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묘행무주 원문보기 글쓴이: 묘하
제8강 무득무설분-의법출생분/설우스님
안녕하십니까? 무득무설분. 제7입니다. 본문을 한 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수보리야.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었는가? 여래가 설한법이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이라 할만한 정해진 법이 없고 또한 여래께서 설한 단정적인 법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한 법은 모두 얻을 수도 없고 설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고 법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성현들이 다 무위법 속에서 차이가 있는 까닭입니다.
금강경 강의 가운데 오늘 제7 무득무설분이 또 한번 설명하기가 어려운 대목입니다.
그래서 그 소제목에 쓰여 있듯이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다. 또는 얻은 것도 없고 설한 것도 없다. 이렇게도 생각해도 되죠.
이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은 제가 여러분에게 어떻게 이걸 설명을 해야 되나?
사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셨을 때는 스님법문을 듣고 뭔가 얻은 것도 있고, 남는 것도 있고, 느끼는 것도 있고, 이렇게 해서 그것이 또 법문 듣는 공덕이고 보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무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다고 하는 이 제목이 이게 선적인 표현이죠.
그래서 선가에서 이 금강경을 선서라고 그러는 거요. 얻은 것도 없고 설한 것도 없다.
얻은 것도 없고 설한 것도 없다고 그랬는데 부처님은 분명히 성불하셔 가지고 45년 동안 성문을 만나면 사제법을 설했고, 또 영각을 만나면 그 12인연법을 설했고, 보살에게는 6바라밀을 설했고, 법화경에서는 일불성을 설했는데 어째 설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나. 또 얻은 것이 없다고 그러는데 부처님은 수다원이나 사다함이나 아나함이나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제자들에게도 다 말씀하시고 또 법화경에서는 많은 제자들에게 수기를 하셨거든. 그런데 어떻게 또 얻은 것이 없다고 하나. 이게 말이 앞뒤가 잘 안맞는다 이 말이오.
이것을 여러분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되느냐? 이게 참 어려운 법문입니다. 대목입니다.
그래서 먼저 여러분들에게 무지역무득이라는 것을 조금 이해를 시키려면은 가장 친숙 되 있는 단어가 반야심경에서 찾아 볼 수가 있어요.
무지역무득이다 이런 말이 있죠. (없을 無무. 알 知지) 아는 바도 없고 알 바도 없고 얻은 바도 없다. 이 말이거든. 무지역무득.
그러면 무지라는 말은, 아는 것이 없다 이 말은 구마라즙에 제자 중에 아주 뛰어난 성조라는 제자가 계시는데 그 분이 쓴 반야무지론이라는데 보면은 무지라는 말을 어떻게 표현했냐 하면은 아는 것이 있으면 모르는 것이 있다.
이렇게 표현을 하거든요. 여기서 아는 것이 있으면 모르는 것이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일반 상식이죠. 그렇죠?
그러니까 이것은 서로 상대적으로 이렇게 양변으로 벌어져 있는 얘기죠.
좋은 것이 있으면 싫은 것이 있다. 깨끗한 것이 있으면 추한 것이 있다. 사랑이 있으면 미움이 있다.
이런 것들은 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중생심에서 그것으로 인해서 생기는 게 뭡니까? 괴로움이 생기죠.
왜 괴로움이 생깁니까?
미운 거는 미운 것에 대해서 멀리하고자 하는 그러한 집착이 있어 가지고 그렇고. 또 사랑하는 건 사랑하는 그 자체에서 그것을 가지려고 유지 하려고 하는 집착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거든요.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좋다 싫다, 있다 없다, 이런 용어들은 결국 우리가 이러한 용어들이 가지고 있는 뜻에 의해가지고 집착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마음이 항상 괴로움이 생기고 고통이 생기고 그렇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은 성인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모르는 바가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좀 어렵죠?
그러니까 아는 바가 없다는 것에는 여기서 말씀 하는 건 일체 집착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분별심 그런 분별심이 없다는 것이죠. 여기서 무지라는 것은 분별심이 없다.
그러나 분별심이 없다는 그 말은 집착이 없다 이 말이거든요.
그럼 그 앞전에 우리가 계속 공부해왔듯이 이걸 무주라 그랬거든요.
무주. 무주는 머무름이 없다는 말은 집착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무주이기 때문에 집착이 없기 때문에. 또는 한 쪽으로 치우친 편협심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아주 평등하고 자유분방하게 사실을 사실대로 볼 수 있는 지혜가 열린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르는 바가 없다 이렇게 하는데. 요건 조금 어려운데. 조금 더 쉽게 접근을 해 보도록 해 보겠습니다.
