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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빈 손으로 온 사람/살전 2:1-4
○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모범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3.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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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채규현목사
우리가 지금 계속해서 바울이 복음이 전한 지 한달도 안 된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바울의 사랑, 그 교회의 복음의 열정, 이런 면을 우리가 함께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면서 보고 있습니다. 지난주까지는 1장 전체를 보았습니다. 1장에서는 주로 인사말이죠? 그리고 바울이 그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 들은 소문들에 대해서 감사하다, 믿은 지 얼마 안 됐지만 그들에게 복음이 흥왕하고 그들이 복음의 소문이 그들이 복음이 증거한 것, 그들의 삶, 모든 것을 통해서 좋은 소문들이 나게 된 것을 감사한다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부터는 바울이 편지한 본론에 들어갑니다.
본론에 들어가서 몇 가지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꼭 필요했던 말씀들이고, 그리고 이것이 성경이 된 것은 온 교회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바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쓴 여러 가지 주제, 내용들을 우리가 잘 이해하려면 그 배경을 충분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리스의 지금의 북쪽 지방입니다. 북쪽 지방에 있는 중요한 교회로는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가 있습니다. 바울이 제일 먼저 유럽 쪽으로 건너와서 제일 먼저 복음을 전한 곳이 빌립보입니다. 강가에서 자주 장사-아마 거기서 염색을 하고, 천을 씻고 그랬나 봅니다-루디아를 만나죠. 그래서 루디아의 집에서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러다가 길에서 점보는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나죠. 그가 계속 괴롭게 하니까 그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러니까 온갖 그 사람들의 핍박이 있고 마침내 그들이 감옥까지 갔다 오죠.
그렇게 해서 거기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고 거의 도망치듯 밤중에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베뢰아에 들렸다가, 아테네에 들렸다가, 그리고 고린도까지 왔습니다.
거기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들어보니까 그 뒤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바울과 실라, 디모데 일행이 떠나면서 급히 떠났기 때문에, 충분히 우리처럼 고별식도 하지 않았고 환송식도 하지 않고 갑자기 떠났습니다. 없어진 거에요. 그러니까 만난 지 한 달도 안 됐으니까, 비록 한 달 동안에 그 복음의 능력과 은혜를 말미암아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전한 그 사람들이 갑자기 떠난 뒤에 여러 가지 말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이 아마 뭔가 한 살림 챙겨서 떠났다.” 이런 말들도 할 수 있고, “그들이 갑자기 자기들의 정체가 탄로날까봐 갑자기 없어졌다.” 이런 얘기도 나올 수가 있고 온갖 루머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들이니까 흔들리죠. 뭐가 흔들리냐면, 바울이나 실라나 디모데에게 “이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이냐, 못 믿을 사람이냐?” 그 문제가 아닙니다. 그 신뢰가 흔들리게 되면 무슨 문제가 생기게 되냐면 그들이 전한 복음이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과연 이 복음을 믿을 수 있을까?” 그 전한 사람의 신뢰가 있어야 그들의 말을 믿을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니까 그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내용의 말도 누가 말했느냐에 따라서 그 말의 신뢰도가 결정이 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에요. 바로 그런 면 때문에 바울이 자기 스스로를 변호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2장, 3장에 걸쳐서 바울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는 사실을 스스로 자기 변호를 합니다.
여기서 오늘날 목자와 성도와의 관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목자와 성도의 관계는 어떠해야 되고, 어떤 관계가 되어야만 하는가?
물론 바울은 사도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직이 지금의 목사에게 계승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직의 권위는 예수님께로 직접 받은 권위입니다. 절대적 권위입니다.
그런데 그 사도의 절대적 권위는 그들이 성경을 쓰면서 성경의 절대적 권위로 바뀐 것입니다. 그 뒤에 수많은 목회자들이-디모데부터 디도, 계속해서 목회자들이 나오지만 그들의 권위는 사도의 권위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목회자적 입장에서 한 그것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연결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자로서 데살로니가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자기의 진실성, 진정성 이런 것들을 바울이 변호하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까?
