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도의 날개 짓으로 날아올라라/
의미 없는 고난 없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목적
없이 훈련시키질 않으신다.
누에고치에서 나방이 나올 때
쉽게 나오도록 칼로 누에고치
를 찢어주면 나방은 쉽게
나오지만 날지 못하고 얼마
있지 않아 죽어버린다.
살리려 함이 오히려 죽음
에 이르게 한 것이다.
스스로 죽을 힘을 다해
누에고치를 뚫고 나와야
그때 강화된 날개로 하늘
을 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문제라는
누에고치, 질병이라는 누에고치,
고난이라고 하는 누에고치
속에 갇혀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의 검으로,
쭉~ 찢어 쉽게 해결
되도록 하시지 않으신다.
우리가 죽을힘을 다해 기도
하고 말씀으로 무장하고 영적
으로 세워지기를 기다리신다.
그때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을 향하여 '야속하다
매정하다' 말한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쉽게 해결 안 됨이,
더 큰 은혜였음을 알게 된다.
때로는 거절하심이 응답이며,
무정하심이 사랑이며
막으심이 열으심이며,
버려두심이 품으심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무기력 증에 빠져있음
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난 중에 있을 때, 환난 중에
있을 때, 부흥이 안 될 때,
질병 가운데 있을 때,
그냥 기도만 한다고 하며,
그냥 주만 바라본다고 말한다.
문제의 해결이나, 부흥이나,
질병의 치유를 위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을 맡기는 신령한
믿음이라고 착각한다.
믿음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며, 관념이 아니라
치열한 전쟁이다.
둥지를 떠난 어린 새들이나
고치를 빠져 나온 나방들은
필사적으로 날개 짓을 한다.
그들의 날개 짓은 장난이나
놀이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이다.
그렇다. 기도는 장난이 아니다.
놀이 또한 아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어야 한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 때
기도의 날개 짓을 하나님께
선명히 보여 드려야 한다.
사랑의 하나님이 왜 우리의
문제를 해결 안 해 주시는가?
왜, 우리의 처절한 기도에
침묵하시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자력으로 죽을힘을 다해
몸부림, 발버둥, 필사의 날개
짓을 해서 창공을 뚫고
올라 날으라는 뜻이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기도의 날개 짓이, 약이며 답이다.
가만히 있는 것이, 대책이 아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도 가만히 계신다.
죽을힘을 다해 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로 날개 짓을
하는 것만이 대책이다.
무기력 증, 기도의 패배주의
그것은 사단이 즐겨
사용하는 비밀병기이다.
신앙은 씨름이며 전쟁이다.
가만히 앉아서 무슨 씨름을
하며 가만히 앉아서
무슨 전쟁을 치루는가?
이젠 좀 강해져야한다.
약해질 시간이 없다.
내가 강하지 못하면
사단에게 삼켜버림을 당한다.
하나님은 벼랑 끝에 서있는
우리를 건져 주시기는커녕 우리
의 등을 낭떠러지로 밀어 버리신다.
그러면, 우리는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편안하게
안주하는 것을 못 보시는가?
우리를 강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를 풍랑과 절망까지도
지치게 할 강한 용사로
만드시려 하심이 고난의 목적이다.
둥지에서 무슨 날개 짓을 하겠는가?
등 따숩고 배부른데 어떻게
죽을힘을 다해 기도의
날개 짓을 하겠는가?
날개 짓은 낭떨어지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 응답의
손은 낭떠러지 밑바닥
에 고정되어 있으시다.
빨리 떨어지라. 빨리 둥지를 떠나라.
빨리 기도의 날개 짓으로 날아올라라.
전쟁의 우연한 승리는 없다.
훈련받은 만큼, 땀 흘린
만큼 승리하는 것이다.
영적전쟁도 마찬가지다.
마귀와의 전쟁은 적당히가 없다.
우연한 승리도 없다.
사단은 죽을힘을 다해 기도하며
죽을힘을 다해 실력을 키우며
죽을힘을 다해 끈기로
달려드는 자를 두려워한다.
기도의 날개 짓, 끈기의 날개 짓,
실력의 날개 짓만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낼 수 있는 자원이 된다.
고난 중에 있는 당신의 마음도
터지지만 고난 중에 있으면서도,
기도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당신을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신다.
성령님 내 안에 쓴 뿌리
를 치유하여 주소서.
식물학자들에 의하면 모든
나무에는, 나이테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나무를 절단해 보면
그 나무가 성장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나이테 안에
자료로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
여기에 나타난 나이테는 아주
가물었을 때 나타난 표시이고
여기에 나타난 나이테는번개를
맞았을 때 나타난 나이테고
여기에 나타난 나이테는
아주 비가 많이 왔을 때
나타난 나이테고
여기에 나타난 나이테는 병충해가
심할 때 나타난 나이테고 여기에
나타난 나이테는 불아 났을 때
나타난 나이테라는 것입니다.'