먼저 시간에도 제가 여기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그랬는데.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라는 말은 無上正等覺무상정등각이라고 제가 설명을 해 드렸죠.
그래서 여기서 (없을 無무) 무엇이 없다는 것이냐? 無得무득이라 얻을 것이 없다. 왜 얻을 것이 없느냐?
본래 자성에 그러한 공덕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얻을 것이 밖으로부터 들어 올 것은 없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 無무자에 무슨 뜻이 있다고 그랬죠? 무념이다 이런 말이 있죠. 왜? 무념이냐? 물들것이 없다는 말인데. 본래 이 자성자리는 허공과 같이 텅 비어있어서 거기에는 물들래야 물들 수도 없다. 그랬죠?
그리고 또 뭐라고 그랬습니까? 무소유라 이런 말을 했죠.
이게 다 없을 無무자안에 들어가 있는 뜻을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무소유라는 것에는 본래 마음 본성자리에는 그렇게 미워하고 싫어하고 집착하고 괴롭고 이런 것들이 그 자성자리에는 세울 수가 없다 이 말이죠. 가질 수가 없죠. 그래서 무소유라 그런 것이죠.
이러한 것들이 거기에 들어가 있다는데. 이러한 뜻이 들어가 있다는 이 말은 우리 불심에는 그 근본 정신이 그렇다는 것이죠.
그런 것들로 본래 공덕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죠. 그렇죠?
그래서 상이라고 그럴 때는 높을 상자를 쓰는데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나 중생이 살아가는 세계를 삼계라고 그러잖아요.
이 삼계안에서는 이렇게 훌륭하고 이렇게 높은 진리를 상대할만한 철학이나 이치나 진리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높다는 뜻인데. 여기에 높은 것은 낮음에 반대되는 높음이 아니고 절대적인 높음이다.
정말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에 대비할만한 그런 진리가 없다 이 말이거든요.
그래서 正정이라고 할 때는 바를 正정자가 正見정견이라고 그랬잖아요. 정법이라.
그리고 等등자를 이야기할 때는 그 等등은 우리 모두가 다 마음 가운데 이러한 지혜로운 일체지를 다 갖추고 있다.
그래서 그 이러한 내용들을 無上正等正覺무상정등각은 覺각은 佛불이니까 불심이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 본래 불성 속에는 다 이런 공덕이 갖추어져 있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뭐라고 했습니까? 여래가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었는가? 법을 얻은 바가 있느냐? 이런 이야기거든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무상정득각으로써 그런 좋은 진리의 법을 가졌는데 그것이 사실은 거짓이라는 거요.
쉽게 말해서.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이게 사람이 속된 말로 말하면 돌아버릴 일이지.
지금까지 다 있다고 해 놓고선 왜 이것이 없다고 그러느냐 이 말이죠. 그것참.
나도 왜 그러냐 하면은 이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제가 무소유라고 말을 했고. 무소득이라 말을 했고. 무념이라고 말을 했지마는. 그런 것들은 다 사실은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이름들이지. 무념이나 무소득이나 무득이나 이런 것들이 본래 영원 불변하게 없어지지 아니하고. 영원성을 가진 그런 불변성을 가진 진리라든지 또는 그 개체성은 아니라는 것이죠.
왜 그러냐? 부처님께서 성문을 만나면은 성문에게 맞는 법문을 설하셨거든요.
그리고 연각을 만나면 연각에게 맞는 법문을 설했어요.
그러니까 요즘 말하면은 상대의 근기와 믿음과 신심을 봐가지고 거기에 맞게끔 맞춘 법문을 하신 것이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전부 다 한마디로 말해서 방편으로 한 말씀이지.
실제로 부처님의 본 그 마음은 열어 보이고 싶어도 열어 보일 수도 없고. 또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도 드러낼 수가 없다는 것이죠.
저번시간에도 말씀을 드렸듯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모든 좋은 진리의 법도 다 땟목이라 그러지 않았습니까?
땟목이라는 말은 방편이다 이런 말이거든. 그래서 이것을 應機說法응기설법이다. 對機說法대기설법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근기에 맞춰서 하신 법문이다 이 말이오. 근기에 맞춰서 한 법문이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은 아니다는 것이죠.
