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3월 20일
성 쿠트베르트 주교
St. Cuthbert, Bishop of Lindesfarne
San Cutberto di Lindisfarne Vescovo
Born:634 somewhere in the British Isles
Died:20 March 687 at Lindesfarne of natural causes;
body removed to Durham Cathedral, Lindesfarne; body incorrupt
Canonized:Pre-Congregation
어떤 사람들은 그가 아일랜드라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스코트인이라 하지만,
저명한 역사가인 성 베다(St. BEDE the Venerable)는 브리톤 출신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어린 아이였을 때 고아가 되었고, 얼마동안 목동 노릇을 하였으며, 메르시아족과 싸웠던 경험도 있다.
그는 멜로즈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된 후,
성 에아따(Saint Aidan:축일:8월31일)를 수행하여 리폰 수도원으로 갔으나,
알크프리드 국왕이 이 수도원을 성 윌프리드에게 넘겨주자,
다음 해에 멜로즈로 돌아와서, 그곳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주로 선교사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성 콜만이 로마 전례 거행을 결정한 휘트비 회의 결정을 수락하기를 거부하고,
린디스파른의 대부분의 수도자를 이끌고 아일랜드로 돌아가 버렸을 때,
성 에아따가 그의 후임 주교로 임명되고, 쿠트베르트는 린디스파른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선교 활동을 재개했는데,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이 일은 그가 은수자로 생활할 허가를 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뜻과는 상관 없이, 헥섬의 주교로 선임되고 말았다.
그는 린디스파른의 주교가 된 것이다. 그는 2년 동안 자기 교구를 지도하였는데,
그 당시 교구 내에 유행하던 페스트 환자를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의 성덕은 너무나 뛰어나서 놀라운 치유 능력을 보였고,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더구나 그의 예언 늘력은 특히 돋보였다. 린디스파른에서 운명하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베다 사제 학자 축일:5월25일.게시판1181번.1783번.
*성 에이단 축일:8월31일.게시판1351번.1342번(1869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성 쿠베르토는 7세기 영국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당시 영국은 순전한 가톨릭 국가로서 국왕 자신이 솔선하여 교회를 위해 진력하던 상태였으므로
교세는 날로 번성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성인이 배출되어 타국에까지 전교하기 위해 가는 선교사도 다수에 달했다.
쿠베르토가 태어난 고향은 잉글랜드의 농촌이었지만,
그는 일찍이 수도원을 지망하여 651년에 멜로즈 수도원에 들어가서 이다
원장의 지도하에 열심히 덕을 닦으며 사제가 된 후 부원장에 선촐되어 그 수도원 수사들은 물론
인근의 신자들도 지도하며 존경을 받았다.
661년에 멜로즈에 흑사병이 발생하여 한창 성행할 때에 그는 손수 환자의 구제에 진력하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도 병에 걸렸지만 하느님의 보호로 기적적으로 완쾌하고 그 후는 국내 각처를 순회하면서
교리를 설명하며 성사를 주고 사람들은 선으로 인도했다.
그동안 몇가지의 기적도 일어나서 성스러운 사제라는 평판이 점차 높아졌다.
3년후 그는 수도원장과 함께 멜로즈에서 린디스파르노(Lindisrarno)의 수도원에 이동하고
거기서도 다름없이 완덕의 모범으로 공경을 받았다.
그 동안에도 항시 의리(義理)만을 구하던 쿠베르토는 678년 원장의 승낙을 얻어
파르노라고 하는 섬에 홀로 들어가서 더 한층 기도와 고행에 힘쓰며 덕을 닦았다.
그 뒤 수도자, 평신도 구별없이 교훈을 청하며 기도를 청하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많이 모여 왔으므로
쿠베르토는 이와 같은 것으로 자기 마음이 산란해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거처의 문을 굳게 닫고
다만 창문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느님께 대해 말하며 영원한 행복을 설명해 주고 혹은 가르치고
혹은 위로해 주고 혹은 축복을 베풀어주었다.
그가 은수생활을 시작한 지 9년째 되는 해의 일이다.
캔터베리의 대주교 지휘하에 열린 주교 회의의 결과로 그 교구를 3등분하여 쿳베르토를
헥섬교구의 주교로 추대하는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는데,
회의에 참석했던 국왕 에그베르토는 겸손한 쿠베르토가 사양하지 않을까 하여 손수 설복의 임무를 맡고
파프노 섬에 건너가서 정중히 주교 취임을 간청했다.