그리고 바울이 복음을 증거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 자기의 신실성이 흔들리면 복음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런 면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교회에서 한 목사의 신실성이 흔들리게 되면 복음이 흔들리게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 때문에 시인하건대 목사지만 저도 인간적인 면이 있고, 죄적인 면도 있고, 결점도 있고, 부족한 점,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면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수많은 성도들이 주변에서 봅니다.
보지만, 그 면이 저와 여러분과의 관계에서 이야기되어지고, 저와 여러분의 관계에서 꾸짖기도 하고, 또 시정을 요구하기도 하고 이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밖에 나가서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왜냐, 제 체면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제 얼굴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때문에 그럽니다. 복음이 땅에 팽개쳐짐을 당할까봐요.
그래서 부흥하는 교회들을 보십시오.
사실 뭐가 더 먼저냐 그럴지도 모르지만, 부흥하는 교회들은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한결같이 밖에 나가서 교회를 칭찬하고, 특히 담임 목사와 교역자들을 칭찬합니다. 자랑합니다.
제가 비록 이렇게 생겼지만 여러분은 밖에 나가서 저를 자랑하셔야 합니다.
왜냐, 제가 잘났다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기본을 복음을 위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도 자기가 스스로를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위해서 나의 신실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자, 그런 면에서 바울이 3가지로 나누어서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2장 1절로 2절까지 에서는 바울과 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갈 때의 여러 가지 면에 대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2장 3절부터 16절까지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있을 때에 어떻게 있었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장 17절부터 3장 13절까지는 급히 바울과 그 일행이 떠나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 이후에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마음, 그의 계획, 이런 것들을 쓴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통틀어서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내가 전한 복음이 진짜다.” 이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2장 1절부터 봅시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안다.”
헛되지 않다는 것은 참된 목적이 없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 자기 직업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고, 다른 허탄한 목적, 허망한 목적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당시 데살로니가에 들어갈 때의 바울과 그 일행들의 행색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대단히 초라했을 것입니다. 빌립보에서 감옥에도 갇혔죠? 옷을 빨아 입었겠습니까, 나와서 갈아입었겠습니까? 그 다음에 온갖 일로 바삐 빌립보에서 도망치듯 나왔습니다. 그리고 걸어서 데살로니가까지 왔으니 그 행색과 몰골은 가히 짐작할 만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게 뭐가 있겠어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오히려 그 데살로니가에 와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죠? 빈손으로 왔습니다. 와서 얻어먹으면서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왔지만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 이것은 비록 우리가 당신들에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이 와서 빈손으로 와서 오히려 당신들에게 신세를 졌지만, 사실은 우리가 당신들에게 들어갈 때 가장 귀한 것, 복음을 가지고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진짜 귀한 선물을 가지고 온 하나님의 사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면을 이야기해요. 인간의 눈으로는 행색이 초라한 방랑자처럼 보였지만, 거의 거지 수준으로 보였지만, 아무것도 없이 와서 자기들에게 빌붙어 사는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그들에게는 진정한 생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 보면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가 하나님에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이미 빌립보에서도 고난과 능욕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에 들어가서 또 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할 때는 많은 싸움 중에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어렵고 피곤하고 힘든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들이 계속해서 복음을 계속해서 증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뭡니까? 복음의 가치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복음을 저 사람들이 들어야 될 텐데, 싸움하면서도 기어이 그 복음을 증거하고자 노력해서 드디어 데살로니가에 교회가 생긴 것입니다.
복음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까?
여러분이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주변에, 여러분 앞을 지나다니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불쌍한 사람들이 누가 있냐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천국의 소망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해줘서 한 생명이 주님 앞에 돌아오는 것이 가치가 있기 때문에 어떠한 싸움이라도, 어떠한 능욕이라도 능히 견디고, 이 복음은 증거되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복음을 어디에 두고 계십니까?