왜? 어린아이를 이렇게 보고는 그 어린아이 앞에서 어른이 ‘이리 오너라’ 이렇게 해서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믿고 아장아장 걸어오게끔. 부처님이 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베푼 것이지.
사실은 그 어린아이는 본래 걸을 수 있고. 본래 다 장성 할 수 있고. 어른이 될 수 있는 공덕이 그 안에 다 들어가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라고 한마디로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딱 정해서 이야기 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시절인연이 도래 하면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걷고 어른이 되고 짝을 지우고 그렇게 살게끔 되어 있는 거를. 어떻게 이것이 딱 하나로 찍어서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이해가 조금 갑니까?
그러면 우리 불성의 공덕자리는 어떤 공덕이 있냐 하면은 그런 모든 공덕을 갖춰져 있는데. 그 공덕은 쓰는 사람이 지혜가 있을 때는 아주 자유스럽게 쓴다는 것이죠.
그 자유는 너무나도 평등한 질서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유인데. 그 자유는 예측이 불허해. 왜 예측이 불허한가?
상대의 인연과 근기와 그 입장과 상황에 맞추어서, 그 상황에 최대한 맞게끔 하는 것이다 이 말이오.
그래서 예를 들자면 고기가 물속에서 이렇게 놀잖아요. 고기가 물 속에서 노는데. 아무리 여러분들이 저 고기가 우측방향으로 갈 것이다, 좌측방향으로 갈 것이다. 어떻게 하겠어요?
여러분들 혹시 정월 달 되면은 신수 보러 많이 가시는 거 같애. 그런데 우측 방향으로 갈지 좌측 방향으로 갈지 그걸 누가 압니까?
고기가 그렇게 노니는 것은 아주 자유분방한 거요. 걸림이 없다 이 말이죠.
이걸 뭐라 그러죠? 반야심경에서는 무가애라. 걸림이 없다. 아주 정한 법 없이 들어가는 거야.
그러니까 그 자기가 노니는 그 순간은 고기에게는 아주 절대적인 그 작용에 삼매에 들어가 있는 거요. 거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요. 방향 틀고 노는 데는 유희하는 데는 부족한 게 없어요.
밖으로부터 수입해 들어와야 할 필요성이 없는 거에요.
그 자체에서 아주 자유로워 지는 거에요. 그렇게 자유로워 지면서도 그것은 그 인연 법에 맞추어서 아주 자유 분망하게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유의삼매다. 또는 어록에서는 육조단경 이런 데서는 일행삼매다.
생활 속에서 자기 하는 일에 아주 정말 최선을 다하면서 지혜롭게 잘 불교적인 관점에서 생활을 잘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한 것을 우리가 삼매라 그러는데. 이 삼매를 예측불허다 이 말이오.
그래서 이것을 무유정법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요. 정한법 있음이 없다. 요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거에요.
그래서 무득무설이라고 그럴 때는 지금까지 그렇게 좋은 말씀들을 해 드렸지만 도. 사실은 부처님의 그 본성 불심자리에 들어가서는 그런 것들이 다 인연에 의해서 방편으로 이름을 세운 것 들이지.
실제로 부처님의 지혜작용은 무슨 무가애다 무득이다 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런 말이 하나의 잠깐 빌려서 이해시키기 위해서 방편으로 만들어 놓은 이름이지 실제는 아니라는 거요.
이것을 내가 조금 더 이해가 쉽게 가게끔 시간을 가져야 되는데.
이게 컵이다 이 말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우리가 이걸 컵이라고 그러잖아요. 컵이라는 말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말과 같은 거에요. 부처라는 말과도 같은 거에요. 그렇잖아요.
부처도 이름이니까. 컵도 이름이고. 그런데 이 컵은 사실은 이 컵의 본질은 뭐하면 이 하나가 이 컵으로 만들어 진 건 아니거든요.
이 우주 전체의 많은 기운들이 모여서 이 컵이 이루어진 거거든. 그러니까 이 우주 전체 모든 것이 만들어 질 때는 그것을 우리가 인연이라 그러잖아.
시절인연이 서로 맞아가지고 이렇게 컵이 이루어졌거든. 그래서 이 컵이 이루어졌는데 실제로 쓰는 것은 뭡니까?
이 컵의 형상보다는 이 안에 비어있는 이 자리를 지금 우리가 쓰고 싶은 거에요. 그러잖아요?
비어져있는 이 공간 이것이 뭐냐 하면은 이것이 부처님이 드러내고 싶어하는 진리고 지혜라는 것이죠.