한 나무의 상처의 질곡들은 대부분
나무의 외형에 나타나 있지 않고
나무의 가장 깊은 심층부에
흔적으로 남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다르지 않습니다.
외형으로야 온갖 위선과 포장
으로 가면 쓴 희극배우처럼
살아가지만 살포시 가슴을
헤집어 보면 굵직한 상처와
질펀한 응어리들이 나이테 되어
나만의 자서전으로 남게 됩니다.
어떤 것은 버림받고 거절당한
나이테로, 어떤 것은 억울하게
오해당한 나이테로, 어떤 것은
병 되도록 참아야 했던 억누른
감정의 나이테로, 어떤 것은 극심
한 외로움과 열등감의 나이테로,
어떤 것은 무시당함과
외면당함의 나이테로,
어떤 것은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한과 부러움의 나이테로,
우리의 걸음 마다 자욱 마다,
피되어 흐르고 눈물
되어 강을 이룹니다.
때로는 무성한 잎과 탐스런
열매로 나를 과시하고
덮으려 하지만 무성한
잎과 탐스런 열매 속에
깊게 후벼 패인 상처의
나이테는 가려 지지 않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쑥 불쑥 출몰하는 게릴라
처럼 여기저기서 우리를
어둠과 무기력의 늪으로
빠져 들게 합니다.
축제 같은 예배로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하지만,
나도 모르게 상처들이
떠오를 때면 순식간에
불랙홀과 같은 어둠에 포로
되어 조종당하게 됩니다.
눈물과 춤으로 은혜에 잠겨
저 높이 비상하다가도
번개 맞았던 억울한 분노의
나이테가 움직이면
금방 받은 은혜는 간 곳 없고
혼란과 무기력의 나락으로
추락하곤 합니다.
이와 같이 처리되지 못하고
회복되지 못한 과거의 쓴
뿌리와 상처들이 한과
억누른 분노되어 나를
타인으로 살게 합니다.
그 무엇으로 풀어 보려 할수록
갈증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작은 종기 하나가
온몸을 힘들게 하듯이, 잊혀진
듯한 작은 쓴 뿌리 하나가
고개 들기 시작하면 삶 전체
가 송두리째 부서진 파도
되어 나를 후려치곤 합니다.
상처로 하루를 열고 쓴 뿌리
로 하루를 엮어가고
어둠으로 하루를 접어야
함에 차마 한숨도 멎습니다.
회복된 줄 알았고 해결된 줄
알았고 처리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잊혀진 것이었습니다.
가라앉은 것뿐이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쓴 뿌리의
잔가지는 더 무성하여
삶의 구석구석을 결박
으로 얽어맵니다.
상처의 나이테는 어둠으로
포장되어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과거 속에
오늘을 살게 하며,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염려하게 만듭니다.
받은 은혜 쏟게 하는 중심에는
어둠의 늪이 있음을 압니다.
평안함을 불안함으로
전환되게 하는 주범도
쓴 뿌리인 듯합니다.
물은 흐르지 않으면 웅덩이가 되고,
생각은 흐르지 않으면 고민이 되고,
피는 흐르지 않으면 고름이 되듯,
상처가 흐르지 않으면 응어리가 되어,
천년을 하루같이 발목을 잡히게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은 물댄 동산인데
회복되지 않은 상처는 웅덩이 되어
터진 샘이 되게 합니다.
작은 여우 한마리가 포도원을
짓밟듯이 작은 상처를 그대로
방치하면 그 상처는 응어리 되고
응어리를 그대로 놔두면
응어리는 한이 되어
내 삶의 포도원을
엉클어지게 합니다.
포도원을 무너뜨리는 것이
작은 여우 한 마리듯이
내 삶을 망가지게 하는 것은
외부에 있지 아니하고 심층
에 있는 상처와 쓴 뿌리입니다.
어쩌면 상처로 인한 어둠과
쓴 뿌리는 고침 받아야 하고
고쳐 질수 있는 질병 중에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상처는 회복되고 왼치될 수
있는 영적질병의 일종입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감기에 걸리듯이
우리의 영적 면역력이 떨어지면
내면에 잠복해 있던 쓴 뿌리의
바이러스들이 고개 들어 우리를
어둠속에 갇히게 하여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죠.
이러므로 나를 나 되지 못하게
하고, 과거 속에 오늘을 살게
하고, 인격 장애와 인격 파괴를
일으키는 실체는 바로 내 안
에 묶은 쓴 뿌리입니다.
기질 때문이라고 변명하지 마십시오..
성격 때문이라고 합리화시키려 마십시오.
