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0년, 호라즘 수도를 함락시킨 칭기즈칸의 몽골군 주력은 술탄이 서쪽으로 도주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칭기즈칸은 자기 휘하 최정예 장군인 사구(四狗) 중의 2명인 제베와 수부타이에게 술탄을 추격할 것을 명한다.
술탄은 아프가니스탄 서쪽 발흐 시와 페르시아 북쪽 니샤푸르 시를 거쳐 카스피해 서쪽까지 도주하였다. 제베와 수부타이는 몽골군 특유의 경이로운 속도로 이를 추적하였고 마침내 술탄은 카스피해의 어느 무인도로 피신해야 했다. 채 몽골군이 무인도로 건너 가기 전에, 술탄은 병으로 죽고 만다.
몽골군은 술탄의 죽음을 확인한 뒤 그 목을 베어 칭기즈칸의 진영으로 보낸다. 때는 12월이었기 때문에 제베와 수부타이의 주력은 그 지역에서 겨울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 다음해 1221년 2월, 몽골군은 카프카즈 산맥 남쪽에 있는 서쪽의 기독교 국가인 그루지아 왕국으로 '정찰'을 나갔다. 그리하여 맞닥뜨린 그루지아 병력들을 박살내고 그루지아 왕국을 약탈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몽골군은 이 일대를 장악하겠다는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거기에 얼마 전에 점령했던 남쪽 이라크 하마단 지역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제베와 수부타이는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반란을 제압한 뒤, 수부타이는 칭기즈칸으로부터 전갈을 받았다. 현위치에서 북쪽으로 진격하여 이민족들을 굴복시키고 카스피해 북쪽을 돌아 중앙아시아의 주력부대와 합류하라는 것이다. 호라즘에서 더 서쪽에 있는 이민족들을 정복하기 위해 몽골군은 가히 서사시적인 전략을 세웠다.
파란 색 실선이 호라즘 술탄의 도주로. 붉은 실 선이 몽골군의 진격로
칭기즈칸이 직접보낸 증원군에 현지의 투르코만과 쿠르드 지원군을 포함시킨 뒤, 제베와 수부타이는 1222년 9월, 그루지아 왕국을 향해 재차 침공하였다. 당시 그루지아 왕국은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국가로서, 국력의 최절정을 달리던 시점으로 국왕 게오르그 4세가 지휘하는 우수한 기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몽골군은 타블리즈 평원에서 유인 - 매복 - 섬멸이라는 특유의 전략으로 이 기사단을 분쇄하는 데 성공한다. 국왕 게오르그 4세도 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죽게 된다.
이 전투로 그루지아 왕국을 굴복시킨 몽골군은 칭기즈칸의 명령에 따라 더 북쪽의 카프카즈 산맥을 향했다. 몽골군은 북동쪽의 현재 다게스탄에 있는 데르벤트 고개를 통해 산맥을 넘었는 데, 너무나 높고 험해서 가지고 온 공성기를 모두 파괴해야 했다고 한다. 제베와 수부타이는 코카서스 산민들을 생포해서 길안내로 삼으면서 더욱 북쪽으로 향했다.
포로가 된 채 협박을 받으며 길안내를 했던 코카서스 산민들은, 몽골군을 다랄스키 협곡으로 안내하였다. 주변에 산이 깎아 지른 듯이 서 있고 길은 턱없이 좁은 험로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길안내를 하던 산민들이 모두 도주해버렸다. 그리고 경보를 전해들은 스텝지역의 투르크계 민족인 폴로브치안인과 코카서스 산민들이 몽골군을 둘러쌓았다.
수부타이와 제베는 일찍이 접해본 적이 없는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 카프카즈 산맥은 몽골군조차도 기동하기 어려운 험난한 곳이었으며, 길은 너무나 비좁았고 몽골군의 장기인 기동성을 살릴 수 있는 방법도 전혀 없었다. 거기에 길안내를 하던 산민들은 일제히 도주한 상태고 몽골인들은 지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칫하면 몽골군 최정예 병력 2만명이 이곳에서 전멸될 위기였다.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하나, 적을 속이는 것이었다.
수부타이와 제베는 적의 주력인 폴로브치안 왕에게 사신을 보내, 그들은 싸움을 원치 않으며 다만 동쪽의 본대로 돌아가기를 원할 뿐이라고 하였다. 정중한 예물도 함께 보냈다. 폴로브치안 인들은 이 말을 믿고 말을 돌려 북쪽으로 사라졌다. 엄청난 실수였다.
