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3.4.30) 말씀/ 빌립보서 3:12-14
오늘을 천국으로 살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히 이전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
지난 주 지홍집사님과 현옥 집사님과 셋이서 소안도를 다녀왔습니다. 금당도에 들어갔을 때 어떤 분이 소안도도 좋다고 가보라는 이야기를 듣고 들어가긴하지만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특별한 곳이 없는 섬이었습니다. 그래서 ”없다면 우리가 아름다움을 창조합시다“하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감탄의 연발을 하였습니다. 현옥 집사님 직장 사표를 내고 왔는데 연실 웃음꽃을 피우고 급기야는 해변에서 명품 꽃게 춤을 추어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였습니다. 또 바람이 좀 불기는 하였지만 차로 가림막을 하고 셋이서 라면을 끓여 먹는데 어찌나 맛이 있던지... 최고였습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여행은 편견을 깨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 말이 딱 이었습니다. 여행은 내 생각을 깨게하고 더 넓고 광대하고 아름다운 세계로 인도한다는 것이 맞습니다. 현옥 집사님은 여행은 누구랑 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도 맞는 말입니다. 섬에 와서 쓱 둘러보면 볼 것이 없는데 우리는 짧은 시간에 많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창조하고 왔습니다. 지홍 집사님과 현옥 집사님이 당일 오후 떠나고 저는 미라 해변에서 이틀을 더 머물러 차박을 하였습니다. 다음날 온 종일 날이 흐리고 비도 오고 해변에는 한 사람 없고 저 혼자 남아서 큐티 멀씀을 준비하고 기도하고 글을 쓰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적하고 뷰가 좋은 곳에 차를 주차하려다가 그만 자갈 밭에 빠져 나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여행하면서 차가 세 번째 빠졌습니다. 한번은 모래밭에 들어갔다 못 나와서 동내 경운기가 와서 빼내주었고, 두 번째는 진흙밭에 빠졌는데 트랙터가 와서 빼주었습니다. 이번에는 어쩐다냐 최선을 다해서 흙을 긁어내고 나무를 밑에 깔고 시도해보았지만 결국 SOS 천사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소안도 파출소에서 순경 두 분이 와서 밀어주었습니다. 셋째 날 돌아오면서 생각해보니 출발부터 순간 순간 모든 과정이 다 추억이고 은혜였습니다. 여행은 목적지라고 생각하고 휙하고 왔다가 휙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작은 과정을 하나 하나 섬세하게 느끼지 않으면 별 볼 일없이 피곤하게 돌아갈 수 있습니다. 창조적 에너지로 충만하는가 아니면 피곤한 여행이되는가 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저 천국을 목표로 하고 살아가는 모든 삶이 여행이라고 생각한다면 역시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 과정입니다. 단지 목적지만 생각하는 사람은 현실을 행복하게 살지 못합니다. 주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천국이라 하였는데 천국 여행하는 사람은 가는 길이 다 즐겁고 행복한 천국 여행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정을 소흘히 여기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어떻게 천국 여행을 하였는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빌립보서 3: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히 이전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 사도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님께 뒷 발질하던 그가 이제는 도리어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생명의 위협까지 무릅쓰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우고 제자들을 양성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선교까지 도전했습니다. 구원을 받고 이렇게 변화되었으면 정말 잘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얻었다 생각지 않았습니다. 온전히 이루었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제까지도 물론 잘 했지만 바울은 성장 발전의 사명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계속 더 나은 목표를 세우고 달려가고자 각오를 하였습니다. 그 각오가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 세상 목표가 아닙니다. 그의 목표점은 하늘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 최고점을 두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좇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2장 12절을 참조해 볼 때 구원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온 천하를 얻어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바울은 끝까지 죄와 싸우고, 사망에서 구원받을 뿐 아니라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부활의 영광이 이르기까지 신앙의 경주를 멈추지 않겠다는 믿음의 목표를 향해 여전히 ing 진행형 이었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 그의 하늘의 목표점은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에 있었습니다. 즉 그것은 구원의 완성을 통하여 얻어지는 영생, 하나님 나라의 영광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신앙의 푯대를 바라보고 줄기차게 신앙의 경주를 하고자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그 부르심의 상을 받을 때까지 아직 졸업이 없었습니다. 아직 이룬 것도 얻은 것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명확하고도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까? 