이 비어있는 텅 비어있는 이것을 우리가 진공이다 그러기도 하고 또는 지혜라고 반야라고 그러는데. 사실 반야나 진공이라는 것도 컵이라는 이름과 같은 거에요.
이 비어있는 이 자리를 진공이라 해도 안 맞고 반야라 해도 안 맞죠.
이것은 인연이 다하면 다 가버리잖아. 그렇잖아요.
가버리는데 컵은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컵은 이것들이 다 가고 나면은 컵이라는 이름은 거짓이름이야. 그렇죠?
제기 설우인데. 제가 속가에 있을 때는 속명이 있거든.
어릴 때는 또 어머니가 좋아하던, 부르는 이름이 또 있어요.
절집에 들어와서 처음에 오게받을 때 불명이 성진이라고 또 있거든.
지금 설우는 나이가 60이 넘으니까 법호를 받은 것이다 이 말이야. 그러면 사실은 성진이니 설우니 이것은 나의 본 모습이 아니에요.
나의 본 모습은 정말 여러분들이 나의 본 모습을 아는 것은 지금 알고 있잖아. 지금 보고 있잖아. 지금 여실히 보고 있잖아요. 여실히 알고 있잖아요.
이걸 뭐라고 해야 되겠습니까? 이걸 어쩔 수 없어서 반야라 그런 거에요.
이걸 어쩔 수 없어서 부처님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라 그런 거라.
그러나 사실은 여러분이 지금 저를 보고 있는데. 저는 사실은 설우도 아니고 성진이도 아니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아니에요. 그대로, 여러분이 보는 그대로, 여러분이 아는 그대로 그냥 그것이에요.
그래서 사실은 지금까지 좋은 말씀을 하고 다 했지만 도 그것은 얻을 것도 없고. 얻을 것은 없죠.
다 인연에 의해가지고 연생연멸로 인해가지고 부쳐진 이름이고. 또 방편으로서 그렇게 세워 놓은 거짓 이름이기 때문에 거짓이름을 그렇게 집착하고 붙들고 가질 것은 없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무득이라 그러는 거에요. 그리고 또 성문을 만나면 성문 법을 설하고. 보살을 만나면 보살 법을 설했기 때문에. 궁극적인 부처님의 그 본 공성자리는 드러 낼 수도 없고, 줄 수도 없고, 보일 수도 없기 때문에. 설한 그 자체도 다 방편이기 때문에. 사실은 설한 것도 없다 그러는 거에요.
설한 것이 없죠. 그 설한 것은 그러면 어디 있느냐? 설한 것은 여러분들이 일상 생활 속에서 여러분의 반야지혜를 가지고 아주 고기가 물에서 자유롭게 그 자유분방하게 노닐듯이.
여러분들도 이 반야지혜를 잘 열어서 일상생활 속에서 여러분들이 아주 자유분방하게 걸림 없이, 매임 없이, 고통 없이, 그리고 집착 없이, 병 없이, 그리고 마음에 윤회 없이. 여러분들 하루에 마음의 윤회를 하루에도 만 번 이상합니다.
만 번 이상 여러분들이 별별 세계를 다 쫓아다녀요.
그 한 생각 변할 때 마다 여러분들은 한 생각 변하는 모습에 몸을 받는 거에요.
그게 뭐 몸이라는 게. 이 몸은 그냥 있는 거 같애도 마음이 그렇게 되면은 몸이나 마음이나 심신이 일여이기 때문에, 하나이기 때문에, 그냥 여러분들이 그 순간에 축생도 되고, 그 순간에 천상도 되고, 그 순간에 극락도 되고, 그 순간에 부처도 되고. 그래서 이 마음 하나 안에 법화경에서는 10계가 들어 있다. 이렇게 이야기 했거든. 10계.
그러면 10가지 세계가 들어있다 이 말이죠.
부처님세계, 보살세계, 선문, 연각. 또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다 따지면 10가지 세계가. 이 10가지 세계를 하루에도 만 번 죽고 만 번 일어나면서, 만 번 들어가고 만 번 나오는 거야.
그런데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얻을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다는 이러한 참 고준한 이 법의 뜻을 이해를 하면은 만 번이 지옥에 들어가도 지옥이 아니고. 만 번이 극락에 들어가도 극락에서 집착할 것도 아니다 이 말이야.