쿠베르토의 심정으로 본다면 본시 고요한 섬의 생활을 버리고는 싶지 않았지만
국왕 자신이 직접 부탁하기도 해서 할 수 없이 드디어 취임을 허락했다.
그러나 결정되었던 헥섬 교구 대신 인연이 깊은 린디스파르노 교구를 사목(司牧)하게 되었다.
쿳베르토의 주교 서품식은 684년의 부활 축일에 거행되었다.
그 뒤 그는 2년 이상 린디스파르노 교구를 다스리고 있었지만 드디어 최후의 날이 임박한 것을 깨닫고
선종의 준비를 하기 위해 사랑하는 파르노 섬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687년 3월 20일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후 그 섬에는 여러 가지의 기적이 일어나고
그의 유덕을 사모하는 순례자도 끊임이 없고 특히 뱃사공들은 지금도 성 쿠베르토를 수호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이야기
어느 날 초저녁 무렵, 저녁기도를 마친 멜로스 수도원의 문지기 수사는 문단속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전쟁에 지친 한 병사가 말을 타고 수도원 문 앞에 와서 섰다.
번쩍이는 창을 손에 들고 있던 그는 말을 탄 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머시아 사람들과 전쟁을 하다가 왔소.
전쟁을 하면서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는 데 신물이 났소.
그러니 제발 나를 당신들의 동료로 받아들여 주시오.”
놀라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문지기 수사는 그를 수도원장에게 안내하였다.
병사의 신실함에 마음이 움직인 수도원장은 문을 열어 주었고
마침내 쿠트베르트는 자신의 안식처를 찾게 되었다.
성 쿠트베르트가 말을 타고 창을 든 채 멜로스 수도원에 도착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 다음 부분은 꾸며진 이야기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실 영혼을 파고드는 이야기는 우리를 감동시키고 많은 것을 가르친다.
예수님도 이야기를 통해서 군중들을 가르치셨다.
단순히 사실만을 나열하는 것은 진실을 축소하고 진실의 위력을 감소시킨다.
우리가 상상력을 동원하여 사실들 사이의 빈 공간을 채울 때,
진실은 더 완전하고 충만한 모습으로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가올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가? 상상력이라는 선물을 주신 하느님을 찬미한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축일:3월 20일
성 쿠트베르트 주교
St. Cuthbert, Bishop of Lindesfarne
San Cutberto di Lindisfarne Vescovo
Born:634 somewhere in the British Isles
Died:20 March 687 at Lindesfarne of natural causes;
body removed to Durham Cathedral, Lindesfarne; body incorrupt
Canonized:Pre-Congregation
어떤 사람들은 그가 아일랜드라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스코트인이라 하지만,
저명한 역사가인 성 베다(St. BEDE the Venerable)는 브리톤 출신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어린 아이였을 때 고아가 되었고, 얼마동안 목동 노릇을 하였으며, 메르시아족과 싸웠던 경험도 있다.
그는 멜로즈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된 후,
성 에아따(Saint Aidan:축일:8월31일)를 수행하여 리폰 수도원으로 갔으나,
알크프리드 국왕이 이 수도원을 성 윌프리드에게 넘겨주자,
다음 해에 멜로즈로 돌아와서, 그곳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주로 선교사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성 콜만이 로마 전례 거행을 결정한 휘트비 회의 결정을 수락하기를 거부하고,
린디스파른의 대부분의 수도자를 이끌고 아일랜드로 돌아가 버렸을 때,
성 에아따가 그의 후임 주교로 임명되고, 쿠트베르트는 린디스파른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선교 활동을 재개했는데,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이 일은 그가 은수자로 생활할 허가를 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뜻과는 상관 없이, 헥섬의 주교로 선임되고 말았다.
그는 린디스파른의 주교가 된 것이다. 그는 2년 동안 자기 교구를 지도하였는데,
그 당시 교구 내에 유행하던 페스트 환자를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의 성덕은 너무나 뛰어나서 놀라운 치유 능력을 보였고,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더구나 그의 예언 늘력은 특히 돋보였다. 린디스파른에서 운명하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베다 사제 학자 축일:5월25일.게시판1181번.1783번.
*성 에이단 축일:8월31일.게시판1351번.1342번(1869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성 쿠베르토는 7세기 영국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당시 영국은 순전한 가톨릭 국가로서 국왕 자신이 솔선하여 교회를 위해 진력하던 상태였으므로
교세는 날로 번성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성인이 배출되어 타국에까지 전교하기 위해 가는 선교사도 다수에 달했다.