이 땅에서 아닌 위에서 하나님의 상!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은 그냥 이 땅에서의 보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늘의 상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목표가 있을 때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또 하나 우리가 바울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경주자로서 달려가는 자세입니다. 바울은 목표만 분명한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현재적으로 분명한 경주자의 자세가 있었습니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 버렸다고 합니다. 자존감이나 실패 감 염려 두려움 등 우리를 붙드는 것들이 얼마나 많았겠지만 앞으로 달려가기 위해서 뒤엣 것들을 버렸습니다. 만일 우리가 과거에 이루어놓은 업적, 혹은 과거 실패의식에 사로잡힌다면 신앙의 경주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오직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달려나가는 사람들임을 히브리서 저자도 이렇게 말 합니다. 히브리서 10:39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우리 안에는 근본 안일을 사랑하는 죄악 된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잘 안됩니다. 일정한 틀이나 형식 가운데 안주하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러한 것은 신앙의 생명력뿐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의 의욕도 잃게 합니다. 나이가 들면 나이가 들었다고 스스로 뒤로 물러섭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노인이 되어서 뒤로 물러 가거나 성숙을 멈추면 안 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육체는 후패하나 우리 속 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아멘.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의 완성을 향해 계속 앞에 푯대를 행해 달려나가는 자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자세가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과정입니다. ‘곁에 두고 읽는 책 괴테’를 읽다보니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생각은 크게, 실천은 작은 것부터’ 아주 깊이 생각하게 하는 명언입니다. 천리길도 한 걸음 아닙니까? 크고 고상한 목표 일수록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웟칭 1>에 보면 막연한 목표를 꿈꾸고 상상하는 것으로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실험 결과가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팸 교수는 학생들에게 며칠 뒤 치를 중간고사에서 높은 점수를 얻는 장면을 매일 몇 분씩 상상해보도록 하였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좋은 성적을 얻고 기뻐하는 장면을 생생히 떠올려 보세요라” 그리고 그들의 점수를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보았습니다. 오히려 점수가 떨어졌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막연한 목표 설정과 꿈은 별 실효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표보더 더 중요한 것은 실행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목표를 정해놓고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실행과정을 구체적으로 그려넣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 몇 시간 공부할 것인가 이런 과정이 설정되어야 공부도 더 잘하고 오히려 목표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과정 없는 결과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표도 중요한 것은 천과정입니다. 1984년, 일본 도쿄에서 진행된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한 무명의 마라토너 야마다 혼이치(山田本一)가 우승컵을 차지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적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밀라노에서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그는 또다시 금메달을 따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기자들이 비결을 묻자 그는 2년 전과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머리로 달렸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도대체 머리로 달리다니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비밀은 10년 뒤 선수생활을 은퇴한 그가 출간한 자서전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출발선을 나서면 선수들의 목표는 40km밖의 결승선에 걸린 깃발 이었습니다. 길고 긴 거리를 달리면서 선수들의 흥분과 긴장은 점차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10km를 달리고 나면 이미 지쳐서 자신도 모르게 속도가 늦추어지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야마다 혼이치도 고민을 하였습니다. 머리를 썼습니다. 목표는 크지만 실천은 작게 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목표점을 작게 나눈 것입니다. 주변 도로, 건물, 상표, 나무 등등, 한 코스 한코스를 목표로 하여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전력해서 달릴 수 있었고, 40km까지 마침내 도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재능 있는 선수도 아닌데 1등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천국 목표 도달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 최고의 목표점입니다. 