이미 그 세계에 딱 들어가 버리면 여러분들은 무엇과도 같으냐 하면은. 그때는 지옥에 들어가도 지옥이 극락이 되고. 축생에 들어가도 축생이 아주 지혜로운 그 인간의 영특한 그대로 사람이 되고. 그렇다 이 말이야. 왜 그러냐
예를 들어서 금을 수천 조각을 냈다고 하더라도 조각조각마다 전부 다 금이야. 전단향을 만조각을 냈다 하더라도 조각조각마다 전부다 향이나는 전단향이에요.
우리의 이 본성을 알아서 깨달아 버리면 깨쳐버리면 그때는 지옥을 가도 지옥이 지옥이 아니고. 축생을 가도 축생이 축생이 아니에요. 이것은 사람 몸을 바꿔서 간다고 생각지 말고. 하루에 내 마음이 축생에 들어가고 지옥에 들어가고 극락에 들어가고 천상에 들어가도. 그것이 무엇과 같으냐 하면은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것이고. 또 흘러가는 물과 같은 것이고. 그대로 여실이 본다 이 말이야.
그것 뭐냐? 수류인덕성이라는 말이 있거든. 그대로 그 경계의 본성, 경계의 본질, 그 경계의 본질을 알기 때문에. 그 경계의 본질은 뭡니까?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연생연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자유로워 진다는 거요.
그것을 지금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그래서 여기에서 뭐라고 또 말씀을 하셨냐 하면은. 여래께서 설한 법은 모두 얻을 수도 없고 설할 수도 없으며. 고것은 고렇게 이해를 하면 되고. 법도 아니고 법아님도 아니다. 비법이고 비비법이다 이 말이거든요.
이것도 어렵잖아요.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이 법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면 왜 법이 아닙니까? 연기법이고 인연법이기 때문에 가질래야 가질 수도 없고. 또 영원토록 불변할래야 불변할 수도 없는 방편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건 법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면 비비법이라고 하는 것은 또 뭐냐 하면은 그렇다고 그것을 배우지도 아니하고, 익히지도 아니하고, 정견과 정법을 알지도 아니하고.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공부를 한다고 할 때는 그것은 불교하고 상관없는 자기식대로 자기 불교가 되가지고. 그냥 자기 소견대로 하는 느낌을 이야기 한다 이 말이야.
그리되면 오히려 더 그나마 그것을 안 하면 더 어리석어 지겠죠. 그렇죠?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도 있습니다. 말이라든지 언어라든지 좋은 지금 명사라든지 이런 것을 내가 많이 이야기 했지마는 이러한 이야기들은 부처님의 본래 말씀하신 반야지혜, 반야바라밀에 그러한 뜻은 아니다 이 말이죠.
왜? 다 인연으로 방편으로 했기 때문에.
그런데 그 본래 도라는 것은 진리라는 것은 언어가 끊어진 자리고. 마음이 끊어진 자리다. 言語道斷언어도단이고 心行處滅심행처멸이라 이런 말이 있는데. 그걸 언어로서도 표현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서도 도저히 드러낼 수도 없지만. 언어가 아니고 마음이 아니면 그 도를 드러낼 수가 또 없어요.
그래서 이것이 법이 아니면서도 또한 그 언어를 의지해가지고 부처님의 법을 드러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비비법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오늘 법문이 조금 어렵죠. 그래도 어려워도 여러분들이 조금 이해는 갈 거에요. 통 이해가 가지 않지는 않죠?
저도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이해 시키기가 어렵습니다.
그냥 생활법문으로 다른 것으로 법문을 하면은 좋겠지마는 그러나 금강경 법이 그렇지 않는데 이 고준한 법을 또 그렇게 너무 금강경 본뜻하고 틀리게 이야기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참선을 한다. 뭘 이렇게 한다고 할 때 선이라는 말이 뭐냐하면은 어떤 고종된 틀이 짜여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고정된 틀이 짜여져 있지 않습니다.
선공부를 우리가 한다 하더라도. 제자가 스승을 찾아와서 선문답을 할 때도 스승은 그 제자가 어디에 지금 묶여져 있는가? 부처님의 가르친 법에 벗어나지 못하고 법에 묶여져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또는 나름대로 그 자기가 하고 있는 공부에 어떤 부분에 묶여져 있다는 것은 병들어 있다 이 말입니다.
자기 문제가 문제성이 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스승은 그것을 그 상대를 봐서 저 사람이 어디에 지금 묶여져 있고 집착되 있는가를 잘 살펴서 그것을 떼주는 거요.
