.
배 타고 가다가 날씨가 수틀리니, 시구르드는 그대로 영국에 상륙해버림.
바이킹 전담 빵셔틀이었던 논영의 헨리 1세와 친구들은 100년까지 쳐맞았던 PTSD를 기억하고는 최대한 정중하게 그들을 맞이했는데, 이새끼들이 대접이 마음에 들었는지, 1107년에 영국에 도착해서 1108년까지 꿀빨다 출발함. 영길리는 속이 타들어갈지경이었겠지만, 대들다가는 바이킹 파워에 쳐맞음+십자군 방해로 파문 당할까 두려웠는지 짜져있었음.
시구르드와 윾쾌한 바이킹 워리어들의 다음 항로는 바로 레콩키스타가 한창인 스페인 반도였음. 이들은 갈리치아 왕국 해안에 상륙했는데, 지역의 기독교 군주들도 처음에는 얘내에게 호의적이었음. 그러나 겨울이 오고, 산티아고 데 캄포스텔라의 영주들이 식량 팔기를 거부하자, 이들은 지나가는 모든 해안선을 약탈하고 불태우면서 읔쾌하게 전진하기 시작함.
그래도 이들은 자신이 '십자군'이란걸 잊지는 않은듯이, 포르투갈의 무슬림 토후국 주변으로 전진하면서 점령한 모든 도시를 레콩키스타 국가들에게 선물했음, 무슬림들은 깜짝 놀라서 요격을 위해 해군을 출격시켰지만, 무슬림 함대는 깨강정이 나고, 오히려 8척의 갤리선만 나포당해 바이킹 원정군의 숫자만 늘려준 채 도망침. 신트라, 알카세 등의 항구도시가 박살나고, 당시 대도시였던 리스본도 활활 약탈당함.
하튼 레콩키스타들을 대충 도와준 노르웨이 괴물들은 지브롤터를 돌아서 발레리아스 제도를 향해 전진함. 대충 지브롤터 주변에서 무슬림 함대가 또 나타났지만, 얘내도 개털린거는 마찬가지였음. 이때쯤, 1108년이 끝나갔음.
1109년 봄쯤이 되자 이들은 발레리아스 제도에 상륙함.
발레리아스 제도는 대충 당시 지중해의 위대한 항로였는데, 무슬림 해적들이 모여사는 공포의 섬이자, 한번 잡혀가면 고향으로 못돌아오는 유명한 노예무역지였음.
바이킹들이 또 해적질은 못참았기에, 여기에서 시구르드와 노르웨이 함대는 '해적을 해적질'하기 시작했음.
발레리아스 제도에서 가장 단단히 요새화되있던 마요르카 섬의 토후들을 제외하곤, 모든 섬의 무슬림 토후들과 해적들은 깨강정이 났고, 노르웨이군은 그 뒤의 모험에서 얻은것들과 맞먹을정도의 금은보화들을 여기 한곳에서 다 긁었음.
발레리아스 제도는 이때 거진 다 털려서, 다음공격을 못 막을만큼 약체화되었고, 노르웨이군이 떠난 다음 이때다 싶었던 카탈루냐인들과 피사인들의 연합함대에게 박살나서 재정복됨.
1109년 늦봄쯤에, 얘내는 발레리아스에서 더 긁을게 없자 시칠리아의 노르만 공국으로 향함. 그들이 상륙한 곳은 소년 백작 로제르 2세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얘내 둘다 대충 노르만계라서 언어도 통하고, 로제르 백작이 환대도 해준 덕에 여기에서 즐겁게 지냄. 겸사겸사 발레리아스에서 약탈한 보물로 식량도 모음.
대충 노르웨이 십자군은 1109년 늦봄에 도착해서 1110년에야 출발해서, 여름 경에 성지 예루살렘 왕국의 항구 아크레에 도착함.