쿠베르토가 태어난 고향은 잉글랜드의 농촌이었지만,
그는 일찍이 수도원을 지망하여 651년에 멜로즈 수도원에 들어가서 이다
원장의 지도하에 열심히 덕을 닦으며 사제가 된 후 부원장에 선촐되어 그 수도원 수사들은 물론
인근의 신자들도 지도하며 존경을 받았다.
661년에 멜로즈에 흑사병이 발생하여 한창 성행할 때에 그는 손수 환자의 구제에 진력하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도 병에 걸렸지만 하느님의 보호로 기적적으로 완쾌하고 그 후는 국내 각처를 순회하면서
교리를 설명하며 성사를 주고 사람들은 선으로 인도했다.
그동안 몇가지의 기적도 일어나서 성스러운 사제라는 평판이 점차 높아졌다.
3년후 그는 수도원장과 함께 멜로즈에서 린디스파르노(Lindisrarno)의 수도원에 이동하고
거기서도 다름없이 완덕의 모범으로 공경을 받았다.
그 동안에도 항시 의리(義理)만을 구하던 쿠베르토는 678년 원장의 승낙을 얻어
파르노라고 하는 섬에 홀로 들어가서 더 한층 기도와 고행에 힘쓰며 덕을 닦았다.
그 뒤 수도자, 평신도 구별없이 교훈을 청하며 기도를 청하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많이 모여 왔으므로
쿠베르토는 이와 같은 것으로 자기 마음이 산란해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거처의 문을 굳게 닫고
다만 창문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느님께 대해 말하며 영원한 행복을 설명해 주고 혹은 가르치고
혹은 위로해 주고 혹은 축복을 베풀어주었다.
그가 은수생활을 시작한 지 9년째 되는 해의 일이다.
캔터베리의 대주교 지휘하에 열린 주교 회의의 결과로 그 교구를 3등분하여 쿳베르토를
헥섬교구의 주교로 추대하는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는데,
회의에 참석했던 국왕 에그베르토는 겸손한 쿠베르토가 사양하지 않을까 하여 손수 설복의 임무를 맡고
파프노 섬에 건너가서 정중히 주교 취임을 간청했다.
쿠베르토의 심정으로 본다면 본시 고요한 섬의 생활을 버리고는 싶지 않았지만
국왕 자신이 직접 부탁하기도 해서 할 수 없이 드디어 취임을 허락했다.
그러나 결정되었던 헥섬 교구 대신 인연이 깊은 린디스파르노 교구를 사목(司牧)하게 되었다.
쿳베르토의 주교 서품식은 684년의 부활 축일에 거행되었다.
그 뒤 그는 2년 이상 린디스파르노 교구를 다스리고 있었지만 드디어 최후의 날이 임박한 것을 깨닫고
선종의 준비를 하기 위해 사랑하는 파르노 섬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687년 3월 20일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후 그 섬에는 여러 가지의 기적이 일어나고
그의 유덕을 사모하는 순례자도 끊임이 없고 특히 뱃사공들은 지금도 성 쿠베르토를 수호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이야기
어느 날 초저녁 무렵, 저녁기도를 마친 멜로스 수도원의 문지기 수사는 문단속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전쟁에 지친 한 병사가 말을 타고 수도원 문 앞에 와서 섰다.
번쩍이는 창을 손에 들고 있던 그는 말을 탄 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머시아 사람들과 전쟁을 하다가 왔소.
전쟁을 하면서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는 데 신물이 났소.
그러니 제발 나를 당신들의 동료로 받아들여 주시오.”
놀라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문지기 수사는 그를 수도원장에게 안내하였다.
병사의 신실함에 마음이 움직인 수도원장은 문을 열어 주었고
마침내 쿠트베르트는 자신의 안식처를 찾게 되었다.
성 쿠트베르트가 말을 타고 창을 든 채 멜로스 수도원에 도착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 다음 부분은 꾸며진 이야기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실 영혼을 파고드는 이야기는 우리를 감동시키고 많은 것을 가르친다.
예수님도 이야기를 통해서 군중들을 가르치셨다.
단순히 사실만을 나열하는 것은 진실을 축소하고 진실의 위력을 감소시킨다.
우리가 상상력을 동원하여 사실들 사이의 빈 공간을 채울 때,
진실은 더 완전하고 충만한 모습으로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가올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가? 상상력이라는 선물을 주신 하느님을 찬미한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