그걸 떼 주는 것이 선문답이고. 그것이 떼 주는 것이 선이고. 그걸 떼주는 그것이 반야지혜에요.
반야지혜라는 것은 고증된 그 무엇을 틀을 짜 놓은 것이 아니고. 어떤 인연법의 상황이 도래 됐을 때 그 상황을 잘 지혜롭게 이렇게 판단해서 잘 묶이거나 또는 집착하거나 병들거나 그러지 않고 자유롭게 잘 할 수 있도록 그 지혜를 열어주는 것이 그것이 선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송나라 때 야보스님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이 스님이 이런 것들을 계송으로 한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 계송을 들으면 여러분들이 조금 이해가 가실 라나. 이런 것들은 무엇이 정견이다 무엇이 정법이다 이렇게 탁 하나로 고증된 틀을 짤 수는 없어요.
왜? 고증된 틀을 짜면은 우리가 그 고증된 털에 묶이기 때문에. 집착이 되기 때문에. 그것도 하나의 병이 된다 이 말이오.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이 금강경은 마음의 자유로움을 열어주고 마음의 걸림 없는 무가애 세계를 열어주는 것이 금강경의 본 뜻인데. 어떤 진리 하나를 정해서 이야기를 하면은 우리는 거기에 반듯이 묶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금강경은 생각에 묶여져 있는 그 상을 부숴주는 거에요.
雲起南山雨北山운기남산우북산이라.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린다 이 말이거든요. 쉽게 말해서 산에 구름이 끼니까 산에 비가 내린다 이 말입니다.
이건 산에 구름이 일어난다는 말은 뭐에요?
모든 시절인연이 이 우주전체의 기운의 시절인연이 다 서로 맞아가지고 구름이 일어나는 거에요.
그렇죠? 그 구름이 일어 나는 것을 어떻게 한 마디로. 이것이 이것으로 인해서 구름이 일어난다고 딱 한마디로 말 할 수는 없잖아요.
천지기운 다 시절인연이 서로서로 인연이 모여가지고 구름이 일어난 것이거든. 그 구름이 일어나니까 당연하게 비가 내리는 것이죠. 당연하게 비가 내린다 이 말이오.
그래서 驢名馬字幾多般려명마자기다반고. 우리가 말이라고 글을 쓸 때 한문으로 말이라는 글을 쓸 때는 그 말 馬마자가 꼭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나귀를 표하든 무엇을 쓰던 말이라고 이야기를 할 때는 앞에 말마변이 꼭 붙게 되어 있다 이 말이야.
수천 가지 말을 표현하더라도 그 수천가지 단어에는 반드시 앞에 말마변이 붙게 되어 있다는 것이죠.
말마변이 붙게 되어 있다 이 말이야.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다르게 또 이야기를 하면은 저 바다를 한 번 쳐다볼 때 請看浩渺청간호묘 無情水무정수라. 바다를 바라보면 그 바다에 하루에도 몇 번이나 둥근파도가 있고 모난 파도가 있고 각진파도가 있고. 파도가 그 바다에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일어났느냐 이 말이오. 그렇죠?
그 파도는 끝없이 끝없이 일어나는데 왜 일어났습니까? 그 많은 인연에 의해가지고 일어 났다 이 말이야.
그런데 사람이 지혜가 없으면 그 일어난 파도를 자기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그것을 붙들려고 했을 때 그 파도가 붙들어지느냐 이 말이야.
그런데도 파도는 정이 없는 것이 되어가지고 무정한 것이야. 무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 파도는 하루에도 수천만 번이나 모양을 바꾸어가면서 일어나고 멸하고 일어나고 멸하는 거에요.
우리 마음을 거기다 비유를 해야 된다는 거요.
이게 어려운 게 아니고. 딴 데서 볼게 아니고 내 마음이 파도처럼 하루에도 수천 만 번 일어난다고 했잖아요.
일어나는데 무정수다. 정이 없이 파도는 일어나고 멸하고 자유롭잖아요.
그와 같이 우리도 반야지혜가 있어서 이 금강경으로 인해서 지혜가 잘 열리면은 수천만 번 생각이 일어나고 멸하더라도 저 바다의 파도가 그냥 자유롭게 둥근 것도 생기고 모난 것도 생기고 그렇게 자유롭듯이, 여러분들의 일상 생활 속에도 그렇게 자유롭게 하라는 거요.
마음에 붙들리지 말고. 그런데 우리는 마음에 붙들리잖아. 경계가 탁 오죠.