이들의 도착타이밍은 아주 절묘했는데, 그 시기에 딱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원병과 함께, 여러 나라의 소규모 십자군이 모인 터라, 예루살렘 왕 보두앵은 매우 기뻐했음.
보두앵은 시구르드 왕에게 진품 십자가 조각을 비롯한 여러 금은보화를 주었고, 같이 요단강에 배띄우고 파티도 여는 등 즐겁게 놀았음.
그 뒤, 시구르드 왕과 십자군은 주요 항구도시였던 시돈을 포위하고 점령해서 예루살렘 왕에게 주었음. 이후 1110년 한해동안 팔레스타인 해안지대를 공격해 많은 영토를 늘리고, 시구르드 왕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음.
이 친구들은 돌아가는길도 읔쾌했음.
먼저 이들은 1110년 언저리에 아크레에서 출발해 동로마 제국 해안을 빠르게 타고 올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함.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로마인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시구르드와 노르웨이인들을 매우 환영했음.
시구르드는 상남자 바이킹 답게 뒤도 안돌아보고 자신들이 타고 온 60+a(납치)의 배들을 모두 팔아서 신나게 돈을 쓰고 말을 샀기 때문이었음.
노르웨이인들은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중 하나였던 콘스탄티노플의 부와 아름다움에 반해버린 상태였는데, 알렉시오스 황제는 이때 딜을 걸기 시작함.
'님들. 돌아가는것도 귀찮으신데 혹시 바랑기안 가드 입대 안하실래요?'
'음.... 연봉 많이줌?'
'노르웨이에서는 만져볼 수 없을만큼 페이 좋음'
'오케이. 이적함 ㅅㄱ'
시구르드 왕은 배랑 그동안의 약탈품 뿐만 아니라 자기 전사들을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오스 황제에게 용병으로 팔아서 또 큰 돈을 만짐. 전사들도 내심 동롬에 눌러살고 싶었기에 많은 수가 용병을 자청함.
6000명 중에, 전사자가 많지 않았음에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시구르드와 함께 귀향길에 오른 전사는 수백명에 불과했을정도로 바랑기안 가드 이적시장은 활발했음.
하튼 윈윈한 계약 이후 동로마인들은 튼튼한 말 수백필을 시구르드에게 주었고, 이 말을 타고 그대로 모에시아-헝가리-신성로마제국 루트로 육로 북상함. 그리고 덴마크에 도착했을때쯤엔 이 말을 또 덴마크 왕 닐스에게 팔아다가 배를 사서 노르웨이로 향함.
이렇게 1113년에 이들의 유쾌한 원정은 막을 내렸고, 이베리아 무슬림들의 공포스러운 전설과 피해 기록에 대한 역사서, 그리고 동로마 인들과 계약해서 남긴 룬 비석들의 기록덕에 이놈들의 모험이 사실임을 역사적으로 알 수 있게됨.
첫댓글 ㄷㄷ 바이킹 바이킹 하더니 이유가 있군여
윾쾌한 바이킹 ㄷㄱ
바르바리 해적:우리보다 더한 놈들이야!도망쳐!
그냥 전국순회도는 건달...
ㅎㅎㅎ 세상에 아주 윾쾌한 건달들이네요
지식이 늘었다
별명이 '십자군'인 유일한 군주죠
이 무슨 유쾌함!
역시 해적의 본좌는 바이킹이네요. 바르바리따위는ㅋㅋㅋ 6000명으로 끝도없이 싸웠을텐데 인명피해도 거의 없는것도 신기하네요
의외로 냉병기 전투에서 승리한쪽은 사망자가 많이 안나옴 ㅋ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0.07.12 11:34
6년만에 유럽 전역을 휘젓고 해피엔딩ㄷㄷ
5년 넘게 전장에서 굴렀는데 손실이 적으면 와...
예능관에서 역사게시판으로 이전되었습니다.
ㄷㄷㄷㄷ
바랑기안엔딩까지 완벽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