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하동지역 문화유적답사를 마치고/안성환/20240420
구례, 하동 문화유적답사
기상청에서 온종일 비 소식을 예고한다. 기분이 쓰윽 좋지 않았다. 이번 답사에 약 80여 명이 참여하니 마음의 부담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단법인 울산문화아카데미에서 채무기교수님과 함께 2024년 첫 정기답사에 나섰다. 울산을 출발한 전세버스 안에는 먼저 이상도 원장님의 노고가 담긴 답사 자료집이 배포되고 있었다, 장장 23페이지 분량이다. 기상청 예보대로 아침부터 비는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니 얼마나 마음이 편안했는지 모른다. 그늘은 겨울보다 여름이 좋고, 햇볕은 여름보다 겨울이 좋듯이 비가 오니 도로가 한산하고 사찰마다 조용하여 답사로서는 최적이었다. 이번 답사에 이동 거리는 약 520km. 걸음 수는 약 1만2천 보 정도 걸었다. 코스는 구례 천은사를 거쳐 화엄사, 연곡사, 하동 쌍계사를 마치고 울산으로 돌아왔다.
이번 답사는 가는 곳마다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기에 문화재에 대하여 간략하게 먼저 설명한다. 문화재란 인위적이거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가적, 민족적 또는 세계유산으로서 예술적 학술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한다. 문화재로 지정하는 기준이 크게 7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여기서 3가지(국보, 보물, 사적)만 설명한다. 먼저 국보의 기준은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인류문화의 견지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말한다. 그리고 보물의 기준은 건축물, 서적, 고문서, 회화, 고고 자료 등 유형문화재 중 중요한 것을 말하며, 사적의 기준은 기념물 중 유적, 제사, 신앙, 분묘, 비 등으로서 중요한 것을 말한다.
보편적으로 문화재에 지정 되려면 최소 100년 이상 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첫 번째 답사지인 천은사에는 보물이 일주문을 비롯하여 7개소이다. 특히 보물 중 극락전 아미타 후불탱화는 크기가 세로 360센티, 가로 277센티의 작은 작품이 삼베 바탕에 짙은 녹색과 적색으로 채색되어 있는데 그 구도와 기법이 매우 훌륭하고 보존 상태가 아주 좋다. 천은사는 신라 때 창건한 고찰이다. 물론 그사이 중창이 계속 이루어졌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와 임진왜란의 병화를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어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천은사를 둘러보고 다시 일주문을 나섰다. 일주문 현판에는 조선 4대 명필의 한사람인 원교 이광사 선생의 친필이 걸려 있다. ‘지리산 천은사’란 서체를 보면서 당시 나주 벽서사건에 연좌되어 유배지에서 생을 마친 원교 이광사 선생의 꼿꼿한 선비정신을 생각하며 천은사와 작별을 했다. 빗속의 쏠쏠한 답사의 맛을 느끼며 만남가든에서 정갈한 향토음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갈 길이 멀어 두 번째 코스 화엄사로 출발했다. 화엄사 입구에서 단체기념촬영을 마치고 경내로 들어갔다. 간단히 설명하면 화엄사도 신라의 고승들이 창건하고 중창한 절이다. 오늘날의 구례와 광양, 순천지역은 6세기까지 가야의 영토였다고 한다. 6세기 중단 신라 진흥왕이 가야의 전 지역을 신라에 완전 병합하면서 이 지역도 신라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특히 화엄사는 임진왜란 때 왜군으로부터 완전 전소되었다고 한다. 숙종 때부터 중건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현재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 규모로 알려 져 있다. 이곳에는 국보가 4개소, 보물이 9개소, 사적이 2개소 기념물이 3개소 있다. 화엄사에서 너무나 보물들이 많아 한 가지를 꼬집으라면 조금 곤란하다. 각황전 앞 석등은 국보로서 우리나라 최대의 석등이다. 꽃잎 형태는 우담바라화로 부처님의 참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석등이다. 특히 기억에 생생한 것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우뚝 서 있는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이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에 천인상을 새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들이 보인다. 