경계가 오면은 저 경계를 보는 순간에 아~ 저기 다 인연이 화합돼서 온 것이구나.
그럼 나 역시도 그 인연을 저버릴 수는 없으니까 같이 맞이 하면서도. 같이 이렇게 맞이 하면서 그걸 붙들려고 하든지 거기에 매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지혜가 없으니까 매해 버리는 거요. 매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 화가 나는 것이지.
그 인연법은 어디로 가버리고 없고. 경계하고 속아가지고 그냥 화부터 내는 거야.
그리고 경계하고 속아가지고 먼저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부터 생각이 나는 거야.
경계한테 속아가지고 먼저 자기가 본래 자유로움을 잃어버리고 그걸 붙들려고 하면서 거기서 괴로움과 고통을 만들어 내는 일만 우리가 한다 이 말이오.
그러니 그 무정수를 보고 배우라는 것이죠. 무정수를 보고 배워라.
몇 번이나 둥글고 몇 번이나 그랬느냐 이 말이오. 이제 이해가 좀 가죠?
그러니까 그 수천만 번 일어난 물, 파도 모양을 얻을 것이 뭐 있냐 이 말이야.
그리고 그것을 둥근 모양이라고 설해본들 못난 모양이라고 설해본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 이 말이야. 다 그건 이미 가버린 것이다 이 말이야. 그래서 육조단경에서는 앞 생각이 어리석어 가지고 집착을 했더라도 뒤따라 일어나는 뒷생각이 그것을 빨리 깨달아서 앞 생각에 집착을 틀어버려라 이 말이야.
그러면 그대가 자유로워진다. 이것을 선가에서는 다른 말로 뭐냐 하면 염기적각이라 그러는 거요. 생각이 일어나면은 번뇌망상의 집착의 생각이 중생심이 일어나면은 일어난 줄을 바로 빨리 알아차려라.
알아차리면 알아차리는 그 순간이 뒷생각은 불심의 생각이다 이 말입니다.
청정한 생각이다 이 말이죠.
그 청정한 생각을 저버리지 말고 배반하지 말아라. 그걸 잘 가지고 있으면 여러분들이 그 만큼 자유로워 진다는 것이죠. 이해가 갑니까? 고맙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을 한 번 더 넘겨 보입시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체워 보시를 한다면은 이 사람의 복덕이 진정 많겠는가? 부처님이시여.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바로 복덕의 본질이 아닌 까닭에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경의 사구게만이라도 받아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준다고 하면은 그러면 그 복이 저 복보다 더 뛰어나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의 법은 다 이 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은 부처님의 불법이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불법이다 이런 말이거든요.
자 이 말도 어렵습니다. 어려운데 요건 요지를 앞에서 설명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삼천대천세계다 하면은 이 우주법계 전체를 다 말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뭐 거기 교리적인 설명은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서 잘 아실 것 일거고. 그러면 이 삼천대천세계에 꽉 찰만한 칠보를 가지고 남을 위해서 보시를 한다고 할 때 그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 참 많겠죠.
그런데 여기서 요지는 뭐냐 하면은 그러한 물질을 가지고 많은 보시를 했다 하더라도 금강경에서 말하는 사구게의 진리를 깨닫는 것만 못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든.
그럼 이런 법문을 여러분들이 잘못 들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냐 하면은 물질보시는 아무것도 아니고 금강경 이것만 사구게만 잘 외우면 그보다 더 공덕이 좋구나.
이 생각이 들면은 벌써 여기에서 여러분들은 경계에 욕심이 앞서 버린 거야.
그래서 읽는 것만 죽자 사자 읽는 거요. 사실은 여기에 뜻은 그게 아니거든요.
뭐냐 하면은 물질의 보시는 아무리 많아도 한계가 있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세월이 가면 한계가 있잖아. 이것을 차이를 말한다면은 보시와 보시바라밀의 차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보시라는 것은 그냥 우리가 남을 도와주더라도 그것을 도와줬다는 상이 있고. 또 도와 줬으니까 되돌려 받아야 된다는 나름대로 어떤 보상심리가 있고. 그렇지 않아요?
이러한 것이 중생의 조건에 의해서 되돌려 받고자 하는 마음에 의해서 보시하는 것은 그냥 우리가 보시라고 이야기하고. 이러한 무주상 보시라는 것을 저번에 말씀을 드렸잖아. 아무 조건 없이 되돌려 받고자 하는 그런 생색 없이 하는 것. 무주상보시를 뭐라 했냐 하면은 그것을 바라밀이라 그랬잖아요.