그러나 이미 천국을 달성한 것처럼 현실의 과정을 무시하고 도외시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정말 천국을 소망하는 신자라면 하루하루를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천국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늘을 천국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천국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 어떻게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미래의 막연한 천국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다 이루었다고 하지 않고 오늘을 천국처럼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달려갈 길을 마치고 의의 면류관을 받게되었습니다. 저도 여행하면서 등산을 하면서 책을 읽으면서 목표 보다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많이 깨닫고 있습니다. 아무리 높은 산도 한 걸음 한 걸음 걸음 걷다보면 올라갑니다. 두꺼운 책도 한페이지 한 페이지 읽다보면 다 읽습니다. 지난번 수용소 군도도 책 분량이 2,400페이지 인데 이걸 다 어떻게 읽을까? 목표만 보면 질려서 못 익습니다. 그래서 2,400패이지를 하루 50페이지 읽을 것으로 하고 나누었습니다. 그랬니 48일이 나왔습니다. 48일로 쪼개서 하루 목표 50페이지만 읽었습니다. 48일 후에 다 읽게 었습니다. 처음에는 언제나 읽을 것 같지만 세월이 참 빠르지 않습니까? 어느새 두꺼운 책들도 금방 끝에 이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때는 내가 이런 인내와 성실이 있었는지 의하할 때가 있습니다. 작은 것 하나씩 실천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이야기도 15권이나 되는데 무리하지 말고 점심 저녁 커피타임으로 읽자 하고 계산 해서 하루 10 페이지씩 읽어 2년이 걸렸습니다. 예화의 마라톤 선수 혼이치도 다른 마라톤 선수들과 다를 바가 없는 평범한 선수였지만 작은 실천 과정을 충실히 실행할 때 평범한 사람도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만약 처음부터 결승지점을 염두에 두고 달렸다면 금방 피로를 느꼈거나 아예 자신감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목표 설정이나 이를 실천하는 비법이 그리 거창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당신도 확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평범하지만 위로부터 부르심의 상이라는 인생의 큰 목표 이룰 수 있습니다. 어떻게 목표에 도달하는가 하는 것은 구체적인 과정에 달려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믿음의 자세, 분명한 푯대와 뒤로 물러서지 않는 자세 그리고 평범한 마라토너 혼이치가 실천했던 방법, 괴테가 우리에게 주는 충고 생각은 크게 실천은 작은 것부터!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꾸준히 하면 세상에 능력 있는 사람들이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를 너무나 멀리 거창하게 두면 오히려 놓쳐버리고 현실에 안주하고 살기 쉽습니다. 첫 출발에서는 누구나 첫 사랑의 감격과 은혜 속에 살아가고 감사가 넘칩니다. 헌신적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들으며 예배를 드립니다. 전도도 열심히 하고 교회 봉사도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흘러가다 보면 그렇게 가깝게 느껴졌던 하나님 나라는 너무 먼 것처럼 생각됩니다. 주님의 재림이 무척 더딘 것처럼 느껴집니다. 롯의 처와 같이 뒤돌아보게 됩니다. 데마와 디도처럼 사역을 떠나 세상 길로 가는 사람도 생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표만 바라보고 현실의 과정을 믿음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거 출애굽의 역사를 보세요. 60만 대군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나올 때 얼마나 감격하였습니까? 그들은 가나안을 향하여 희망찬 진군을 하였습니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에게는 하늘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광야의 길이 길어지면서 어떤 문제가 생겼습니까? 점점 불평 불만이 생기고 가나안은 이들의 마음과 눈에서 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믿음으로 현실을 살지 않으니 목표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가나안에 도착하기도 전에 중도에서 넘어지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훈련하신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날마다 하루 목표치 일용할 양식을 거두는 훈련입니다. 가나안 입성의 긴 날을 하루 하루 쪼개서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막연히 먼 목표만 바라보게 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루를 사는 현실의 목표를 설정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루 하루 믿음으로 산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에 도착하여 약속의 땅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는 중도에 다 넘어지고 죽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여러분, 천국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루 하루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이다. 날마다 순간순간 한걸음 한걸음 믿음으로 걷는 사람은 힘들고 어렵고 목표 점이 멀어도 마침내 이를 수 있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믿음의 경주자가 되어 마침내 사도 바울처럼 승리자의 고백을 할 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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