한 숨 돌리자마자 몽골군은 평야지대로 내려와서 그 주변 일대 산민들을 박살내고 마을들을 불바다로 만들어서 보복하였다. 카프카즈 북쪽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든 뒤, 몽골군은 폴로비치안을 공격하였고 완벽하게 기습을 당한 적군을 돈강 전투에서 박살을 낸 뒤에 드네프르 강까지 추격하였다. 플로비치안의 대부분의 귀족들이 몽골군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 뒤에 수부타이와 제베는 계속 서쪽과 북쪽으로 진격하여 칼카강 전투에서 키에프와 킵자크 공국의 병력을 전멸시키고, 1224년 칭기즈칸의 주력과 합류하는 데 성공한다. 키에프, 크림 반도, 플로비치안, 우랄 지역의 광대한 영역이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그러나 코카서스의 산민들은 비록 크게 타격을 입었지만 완전히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몽골은 산민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수차례 원정군을 보내야 했다. 첫번째 대규모 원정군은 1238년, 바투의 조카 구유크가 지휘하였다.
10개월이 소요된 이 원정에서 몽골군은 산민들의 거점 마을이자 현재 잉구세티아의 수도 마가스를 포위하였다. 농성은 1달 반이나 이어졌고 마침내 몽골군이 점령했을 때 마을은 그야말로 이름만 남기고 모두 파괴되었다. 보고에 의하면 몽골군은 산민들의 오른쪽 귀를 베었는 데, 2만 7천개의 귀가 가득 쌓였다고 한다. 그 다음해인 1239년에는 아바르족의 영역이자 현재 다게스탄의 영역인 카스피해 서쪽 일대가 몽골군에게 굴복하였다.
몽골군의 가차없는 공격과 파괴로 인해 평야지대에 살던 코카서스 인들은 산맥의 깊숙한 골짜기로 피신해야 했다. 몽골군은 산악지대까지 완전히 차지하지는 못했다. 아마도 수부타이와 제베가 처음 산악지대에서 맞닥뜨린 그 공포의 기억으로 인해, 몽골군은 코카서스 산맥 깊숙이 까지는 병력을 투입하지 않았다. 13세기 이탈리아 여행가인 플라노 카프리니의 기록에 의하면, 몽골군은 주변의 여러 민족을 복속시켰으나 산악지대는 아직도 끝내 복종을 거부하고 있으며, 어떤 곳은 무려 12년 동안 몽골군이 산을 포위했는 데도 저항했다고 전한다.
이는 1264년, 일한국의 훌라구 칸이 7만의 병력으로 3달동안 다게스탄과 체첸 지역의 평야지대를 장악하고 불태우고 학살했음에도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산악지대는 그들의 영역이 아니었다. 마침내 몽골군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평야지대와 산악지대 사이에 정예부대를 배치하여 산민들이 가축들을 훔쳐가지 않게 경비를 서게 하였다. 그리하여 평야지대는 몽골인이, 산악지대는 산민들의 영역으로 남게 되었다. 이 관계는 몽골인들이 코카서스 평야지대에서도 물러나게 되는 14세기 말까지 계속된다.
거대한 몽골 제국의 유일한 빈틈 - 코카서스 산맥
그리하여 몽골인들의 침략은 체첸인들에게 그리 심한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그들의 주변을 거쳐가면서 숱하게 많은 지역이 파괴되고 평야지대에서 피난민들이 몰려와서 계곡이 붐비게 되었지만, 적어도 산악지대 자체는 몽골군이 파괴할 수 없었다. 따라서 몽골인들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이 다음에 오게 된 침략자는 코카서스 산민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긴다.
세계에서 가장 잔혹한 정복자 '티무르'가 쳐들어온 것이다.
출처 : http://www.amina.com/article/br_hist.html
http://www.chechnyafree.ru/en/article.php?IBLOCK_ID=352&SECTION_ID=0&ELEMENT_ID=63392
http://en.wikipedia.org/wiki/Mongol_invasions_of_Georgia
Kalka River 1223 - Genghiz Khans Mongols invade Russia
Genghis Khan & The Mongol Conquests
첫댓글 크흑 정동 행성과 쌍성 총관부땜에 원제국에 병합된것으로 표기되는군 ㅠㅠ
서양에서는 그렇게 보더군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바투의 침공이 없었을 수도 있겠죠. 핵심이 수부타이였으니
저기서 깨줬어야 되는데...
그러게요
기독교 국가인 그루지아가 나중에는 몽골에 꽤나 충직한 나라로 남았다고 하네요 ~ 유럽 원정 때도 꽤나 지원 병력 보냈다고 하구요.
그루지아 기사단도 꽤 우수했다고 하네요
서유럽에서 헝가리가 1번 이겼다고 하던데요
리그니치 전투라면 몽골의 대승 아닌가요?
일본 왜이리 크나...
은근히 일본 꽤 큽니다
그렇다면 티무르가 왔을 때는 이 정도 파괴가 아무것도 아니게 보일 정도로 당했다는건데 (...)
체첸인들의 자료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근데 이 글과는 상관 없는데, 그럼 체첸어는 다게스탄이나 오세티야, 아르메니아등의 주변지역 언어와도 차이가 심한가요?
전혀 다른 언어라고 하네요.