그래서 보시는 물질은 그냥 보시고.
또 이 금강경 사구게에서 말하는 그 진리는 뭐냐 하면은 바라밀보시를 말하는 거요.
그러면 여기 금강경에서 말하는 사구게라는 건 뭐냐 하면은 凡所有相범소유상이 皆是虛妄개시허망이다.
凡所有相범소유상이 皆是虛妄개시허망이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아까 뭐라 그랬죠?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다 연생연멸 된 것이라고 보라고 한말이거든요.
그래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는 것과 같은 이야기죠. 그렇죠? 그러니까 그렇게 보라는 것이죠.
그렇게 보는 반야지혜가 열려 있을 때 그때는 내가 보시를 한다든지 누구에게 어떤 그러한 좋은 선행을 한다든지 공덕을 짓더라도 그것이 그냥 무량무변하다는 거에요.
그래서 물질보시에는 무량무변이라는 말을 안 씁니다.
이 정식적으로, 즉 말해서 이 사구게를 잘 이해를 하고 알면 여기에는 그 마음이 이미 부처님의 깨달은 불심의 세계에 들어갔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무량무변이란 말을 쓰는 거야. 끝도 없다 이 말입니다.
끝이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공덕이 끝이 없는 것이죠. 왜? 쉽게 비유를 하자면 보시라는 것에는 부모가 자식에게 그 곡식을 창고에다 잔뜩 넣어주면서 평생 먹고 살라고 준거나 같아요.
그러면 그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살다 보면은 물난리가 날 수도 있고. 불난리가 날 수도 있고 변수가 생겨서 곡식이 타고 없어질 수도 있다 이 말이야.
그러면 그 자식이 지혜가 없기 때문에 그 농사를 지을 줄 모르니까. 결국은 그 한계 속에서 자식은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렇죠? 비유를 쉽게 하자면.
그러나 부모가 곡식을 물려주지 아니하고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줬을 때 그 창고의 곡식하고는 상관없이 그 자식은 시절인연에 따라서 항상 농사를 지으면서 얼마든지 사는데. 그것은 세세생생도록 언제든지 곡식을 만들어낸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무량무변하다 이 말이지. 이것은 농사짓는 법을 여기서 뭐로 비유했냐 하면은 금강경에서 말씀하시는 반야바라밀의 지혜를 말하는 거요. 반야바라밀의 그 지혜가 열리면은 그 많은 무변한 보시를 한다 하더라도 그 보시가 상대방에도 아주 도움을 주고 또 그 보시는 나에게도 엄청난 행복과 사랑과 안락과 평화를 나에게도 준다 이 말이야. 서로가 좋다 이 말입니다.
그럼 그게 농사짓는 기술을 아는 것과 똑같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금강경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까. 여러분들이 이 금강경에서 생각할 때 아~ 이게 물질 보시는 아무것도 아니고 진리만이 제일이다라고 생각할 때는 그것은 공부를 잘못하는 거라.
그래서 이 물질 보시가 사실은 대단한 것이죠. 여기에서 삼천 대천세계에 칠보를 가지고 보시를 한다 했을 때 그 보시의 공덕은, 복덕은 대단한 것이죠.
그렇지만은 그 대단한 복덕 보다도 내 마음의 지혜의 문을 열었을 때 그것은 내 생활이 일상생활이 아무 걸림 없이 자유롭게 고기가 물에서 놀듯이 그렇게 잘 하는 삶을 살수가 있으니까 오히려 그것은 내 영원한 내 지혜의 자산이니까. 그것이야말로 좋지 않겠느냐? 이런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이 금강경은 사구게가 참 중요하거든요.
그 사구게의 정신은 항상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라는 그 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이 금강경이 항상 설해져 있기 때문에 금강경이 이 사구게에서 나온 것이고. 또 반야바라밀이라든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법이라는 것도 전부 다 이 사구게 정신을 바탕을 해가지고 나온 것이다.
그러면 사구게 정신은 무엇이냐 모든 것은 다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고. 그 인연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면서 내가 거기에 자유로움을 얻고 거기에 집착하거나 병들지 아니한 영원한 자기의 지혜를 열어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요렇게 정리 하면 되겠습니까?
예. 성불하입시다.
출처 :진불선원 () 선불교대학 원문보기▶ 글쓴이 : 법흥(法興)
첫댓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_()_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