벽장 속에 두고 계십니까?
선반 위에 얹어 놓았습니까?
아니면 열심히, 여러분이 어디를 다니든지 그 복음을 들고 다니면서 누구에게나 나누어 주고 있습니까?
복음을 나누어줄 때, 복음을 전할 때 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보든 관계없어요.
여러분의 행색이 어떻든지 관계없습니다.
여러분의 말이 짧은 것도 관계없습니다.
복음은 그 자체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누구에게든지 있는 그대로 복음을 증거하십시오. 바울이 전한대로요.
저도 여러분에게 그렇게 하길 원합니다.
어찌되든지 복음이 흥황하길 원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복음이 흥황하길 원하고, 우리 교회 밖에서도 어찌하든지 복음이 흥황하는 길을 찾기를 원합니다.
그들의 생명을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면에서 바울이 거듭거듭 한 말이 “너희가 친히 아나니” 우리가 이렇게 한 것을 너희가 알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 “너희 아는 바와 같이.”,
또 5절에 “너희도 알거니와” 바울이 지금 스스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계속해서 하는 말이 “너희도 알거니와”입니다.
또 9절에도 보면 “너희가 기억하리니” 옛날에 있을 때에 내가 한 일을 너희도 기억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10절 끝에도 “너희가 증인이요” 이미 다 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11절에도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계속해서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비록 거기에서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을 데살로니가에서 있으면서 복음을 전했지만, 그 때 바울의 삶은 전부 노출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하는 일도 다 노출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다 보여졌다는 말입니다.
“너희도 다 알지 않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교회에서도 저의 삶이 노출되기를 원합니다.
노출될 때에 저의 연약한 면도 물론 보일 수가 있고, 저의 결점도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비록 그렇게 연약한 인간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복음증거하는 일에 세우셨으니까 그 일을 위해서 열심히 내 자신을 치려고도 노력하고, 열심히 그 일을 위해서 나도 매진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모두 같이 나누기를 원합니다.
어찌하든지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성도들이 많으니까 모든 사람과 동일한 시간을 하루씩 이틀씩 낼 수는 없겠지만, 어찌하든지 만나는 시간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줘서 가식적인 것이 없이,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시간들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너희도 알거니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 아주 감추는 비밀이 없는 상태, 서로서로 마음을 열고 함께 보는 상태, 이것들이 필요합니다. 사실 지금 우리가 기초양육훈련을 하고 있죠? 장로님들은 제자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함께 나누고 이야기할 때 모든 삶을 함께 나누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 제자훈련 할 때 장로님들께도 말씀드렸지만, 사실 그런 것들을 하면서 제일 힘든 게 누구냐면 바로 접니다.
왜냐하면 삶을 내놔야 되니까요.
거기 나온 모든 분들도 함께 삶을 내놔야 되니까요.
이건 그냥 성경공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삶을 내놔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투명하게 비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는 위험부담이 따르거든요.
“아니, 저 사람이 저랬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근본적으로 우리의 모든 본전이 어떻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누구 이야기할 것 없어요.