위층 기단은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 삼아 세워 놓고 날카로운 입을 벌린 채 이를 드러내고 있다. 이색적인 것은 사자들이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 있는 비구니가 있는데 이는 연기존자의 어머니라고 전한다. 연기존자의 지극한 효성을 잘 표현해 놓은 것 같다. 성불계단을 내려오며 생각한다. 필자는 이제 효도할 곳이 없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많은 비는 아니지만, 우산을 펴지 않으면 옷 젖을 정도의 비가 계속 내린다. 서둘러 우리는 연곡사로 옮겼다. 연곡사도 기록으로는 신라 진흥왕 4년 화엄종의 종사 연기조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국보 2개와 보물 4개가 있다. 연곡사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많은 건물이 불타버렸다고 한다. 이후 소요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20세기에 들어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인 1907년 무렵 연곡사는 호남 의병활동 근거지가 됨에 따라 왜병에게 병화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24년 박승봉 등 몇몇에 의해 창건하지만 한국 동란 때 ‘피아골전투’로 다시 완전 폐사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연곡사는 절뒤 석조건물을 제외하고 단 한 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승탑은 효종원년에 조성된 것으로 소요대사의 승탑으로 조선후기에 조성된 승탑 중 뛰어난 작품에 속한다고 한다. 절 안쪽 좌측에 피아골 전투비가 그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피아골 전투비를 보는 순간 마음이 숙연해 졌다. 한때 이곳 피아골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남명 조식선생은 이곳을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도 붉어라’ 경치를 예찬하며 시를 읊은 곳이기도 하다. 지금 남명 선생이 살아 계신다면?
마지막 코스인 하동 쌍계사로 자리를 옮겼다. 비는 여전히 그칠 줄 모르고 내렸다, 쌍계사는 봄철 벚꽃으로도 잘 알려진 절이라 간략하게 요약한다. 쌍계사라는 이름은 산문밖에 두 시내가 만나 흐르니 쌍계사라는 사찰 이름이 붙어져 지금까지 이른다고 한다. 최치원선생은 일찍이 이곳을 ‘호리병 속의 별천지’라 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에도 문화재는 국보 1개, 보물 9개 사적 및 기념물이 19개 이상 있다. 국보인 ‘진감선사 대공령탑비’가 이색적이다. 탑은 왕명으로 최치원선생이 글을 짓고 쓴 것으로 우리나라 4대 금석문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고 한다. 글씨 서체는 해서체인데 글씨의 크기는 약 2센티 정도의 크기로 짜임새 있게 새겨져 있다. 수년 전에 필자가 이 비를 만났을 때는 비신의 손상도 매우 커서 보조 철 틀로 겨우 모양을 유지되고 있었다. 특히 글씨의 마멸도 심해 맨눈으로 내용을 읽을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이번에 복제 비문으로 대체 되어 있었다. 아마 더 이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서인 것 같다. 이 비는 당대의 불교사 연구에 큰 가치가 있다고 한다, 쌍계사를 나서며 일주문의 현판글씨를 본다. ‘삼신산 쌍계사’ ‘선종대가람’이라는 글씨는 해강 김규진선생의 글씨다. 글씨의 필력이 대단하고 활달하여 필자의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였다.
이번 답사는 국보 7곳 보물 29곳, 사적/기념물 24곳이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돈으로 가치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답사는 여전히 필자의 사고력 가치를 높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답사에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답사를 마치고 귀가 전 야외 저녁 만찬 때 깜짝 이벤트로 김숙희선생님의 ‘팬플롯’ 연주와 이정숙선생님의 ‘시 낭송’ 버스킹을 준비되었는데 하늘이 도와주지 못하여 너무너무 아쉬웠다. 이번에 놓친 기회를 다음 기회로 기대하며 답사기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