어쩔 수 없었다고 핑계대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 쓴 뿌리와 상처를
그대로 방치하거나 묻어두면
쓴 뿌리는 언젠가 쓴 열매 되어
나를 그늘지게 할 수 있습니다.
예배 후에도 그늘지고, 기도
후에도 수심으로 가득하고,
말씀을 들어도 늘 지치고
곤하게 한다면 그 중심에는
어둠이 있거나 쓴 뿌리가
운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러므로 쓴 뿌리를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쓴 뿌리를 유전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쓴 뿌리를 불치의 병으로
단정하지 마십시오..
쓴 뿌리를 인정하고
자각하셔야 합니다.
환자가 자신의 병을 모르거나
숨긴다면 병을 더 키우게 되지요..
쓴 뿌리와 싸움이 있을 때 마다
요셉의 영성을 품으세요.
청춘을 망치게 한(?) 형들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를 하나님의
역사관으로, 해석함으로
형들을 끌어 앉고 대성통곡했던
요셉의 영성을 구하십시오.
쓴 뿌리와 상처들이 고개들 때마다
갈보리 언덕으로 달려가십시오.
그리고 나의 쓴 뿌리와 상처들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께 낱낱이 토설하고 오픈하십시오..
한두 번에 되지 않습니다.
백번 천번 만번 반복하셔야 합니다.
은밀한 상처까지도 그분은
아시고 들으시고 품으실
준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부분이라면 신실한
지체들과 나누십시오..
드러내고 자각해야 치유
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배고프면 보챕니다.
성도가 보채는 이유도 대부분
심령의 쓴 뿌리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손등에 가시가 박혀 있으면
무얼 소유해도, 무엇을 이루어도,
무슨 일을 만나도 짜증납니다.
그러나 가시를 뽑아내면
못 먹어도 배부르고,
달려가도 피곤치 않습니다.
상처와 쓴 뿌리도 이와 같습니다.
뽑아내야 합니다. 제거해야 합니다.
회복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충만히 임하고,
은혜를 누리고, 생명이
자라기 위하여, 우리의 복병
인 쓴 뿌리와 상처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세워질 수 있습니다.
자유할 수 있습니다.
사명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남 살릴 수 있습니다.
빗방울에 바위 패이고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했습니다. 가랑비의
은혜를 받아야만 합니다.
빗방울의 은혜 말입니다.
상처보다 더 큰 은혜, 쓴
뿌리보다 더 많은 은혜만이
우리를 상처와 쓴 뿌리에서
자유케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더 큰 은혜가 아닙니다.
더 큰 헌신이 아닙니다.
더 큰 축복이 아닙니다.
더 많은 일이 아닙니다.
쓴 뿌리를 제거하는 일입니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 일입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일입니다.
내가 온전히 세워
지는 것입니다.
상처로 일하면 오히려
상처를 입힙니다.
어둠으로 축복받으면
교만에 빠집니다.
쓴 뿌리로 일하면
나중에 버림 받습니다.
선착장에 배를 묶어 두고는
항해가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쓴 뿌리를
그대로 두고는,
믿음의 항해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날개 짓을 해도 새가
날지 못하는 이유는,
새장에 갇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하여
비상하지 못하는 이유는
똑똑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쓴 뿌리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성장을
못하는 이유도, 상처와
한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와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사사건건 어둠과 상처로
인하여 축소되고 제한된다면
이 또한 얼마나 가슴
저릴 일입니까?
이제 상처로 인한
어두운 나이테를
은혜로 말미암은 영광의
나이테로 바꾸어 나갑시다.
은혜는 흘러야 하고
생명은 자라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처를
아물게 하고 쓴 뿌리를 제거
해야 하는 거룩한 댓가
를 치루어야 합니다.
가나안은 그냥 정복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곱 족속과 싸워 몰아내야
가능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상처는 그냥
아물거나 회복되지 않습니다.
거룩한 싸움을 하셔야 합니다.
상처의 회복과 쓴 뿌리의 제거를
위하여 싸움의 흔적, 침노의
흔적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래야 상처는 영광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지 않는 샘 그것은 밖에서
흘러들어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솟아나는 샘입니다.
상처가 아문 자리에서 쓴 뿌리가
제거된 그 현장에서 말입니다.
퍼내도 마르지 않는 물댄 동산 같이,
주님이 격려하시기를 기대합니다.
주님의 옆구리에 나신 상처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피 묻은 어깨 밑으로 숨으세요.
그리고 안심하십시오.
다 잘, 될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모래에서
금을 찾아내듯이
감사의 조건을 찾아냅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모든 일을 감사할
것이 없다고 덮어 버립니다.
여러분, 감사를 작은 것에서부터
하나하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인줄로 믿습니다.
큰 것만 보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쓰고도 풍족
하도록 다 받아서 쓰며
모든 것이 행복한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하루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