단지 서로가 서로를 내놓고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위해서 더욱 기도해주고, 서로를 더욱 감싸주고, 서를 위해 더욱 도와주고, 격려해주고, 그래가면서 함께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때는 자신있게 서로가 “장로님들도 다 아시겠지만, 집사님들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제가 이런 면이 있고….”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뿐만 아니고, 여러분들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에게든지, 교회 안의 모든 조직과 모든 기관과 모든 모임과 팀들이 있죠? 그런 가운데에서도 여러분의 삶이 함께 나누어져야 합니다. 함께 나누어지면서 그 속에서 복음이 함께 나눠지는 그러한 역사들이 일어나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일반적으로 사는 삶은 다르고, 교회에 와서 비춰지는 면은 또 다르고,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나눔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수없이 많은 경우에 “너희도 알거니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함께 그렇게 삶을 나눴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도 여러분과 삶을 나누기를 원하고, 여러분들도 우리 모두가 다 함께 삶을 나눌 수 있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들어올 때 온갖 환난과 핍박과 싸움에도 불구하고 너희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들이 알지 않느냐고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왜 그들이 그렇게 했느냐, 이 복음이 당신들에게 가장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수없이 많은 복음 전하는 사람들이 어떻습니까? 생명을 걸고 복음을 증거합니다. 우리 한국은 생명을 걸 일이 없으니까 오히려 복음이 흥황 안하지 않나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될 수 있는 대로 적금이라도 들어서 여러 선교지들을 방문해 보십시오. 그러면 거기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걸고, 자기 인생을 걸고 복음 증거하는 것을 여러분이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정신이 번쩍 날 것입니다. 한번 가십시다. 그래서 그 복음의 귀함 때문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인생을 걸고, 그 복음의 귀함 때문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명을 걸고, 자기 가족의 생명까지 같이 걸고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복음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전해주신 것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3절, 4절을 봅시다.
드디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있으면서 바울과 그 일행이 복음을 증거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다, 그래서 사실 교회 조직 안에서는 목사가 복음 전할 부탁을 받은 청지기 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도 어디에서나 복음 전할 부탁을 받은 청지기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청지기적 역할을 이야기했습니다.
바울이 “나는 복음 전할 부탁을 받은 청지기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 앞에서 그렇고, 여러분도 모든 사람들 앞에서 복음 전할 부탁을 받은 청지기들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면 그 역할을 어떻게, 가장 완전하게, 적합하게 했는지 말씀을 하나하나 봅시다.
바울이 청지기 역할을 어떻게 했냐면 제일 먼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말로는 조금 의미가 달라지는데, 원래 의미로 하면 간사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전한 복음은 절대로 가짜가 아니고 진짜다.” 요새말로 하면 짝퉁이 아닌 오리지날, 진짜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전한 복음은 진짜다, 가짜가 아니다, 유사품이 아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면, 그 뒤를 보십시오.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잘못된 동기로 너희에게 전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불행하게도 이 세상의 많은, 소위 복음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사람들 중에서 잘못된 동기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여러 사역자들 중에도 섞여 있어요. 섞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에 일반 성도들은 거기에 대한 구분이 잘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겉으로 보일 때는 다 성도들에게 잘 하니까요. 그렇지만 그들의 마음에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불순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남자들이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들을 꼬실 때 그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잘못된 동기로요. 잘해주죠? 그런데 이 불쌍한 여자들은 ‘이 사람이 나를 진짜로 사랑하나보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홀딱 넘어가서 모든 것을 다 주고나서, 그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얻고 나면 홀라당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한 면이 복음을 증거하는 면에도 얼마든지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여러분에게 접근합니다.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해줍니다. 쫓아다니면서 기도해줍니다. 잘못된 동기로요. 그리고 궤계를 씁니다. 궤계는, 우리가 이 세상에 마음을 두고 있는 한 궤계가 통합니다. 어떻게 통하는지 잘 보십시오. “내가 기도하면 이거 금방 나아. 내가 기도해주면 당신 사업이 잘 될 거야. 내가 기도해주면 모든 당신의 문제들이 다 해결될 거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수시로 다니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을 빼앗고, 돈을 빼앗고, 모든 것을 빼앗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제가 예수님 믿기 전에 무수히 본 것입니다. 절에도 다니고, 어디 “비나이다” 하는 곳에도 다닐 때, 거기서 소위 액땜을 하라고 합니다. “이거 액땜 안하면 당신 앞으로 문제 있을 거다.” 우리 어머니에게 “이거 액땜을 해야 당신 아들이 잘 된다.” 그러면 한밤중에 시루떡 해가지고 사거리 한 가운데에 몰래 나가서 땅을 파서 뭘 묻기도 하고 그런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 소리 들으면 찜찜해서 안 할 수가 없어요. 혹시 내 아들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봐요. 소위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의 이름을 걸고 그런 식으로 협박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식으로 감언이설로 속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현혹될 것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천국이요,
이 세상에서는 믿는 백성 중에서 잘 사는 사람들도 있고 못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천국 가는 그 날에 뒤돌아보면, 30년을 살았든 100년을 살았든 눈 깜짝할 새입니다. 일장춘몽과 같은 새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확실하게 압시다. 그러니까 여기에다 막 소망을 두고, 여기 있는 모든 것이 없어질까 봐 벌벌 떠는 그런 사람들이 지남철처럼 달라붙어요. 이 세상에서 잃어버릴 것들이 많은 사람들, 이 세상에 뭔가 붙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뭔가 냄새를 맡고 온다니까요. “내가 기도해줄께.”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에 걸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복음을 증거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복음을 증거하지 마십시오.
