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아래 벤치는 낡은 이젤이다 거기,
구름 캔버스가 있었고 중풍의 손가락 붓이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새들이 날아오르면
시장통은 후들거리고, 느린 붓터치를 따라서
목련은 녹슬고 벚꽃은 소멸과 완성의 한순간에
캔버스 밖으로 흩날려 갔다 평생 아무도
등장하지 않던 무변의 구름 들판, 언제부턴가
한 소년이 굴렁쇠를 굴렸다 끝까지 가 본 적은 없다
늘 한복판을 돌고 도는 것이었다 들판은 꿈속까지 따라오고
하늘언덕에는 길고 긴 행렬이 자신의 해골을
두 손에 받쳐들고 차례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멀리도 돌아온 사람, 너무 길었던 것이다
캔버스가 유난히 하얗던 어느 날, 비로소
벤치가 은행나무 속으로 들어갔다
그 속엔 가득한 노란나비 떼들
하나씩 허공으로 떠나갔다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오랜 유폐에서 풀려났다
허공을 날던 나비들이 차례차례 화폭 속으로
내려앉았다 끈질기게 내려앉았다
노랗게 덧칠된 들판 끝을 노인이 가고 있다
소년의 손을 잡고 막 고개를 넘어가는 중이다
원경으로 장엄한 일몰이 내리고 저녁으로의 산책
널부러진 막걸리 통 하나 근경으로 남았다
-계단은 잠들지 않는다, 황금알, 2009
첫댓글 와~ 동화 같은 풍경이네요
화가님이 떨리는 손으로 그리는 풍경속에 들어가 앉습니다
언젠가 내가 그린 글이 나를 삼켜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요~ㅎ
좋은 시 배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