“예수님만 믿으면 당신 사업 잘 될 거다.” 그렇게 복음증거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그 병든 것 다 나을 거다.” 그렇게 전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믿고도 병 걸리는 사람은 어떻게 하겠어요?
뭐 잘못해서 병 걸립니까? 안 믿어서 병 걸립니까? 그런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적인 것을 걸고 예수님 믿으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게 잘못하면 궤계와 간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영생이 있다, 예수님 속에 죽어도 사는 영생이 축복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되고, 이 세상의 삶에서도 우리에게 있는 복은 무엇이냐면, 이 세상에서 잘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능히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증거해야 되지 “예수 믿으면 잘 될 거야, 예수 믿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야.”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은 그런 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바울도 그랬을 것입니다. 진정한 복음을 간사로, 부정한 동기로, 궤계로 증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복음 증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복음을 이야기할 때 “예수님 믿으면 다 잘 된다.” 고 말하지 않습니다. 잘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뭐가 문제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뒤에 영원한 삶이 있는데, 우리에게는 영원한 삶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 순간은 찰나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 있는 이 때에는, 이 세상이 어려울 때에는 길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나고 나면 뒤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이 살았던 인생, 30년을 살았든 70년을 살았든 뒤돌아보십시오, 인생이 얼마나 허망한지. 주님 앞에 가는 그 날에 느낄 때는 더욱 더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잘 전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4절에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하나님이 테스트를 하셨다는 말입니다.
진짜 믿는가 안 믿는가 말입니다.
옳게 여기심을 입는다는 말은 “도키마조(δοκ μαζω : dokimazo)”라는 말인데 이것은 시험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금은방에서 누가 금반지를 팔러 오면, 한번 눌러도 보고 긁어도 보죠? 불에 한번 태워보기도 하고, 돋보기로 자세히 보기도 하고, 그리고 “맞습니다. 이것은 순금입니다.” 하는 이 과정이 도키마조입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완전한 것인지 불완전한 것인지 시험해 보는 것이 도키마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시고, 진짜 믿는지 안 믿는지 확인해 보시고 그 다음에 복음 전할 부탁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그 일행이 확실히 복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줄 확인하고 그 다음에 복음 전할 부탁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도 복음 전할 부탁을 하셨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복음 전할 부탁을 하신 것입니다.
부탁을 받은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제가 청지기이고, 개별의 모든 삶에서는 여러분이 모두 청지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러니까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이게 무슨 말이냐면, 내가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다음부터 어느 누구도 보지 않고 내가 복음 증거하는 면에서 하나님 앞에서 옳다 인정함을 받겠다 이겁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온전한 청지기의 일입니다.
제가 여러분 앞에 설 때에도 제가 사람을 보고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여러분이 기도해 주십시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무엇인가 오직 그것만을 생각해서 제가 담임목사로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여러분이 도와주시고 기도해주셔야 합니다.
이 역할이 마치 뭐와 같냐면 호텔의 총지배인과 비슷한 역할입니다.
제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한다고 해서 사람을 무시하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호텔의 지배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호텔 지배인의 모든 직무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고객감동, 호텔에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기쁘고 만족하게 그 호텔에서 묵고 가게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어찌하든지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하루 종일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어요.
그렇다고 그 호텔에 온 사람들 마음대로 다 하게 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방에서 텔레비전을 들고 나가는데 가지고 가게 합니까? 못 가져가게 하죠. 왜냐, 사실은 그 모든 손님들에게 열심히 고객감동으로 섬기는 이유는 호텔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호텔이 잘 되서 주인에게 유익이 가도록 하기 위해서 손님들에게 잘 하는 것이거든요.
결국 청지기의 역할은 바로 그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예수님을 잘 믿고, 그 안에서 정말 천국을 서로 나누고, 진정한 천국 공동체로서 우리 교회가 이루어지고 이것을 위해서 제가 열심을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이 목표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전체 성도들이 하나님을 떠나가자 하면 떠나갑니까?
하나님과 멀리 갈 때에는 열심히 쫓아가서 붙들어야 되죠?
잘못된 길은 바로 잡아야 되죠? 그게 그 분에게 기분 나쁜 일이 될 수도 있고 그 분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것이 그 분을 위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목표를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두렵습니다.
여러분은 안 볼 때가 있어요. 그러나 저는 결국 하나님 앞에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보고 계시니까. 그것을 잊어버리는 순간에 저는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언제나 제가 그것을 중심에서 바로 잡고 갈수 있도록 여러분이 도와주셔야 되고, 여러분이 기도해주셔야만 하겠습니다. 청지기 역할은 저에게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 교회가 어떻게 비치느냐, 이 세상 사람들에게 여러분 개개인이 어떻게 비춰지느냐 그것을 의식하고 사십시오. 그들에게 최대한 서비스를 하십시오. 그들에게 가장 좋은 이웃이라는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 여러분이 노력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같이 믿지 않는 길을 가자고 할 때, 믿음에서 떠나가는 길을 함께 가자고 할 때는 안 가죠. 그렇지만 그들에게, 마치 호텔 지배인이 고객들에게 감동 서비스를 하듯이 여러분은 그들에게 감동 서비스를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가장 좋은 면으로 비쳐지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믿지 않는 여러분의 가족들, 믿지 않는 여러분의 이웃들, 믿지 않는 여러분의 직장 동료들, 믿지 않는 친구들, 어디가든지 누구에게나 여러분은 좋은 소문이 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는 여러분이 열심히 해서 어떤 것이 되겠다 그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뭔가, 내가, 내가…” 이것은 곤란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행동을 결정하는 유일한 것이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가?”
궁극적으로는 그렇고, 실질적인 면에서는 “이것을 통해서 저 사람을 충분히 섬기고 있는가?
저 사람에게 좋은 면으로 비춰지고 있는가?
차라리 그것을 위해서 내가 손해 봐야 되지 않는가?”
이런 모든 면으로 생각해서 여러분의 행동과 여러분의 모든 삶의 방향을 결정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습니까?
교회적인 면에서 이야기하면, 우리 교회 소문이 잘 나야 합니다. 문제가 없는 교회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도 문제가 있죠.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끼리 해결하는 거에요. 밖에 나가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이죽이죽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다. 그러면 복음이 문제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어차피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복음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자 이겁니다. 함께, 저도 노력하고 여러분도 노력하고. 오히려 그렇게 사는 삶이 복음을 위해 산다고 하는데 점점 우리의 삶 속에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고, 감사가 있고,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준 그 복음의 귀함과 능력이 우리 교회에도 있기 원합니다. 바울과 같은 마음이 제게도 있고, 여러분 모두에게도 함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